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약속 5

제3장 용의 아들

 

3)

 

차량은 두 대로 움직였다. 나와 미륵팀 총무 정지원이 탄 SUV 차량은 김현 교수가 운전하였다. 아니, 미륵팀이 김교수의 차에 신세를 지고 있었다. 서울대 사학과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박사 후 과정을 마친 김교수는 전공이 서양사였다. 그는 내가 어느 역사 답사−말이 역사답사이지 내 입장만 보면 불교 성지순례라고 하는 편이 더 어울린다고 할 수 있었다. 그래도 ‘답사’라고 하자−를 간다고 동행의사를 물어보면 단 한 번도 거절한 일이 없었다. 내가 불학을 전공하고 그는 사학을 전공하였으므로 답사에 관한 한 어느 정도 공통점이 있기는 하였다. 그러나 좀 더 엄밀하게 분류해 보면 그는 서양사 전공자이므로 학문적으로 불교 유적지와는 무관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거절하는 법이 없이 동행하는 것을 보면, 넓은 의미로 사학의 범위에 든다거나, 마음이 바다만큼이나 넓은 호인이거나, 차마 남의 청을 거절 하지 못하는 위인이거나, 사주팔자에 역마살이 많아서 집 밖을 나다니기 좋아하거나, 뭐, 그런 경우 중의 어디에 속하는 사람으로 추측되었다. 어디까지나 그것은 추측이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있다. 그를 알게 된 지는 10년이 훌쩍 지났으나 화를 내는 것은 한 번도 보지 않았다는 점이다. 내 생각이지만, 그렇게 보면 그가 호인인 것은 분명하였다. 하긴, 사람은, 모른다. 죽을 때까지 가 봐야 아는 것. 우리는 참 많은 곳을 답사한 것 같다. 경주 남산을 비롯하여 화순 운주사와 민불, 남해 보리암, 서산 마애여래삼존상, 익산 미륵사, 양주 회암사, 파주 용미리 쌍미륵불…. 뿐만 아니라 일본 교토, 인도 불교 유적지까지도 같이 다녔다. 답사한 곳들을 생각해 보니까, 십중팔구는 불교 유적지인 것이, 아무래도 내 의지가 많이 반영되었던 것 같다. 김교수는, 나한테, 그렇게, 사람 좋기로, 두 번째 가라면 서러워할 위인이었다.

국내 답사를 갈 때면, 차가 SUV인 탓도 있지만, 김교수가 주로 운전하였다. 종일 운전을 하다가 지칠 때면, 도로변에 차를 세워두고 잠시 잠을 청하는 일이 있어도, 그는 단 한 번도 운전대를 나에게 넘겨준 일이 없었다. 나이 탓도 없지는 않았을 터였다. 생물학적으로 내가 그보다 다섯 살이 위니까, 어쩌면 선배 대접을 해주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김교수. 요즘 답답하지 않아요?”

며칠 전 나는 그의 연구실로 밀고 들어가서 차를 마시는 도중에 은근히 떠보았다.

“어디 답사할 곳이 생겼나 보죠?”

그는 이미 눈치를 챘다는 듯 물었다.

“예. 내가, 요즘, 누군가에게 꽂혔어요.”

“누굽니까, 마교수님의 그 열정을 앗아간 분이?”

”진표율사요!“

”아. 그분요.“

“잘 압니까?”

“아니요. 조금은 알지요.“

“내가 또 문자를 씁니다. 역사가 앞에서. 허허.”

“역사는. 나야 뭐 서양사 전공인데.”

“어. 김교수. 축구공만 한 지구를 놓고 서양사는 뭐고 동양사는 뭡니까. 그냥 사학이지. 허허허.”

“그런가요. 좋을 대로 생각하면, 되겠지요. 하하.”

