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귀족 성씨 2

독일의 5대 귀족 가문

현존하는 독일 귀족가문 수는 약 3천에 이른다고 한다. 1956년에 발족되어 지금도 활동 중인 독일 귀족 연합회 (VdDA: Vereinigung der Deutschen Adelsverbände)에 등록된 회원은 약 8만 명이다 (2013년 기준). 2016년 독일의 경제 일간지 한델스블라트 Handelsblatt는 현재 독일에서 가장 중요한 귀족 가문을 아래와 같이 꼽았다.

  • 호엔촐레른 가문
  • 바이에른 가문
  • 푸거 가문
  • 하노버 가문
  • 헤센 가문

호엔촐레른은 200여 년 동안 프로이센 왕국의 왕들과 독일제국의 황제들을 배출하였고 그 역사가 천 년이 되는 오래된 성씨이며 독일에서 가장 중요한 귀족가문이다. 바이에른 가문 또한 동화의 성으로 세계적인 명소인 노이슈반슈타인 성을 가진, 독일 남부를 차지한 유구한 역사를 가졌으며 가문의 창시는 6세기 바이에른 대공 가브리발트 1세 (Gabribald I. ca. 548-595)로 기록된다. 푸거는 세계 제일의 막강한 재력과 영향력의 대명사로 통하는 가문으로 15세기 직조공 집안에서 출발하여 구리, 은 채굴 등 광산업과 은행가로서 부를 축적하였다. 푸거 가는 로마의 교황들과 신성로마제국 황제들에게 자금을 빌려주고 자신들의 영향력을 전 유럽으로 확대해 나갔던 가문이다. 하노버 가문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영국 왕실이 나온 가문으로서 현재 이 가문의 수장인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폰 하노버가 그의 후계자인 동명의 아들에게 상속했던 마리엔부르크 성의 매각을 계기로 오래된 문화유산 관리를 둘러싼 세대간의 갈등이 일반에게 널리 공개되었다. 니더작센 주에 있는 마리엔부르크 성은 하노버 가문의 본가로서 135개의 방이 있는 ‘독일 북부의 노이슈반슈타인’으로 일컬어질 만큼 아름다운 곳이나 내부는 오래 전부터 황폐한 상태였고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2세가 이 성을 상속받고 난 후 2018년 단돈 1 유로라는 상징적인 금액으로 매각해버렸다. 성을 보수하는데 약 2천 7백만 유로, 우리 돈으로 350억 원이 넘는 예산이 필요한데, 니더작센 주정부에서 비용의 절반을 부담한다 하더라도 가문에서 나머지 절반의 비용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이유였다. 이 매각 사건은 가문의 수장이 아들에게 넘겼던 성의 상속권을 다시 물리면서 일단락 지어졌다.

 

바이에른 퓌센에 위치한 노이슈반슈타인 성

 

바덴뷔르텐베르크 주에 위치한 호엔촐레른 성

 

호엔촐레른 가문: 프로이센 왕가 유산 반환 청구 소송

몇 해 전 우리나라 언론에 의해서도 알려진 바 있는 독일 왕가 후손의 왕가유산 반환 청구사건은 호엔촐레른 가문의 이야기다. 호엔촐레른의 역사는 중세로 거슬러 올라가며 2백 년 넘게 프로이센왕국을 통치했던 독일의 매우 중요한 가문이다. 마지막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를 배출했던 가문의 후손들이 1991년부터 최근까지 국가를 상대로 브란덴부르크와 베를린에 집중되어 있었던 왕가 자산의 대부분이 2차 세계대전 패전 후 점령군 소련에 몰수당했었는데 이를 되찾기 위해 왕가유산의 반환과 배상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러나 소련으로부터 재산을 몰수당한 사람들은 보상을 요구할 권리가 있었지만 나치 정권에 협력한 자는 이 권리를 행사할 수 없었다. 빌헬름 2세의 아들이었던 황태자 빌헬름 폰 프로이센 (1882-1951)이 나치에 협력한 설이 도마에 올랐다. 이는 가문의 소유였던 성들과 수천 점의 예술품들을 포기해야 할 사안이었다. 이에 가문의 수장인 ‘프로이센 왕자 게오르그 프리드리히’(Georg Friedrich Prinz von Preußen,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계파, 1976년생)가 빌헬름 황태자의 나치와의 긴밀한 관계를 주장했던 학자들을 고발하고 법적으로 대응하면서 다시 사회적으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독일 내 여론은 이 왕가의 반환 요구에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25년간 다투어 온 호엔촐레른 가문의 유산 반환 청구는 최근 2023년 3월에 이르러 게오르그 프리드리히가 이제까지의 요구를 모두 철회하고 손해배상과 관련한 모든 소송을 취하하면서 마무리 되었다.

