천년의 약속 3

제2장 출가

3)

진표율사에 대한 전기는 몇 가지가 전해지고 있다. 국내 기록으로는 고려시대의 고승 일연이 쓴 『삼국유사』 권4 제5 「진표전간眞表傳簡」과 「관동풍악발연수석기關東楓岳鉢淵藪石記」(이하 「석기」로 줄임)가 대표적이다. 전기는 아니지만 고려시대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실려 있는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도 진표의 행적에 대한 일부를 제공하고 있다. 중국기록에는 송나라 찬영贊寧(930∼1001)이 쓴 『송고승전』 권 제14 「당백제국금산사진표전唐百濟國金山寺眞表傳」(이하 「진표전」으로 줄임), 원나라 사람 담악曇噩이 찬술한 『신수과분육학승전新修科分六學僧傳』의 「진표전」 그리고 명나라 태종 성조成祖가 지은 『신승전神僧傳』 권7 「진표」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중국기록인 『신수과분육학승전』의 「진표전」은 『송고승전』의 「진표전」을 거의 그대로 옮겨 실었다. 『신승전』의 「진표」 역시 마찬가지다. 『송고승전』 「진표전」의 첫머리에 있는 출가 동기에 대한 부분과 끝부분의 금산사 조성에 관한 부분만 제외되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중국기록으로서 전표 전기는 『송고승전』의 「진표전」 한 편으로 귀착된다.

금산사를 다녀온 뒤에 나는 꽤 열심히 자료를 수집하였다. 국내 도서관은 물론 인터넷을 통해 모은 국내외 자료도 제법 쌓였다. 그 결과를 연구노트에 정리하고 있을 때, 학생들이 연구실로 들어왔다. 이번 학기에 나한테 수강하고 있는 ‘한류반’ 학생들이었다.

“어서들 오게.”

나는 학생들에게 자리를 권하였다.

“뭐하셨어요? 지난번에 금산사 다녀오신 뒤로 엄청 바쁘신 것 같던데요. 역시, 진표율사인가요!”

“음. 맞아. 내 나름대로 진표율사에 관한 전기를 수집하다 보니까 말이야. 아주 재미있는 점을 발견했다네.”

“뭔가요, 교수님?”

“『송고승전』에 실려 있는 「진표전」은 송나라 단공端拱(988~989) 원년에 찬술되었단 말이야. 진표 전기의 찬술시기로는 국내·외를 통틀어 가장 오래되었지.”

“그 말씀은…, 진표율사 전기가 중국에서 먼저 기록되었다는.” 석사과정 2학기인 여학생 정지원이 말했다. 그는 불제자로서 이번 학기에 내가 강의하는 과목은 물론, 특히 내가 관심을 두고 진표율사 건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적극적이었다.

“맞아. 바로 그 점일세.”

“….”

“문제를 좀 더 확대시키면 더욱 재미있는 점을 발견할 수가 있다네.” 나는 어조에 힘을 주면서 정지원을 보았다. 그의 지식에 대한 욕구를 자극하려는 의도였다.

“네. 교수님. 진표율사는 신라 시대 다른 고승들과 같이 당나라에 구법 유학을 하지도 않았고, 또한 직접 집필한 저술도 남기지 않았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에까지 알려져 그의 전기가 국내보다도 먼저 중국에서 『송고승전』을 비롯한 몇 편의 고승전에 실려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좋아. 나도 그 생각을 하고 있었네.”

“굳이 비교하자면 원효와 같은 인물이군요,” 박사과정 1학기에 재학하고 있는 송진호가 메모지를 무릎에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그렇게도 볼 수 있겠지. 원효 역시 당나라에 유학하지 않은 고승으로서 『송고승전』을 비롯하여 각종 중국의 고승전에 입전되었으니까.”

나는 송진호와 정지원을 번갈아 보며 일단 송의 의견에 일단 동의를 하였다.