우리는 한 바탕 웃었다. 웃는 동안 나는 그의 연구실을 둘러보았다. 학문적 호기심이 남다른 김교수의 책장에는 동서양을 가리지 않았다. 한국 고대사, 신화, 심지어 언어학책도 많이 보였다. 그가 언어학에 관심이 많고 히브리어까지 공부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으므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까 국내 답사를 자주 다녔으므로 나는 가끔 그가 서양사 전공이라는 사실을 잊곤 하였다. 그런 망각을 나는 애써 말이 되는지 안되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에둘러 꾸며대서 웃음으로 덮곤 하였다. 내가 주변을 얼쩡거리자 그는 배부른 고릴라처럼 여유롭게 웃었다. 말이 나왔으니까 말이지만, 그의 별명은 ‘고릴라’였다. 그 고릴라를 내가 먼저 붙였는지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붙였는지 지금은 생각나지 않았다.

잠시 후 그는 내 앞에 놓인 빈 찻잔에 보이차를 따라 주면서 중단되었던 얘기를 꺼내 들었다.

“어딘가요, 진표율사라면, 금산사인가요? 어. 그러고 보니까, 금산사는 마교수님과도 인연이 깊지 않습니까.”

“뭐, 그렇긴 하지요. 잊어버렸던 인연이지만.”

“잊어버린 인연이라.”

“아니, 잊어버린 것이 아니라 잊어버렸던, 잊어버리고 싶었던 인연이라고 할까.”

“감회가 깊겠군요. 알겠습니다. 금산사라면, 나도 가보고 싶습니다.”

“아니요. 김교수. 금산사는 며칠 전에 다녀왔어요. 금산사가 아니고, 그 옆에, 행정구역으로는 같은 김제시 지역이지만, 그 옆에 만경읍입니다. 전라북도 김제시 만경읍⋯.”

“만경읍이라구요! 좋아요. 가는 길에 벽골제, 김제 금산사도 함께 답사하지요. 그래야 징게 맹경 외에밋들을 다 밟는 거 아닌가요!”

김교수는 벌써부터 신이 나는가 보았다.

“뭐. 그러지요. 징게 맹경 외에밋들을, 답사해 보지요. 허허.”

전라북도 김제를 얘기할 때 떠오르는 대표적인 표현이 ‘징게 맹경 외에밋들’이다. ‘징게 맹경’은 김제와 만경을, ‘외에밋들’은 넓은 들녘을 가리킨다. 김제평야와 만경평야는 우리나라 최대의 평야로서 한반도에서는 유일하게 지평선을 볼 수 있는 호남평야를 이루는 들판이다. 삼한 시대에, 바로 그곳에 물을 대기 위해 조성한 저수지가 벽골제다. 우리나라 최대의 고대 저수지이자 제천 의림지, 밀양 수산제와 더불어 삼한 시대 3대 수리 시설로 꼽힌다.

“그런데 왜 진표율사에 꽂힌 분이, 만경에 가는 건가요?”

김교수가 불쑥 물었다.

“무작정 가는 겁니다. 진표율사 출생지가 기록마다 달라요. 진표율사에 대한 기록이, 이게 아주 문제야.”

나는 들고 온 책 한 권과 함께 복사물을 김교수에게 건네주었다. 『진표, 미륵 오시는 길을 닦다』(이하 『진표』로 줄임)라는 책과, 복사물은 내가 금산사를 다녀온 뒤부터 수집한 진표율사 관련 문헌자료였다.

“참고하라고 드립니다. 조사해 보니까, 진표에 대한 전기자료는 몇 가지가 전해지고 있어요. 최초의 기록은 중국기록으로 『송고승전』이에요. 거기에 수록된 「진표전」과 함께 원나라 사람 담악(曇噩)이 찬술한 『신수과분육학승전(新修科分六學僧傳)』의 「진표전」 그리고 명나라 태종 성조(成祖)가 지은 『신승전』 권7 「진표」 등이 있어요. 국내 기록으로는 일연이 쓴 『삼국유사』 권4 제5 「진표전간」과 「관동풍악발연수석기」(이하 「석기」로 줄임)가 대표적입디다. 전기는 아니지만 고려시대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실려 있는 「남행월일기」도 진표의 행적에 대한 일부를 제공하고 있어요. 그리고, 현재 시중에 진표율사 관련 책은 이 『진표』가 유일합니다. 여기에, 비교적 상세하게 정리했으니까 한 번 보도록 하구.”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김교수의 연구실을 나왔다. 학구열이라면 두 번째 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인 김교수는 연구실을 나서는 나는 쳐다보지도 않고 방금 내가 전해준 책 『진표』를 뒤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빙긋 미소를 지으며 내 연구실로 돌아왔다.

