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의 소도 문화 6

 소도문화의 변천사 (3)

 

대시전의 환웅전, 국조삼신을 모시는 삼성전三聖殿, 불교의 대웅전大雄殿

 

소도로 지정된 산골짜기에는 신단이 있다. “산골짜기에 나무를 심고 토단을 쌓는 것을 신단이라고 말한다[在山谷而植木爲土壇者 曰 神壇]”(『태백일사』 「신시본기」). 신단은 삼신의 공덕을 기리고 모시는 제단이다. ‘임자년에 4세 오사구단군烏斯丘檀君은 마한馬韓 왕에게 명하여 상춘常春에 들어가 구월산에서 삼신께 제사드리는 일을 돕도록 했다[壬子 韓以命 入常春 助祭三神于九月山]’(『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는 기록이 있다. “삼신은 우주만물을 능히 이끌어 내고, 각기 타고난 성품을 온전하게 하니, 신의 오묘함을 백성 모두가 믿고 의지하는 것이다[神者 能引出萬物 各全其性 神之所玅 民皆依恃也]”(『단군세기』).

그런데 신단에 역대 천왕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삼신전三神殿’을 세우고 신주神主를 모시기 시작한 것은 2세 부루단군扶婁檀君 때이다. 『단기고사檀奇古史』에 의거하면, ‘부루단제가 삼신전을 세우고, 환인, 환웅, 단군의 성조를 봉안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경배하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다. 삼위성조三位聖祖는 바로 인류최초의 시원국가로 알려진 환국의 환인천제, 그 국통을 계승하여 배달국을 창업한 환웅천황, 그리고 배달의 국통을 계승하여 법도를 실현한 단군조선의 단군왕검이다. 또한 5세 구을단군丘乙檀君은 “재위 16년에 장당경에 몸소 행차하여 삼신단을 봉축하고 환화를 많이 심었다[丁丑十六年 親幸藏唐京 封築三神壇 多植桓化]”(『단군세기』).

소도에 성조의 유상遺像을 모시고 직접 제사를 지내는 풍속은 11세 도해단군道奚檀君에서 비롯된다. 도해단군은 “재위 원년인 경인년에 오가에게 명하여 12명산 가운데 최고로 빼어난 곳을 찾아 국선소도를 설치하고, 둘레에 박달나무를 많이 심었다. 가장 큰 나무를 선택하여 환웅상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니 그 이름을 웅상이라 했다[庚寅元年 帝命五加 擇十二名山之最勝處 設國仙蘇塗 多環植檀樹 擇最大樹 封爲桓雄像而祭之 名雄常]”(『단군세기』). 같은 해 도해단군은 ‘대시전大始殿’을 세우고, 거기에 환웅천황의 유상을 봉안하여 모시기 시작했다. 도해단군은 “겨울 10월에 대시전을 건립하도록 명하였다. 대시전이 완성되니 지극히 웅장하고 화려했다. 천제환웅의 유상을 받들어 안치하니 머리위에는 광채가 찬란하여 마치 태양이 온 우주를 환하게 비추는 것 같았다[冬十月 命建大始殿 極壯麗 奉天帝桓雄像而安之 頭上 光彩閃閃 如大日有圓光 照耀宇宙]”(『단군세기』).

대시전은 환웅천황의 유상을 모신 누각이다. 대시전이 바로 ‘환웅전桓雄殿’인 것이다. 그런데 이후에 소도제천이 역대歷代로 내려오면서 삼신전과 환웅전이 통합하여 명칭이 ‘삼성전三聖殿’으로 바뀐다. 삼신전이 곧 삼성전인 셈이다. 왜냐하면 삼신이 우주만물을 이끌어내어 각기 부여된 성품을 온전하게 하지만, 국조삼성으로 말미암아 그 공덕이 더욱 빛나고 성대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삼신전은 곧 동북아 한민족의 국조삼성, 즉 환국을 건국한 환인천제, 배달국을 개창하여 문명화에 힘쓴 환웅천황, 환국과 배달의 국통과 법통의 맥을 이어 동북아 제국을 건설한 단군왕검의 공덕을 봉안하여 모시는 삼성전으로 자연스럽게 바뀐 것이다.

삼신전이 곧 삼성전이라는 사실은 33세 감물단군甘勿檀君이 제사를 지낼 때 지은 ‘서고문誓告文’에서 알 수 있다. “세분 성조의 존귀함은 삼신과 더불어 공덕이 같고, 삼신의 공덕은 세분 성조로 말미암아 더욱 성대하도다. 비어있음과 거칠게 있음은 한 몸이요, 낱개와 전체는 하나이니, 지혜와 생명을 함께 닦으면 내 몸과 영혼이 함께 뻗어나가네. 참된 가르침이 정해지고, 믿음이 오래되면 자명해지고 세력을 타면 높아지나니, 빛을 돌려 몸을 돌아봄이로다. 저 높은 백악산이여 만고에 변함이 없이 푸르고, 역대성조께서 대를 이어 예악을 부흥시켰으니 규모가 그토록 위대하여 도술이 깊고도 광대하도다. 하나를 잡으면 셋을 머금고 셋이 모이면 하나가 되나니, 하늘의 계율 널리 펴서 영세토록 법으로 삼으리라[三聖之尊 與神齊功 三神之德 因聖益大 虛粗同體 個全一如 智生雙修 形魂俱衍 眞敎乃立 信久自明 乘勢以尊 回光反躬 截彼白岳 萬古一蒼 列聖繼作 文興禮樂 規模斯大 道術淵宏 執一含三 會三歸一 大演天戒 永世爲法]”(『단군세기』)

