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들, 그들의 깊은 사유와 ‘웃픈’ 삶 24 쇼펜하우어 (3)

우리는 더 나은 세상에 살고 있지 않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3. 삶은 맹목적 의지의 책략

 

바이마르에서 그를 붙잡아 둘 수 있는 것은 전혀 없었다. 1814년 그는 드레스덴으로 떠난다. 그곳에서 쇼펜하우어는 먼저 괴테의 입장과는 다른 색채론을 발전시킨다. 이 대가로 시인의 애정을 잃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는 이제 “마치 모태 안의 아이처럼” 자신 안에서 자라고 있던 위대한 작품을 세상에 내놓고자 한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이다.

책의 제목은 그 안에 담긴 근본사상을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경이로운 칸트”처럼,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역시 우리에게 “나타나는(erscheint)”, 곧 우리에게 지각되는 대로의 세계와 “그 자체(an sich)”의 세계[물 자체, Ding an sich]를 구별한다.

칸트에 따르면 우리는 세계가 그 자체로 어떤 것인지는 인식하지 못한다. 다만 인식 능력(감성, 오성, 이성)이 다듬고 꼴을 만든 형태대로 나타나는 세계만을 인식한다. 그렇게 볼 때 공간과 시간, 인과성은 우리가 애초부터(선험적으로) 세계와 그 과정들에 적용하는 인식장치의 일부이다.

세계 그 자체가 공간과 시간 안에 있고 원인과 결과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인식 능력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고 우리에게 나타나지 않는 “물 자체”의 세계는 지각 밖에 있기 때문이다. 칸트 철학에서 “물 자체”는 영원한 비밀로 남는다.

쇼펜하우어가 ‘세계는 표상’이라고 설명할 때, 그 역시 대체로는 칸트 입장을 지지한다. 그러나 이내 칸트가 그어 놓은 인식의 경계를 과감히 뛰어넘으며 “물 자체 ”를 “의지”로 규정한다.

관념론적 철학자인 프리드리히 헤겔이 물질을 다만 신적 정신이 나타나는 형식(타자태他者態, Anderssein)일 따름이라고 여긴 것처럼, 쇼펜하우어는 생물적, 무생물적 우주 전체를 위력적인 근원의지가 실재하는 형식으로 본다. 땅에 떨어지는 돌, 식물들을 포함하여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사실은 위력적인 근원의지가 이끈다는 것이다.

의지의 형이상학자 쇼펜하우어는 의지란 무시간적이며 한계가 없고, 무엇보다도 멈추지 않는다고 말한다. 또 의지는 인식하지 않으며, 곧 사유도 이성도 갖고 있지 않으며 오로지 의욕함만을 의욕한다.

따라서 인간의 육체 또한 보편적 의지가 나타나는 형식일 따름이다. 이는 의지와 육체의 행위(예컨대 팔의 움직임)는 서로 다른 두개의 것으로서 인과적 관계로 연결돼 있는 게 아니라 동일하다는 주장이다. 달리 말해 의지는 육체와 육체의 행위(팔의 움직임 같은) 안에서 우리에게 나타난다(눈에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쇼펜하우어 역시 인간의 의지란 의지의 행위(예컨대 의식적으로 손을 드는 동작) 안에서 객관화된다는 사실을 간과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그의 기술에 따르면 이런 의지는 극히 사소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비해 우리 내부에서 맹목적 충동으로서 소용돌이치고 있는 의지가 차지하는 부분이 한계를 모를 정도로 훨씬 크고 강력하다. 맹목적 충동인 의지는 우리에게 삶을 욕구하도록 끊임없이 몰아친다.

예컨대 맹목적 의지는 우리 내부에서 성적 욕구로 작용하면서 종種으로서의 인류가-개별적인 인간들의 죽음을 넘어서-보존되도록 한다. 그렇지만 이는 자비로운 신의 경우처럼 비이기적인 게 아니다. 오히려 의지는 인류의 존속 안에서 자신의 실재 일부를 지켜나가기 위해 남자와 여자의 사랑 또는 여자의 아름다움을 책략적으로 이용한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는 사랑은 일종의 기만이다.

의지는 또 불행의 원리이기도 하다. 인간은 단지 자기가 처한 상태가 만족스럽지 못할 때 의욕을 갖는다. 그렇지 않고 만족스럽다면 당연히 자신을 변화시키려는 의지를 갖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현재의 삶에서 벗어나고자 애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삶은 눈물의 골짜기일 게 분명하다. 그러고 나서 우리의 사상가는 절망, 질병, 불공정함 등 인간의 비참함을 근거로 제시한다. 세상에는 행복과 즐거움도 있다는 반론은 쇼펜하우어를 난처하게 만들지 못한다. 왜냐하면 행복, 즐거움이나 만족함이란 착각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기쁨들은 금세 권태, 불만족스러움, 곧 불행으로 변한다.

쇼펜하우어는 이 주장을 보다 더 확장시킨다. 우주는 맹목적인 근원의지에 의해 운영되는 탓에 실재하는 모든 것은 어떤 식으로든 불행할 게 틀림없다. 따라서 존재 전체는 하나의 지옥이며 그 때문에 그것은 보다 나은 것일 수 없다.