『진표』에는 진표율사의 전기적 생애에 관한 문헌자료를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이 가운데 중국기록인 『신수과분육학승전』의 「진표전」은 『송고승전』의 「진표전」을 거의 그대로 옮겨 실었다. 『신승전』의 「진표」 역시 마찬가지다. 『송고승전』 「진표전」의 첫머리에 있는 출가 동기에 대한 부분과 끝부분의 금산사 조성에 관한 부분만 제외되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중국기록으로서 전표 전기는 『송고승전』의 「진표전」 한 편으로 귀착된다. … 국내 기록으로서 진표의 전기 두 편이 『삼국유사』에 앞뒤로 실려 있는 것이 시선을 끈다. 「진표전간」은 물론 일연이 기록한 것이다. 같은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것이라고 해도 「석기」는 기록자가 다르다. 「석기」는 1199년 금강산 발연사 주지 영잠(瑩岑)이 기록한 「관동풍악산발연수진표율사진신골장입석비명(關東楓岳鉢淵藪眞表律師眞身骨藏立石碑銘)」을 일연의 제자 무극無極(1250~1322)이 정리, 수록한 것이다. 「석기」 말미에 “이 기록[『삼국유사』]에 실린 진표율사의 사적[「진표전간」]과 발연사 비석의 기록은 서로 다른 데가 있다. 때문에 영잠의 기록만을 추려서 실었으니 후세의 현자들이 당연히 잘 살피기 바란다. 무극이 기록한다.”고 덧붙여 놓았다.

「남행월일기」는 전주목 사록겸서기(史錄兼書記)에 보임된 이규보가 1199년 9월부터 이듬해 12월까지 1년 4개월여 기간 동안의 외직생활을 통해 얻은 견문을 토대로 1201년에 정리한 일종의 기행수필이다. 당대 최고의 문인 이규보는 전주목 주변을 두로 다니면서 보고 듣고 느낀 바를 기록했는데, 여기에 진표에 관한 기록이 들어있는 것이다. 영잠의 「비명」과 같은 해에 쓰였다. 현재 전하는 진표에 관한 국내 기록으로는 「석기」와 함께 최초의 기록이다. 기행수필이므로 진표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전기는 아니지만 진표의 수행에 관해서는 매우 유용한 자료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현재 전하는 진표에 대한 대표적인 전기는 「진표전간」, 「석기」 그리고 「진표전」 등 3종이 있다. 이들 중 「진표전」이 가장 오래 되었다. 그러나 「진표전」은 중국기록으로서의 한계가 있다. 진표와 전기 찬술자들의 사망연대를 기준으로 「진표전」은 진표 사후 약 230년 뒤에, 「비명」(「석기」)은 약 435년 뒤에, 그리고 「진표전간」은 525년 뒤에 기록되었다. 전기물의 평가 대상이 ‘사실성’ 여부에 좌우되는 것은 아니라고 해도, 또한 전혀 무시할 수는 없다. 굳이 사실성만을 기준으로 한다면 진표와의 시간적 거리와 공간적 거리가 가까울수록 전기물로서의 ‘가치’가 커질 것이다. 이 경우 시간적 거리는 「진표전」 〉 「비명」 「석기」 〉 「진표전간」이 되고, 공간적 거리는 「석기」=「진표전간」 〉 「진표전」이 된다. 그러나 시간적 거리에서 「석기」의 경우, 원래 영잠에 의해 집필된 「비명」은 「진표전간」보다 앞서지만, 무극에 의해 정리·편찬된 「석기」는 「진표전간」보다 늦다. 스승 일연이 쓴 「진표전간」을 보고 「비명」과 다른 곳이 있어서 제자 무극이 다시 정리하여 「석기」라는 제목으로 「진표전간」 뒤쪽에 수록한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들 3종의 전기가 진표의 행적에 대한 연대를 각각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구체적인 것은 논의과정에서 검토하겠으나 적게는 10년, 많게는 20년 정도의 차이가 난다. 따라서 진표의 생애에 대한 접근은 이들 3종의 전기에 대한 종합, 비교 검토가 선행되어야 한다.