호엔촐레른 가문이 1차 세계대전 패망과 독일제국의 몰락 이후 1920년대에 돌려받았던 부동산은 상수시 궁과 베를린 궁, 오라니엔부르크 성을 비롯한 39개의 궁전과 성이었고 이 궁전과 성들에는 소유한 엄청난 수의 예술품이 있었다. 이들 중 많은 유산들은 1990년 독일 통일 이후 설립된 연방정부기관 프로이센문화재단들이 맡아 관리되어 왔다. 그러나 이 가문의 본성(本城)인 바덴뷔르텐베르크주에 위치한 호엔촐레른 성은 프로이센 왕자 게오르그 프리드리히와 호엔촐레른 왕자 칼 프리드리히(1952년생)의 공동소유이며, 문화재로서 성의 보존과 관리는 두 사람이 각각 수장으로 있는 호엔촐레른의 두 가문과 그리고 300여명의 호엔촐레른 성 후원회에서 공동으로 맡고 있다.

호엔촐레른 성은 11세기 중세시대로 그 역사가 거슬러 올라가는데 1850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에 의해 개축을 시작하여 1867년 그의 동생으로서 프로이센 국왕에 올랐으며 독일제국의 초대 황제가 된 빌헬름 1세 때 신고전주의 양식의 현재 건축물로 개축을 완료했다.

 

 호엔촐레른 가문의 두 계파: 호엔촐레른과 브란덴부르크 프로이센

호엔촐레른 가문의 역사는 1000년 전 베를린에서 멀리 떨어진 슈바벤에서 시작되었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오늘날 독일 남서부 바덴뷔르템베르크 주 헤칭엔(Hechingen) 인근에 위치한 중세 백작령 촐레른(Zollern)이 그곳이다. 촐레른 성姓을 가진 가장 오래 전의 인물은 부르크하르트 폰 촐레른 (1061년 사망)으로 라이헨아우 수도원 연보에 “Burchardus de Zolorin”이라 언급된 인물이다. ‘Zollern’은 기록에 따라 ‘Zolorin’, ‘Zolre’, ‘Zolrun’으로 표기되기도 했는데, 부르크하르트는 당시 라이헨아우 수도원의 행정관(Vogt)으로 그 지역에서 상당한 권력자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문서상으로 증명되는 호엔촐레른 가문의 시조는 프리드리히 1세 (1125년 사망)이며 부르크하르트의 후손이다. 프리드리히 1세는 알피어스바흐 수도원의 첫 행정관이었다. 살리 왕조의 왕자였다가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된 하인리히 5세를 위해 제국의 국정을 보필하며 로마 교황과 성직자 임명권 투쟁을 도왔다. 1111년 교황 파스칼 2세로부터 신성로마제국 황제 대관식을 받기 위해 로마로 갔던 하인리히 5세의 수행단에 프리드리히 1세가 동행했는데 그의 신분이 백작(Graf)이었음을 증명하는 문서가 남아있다.

이 가문의 성씨는 본래 ‘촐레른Zollern’이었다. 가문의 본가인 촐레른 성 (라틴어로는 Castro Zolre)이 처음 언급된 것은 1267년 때인데, ‘촐레른’에서 ‘호엔촐레른’으로 바뀌게 된 것은 14세기부터이며 16세기에 이 이름이 성씨로 굳어졌다. 바뀐 배경은 가문의 성이 위치한 곳이 855미터 높이의 산 위에 있어 ‘높다’는 뜻의 ‘hoch’를 붙여 그렇게 부른 것이라 본다.