“교수님. 하지만 진표와 원효는 다르다고 생각해요.” 정지원이 반대의견을 들고 나왔다. 이미 예상했던 대로였다.

“응. 말해보게.”

“원효는 많은 저술을 남겨 우리나라는 물론 일본, 심지어 중국에까지 영향을 주었잖아요. 그러니까 중국 고승전에 입전될만하죠. 또, 원효는 두 차례나 당나라 구법 유학을 시도했었잖아요.”

정지원이 지적한 것처럼 원효가 두 차례에 걸쳐 당나라 유학을 시도한 것은 학계에서 인정하고 있다. 원효가 당나라에 유학하려고 했던 이유는 유식학을 공부하기 위함이었다. 유식학의 중국(신라도 마찬가지였다) 전래는 세 단계에 걸쳐 전해졌다. 첫째는 보리유지菩提流支의 『십지경론十地經論』의 한역, 둘째는 진제眞諦의 『섭대승론攝大乘論』의 한역, 셋째는 현장玄奘의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과 『성유식론成唯識論』의 한역이다. 이러한 유가유식사상의 한역으로 종파가 발생하여 『십지경론』의 지론종地論宗을, 『섭대승론』은 섭론종攝論宗을, 그리고 『유가사지론』과 『성유식론』은 법상종法相宗을 발생시켰다. 이 가운데 보리유지와 진제가 전한 유식학을 구유식, 현장의 유식학을 신유식이라고 하였다. 이 유가사상은 미륵신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중국의 유가유식은 세 차례에 걸쳐서 도입되었고, 또 유가사상과 함께 미륵신앙을 도입한 이들 세 종파는 눈부신 신앙운동으로 유가사상의 보급과 함께 미륵신앙도 토착화시키게 된다.

중국에 전해지고, 발생한 유가유식은 신라에도 그대로 전해졌다. 신라에는 유식학자가 많았다. 섭론종에 속했던 원광법사와 법상종에 속하는 원측법사를 비롯하여 원효, 도증道證, 승장勝莊, 신방神昉, 순경順璟, 경흥憬興, 둔륜遁倫, 태현太賢 등이 그들이었다. 이 가운데 원효가 처음 접한 유식은 구유식이었다. 원효와 의상義湘은 중국에 전해진 신유식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그것은 신라 불교계에서 하나의 신사조에 다름없었다. 원효와 의상은 그 신사조를 공부하기 위해 중국을 향했다. 그러나 첫 번째 시도는 고구려의 국경에서 체포됨으로써 실패로 끝났다. 두 번째 시도는 뱃길이었다. 오늘날의 충남 당진인 당주항唐州港에서 중국 배를 기다리면서 어떤 묘막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한밤중에 원효는 갈증이 났다. 물을 찾다가 근처의 샘에서 물을 달게 마셨다. 이튿날 아침에 다시 샘을 찾은 그는 자신이 간밤에 마신 감로수가 해골에 고인 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을 보고 구토가 일어났고 그 순간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당시 원효가 읊었다는 오도송이 전한다.

 

마음이 일어나는 까닭에 갖가지 법이 생기고

마음이 사라지면 감龕과 분墳이 둘이 아니네.

삼계가 오직 마음이 지은 것이며, 모든 현상은 의식의 전변이다.

마음 밖에 법이 없는데 어찌 달리 [마음 밖에서] 구하겠는가

心生則種種法生 心滅則龕墳不二. 三界唯心 萬法唯識 心外無法 胡用別求.

 

원효는 당나라 유학을 포기하고 신라로 돌아오고 말았다. 동행하였던 의상은 홀로 당나라로 구법 유학을 떠나 정작 당나라 수도 장안에 가서는 유식학이 아닌 화엄학을 공부하여 해동 화엄학의 개조가 되었다.

“그런가. 그렇군. 허허.” 나는 정지원의 견해에 동의하였다. “그렇다면, 진표율사가 당시 유행이다시피 한 당나라 유학도 하지 않고, 저술도 남기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중국 고승전에 입전된 이유를 뭐라고 생각하나?”