 

4)

 

진표율사의 출생지에 대한 답사를 떠나기 며칠 전, 미륵팀은 대전 시내의 한 카페에서 모임을 가졌다. 대전천변에 위치한 카페는 보문산 전망대가 한 눈에 올려다 보이는 곳이었다. 임시수업 겸 그동안 각자 준비한 내용들을 점검해 보자는 의도였다. 총무인 정지원이 미리 준비해 온 자료를 팀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진표율사의 생애에 관한 문헌자료였다.

 

중 진표는 완산주(完山州)(지금의 전주목이다) 만경현(萬頃縣)(혹은 두내산현豆乃山縣 또는 나산현那山縣)이라고도 한다. 지금의 만경의 옛 이름이 두내산현이다. 「관녕전(貫寧傳)」에서는 진표의 고향을 ‘금산현(金山縣) 사람’이라 하였으나, 이는 절 이름과 현 이름을 혼동한 것이다) 사람이다. 아버지는 진내말(眞乃末)이요, 어머니는 길보랑(吉寶娘)이며 성은 정씨(井氏)이다. (「진표전간」)

 

진표율사는 전주 벽골군(碧骨郡) 도나산촌(都那山村) 대정리(大井里) 사람이다. (「석기」)

 

그[진표]의 고향은 금산(金山)에 있다. 대대로 사냥을 하며 살았다. 진표는 날쌔고 민첩하였다. 특히 활을 잘 쏘았다. (「진표전」)

 

“진표에 대한 3종 전기를 검토할 때 가장 먼저 부딪치게 되는 문제는 출생연도와 함께 출생지, 그리고 활동연대가 자료마다 각기 다르다는 점인데요. 중국기록인 「진표전」은 물론이고 『삼국유사』에 앞뒤로 나란히 실려 있는 「진표전간」·「석기」조차도 기록되어 있는 연대가 다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후자는 두 편 모두 어느 정도의 연대가 기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달라서 오히려 혼란을 부추기는 측면이 없지 않아요. 현재로서는 서로 다른 연대의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있는 방계자료도 찾아볼 수도 없구요. 진표의 행적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문제점이 있다는 전제 아래에 3종의 전기를 비교,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미리 말씀 드려요.”

정지원이 설명했다. 나는 말없이 지원을 보았다. 짧은 시간에 참 열심히 준비하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시학원 영어강사이기도 한 그가 언제 시간을 내서 이토록 철저하게 준비했는지 놀랍고 미안하기까지 하였다. 과연 나도 이미 관련 자료들을 검토하였으나 그녀의 설명대로 진표의 출생연대는 물론 출생지, 활동연대도 정확하지 않았다. 일단 출생지와 출생연도를 확인하면 활동연대는 자연스럽게 확인이 될 터였다. 먼저 출생연대의 경우, 정지원이 지적한 것과 같이 3종의 진표 전기에 나타나는 연대를 종합적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나는 이미 판단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활동연대가 확정되면, 거기에서 출생 연도를 유추하는 것이었다. 이 경우, 연구논저 『진표』가 퍽 도움이 되었다. 이 책에는 진표의 생애에 관한 대표적인 3종의 진표 전기를 중심으로 연대를 정리해 놓았다.

