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들, 그들의 깊은 사유와 ‘웃픈’ 삶 23 쇼펜하우어 (2)

우리는 더 나은 세상에 살고 있지 않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2. 충족이유율의 네 가지 근거

 

같은 해 그는 거상巨商이고 시의원인 예니쉬가 운영하는 회사에서 수습사원으로 일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3개월 뒤 쇼펜하우어 가족에게 불행이 닥친다. 이 사건은 곧 이어 아들의 인생마저 바꿔버린다. 아버지가, 추정컨대 우울감이 엄습한 가운데 곡식창고 창문에서 투신해 자살한 것이다. 사업부진이 원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완전히 밝혀지지 않은 죽음의 원인은 아마도 노쇠해가는 남편에게서 더 이상 삶의 욕망을 채우지 못한 그의 아내일 것이다. 이에 대해 아들은 이렇게 쓰고 있다. “아버지가 고독 속에서 보내는 동안, 내 어머니인 여자는 파티를 열었다. 그가 쓰라린 고통을 겪을 때, 그녀는 인생을 즐겼다. 그것이 여자의 사랑이다.”

요한나 쇼펜하우어가 딸을 데리고 바이마르로 거처를 옮기고 아르투어는 함부르크에 남게 되면서, 그들 사이에 첨예한 불화가 일어난다. 그녀는 바이마르에서 문학사교모임을 연다. 괴테도 여기에 참석한다. 독일의 위대한 시인은 금세 미망인 작가에게 감사한다. 그녀가 낮은 신분 출신인 자신의 아내 크리스틴 불피우스에게 사회가 묶어놓은 속박을 풀어주었기 때문이다. 요한나는 “괴테가 그녀에게 성(姓)을 주었다면, 우린 그녀에게 한 잔의 차를 줄 수 있다.”란 유명한 말과 함께 사회로부터 차별받는 크리스틴을 초대하였다.

열아홉 살이 돼 아르투어는 마침내 내키지 않는 상점 일을 그만두기로 결심한다. 대학에 진학하려면 김나지움(고등학교) 졸업증서가 있어야 했다. 어머니 친구 중 한 사람이 그에게 고타의 김나지움에 다닐 수 있도록 주선해주지만, 그곳에 오래 머물지 못한다. “나를 망치는 것.” 편협함으로 자신을 화나게 만든 한 교사에 대해 그가 쓴 조롱의 시다.

쇼펜하우어는 바이마르의 김나지움에 다시 입학한다. 이는 침울한 아들을 자기 곁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두고 싶어 했던 어머니로선 정말로 꺼림칙한 일이다. 그는 2년이란 기록적인 시간 안에 김나지움의 전 교과과정을 이수한다.

1809년 성년이 된 그는 아버지가 남긴 유산 가운데 자기 몫을 상속받는다. 유산은 그에게 평생 일체의 재정적 어려움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었다. 졸업시험을 통과한 후 대학 입학 자격을 얻는다. 학자, 해박한 지식인이 되고 싶어 한 그는 “독일 학문의 중심지”인 괴팅겐 대학에 입학하여, 의학, 화학, 물리학과 그 밖의 과목들을 수강 신청하였다. 그러나 여기에 철학은 포함돼 있지 않다. 비록 철학에 대한 천부적인 재능을 자주 나타내 보이고 있음에도, 그때까지 그는 아직 전공이나 학문으로서의 철학에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2학기 들어 고트로브 에른스트 슐체 교수가 그에게 두 명의 위대한 사상가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면서 상황은 변한다. 훗날 쇼펜하우어는 두 사상가에 대해, 한 사람은 “신적神的”이고 다른 한 사람은 “경이롭다”고 말한 바 있다. 플라톤과 칸트이다. 그때부터 그는 이제 두 철학자에게 “개인적인 열정”을 바친다.

이 시기에 그의 성격이 완전히 형성되었다. 우울, 불안, 절망감에 더해 고독, 무례함, 오만의 성향이 나타난다. 이를테면 그는 자주 자기 생각과 맞지 않던 슐체 교수를 “멍청이”니 “흉악한 야수”니 하고 부른다. 물론 그렇다고 그 교수가 지닌 엄청난 학식을 소홀하게 보는 것은 아니다.

그는 여러 친구들과 사귀고, 특히 독일계 미국인으로 백만장자이던 야콥 아스토르(Jokob Astor)의 아들과 친하게 지낸다. 그렇지만 혼자서 독서를 하거나 플루트나 기타를 연주하기를 더 좋아하였다. 그럴 때면 그의 첫 번째 반려견인 푸들 강아지가 서재의 곰 가죽 위에서 꾸벅꾸벅 졸음을 졸았다.

1811년 그는 자신의 학문적 방향을 결정하지 못한 채, 학교를 베를린 대학으로 옮긴다. 철학자 요한 고트리브 피히테(Johann Jakob Fichte)의 전설적 명성이 그를 이곳으로 오도록 만들었다. 피히테는 독일관념론의 영웅이자 최초의 근대 변증법 사상가, 곧 그를 승계한 헤겔에 의해 유명하게 되는 사유방식의 주창자로 평가받고 있다.

쇼펜하우어는 특히 피히테의 ‘지식론’을 경청한다. 지식론은 피히테에겐 본래적인 철학을 의미한다. 그러나 교수는 그에게 실망감을 안겨 준다. 쇼펜하우어는 단지 몇 차례의 수강 만에 피히테의 현란한 수사는 대부분 허풍(“요술 주문”, “헛소리”)이 아닐까 의심하게 된다. 그는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우리는 피히테에게 지식론(Wissenschaftslehre)이란 말 대신에 ‘지식의 공허’(Wissenschaftsleere)란 말을 써야 할 것이다.”