프리드리히 1세를 시조로 하는 호엔촐레른 가문은 크게 두 계파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가문이 발원한 헤칭엔 지역 영지를 대대로 소유해온 ‘슈바벤’ 파이고 다른 하나는 이보다 나중에 갈라져 나온 ‘브란덴부르크 프로이센’ 파이다. 슈바벤은 오늘날 바덴뷔르템베르크 주가 포함된 옛 지명이다. 호엔촐레른 가문의 본성인 호엔촐레른 성을 관리하는 주체가 프로이센 왕자 게오르그 프리드리히와 호엔촐레른 왕자 칼 프리드리히 두 사람인데, 전자는 ‘브란덴부르크 프로이센’파 가문의 수장이고, 후자는 ‘슈바벤’파를 대표하는 ‘호엔촐레른 지그마링엔’ 가문의 수장이다. 지그마링엔은 헤칭엔과 같은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에 속한 도시로, 1806년에서 1849년까지 호엔촐레른 공국의 수도였다. ‘호엔촐레른 지그마링엔’은 ‘호엔촐레른 슈바벤’파에서 현존하는 유일한 가문으로, 지금은 그냥 ‘호엔촐레른’ 가문이라고 부른다. 본관을 떠나지 않은 이 호엔촐레른 파와 ‘브란덴부르크 프로이센’ 파 두 가문이 그들의 본가인 호엔촐레른 성을 공동 소유하며 연간 30만의 방문객에게 가문의 역사와 유산을 알리고 있다.

 

호엔촐레른 슈바벤 파

프리드리히 1세를 시조로 한 호엔촐레른 가문은 1111년 슈바벤의 헤칭엔 인근 영지를 가진 백작 가문이 된다. 프리드리히 1세의 아들 프리드리히 2세는 신성로마 황제 로타르 3세를 위해 싸웠고,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 3세는 본가가 있는 슈바벤을 떠나 뉘른베르크에서 오스트리아 출신인 라브스 가문의 마지막 성백작(Burggraf) 상속녀와 결혼하며 하인리히 6세 황제를 섬긴 공로로 1192년 뉘른베르크 성백작 작위를 수여받는다. 이로써 프리드리히 3세는 촐레른의 백작인 동시에 ‘뉘른베르크 촐레른 백작 프리드리히 1세’ (1139-1201)가 되며 뉘른베르크 성백작으로서 뉘른베르크 성을 맡아 관리하게 된다. 이 해부터 뉘른베르크는 호엔촐레른 가문이 프랑켄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기점이 된다.

1214년 호엔촐레른가의 영지는 뉘른베르크 촐레른 백작 프리드리히 1세의 두 아들에게 분할 상속된다. 호엔촐레른 본가인 슈바벤은 큰 아들 프리드리히 4세 (1255년경 사망)에게, 뉘른베르크 성백은 작은 아들 콘라드 1세 (1260년 사망)에게 상속되며 이로써 가문은 슈바벤 파와 프랑켄 파로 나누어지게 된다. 프리드리히 4세는 이후 호엔촐레른 가문의 시조가 되며, 콘라드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들과 프로이센 왕들의 시조가 된다.

프리드리히 4세를 시조로 한 호엔촐레른 슈바벤 파 가문은 그렇게 성공하지 못했다. 1576년 이 가문은 다시 호엔촐레른 하이거로흐 Hohenzollern-Haigerloch, 헤칭엔, 지그마리엥 세 파로 나누어지고 1869년부터 호엔촐레른 지그마링엔 가문만 존속하게 된다. ‘진정한 바로크 백작’이라 평가받는 요셉 프리드리히 에른스트 (1702-1769)가 가문을 이끌던 50여 년을 제외하곤 본가인 호엔촐레른 성이 점령되고 파괴당하며 다시 되찾는 등 격랑의 시대를 겪게 된다. 1848년 독일 전역에서 민중들의 봉기와 자유주의 혁명이 거세지자 당시 슈바벤 파 호엔촐레른에서 남은 두 계파인 지그마링엔 가문의 수장 칼 안톤 대공 (Fürst Karl Anton 1811-1885)과 헤칭엔 가문의 수장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공 (Fürst Friedrich Willhelm Konstantin 1801-1869)은 1850년 그들의 영지에 대한 통치권을 프로이센 계파의 친척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에게 이양했다.