“자명하지 않을까요. 진표의 교화력과 명성이 국내 신라는 물론 중국까지 명성을 떨쳤던 까닭이겠지요. 결국 진표율사의 교화력이라고 봐요.”

“교화력이다!”

“저도 동의합니다. 무엇보다도 진표율사가 추구했던 미륵신앙과 참회교법 등에 의한 교화와 대승보살로서의 실천적 삶이 뛰어났기 때문으로 추정됩니다.” 송진호가 말했다.

“대승보살로서의 실천적 삶이라! 그럴 수도 있겠군. 바꾸어 말하면 대중적 영향력이 그만큼 컸다는 애기였을 테구 말이야.”

나는 두 학생의 토론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말하자면 그들의 의견에 충분히 공감하고 있었다.

“자. 그럼 다음 발표는 누구 차례인가.”

 

4)

국내 기록으로서 진표의 전기 두 편은 『삼국유사』에 앞뒤로 실려 있다. 앞에 실려 있는 「진표전간」은 물론 일연이 기록한 것이다. 같은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진표전기라고 해도 「석기」는 기록자가 다르다. 「석기」는 1199년 금강산 발연사 주지 영잠瑩岑이 기록한 「관동풍악산발연수진표율사진신골장입석비명關東楓岳鉢淵藪眞表律師眞身骨藏立石碑銘」(이하 「비명」으로 줄임)을 일연의 제자 무극無極(1250~1322)이 정리, 수록한 것이다. 「석기」 말미에 다음과 같이 덧붙여 놓았다.

 

이 기록(『삼국유사』)에 실린 진표율사의 사적(「진표전간」)과 발연사 비석의 기록은 서로 다른 데가 있다. 때문에 영잠의 기록만을 추려서 실었으니 후세의 현자들이 당연히 잘 살피기 바란다. 무극이 기록한다(此錄所載眞表事跡 與鉢淵石記 互有不同 故刪取瑩岑所記而載之 後賢宜考之 無極記).

 

『삼국유사』에는 ‘무극기無極記’라고 덧붙인 곳이 두 군데가 있다. 『삼국유사』라는 제목은 일연이 붙였으나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 제자 무극에 의해서 책으로 간행되었다.

「남행월일기」는 전주목 사록겸서기史錄兼書記에 보임된 이규보가 1199년 9월부터 이듬해 12월까지 1년 4개월여 기간 동안의 외직생활을 통해 얻은 견문을 토대로 1201년에 정리한 일종의 기행수필이다. 당대 최고의 문인 이규보는 전주목 주변을 두로 다니면서 보고 듣고 느낀 바를 기록했는데, 여기에 진표에 관한 기록이 들어있다. 이 기록은 영잠의 「비명」과 같은 해에 쓰였다. 현재 전하는 진표에 관한 국내 기록으로는 「석기」와 함께 최초의 기록이다. 기행문이므로 진표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전기는 아니지만 진표의 수행에 관해서는 매우 유용한 자료다.

 

학생들이 내가 준 프린트 복사본을 읽는 동안 나는 팔짱을 낀 채 창밖을 보고 있었다. 정원사 황세운씨는 오늘도 정원수 정지작업을 하다가 휴식 시간에는 책을 꺼내 읽고 있었다. 잠시 후 나는 자리로 돌아왔다. 각자 읽었던 프린트 물을 앞에 놓고 고개를 드는 학생들을 나는 천천히 둘러보았다.