 

먼저 「진표전」을 보자. 이 전기에서 나타나는 연대는 출가연도뿐이다. 그것도 “개원중 (중략) 출가의 뜻을 품었다(當開元中 [中略] 因發意出家).”고 하여 정확한 연도를 알 수 없다. 개원연간(713-742)은 신라 33대 성덕왕( ? ~ 737) 12년(713)부터 34대 효성왕(737~741)을 거쳐 35대 경덕왕 1년(742)까지 30년에 해당하는 기간이다. 결국 이 전기의 연대 기록만으로 진표의 출가연도를 알기는 어렵다.

「진표전간」의 사정은 조금 나은 편이다. 이 전기에는 진표가 선계산 부사의암에서 14일 동안 수행을 하다가 지장보살을 친견하고 정계(淨戒)를 받은 것이 23세 때, 개원 28년 경진년(740, 효성왕 4)이라고 했다. 그 후에 아슬라주(阿瑟羅州)에 이르러 어별들 위해 설법하고 계를 준 것이 천보(天寶) 11년 임진년(752, 경덕왕 11)이다.

「석기」에 따르면 진표가 변산 부사의암에 들어간 것이 27세 때인 상원(上元) 원년 경자년(760, 경덕왕19), 그로부터 3년 뒤인 임인년(762, 경덕왕 21)에 지장·미륵 두 보살로부터 계법을 얻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진표전간」에 따르면 진표가 지장보살로부터 계를 받은 것은 23세 때, 740년이구요. 12세 때 출가했다고 했으므로 출가연도는 729년, 출생연도는 717년이 돼요. 「석기」 역시 같은 방식으로 정리할 수 있겠죠. 변산 부사의방으로 들어가던 해가 27세 때인 760년이므로 출가하던 12세 때는 745년, 다시 출생연도는 733년이 됩니다. 문제는 두 전기 「진표전간」과 「석기」 사이에 출생과 출가 연대 기록이 16년의 차이가 난다는 점이구요.”

나는 물론 미륵팀원들은 모두 정지원의 발언에 귀를 기울였다. 내용도 그렇지만, 그의 열정적인 모습에 모두 기가 죽었다는 표정들이다.

“연구자들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한 가지 열쇠로서 진표의 출가 나이를 주목합니다. 「진표전간」과 「석기」에서 출가연도는 각기 다르지만 나이는 12세로 동일하게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죠. 물론 진표의 출가 연도기록―729년(「진표전간」), 745년(「석기」)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정확할지 알 수는 없답니다. 여기서 또 하나의 열쇠가 추가될 수 있다고 봅니다. 「진표전」의 출가연도인 개원연간(713~741)이 그것이다. 이 출가연대와 앞의 두 전기에서 기록하고 있는 출가연도가 합쳐지는 것이 「진표전간」의 729년이랍니다.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진표전간」의 연대를 기준으로 잡는 이유이기도 해요. 이에 따르면 진표는 성덕왕대에 출생하여 효성왕대에 출가하여 경덕왕대를 중심으로 혜공왕대에 이르기까지 크게 교화를 떨치다가 입적하였다는 결론이 내려지구요.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추정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도 유의해야 하답니다.”

정지원이 발표를 마치자 나는,

“좋아. 아주 고생이 많았어.”

격려하였다.

“다음 주제는 뭔가? 응. 진표의 가계와 출생지로군.”

“예. 한상수 동학님이 발표할 겁니다.”

“그런가!”

나는 정지원 옆에 앉아 있는 한상수 학생에게 눈길을 가져갔다. 박사 1학기인 그는 희끗희끗한 백발에 노익장인 듯싶지만 피부에 윤기가 났다. 겉으로 보기에는 50대 중, 후반의 장년 정도로 보였으나 공무원 정년퇴직을 하고 가는 세월이 아까워서 한류대 대학원에 진학했다고 포부를 밝힌 노신사였으나, 그는 수행에도 관심이 많아서 미얀마의 양곤(Yangon)에 있는 마하시명상센터(Mahawi Sasana Yeiktha Meditaion Centre)에 가서 한 달 동안 위빠사나 수행을 하고 올 정도로 멋진 노년을 보내는 늦깎이 학생이었다.