그가 베를린 대학에서 학위를 받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나폴레옹을 상대로 한 ‘해방전쟁解放戰爭’이 발발한 것이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전 국민을 전쟁에 동원한다. 그렇지만 프로이센뿐만 아니라 그 어떤 나라의 시민권도 갖고 있지 않은 쇼펜하우어(“내 조국은 독일보다도 크다.”)는 전쟁터에 나가 목숨을 걸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는 위험에 처한 베를린을 빠져나가 드레스덴을 거쳐 바이마르로 향한다.

그러나 바이마르 집에서 그는 어머니와 누이가 작가인 프리드리히 폰 게르스텐베르크와 함께 운명적인 ‘활기찬 트리오’(Trio con brio)로 결속돼 있음을 확인한다. 분개한 그는 이들 세 사람의 공동체를 떠나 루돌프슈타트(튀링겐의 숲)에 있는 ‘기사騎士 여관’으로 거처를 옮긴다. 그곳에서 쇼펜하우어는 “깊은 고독 속에서” 학위 논문인 『충족이유율의 네 가지 근거에 대해(Über die vierfache Wurzel des Satzes vom zureichenden Grunde)』를 완성한다.

그때 나이 스물다섯 살이던 그는 예나 대학에 제출한 이 논문을 통해 곧바로 자신이 풍부한 재능의 사상가임을 입증한다. 논문은 최우등의 평점을 받고, 쇼펜하우어는 이제 자신을 박사로 부를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독창적 구상을 위한 주제를 철학자 라이프니츠의 작품에서 발견한다. 라이프니츠는 이렇게 주장했다. 모든 논리적 사유들은 두개의 근본명제들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 하나는 그 자체로 모순되는 것은 모두 오류라고 말한다(모순율). 이에 반해 다른 하나의 명제는 그렇게 있고 그밖에 다르게 있지 않는 “충분한 이유 없이는” 어떤 것도 실재할 수 없고 어떤 발언도 참일 수 없다는 가정에 기초한다. 달리 말하면 어떤 것도 그렇게 있어야 할 이유 없이 있지 않다는 것이다. 혹은 “모든 것은 언제 어디서나 각기 다른 것에 의해서만 있다.”

모든 논증들(예컨대 해가 비치고 있기 때문에 따뜻하다.)에 들어 있는 이 근본명제에 대해서 우리는 어느 경우든 그리고 애초부터[선험적으로] 타당하다고 믿는다. 설령 그것이 도무지 입증될 수 없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왜냐하면 모든 설명의 원칙이라 할 근본명제, 즉 ‘모든 것은 그렇게 있을 충분한 이유가 있다.’ 자체는 증명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근본명제를 증명하려면 ‘그것은 타당하다. 왜냐하면 … ’ 하는 식으로 그 원칙을 여기에 적용해야만 한다. 그런데 이는 증명하고자 하는 것을 끌어들이는 논증 방식을 허용하지 않는 논리학에 위배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충족이유율은 네 가지 근거(또는 형태)를 가지고 있다. 우선 ‘존재 이유’와 ‘인식 이유’로 나뉜다. 예를 들면 존재란 개념에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따라서 따뜻함 역시 포함된다. 그렇게 볼 때 점점 열기가 더해가는 따뜻함은 온도계가 올라가는 것에 대한 존재 이유이다. 그러나 따뜻함의 정도가 더해간다고 인식하는 이유는 온도계와 같은 보조수단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개념들이고 경험들이다. 이렇듯 존재 이유와 인식 이유는 비록 어느 정도 관계는 있지만, 상이한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이들 외에 또 다른 두 가지 이유들을 제시하는데, 각기 ‘생성의 이유’와 ‘행위의 이유’라 불린다. 그는 전자인 생성의 근거를 ‘모든 상태(사건)는 각기 다른 상태에 의해 야기된 것이다.’ 곧 ‘모든 변화는 각기 그 원인을 갖고 있다.’는 인과성으로서 이해한다. 마지막으로 행위의 충족이유율은 동기부여, 의욕의 법칙에 관한 것이다. 철학자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이를 상세히 다루고 있다.

쇼펜하우어는 바이마르로 돌아 와 어머니에게 학위 논문을 매우 자랑스럽게 보여준다. 그렇지만 논문 제목만을 힐끗 쳐다본 어머니는 거기에 쓰인 ‘근거’란 말을 보고서는 “이것은 약사에게나 필요한 책이겠군.” 하고 비꼰다. 그리고서는 논문을 읽어보지도 않고 내려놓는다.

아들은 심한 모욕감을 느꼈다. 또 한 차례의 싸움 끝에 그는 어머니와 완전히 결별하고 만다. 이번에도 역시 그녀의 정부情夫가 발단이 되었다. 그 후 어머니는 24년을 더 살지만, 두 사람은 더 이상 만나지 않는다.

그 대신 그는, 비록 일시적인 것에 그쳤지만 괴테의 애정을 얻는다. 시인은 자신의 색채론에 관해서 쇼펜하우어와 얘기를 나누고 그에게 감탄한다. “그렇게도 젊은 나이에 그렇게도 풍부한 경험.” 나아가 괴테는 다음과 같은 경구의 시를 지어 쇼펜하우어의 방명록에 적어 준다. “네가 너의 가치를 누리려면/ 너는 세상에 가치를 부여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괴테의 시구는 청년 철학자에게 그 이상의 어떤 인상도 심어주지 못한다. 그 사이 그는 극동의 신비를 연구하면서 세상은 무가치하다는 생각에 깊이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인도의 현자賢者들 역시 이 세상을 명상과 모든 세속적인 것의 부정을 통해서 벗어나는 게 최선인 악惡으로 본다고 규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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