삼성전은 세 분 성조聖祖, 즉 환인천제, 환웅천황, 단군왕검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이를 ‘삼성사三聖祠’라고 한다. 삼성전의 명칭이 삼성사로 바뀐 것은 감물단군 “재위 7년 무자 년에 영고탑 서문 밖 감물산 아래에 삼성사三聖祠를 세우고 친히 제사를 드렸다[戊子七年 寧古搭西門外甘勿山之下 建三聖祠 親祭]”(『단군세기』)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단군조선이 무너지자 만주 상춘지역의 구월산九月山에 있던 삼성전은 고려에 이르러 다시 삼성사를 지어 이를 계승하게 된다. 오늘날 까지도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에는 “인웅검 삼신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조자용, 『삼신민고』, 169쪽).

문제는 환웅전桓雄殿이 삼신전과 통합되면서 한편으로는 삼위성조를 모시는 삼성전으로 바뀌게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불교의 본존本尊을 모시는 ‘대웅전大雄殿’으로 둔갑되었다는 사실이다. 환웅전은 어떻게 해서 대웅전이 되었을까? 대웅전이라는 명칭은 환웅이 ‘대웅천大雄天’이라는 사실과 불교가 한반도에 유입되면서 융합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단군조선의 삼조선三朝鮮 관경체제가 무너지자 삼국三國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 와중에 외래종교인 불교가 들어와 한민족의 생활문화 속으로 깊이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불교는 전통적인 민족 신앙인 신교와 대립하게 되는데, 이것을 ‘신불상쟁神佛相爭’이라 한다. 다른 한편으로 불교는 한민족의 토속신앙을 거부감 없이 수용하여 반영하기 시작했다. 이것을 ‘신불융화神佛融和’라 한다. 신불융화의 과정에서 불교는 본존을 모신 불당佛堂을 ‘삼성전’이 아니라 ‘대웅전’이라 호칭했고, 그리고 삼신전이란 이름은 본당에서 뒷전으로 밀려나 작은 규모로 지어진 ‘삼신각三神閣’이라고 했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에 산재해 있는 사찰寺刹은 대부분 대웅전이란 간판이 붙어 있고, 그 안에는 삼존불三尊佛, 즉 본존불인 석가불釋迦佛,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文殊菩薩, 수행을 상징하는 보현보살普賢菩薩의 불상이 모셔져 있다.

사실 대웅전은 불교의 용어가 아니다. ‘대웅大雄’이란 말은 ‘크게 뛰어남’을 뜻한다. 그래서 대웅전은 문자적으로 크게 뛰어난 인물을 모시는 전각이란 뜻이다. 이 말의 직접적인 기원은 ‘대웅천大雄天’에서 비롯한다. ‘대웅천’의 주신은 ‘환웅’이다. 이에 대해 『태백일사』 「삼신오제본기」는 “그러므로 말하기를 사람과 만물이 모두 삼신에서 생겨나니, 삼신이 바로 한 뿌리의 조상이다. 환인은 역시 삼신을 대행하여 환국의 천제가 되었다. 후에 나반을 대선천이라고 부르고, 환인은 대중천이라고 불렀다. 환인은 환웅과 치우와 더불어 삼황이 되고, 환웅을 대웅천이라 부르고, 치우를 지위천이라 불렀다. 이것이 『황제중경』이 만들어진 유래이다[故 曰人物 同出於三神 以三神 爲一源之祖也. 桓仁 亦代三神 爲桓國天帝. 後 稱那般 爲大先天 桓仁 爲大中天, 桓仁 與桓雄治尤 爲三皇 桓雄 稱大雄天. 治尤 爲智偉天 乃皇帝中經之所由作也]”(「三神五帝本紀」)라고 한다. 따라서 대웅전은 바로 환웅전이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본존을 모시는 불전佛殿은 환웅전이라 하지 않고 대웅전이라 했을까? 이는 ‘신불융화’의 과정에서 불교가 신교의 토속신앙을 수용하는 일환으로 전각의 명칭만 차용해갔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태백일사』의 「신시본기」에 의거하면, “불상이 처음 들어오자 절을 세우고 이를 대웅이라 호칭했다. 이것은 승도들이 옛 풍속을 세습으로 인하여 부르는 칭호이지 본래 승가의 말이 아니며, 또한 이르기를 승도와 유생이 모두 낭가에 예속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佛象始入也 建寺稱大雄 此僧徒之襲古仍稱而本非僧家言也, 又云僧徒儒生皆隷於郞家以此可知]”(『고려팔관잡기高麗八觀雜記』).

그러므로 한민족의 세속적인 신교문화는 소도에 있고, 불교가 들어오면서 세속적인 신교문화와 결합하게 되고, 소도가 있을 만한 곳에는 대체로 불당이 세워지게 된다. 이때 대시전에 모셔진 환웅천황의 유상은 바로 불상으로 대체되었다. 다시 말하면 불교가 한반도에 처음 들어왔을 때 신교의 신앙문화와 불교가 습합되면서 불전은 옛 풍속으로 전해오는 환웅의 이름을 따서 ‘대웅전’으로 부르게 되고, 그 안에 본존을 모시게 된 것이다. 이로부터 불교문화와 전통적인 신교문화 간에는 이질감이 다소 해소되고, 친화성이 쌓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사찰 곳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삼신각이나 칠성각 등과 같은 신당神堂은 곧 신불융화의 과정에서 남아 있는 신교문화의 잔영殘影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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