지그마링엔 가문의 수장 칼 안톤 대공은 헤칭엔 가문의 마지막 대공이 죽은 1869년 이후 슈바벤 호엔촐레른 가문 전체를 이끌게 되며, 1858년에서 1862년까지 프로이센의 수상을 역임했다.

 

호엔촐레른 지그마링엔과 루마니아계 호엔촐레른

칼 안톤 대공 대에 호엔촐레른 슈바벤파 가문은 다시 두 갈래로 나누어진다. 한 갈래는 그의 첫째 아들 레오폴드 (1835-1905)가 이어받은 호엔촐레른 지그마링엔 가문으로 현재의 수장인 칼 프리드리히 폰 호엔촐레른으로 이어지는 계보이며, 다른 한 갈래는 그의 둘째 아들 칼 1세 (1839-1914)에 의해 새로 형성되는 ‘루마니아계 호엔촐레른’ 계보이다. 칼 1세는 1866년 나폴레옹 3세의 추천과 국민투표에 의해 루마니아 공국의 대공으로 추대되며 1881년 루마니아 왕국의 초대 국왕이 된 인물이다. 칼 1세의 왕위는 호엔촐레른 지그마링엔의 레오폴드 대공의 둘째 아들 페르난드 1세 (1914-1927)가 승계 받았고 그로부터 1947년 12월 30일 루마니아 왕국이 공산주의 정권으로 넘어가기 전까지 호엔촐레른 가문에서 모두 네 명의 왕을 배출했다.

 

호엔촐레른 브란덴부르크 프로이센 파

호엔촐레른 가문이 독일에서 가장 중요한 가문으로 부상한 계기는 프리드리히 1세 (1371-1440) 때 마련된다. 프리드리히 6세로서 뉘른베르크 성백작이었던 그는 1415년 브란덴부르크 후작이며 헝가리의 왕이었던 지기스문트가 신성로마제국의 왕위에 선출되도록 도왔던 공로와 외교적 수완을 인정받아 브란덴부르크 국경지구를 물려받고 신성로마제국 왕을 선출하는 선제후의 지위를 얻게 된다.

브란덴부르크 프로이센 파 가문을 성장시킨 인물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Friedrich Wilhelm, 1620-1688) 이다. 1640년 이후부터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이며 프로이센 공작이다. ‘대선제후’라 일컫는 그는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간의 종교전쟁인 30년전쟁으로 인해 황폐화된 나라를 다시 일으켜 경제적 문화적으로 부흥시켰다. 스웨덴과 폴란드 및 합스부르크 제국과 러시아가 가담했던 제2차 북방전쟁 (1655-1661) 동안 동맹들 관계에서 그는 뛰어난 정치력을 발휘하여 베라우 평화조약으로(1657) 폴란드 왕국의 영지였던 프로이센 공국의 주권자가 된다. 종교적으로 칼뱅파로 개종했던 프리드리히 빌헴름은 1664년 루터파와 칼뱅파간의 대립을 종식시키는 ‘관용법’을 제정하였고, 1665년 포츠담 법령을 통해 프랑스에서 망명한 2만여 명의 칼뱅파 신교도를 받아들였다.

프로이센 대공에서 프로이센 왕으로 승격된 것은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 3세 (1657-1713) 때이다.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는 1701년 신성로마제국 레오폴드 황제의 허락을 받아 프로이센의 초대 국왕 프리드리히 1세가 된다. 대관식은 당시 프로이센의 수도였던 괴니히스베르크에서 화려하게 거행되었다.

현재 베를린의 대표 명소인 살롯텐부르크 궁은 프리드리히 1세와 그의 왕비 소피 샬롯테 폰 하노버가 1701년 프로이센 왕실 여름궁전으로 건축을 시작해 1888년 완공된 것이다.

프리드리히 1세 다음으로 왕위에 오른 인물은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1688-1740)이다. 그는 선왕 때 바닥났던 국고를 재정비하고 경제 재건에 힘쓰며 재임기간 (1713년-1740년) 부국강병책을 펴나갔다. 1713년 왕위에 오른 후 선왕이 살았던 호화로운 궁전들을 임대하였고 불필요한 궁중의식들과 시종들을 정리하고 화려한 바로크 궁전문화 전통을 타파했다. 그 자신은 근검절약과 근면함의 대명사로 오늘날 알려진 이른바 ‘프로이센 정신’을 대표하는 정신적 지주가 된다. ‘군인왕’이라 불리는 그는 나라의 재정을 군사력 확충에 집중해 쓰며 마침내 8만 명의 188센티미터 이상의 건장한 체구를 가진 잘 훈련된 군인들로 구성된 군단을 만들어 프랑스, 네덜란드, 러시아 다음으로 유럽에서 네 번째로 강한 군사력을 갖게 된다.