“정리를 하면 이렇다네. 현재 전하는 진표율사에 대한 전기는 「진표전간」, 「석기」 그리고 「진표전」 등 3종이 있네. 이들 중 「진표전」이 가장 오래 되었지. 그러나 「진표전」은 중국기록으로서의 한계가 있다고 생각된단 말이야. 진표율사와 진표전기 찬술자들의 사망연대를 기준으로 「진표전」은 진표 사후 약 230년 뒤에, 「비명」(「석기」)은 약 435년 뒤에, 그리고 「진표전간」은 525년 뒤에 기록되어 있어요. 전기물의 평가 대상이 ‘사실성’ 여부에 좌우되는 것은 아니라고 해도, 또한 전혀 무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 굳이 사실성만을 기준으로 한다면 진표와의 시간적 거리와 공간적 거리가 가까울수록 전기물로서의 ‘가치’가 커질 것이고. 이 경우 시간적 거리는 「진표전」〉「비명」「석기」〉「진표전간」이 되고, 공간적 거리는 「석기」=「진표전간」〉「진표전」이 되지. 그러나 시간적 거리에서 「석기」의 경우, 원래 영잠에 의해 집필된 「비명」은 「진표전간」보다 앞서지만, 무극에 의해 정리·편찬된 「석기」는 「진표전간」보다 늦어. 스승 일연이 쓴 「진표전간」을 보고「비명」과 다른 곳이 있어서 제자 무극이 다시 정리하여 「석기」라는 제목으로 「진표전간」 뒤쪽에 수록한 것이기 때문이지.”

“문제는 이들 3종의 전기가 진표율사의 행적에 대한 연대를 각각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생각됩니다. 적게는 10년, 많게는 20년 정도의 차이가 납니다. 따라서 진표의 생애에 대한 접근은 이들 3종의 전기에 대한 종합, 비교 검토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되는데요.” 정지원이 지적했다.

“제가, 어떤 논문을 읽었는데, 이런 구절이 있더군요.” 그때까지 잠자코 듣고만 있던 박사과정 3학기 백기영이 입을 열었다. “한 인물의 생애와 사상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그 인물의 직접적인 활동 행적을 통하는 길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 인물이 남긴 ‘말씀’을 통하는 길이지요. 특히 종교인의 사상은 그 인물의 삶 자체에서 찾을 수 있지만, 그 인물이 남긴 ‘말씀’ 또한 중요합니다. 종교인의 ‘말씀’은 영원한 생명력을 가진다는 점에서 더욱 중요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진표의 생애와 사상을 탐구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에 대한 전기는 3종이 있지만, 그가 남긴 ‘말씀’의 기록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진표의 생애와 사상을 탐구하고자 하는 우리에게는 그에 관한 3종의 전기를 통해 그의 ‘말씀’과 의미를 읽어내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그렇습니다. 신라 중대 불교사상을 연구할 때 진표율사만큼 논란이 많았던 인물도 드물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무엇보다도 진표의 행적이 ‘신이神異의 사事’로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현존하는 진표 전기 가운데 최초의 기록인 「진표전」이 실려 있는 『송고승전』은 신비주의 성향이 특히 강한 문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진표전」뿐만 아니라 두 국내기록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중국 명나라 태종 영락제가 편찬한 『신승전』은 마등摩騰으로부터 원元의 첨파瞻巴까지 신이를 행한 승려 208명의 전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진표의 전기가 실리게 된 이유도 ‘신이의 사’가 큰 작용을 하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송진호가 말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일본의 저명한 불교학자 나카리야 가이텐忽滑谷快天은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진표전간」과 「석기」는 모두 황당한 기사로 채워져 있다. 『송고승전』에도 진표의 전기가 실려 있지만 하나도 취할 것이 없다고 비판하였습니다.”

노트에 무엇인가를 쓰고 있던 정지원이 고개를 들었다. “그와 같은 비판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진표율사는 고대 신라시대의 종교인입니다. 종교인의 행적에 신이가 없기를 바라는 것은 ‘종교인’이기를 포기하라는 얘기가 아닐까요. 또한 ‘신이의 사’라고 지적하는 기준도 모호해요. 결국 잣대는 과학적 합리성, 실증성이라는 것일 텐데. 아무리 학문적 접근이라고 해도 그것이 만능일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내 생각에 진표 전기에서 신비주의는 불교 나름의 ‘종교적’인 범위를 넘어서지 않습니다. ‘신이의 사’로 기록된 진표의 행적에서 역사적 진면목을 찾아내는 것은 바로 연구자의 몫이 아닐까요.” 정지원의 목소리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5)

묵은 해가 가고, 다시 새해가 왔다.