그렇지만 쇼펜하우어는 자살함으로써 모든 것들을 둘러싸고 있는 불행에서 벗어나자는 안이한 생각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자살을 통해서는 의지 자체가 아니라 단지 의지가 실재하는 한 형태만을 무화無化시킬 뿐이다. 쇼펜하우어는 불교도들과 유사하게 환생을 믿는다. 의지는 그 즉시 자기 실재를 위한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철학자는 맹목적이고 두려운 보편적 의지로부터의 구원 가능성을 세계를 부정하는데서 찾는다. 인간은 무관심과 금욕에로 자신을 관철시키면서 성자聖者나 인도의 요가 수행자들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현세에서 더 이상의 어떤 것도 바라지 않는 이들 안에서 의지는 “작동을 멈춘다.” 이는 이른바 ‘니르바나(Nirwana)’라 불리는 것과 같다.

우리 사상가의 추론에 따르면 한 개인이 삶을 부정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연민의 행위에 있다. 다른 불행한 피조물들에 향한 연민은 인간이 이기주의를 극복하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반反기독교도인 쇼펜하우어는 예수가 또한 일깨우고자 했던 기독교적 이웃사랑을 신뢰한다. 이웃사랑은 괴로움을 겪는 인류를 결속시키는 요소라는 것이다.

1819년 브로크하우스 출판사에서 출간돼 나온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독자의 반응을 얻지 못한다. 쇼펜하우어는 곧바로 이를 비평가들의 공모라고 추측한다. 말하자면 그는 그 사이 스스로를 “철학의 황제”로 여기고 자신의 책이 “장차 수많은 책들에게 저술의 원천과 동기가 될 그런 작품들 중 하나”라고 여기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나는 내 책을 쓰기 위해서 살았다. … 내가 이 세상에서 하고 싶었고 해야 했던 일의 99퍼센트는 확고하게 이뤄졌다. 그 밖의 것들이란 사소한 것이다. 나 개인과 나의 운명 또한 그렇다.”라고 믿는다.

그는 세계의 비밀을 파헤쳤다고 확신하며 드레스덴을 떠난다. 그의 아이를 낳았던 하녀는 그곳에 남겨진다. 그렇지만 딸아이는 태어나 곧 죽는다. 이탈리아의 로마, 플로렌스, 베네치아 등지에 머물면서, 적어도 그가 은근하게 내비친 바에 따르면 그곳 귀부인들과 스캔들을 갖는다. 심지어 그는 결혼을 생각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가 내린 결론이란 “철학자에게 여자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11개월이 지난 후 이탈리아 체류는 갑자기 중단을 맞게 된다. 밀라노에 머물고 있을 때 “무을(Muhl)이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란 소식을 받는다. 무을은 쇼펜하우어의 재산을 관리하는 단치히의 한 회사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철학자는 자기 돈을 금융가에 빌려주고 그에 대한 어음을 갖고 있었다.

실제로 무을은 도산에 이르고 쇼펜하우어에게 채무 변제에 대한 한 가지 타협안을 제시한다. 그렇지만 쇼펜하우어는 그 제안을 단호히 거부한다. 그는 단치히의 회사에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써서 보낸다. “당신이 스스로 돈을 갚지 않는다면, 어음대금 청구 소송을 하겠습니다. 당신은 숙맥이 되지 않고서도 훌륭하게 철학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조정안에 대해선 이렇게 답장을 한다. “내가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난 무리 속에 끼어 지내는 게 어울리는 한 마리 메리노 면양일 게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 ”

마침내 무을은 우리의 수완 있는 세계부정자否定者에게 부채 전액을 상환한다. 반면 어머니와 누이는 뼈아픈 손실을 입는다.

1820년 그는 철학 강사로 베를린으로 간다. 그곳 대학에서는 국가철학자이며 궁정사상가인 프리드리히 헤겔이 이론의 여지없는 군주의 위치에 있었다.

사상계 영웅인 헤겔의 이론을 “정신병자의 헛소리”로 여긴 쇼펜하우어는 터무니없는 자신에 대한 과대평가 속에서 늘 헤겔이 강의하는 같은 시간에 강의를 개설한다. 그 결과 서른 두 살의 강사는 빈 책상 앞에서 강의를 한다. 그는 삶과 세상을 경멸하면서도 이같은 “냉담함과 무관심”에 괴로워한다. 그에게 유일한 위안은 이탈리아에 있었을 때 이미 시구로 표현한 바 있는 한 가지 확신이다. “후세는 날 위해 기념비를 세우리라.”

안정을 찾지 못한 그는 일 년 사이 세 번을 이사한다. 그는 베를린 오페라단의 합창단원인 카롤린 리히터와 사귀게 된다. 쇼펜하우어는 ‘메돈’이란 예명藝名을 지닌 열아홉 살의 여자를 “공주”로 부른다. 이미 꽤 많은 수의 사생아를 가지고 있던 그녀가 1823년에 또 한 아이를 낳자, 쇼펜하우어는 아이의 아버지란 사실을 부인한다. 자신이 메돈의 유일한 애인이 아니란 점을 알고 있고, 또 감수하고 있던 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때문에 그녀를 나쁘게 여기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그 무렵 이웃의 한 여자-이제 앞으로 20년간 그의 호주머니에서 돈을 꺼내가게 될 “늙은 계집”-가 “공주”보다도 더 심하게 그를 괴롭힌다. 한번은 싸움 끝에 쇼펜하우어는, “마치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기라도 한 것처럼, 이웃집 여자의 몸을” 들어서 곧장 집 밖으로 내동댕이쳤다.

아마도 “사악한 여자”는 떨어질 때 운이 없었던 게 틀림없다. 그 후 오른쪽 반신半身을 거의 쓸 수 없는 지경에 놓인다. 그러자 그녀는 쇼펜하우어를 고소하고, 법원은 즉시 철학자에게 평생 동안 위자료를 정기적으로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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