 

프리드리히 대왕

호엔촐레른 가문이 배출한 역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인물은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 2세로서 후에 프리드리히 대왕 (1712-1786)으로 추앙되며 지금도 독일인들의 우상이 되는 인물이다. 1740년 5월 왕위에 오른 그는 아버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로부터 물려받은 8만 군사를 더욱 증원시켜 독일 내와 유럽에서 프로이센의 세력을 넓혀갔다. 청소년 시절, 부왕과 완전히 성향이 달랐던 그는 왕세자로서 받아야 할 군사교육보다 음악과 문학에 관심을 쏟았고 플루트 연주를 즐겼다. 18살 때 부왕의 폭압적인 훈육에 반발하다 영국으로 도피를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여 함께 도망하던 친구가 처형당한다. 그러나 그는 부왕이 죽고 프로이센의 왕위에 오른 후 얼마 안 되어 전혀 다른 면모를 드러내는데 ‘전쟁왕’이란 별명을 얻을 정도로 탁월한 지휘관으로서 전장을 누볐고 슐레지엔 영유권을 둘러싼 오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왕위계승을 승인하는 대가로 당시 합스부르크가 영지인 슐레지엔의 할양을 요구하며 전쟁을 일으켜 이 지역을 얻었던 것이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1740-1745), 그 후 다시 슐레지엔을 탈환하기 위해 마리아 테레지아가 일으킨 7년 전쟁 (1756-1763)에서 승리하여 이 지역의 지배를 확실히 하였다. 1772년 쇠퇴한 폴란드왕국의 제1 차 분할에서 폴란드의 영토였던 서프로이센을 차지해 프로이센의 영토를 한층 더 확장시켰다. 대왕이라는 칭호는 이때 얻은 것으로 알려진다.

한편 국가경영에 있어서 그는 계몽군주로서 개혁정책을 펼쳤다. 프랑스 계몽주의 사상가 볼테르와 교류했으며 볼테르의 도움으로 왕위에 오른 몇 달 후 1740년 9월 저서 《반(反)마키아벨리론》을 출판했다. 죄인과 증인 심문에서 잔인하고 야만적인 행위로 비난받아온 고문을 완전 폐지했으며, 프로테스탄트 국가 프로이센에 가톨릭교도들과 프랑스 칼뱅파 교도들, 그리고 유대교인들을 받아들이는 관용정책을 폈다. 이들 종교간의 사회적 차별을 없애며 이후 개신교도와 가톨릭교도 간의 혼인에서 아들은 아버지의 종교를, 딸은 어머니의 종교를 배우도록 하는 구체적인 법령을 제정하기도 했다.

포츠담에 위치한 상수시 궁은 ‘프로이센의 베르사이유’로 일컫는 아름다운 궁전이다. 프리드리히 대왕이 남긴 세계문화유산인데 그는 당시 철학자들과 예술가들을 그곳으로 불러 교류하였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전장을 누볐던 철저한 군인으로서 역사에 기록되는 인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시와 희곡을 쓴 시인이며 플루트 연주자이었고 작곡가였다. 121곡의 플루트 소나타, 4편의 플루트 협주곡과 1편의 교향곡 등 많은 곡을 작곡했는데, 예술가로서의 면모는 상수시 궁에서 플루트를 연주하는 그의 모습을 그린 아돌프 멘첼의 1852년 그림에서 잘 나타난다.

동성애자였던 그는 결혼생활에서 자손이 없었으며 그의 죽음 후 왕위는 그의 조카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가 계승하였다.

<상수시궁 프리드리히 대왕의 플루트 연주회), 1850-1852년 아돌프 멘첼이 완성한 그림

 

프리드리히 2세 초상화, 1781 안톤 그라프의 그림

 

 

EnglishFrenchGermanItalianJapaneseKoreanPortugueseRussianSpanishJavane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