봄볕이 완연하다.

4월 하순을 지났을 무렵이다. 모내기철이다. 이제부터 들판은 차츰 바빠지기 시작한다.

엄뫼는 온통 푸른 옷으로 갈아입은 지 오래였다.

“잡아랏. 놓치면 안 된다.”

그날 사냥에 나선 진내마가 쩌렁 소리 질렀다. 사슴이었다. 지난해 가을에 놓친 사슴이 생각났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잡자.”

진표도 속으로 중얼거렸다.

“와아, 와아―.”

몰이꾼으로 나선 노비들이 고함을 질러댔다.

진표는 말을 몰았다. 그해에도 그의 작은 흑마는 바뀌지 않았다. 복보를 두 발로 차면서 채찍을 휘둘러댔으나 아무리 빨라도 아버지가 타고 있는 백마를 따라잡기에는 턱도 없었다. 그래도 흑마는 나름 달린다고 혼신을 다 해 달렸다. 얼마나 달렸을까. 신나게 달렸는데 사슴은커녕 아버지가 탄 백마는 물론이고 몰이꾼들도 보이지 않았다. 숲속에서 진표 혼자 남은 셈이었다.

말은 이미 지쳤는지 걸음이 더뎠다. 진표도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숲속의 싱그런 봄내음이 좋았다.

“도련님 아닌감요?”

그때 판돌이 울먹이는 소리로 길을 막았다. 같은 또래인 판돌은 진표에게 친구나 다름없는 노비였다.

“판돌이구나. 혼자 남은 거냐?”

“근당게요.”

“다들 어디로 갔지?”

“나도 모르것는디요. 함께 달려왔는데, 눈뜨고 보니께 혼자 아닙뎌.”

“그러냐. 어여 타거라.”

진표는 말을 세우고 뒤쪽으로 턱짓을 하였다. 뒤에 타라는 것이었다. 판돌은 얼른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뭐하냐. 내 뒤에 타라구.”

“안되어라 잉.”

판돌이 뒷걸음질을 하였다. 자신의 신분이 노비임을 잊지 않은 까닭이었다.

“누가 보믄 어쩔라구.”

“보긴 누가 본다고. 어여 타기나 해.”

진표가 윽박지르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주인집 도련님의 명이다. 그제야 판돌은 진표의 뒤에 올라탔다. 작은 말은 힘겹다는 듯 절룩거리면서도 어딘가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다. 낯설지만 낯선 것 같지 않은 숲속 길이다. 진표를 서두르지 않았다. 그저 말이 가는대로 몸을 맡길 뿐이다.

해는 이미 중천에서 많이 기울었다.

 

개굴, 개굴―.

얼마나 갔을까. 진표는 개구리 울음소리를 들었다. 가까운 곳에 개울이 있었다. 볕이 잘 드는 아늑한 숲속 개울이다. 그러고 보니까 퍽 눈에 익은 숲속이었다. 진표는 개울가로 말을 몰았다.

개구리 울음소리가 제법 요란하였다. 개구리 울음소리만 제외하면 숲속은 정적이 흘렀다. 잠시 동안 주위를 둘러보던 진표는,

“쉬었다 가자.”

하고 판돌의 대답을 들을 사이도 없이 말에서 뛰어 내렸다. 판돌도 말에서 내려 뒤따라 왔다.

“….”

바로 그때였다. 개구리 울음소리를 따라 물속을 들여다보던 진표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몰속을 보고 있는 눈이 의심스러운 까닭이다.