 

5)

 

한상수가 『진표』를 중심으로 준비해 온 진표율사의 가계는 이러하였다. 진표의 아버지는 진내말, 어머니 길보랑 정씨라고 했다. ‘진내말’은 내마(奈末) 또는 나마(柰麻)인 신라의 11등급 관직명에 성씨인 ‘진’을 앞에 붙인 것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의 제3대 왕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 재위 24∼57) 9년에 17등급의 관위를 설치하였다. 법흥왕 7년(520) 율령 공포 때에 제정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17관등 중에 1관등 이벌찬에서 5관등 대아찬까지는 진골만이 받을 수 있다. 11관등은 나마라 하여 중나마(重奈麻)부터 칠중나마(七重奈麻)까지 두었다.

오늘날 한국의 성씨에는 보이지 않는 진씨는 백제의 대표적인 여덟 귀족 성씨―백제의 대성팔족(大姓八族) 가운데 하나였다. 백제의 대성팔족은 ‘8개의 큰 성씨’라는 뜻으로 백제 후기의 대표적인 귀족가문 8개를 아울러 가리키는 말이다. ‘대성팔족’은 『수서』 등을 비롯한 중국 역사서의 “[백제] 나라 안에 큰 성씨로서 8개 집안이 있으니(國中大姓有八族)…”라는 문장에서 비롯된 말이며, 『삼국사기』 등 국내 역사서에는 나오지 않는다. 백제의 대성팔족에 대해 기록한 중국역사서는 『수서』, 『북사』, 『신당서』, 『통전』 그리고 「괄지지」를 인용한 『한원(翰苑)』 등이다. 8개 성씨에 대한 내용이 저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삼국사기』 등의 국내기록에는 진씨와 백씨가 자주 나온다.

말하자면 진표율사의 집안은 신라 5두품 계급에 속하는 유력가문이었다. 5두품은 신라시대 골품제도 중 하나의 신분계급으로서 성골·진골·6두품 다음의 계급이다. 밑으로 4두품이 있었다. 원래 신라의 골품제에 포함되는 자는 왕경인(王京人)에 한하는 것이었고, 5두품은 중앙관직에 임명되므로 지배자집단에 속하는 계급이었다. 『삼국사기』는 진촌주(眞村主)를 5두품과, 차촌주(次村主)를 4두품과 동일하게 파악하고 있다. 진촌주와 차촌주가 어떤 신분에 속하는지 분명하지 않으나 촌주는 촌락의 장이었으며 여러 개의 촌을 다스리고 있었다. 5두품은 제10관등인 대나마까지 오를 수 있었다. 다만, 대나마에서 더 관등을 올려야 할 경우 중대나마에서 9중대나마까지 중위(重位)를 내려주었으며, 제9관등인 급벌찬 이상으로는 승진시키지는 않았다. 따라서 진표는 한 고을을 장악하고 있는 유력한 지방호족 출신이라고 할 수 있다. 『신라 법상종 연구』라는 논문에 따르면 ‘내마’는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후 백제귀족에게 관직을 나누어줄 때 3등급인 은솔(恩率)을 강등하여 수여한 관직명이라는 견해도 있다. 이 경우 진표는 옛 귀족가문이지만 백제멸망 후 신라에서도 우대를 받았던 가문 출신이라고 할 수 있다.

“진표의 출생지에 대해서도 3종의 전기가 일치하지 않다는 것은 정지원 총무가 나눠준 자료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요. 다들 자료를 보면서 토론을 이어 나가도록 합시다. 먼저 「진표전간」에서는 진표의 출생지가 완산주 만경현라고 했는데, ‘만경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주석을 붙였어요. ‘혹은 두내산현이라 하고 혹은 나산현이라고도 하는데 지금 만경의 옛 이름이 두내산현’이다. 그리고, 「석기」에는⋯.”

한상수는 뒷자리에 앉아있는 나를 흘끔 본 뒤에 다시 굵고 침착한 어조로 발표를 이어 나갔다. 이어지는 그의 발표를 요약하면 이러하였다.