“도련님, 이거슨.”

판돌이 뒤에서 소리 질렀다.

“앗. 아아.”

진표는 말없이 탄식을 삼켰다. 맞다. 판돌이 기억하고 있는 바로 그 개구리 꿰미였다. 작년 가을에 사냥을 왔다가 진표의 요구로 일행이 잡아서 물속에 담가 두었던 바로 그 개구리 꿰미였다. 개구리 꿰미는 진표가 물속에 담가 둔 그대로 놓여 있었다. 진표는 꿰미 끝에 눌러놓은 돌들을 치우고 개구리 꿰미를 들어 올렸다. 거기에는 줄잡아서 30마리 가량의 개구리가 아직까지 살아서 퍼덕거렸다. 5, 60마리는 잡아 두었는데, 그렇다면 절반 정도는 죽었다는 얘기였다.

개구리 꿰미를 들고 한참 동안 바라보는 진표의 눈가에 안개가 피워 올랐다. 목안이 울컥했다.

―내 잘못이다. 내 욕심으로 이 개구리 절반을 죽였구나.

개구리 꿰미에서 눈을 떼지 않는 진표의 두 뺨으로 뜨거운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참회의 눈물이다.

―괴롭구나. 괴로워. 어찌 입과 배가 저같이 꿰어 해를 넘기며 괴로움을 받는고!

진표는 무거운 고개를 들고 하늘을 보며 스스로 책망하여 말했다. 한동안 괴로워하던 진표는 버들가지를 끊어 살아있는 개구리들을 모두 놓아주었다. 무엇인가를 결심한 듯 굳은 표정을 하고 말위에 올랐다.

그날, 집으로 돌아온 이후 진표는 도통 말이 없었다. 아예 말을 잃어버린 아이처럼 말을 하지 않았다. 벌써 달포가 지났다.

그날 밤, 늦게 진표는 안방을 찾아갔다.

“표야. 이 밤중에 네가 웬일이냐?”

“아버지, 어머니.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전에 없이 깍듯하게 경어를 쓰는 열두 살 아들을 보고 진내마와 어머니 길보량은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아들을 바라보았다.

“소자는, 중이 되고자 합니다.”

잠시 동안 뜸을 들이던 진표가 뚜벅 말했다. 열두 살 어린 아이의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부모는 금방 알아차렸다. 철없는 것 같지만 속이 깊어도 한없이 깊어 부모조차도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아들이었다. 아들이 이 정도의 얘기를 한다면, 그것은 어떤 권위와 회유를 가져온다고 해도 도저히 물릴 수 있는 결심이 아니라는 것을. 더구나 진내마 내외는 원근에서 두 번째 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불심이 깊은 청신사, 청신녀였다. 아무리 그러하기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선뜻 출가하도록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시 한 번 더 깊이 생각해 보도록 하여라.”

진내마 내외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물론 그 말조차도 형식적임을 모르지 않았다. 혹시라도 아들이 마음을 돌리기를 바라지만, 그것은 죽은 나무 가지에서 꽃이 피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는 것을 부모는 모르지 않았다.

진표 역시 부모의 뜻을 모르지 않았다. 그는 말없이 안방에서 물러 나왔다. 7일 뒤, 진표는 다시 안방을 찾았다. 그날도 부모는 완곡하게 다시 한 번 더 깊이 생각해 보라고 하였다. 그렇게 부모를 설득하기를 세 번, 진표는 다시 안방을 찾았다.

“어디로 가겠느냐?”

뜻밖에도 진내마가 먼저 말했다.

“금산사 숭제스님 문하에 들고자 합니다.”

“알았다.”

진표는 마침내 부모의 허락을 받았다. 그러니까 진표는 개구리 사건을 계기로 출가의 뜻을 품게 되었고, 다음날 모악산 금산사로 들어가 숭제법사 문하에서 출가하였다, 그의 나이 열두 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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