「석기」에는 진표율사가 전주 벽골군 도나산촌 대정리 사람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학계에서는 진표가 완산주 두내산현 도방산촌 대정리, 오늘날의 전북 김제시 만경읍 대정리에서 출생하였다는데 대체로 동의하고 있다. 다만 『동국여지승람』 ‘만경현’조에 “본시 백제 두내산현豆乃山縣인데 신라 때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김제군의 영현領縣으로 만들었다.”고 하였으므로 「석기」의 ‘도나산촌’이 아니라 ‘도나산현’이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그런데 말예요. 여기에는 검증이 필요하다고 생각돼요. 현재 학계에서 주장하고 있는 진표의 출생지에 대한 전북 김제시 만경읍 대정리 설은 두 진표 전기를 논의의 편의에 따라서 비빔밥처럼 잘 버무린 결과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지요. 완산주는 지금의 전주를 가리킵니다. 『동국여지승람』 ‘전주부’ 조에 따르면 본래 백제의 완산이며 신라 진흥왕 때 완산주를 둔 이후에 부침을 거듭하다가 조선 태종 때 전주부로 고쳤어요. 같은 책 ‘김제군’ 조에는 ‘본래 백제의 벽골군인데 신라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고려 초에 전주의 속현이 되었다가 인종 21년에 현령을 두었다’고 했어요. 지금 제시한 검증자료에 따르면 학계의 결론은 어느 정도 수긍이 가긴 해요. 그렇지만, 문제가 남아 있어요. 『삼국사기』에 따르면 오늘날 김제지역의 지명은 원래 벽골(또는 소골疎骨), 두내산(豆乃山, 흑은 두내지豆奈知), 수동산(首冬山), 무근촌(武斤村), 야서이(也西伊) 등 여러 가지 지명들이 변천을 거듭해 왔어요. 그러다가 757년 벽골이 김제로 개칭되었고 두내산은 만경으로 개칭되었어요. 또한 수동산은 평고(平睾)로, 무근촌은 무읍(武邑)으로 각각 개칭되어 모두 김제군의 속현이 되었거든요. 따라서 벽골=김제, 두내산=만경은 각기 다른 지명인데 위의 두 진표 전기에는 같은 행정구역으로 기록하였고, 현재 학계에서는 진표의 출생지를 전북 김제시 만경읍 대정리 설로 마치 전주비빔밥처럼 얼버무려 놓았단 말입니다.”

“⋯.”

자료를 들이대고 평소와는 다른 모습으로 냉정하게 비판하는 한상수의 결론에 미륵팀원들은 모두가 할 말을 잃어버린 듯 입을 열지 않았다. 분위기는 이미 무거워졌다.

“예. 발표 잘 들었어요. 수고했습니다. 진표율사의 출생지가 현 학계에서 주장하는 만경읍 대정리 설이 과연 전주비빔밥처럼 얼버무린 것인지 아닌지 결론은⋯.”

내가 상체를 앞으로 당기면서 말했다.

“현장에 가서 확인하는 것이 어떨까요? 비록 1천여 년이 지났으나 현장은 기록에서 발견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들려줄 지도 모르니까. 현장에 간다고 해도, 지명이라는 것이 있다가도 없어질 수도 있겠지만.”

토론 결과, 이번 답사가 결정되었다.

세종 시내를 벗어난 차는 대전-당진 고속도로의 짧은 구간을 지나 곧장 호남고속도로로 꺽어들었다. 운전하는 내내 김현 교수는 말이 없었다. 이따금 창밖을 흘끔거리는 정지원도 조용하다. 뒷좌석에 앉아 있는 나는 진표율사의 전기 자료를 검토하였다.

차는 여산 휴게소 앞을 지나고 있었다. 차창 밖으로 너른 들판이 달려왔다. 그 너머로 흰 구름이 둥실 떠 있었다.

 

 

 

 

 

 

 

EnglishFrenchGermanItalianJapaneseKoreanPortugueseRussianSpanishJavane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