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메르의 금융제도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최초로 문명을 일으킨 수메르인들은 기록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겨놓았다. 설형문자라는 문자를 발명했을 뿐 아니라 갈대 펜으로 쐐기문자를 점토판에 써넣는 방식으로 문서를 만들어 보관하였다. 이러한 점토판은 마르면 거의 돌처럼 딱딱해진다. 파피루스나 종이, 양피지보다 훨씬 견고하고 심지어 불이 나거나 홍수가 나도 쓰인 글자는 그대로 유지한다. 현재까지 수십 만 점에 달하는 수메르의 점토판이 발견되었는데 이러한 점토판 문서들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것이 상거래 기록이다. 그 가운데서도 금융 기록 즉 금융계약을 기록한 문서들이 더러 발견되었다.

농업뿐 아니라 상공업 활동도 매우 발전하였던 수메르에서는 화폐로는 금과 은을 사용하였다. 금과 은은 후대의 그리스나 로마처럼 주화로 만들어져 사용된 것은 아니고 덩어리를 잘라서 이용하였는데 그 단위로 미나와 세켈이 있었다. 미나는 약 500그램에 해당하고 세켈은 그것의 1/60에 해당한다. 이 단위와 용어는 후대에 계승되어 고대 히브리인들도 이 단위를 사용하였다. 현재 이스라엘의 화폐 단위가 세켈이다. 은괴(은덩어리)는 디스크나 고리 등 여러 가지 형태로 만들어졌는데 물론 표준화된 무게로 만들어졌다.

금은 대규모 거래에서 사용되었던 반면 은은 무역에서만 아니라 일상적인 거래에서도 널리 사용되었다. 그런데 충적토 지역인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은이 나지 않았다. 은 광산이 없었다는 말이다. 은은 서쪽의 아나톨리아에서 많이 산출되었는데 이 지역과의 무역으로 유입되었다. 당시 이 지역과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잇는 무역로가 아시리아와 시리아를 거쳐 갔다는 것이 고고학자들에 의해 밝혀졌다.

무역로를 따라 많은 곳에 무역식민지가 세워졌는데 무역식민지를 아시리아어로는 ‘카룸’이라 하였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시리아로 넘어가는 길목에 위치한 아시리아인들이 이런 무역을 주도하였는데 현재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투르키예의 역사유적지 퀼테페에 아시리아의 앗수르 상인들이 세운 카룸이 있었다. 도시 외곽에 세워진 그 무역식민지의 이름이 ‘카네쉬’였는데 당시 아나톨리아에 있던 카룸 가운데 가장 큰 곳이었다고 한다. 직경이 500m 되는 원형의 특별구역이었다.

 

원형 모양의 무역식민지 카네쉬 유적지.

 

카네쉬에서 발견된 점토판 문서들 가운데 무역을 위한 투자계약서가 발견되었다. 그 문서에서는 ‘아무르이그타르’라는 이름의 무역상인이 나오는데 그는 투자자들로부터 12년 기한의 투자를 받아 무역을 하였다고 한다. 투자금은 금 30미나로 오늘날의 금시세로 계산하면 16억원 정도 되는 돈이다. 이 자본으로 무역을 해서 이익이 나면 상인은 이익의 1/3을 갖고 손해가 나면 손해의 1/3을 책임진다고 하였다. 또 투자자가 계약만료 전에 투자금을 회수하려면 금과 은 4:1의 가치로 은으로 돌려받아야 한다고 명시하였는데 당시 금과 은 시세보다 불리한 비율이었을 것이다. 고대 시리아 지역에서는 금과 은의 교환비율은 5:1의 정도였다.

금융의 기초는 돈을 필요로 하는 사람과 돈을 빌려주는 사람을 연결하는 대부이다. 대출에서 이자는 돈의 비용으로서 큰 역할을 한다. BCE 1750년경의 함무라비 법전에는 이자율을 정하고 있는데 은으로 빌릴 때는 20퍼센트, 보리로 빌리는 경우는 1/3로 정하고 있다. 물론 이자율은 시대에 따라 변한다. BCE 2000년경 수메르의 수도 역할을 하였던 우르는 히브리인들의 조상 아브라함의 고향으로 알려져 있는 곳이다. 영국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된 우르에는 돈을 빌려주는 은행가들과 상인들의 사무실이 모여 있는 금융 지구가 있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BCE 1800년경의 금융문서가 수십 개 발굴되었는데 그 가운데 ‘두무지밀’이라는 사업가가 맺은 금융계약서가 있다. 그와 동업자 슈미아비야는 슈미아붐이라는 이름의 사람으로부터 500그램의 은을 빌렸는데 두무지밀은 자신의 빌린 몫인 은 250그램을 5년 후에 297.3그램으로 갚겠다고 계약하였다. 이는 이자를 포함한 원리금 합계인 셈인데 당시의 이자계산법에 의하면 연 3.78퍼센트에 해당하는 것으로 오늘날의 은행에서 부과하는 이자율과 비슷하다. 그런데 대출자인 슈미아붐은 이 대출채권을 제3자인 두 상인에게 양도하였다. 만기일에 이 두 상인들은 대출금을 문제없이 회수하였다고 하는데 대출채권이 제3자에게 양도되었던 것으로 보아 그 대출계약서는 오늘날의 어음과 같은 역할을 하였다고 보인다.

그런데 두무지밀과 그 동업자가 어음을 발행하고 빌린 대출금은 그리 큰 돈은 아니다. 우리 돈으로 환산해서 100만원 정도인데 이런 대출들을 이용해서 두무지밀은 빵을 굽는 제빵소에도 투자를 하는 등 다양한 사업을 벌였다. 그는 당시 수메르의 왕인 림신 왕에게 곡물을 5천 리터 이상을 매달 공급하기도 하였다. 그는 상업만 하지 않았다. 어부와 농민들에게 돈을 빌려주는 대금업자 역할도 하였다. 두무지밀은 이런 서민들에게 대출을 해줄 때 무려 한 달에 20퍼센트의 이자를 받았다. 엄청난 고리대였다. 두무지밀은 싼 이자로 돈을 빌려 고리대를 한 것이다. 그의 대출계약은 대부분 1~3개월짜리 초단기계약이었다.

이러한 고리대가 사람들의 원성을 샀던 것은 물론이다. 고리대금업을 통해 두무지밀 같은 사업가는 재산을 크게 불릴 수 있었지만 고리로 돈을 빌려야 하는 서민들에게 높은 이자는 끔찍한 것이었다. 돈을 갚지 못하면 신체를 팔아 갚는 노예계약도 있었다. 그리하여 때때로 왕들은 서민들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채무면제령을 내리기도 하였다. 실제로 두무지밀 시기의 우르의 통치자 림신 왕은 BCE 1788년 모든 채무를 무효로 한다고 선언을 해버렸다. 국가권력으로 채무위기를 해소한 것이다. 두무지밀 같은 대출업자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사태였을 것이다. 당시 대금업자들은 범죄자 취급을 받아 도시 바깥으로 쫓겨났다. 그리고 림신의 칙령 이후 한동안 금융거래가 끊겼다고 한다.

그러나 돈이 급하게 필요한 사람들은 없을 수 없다. 다시 대부가 이루어졌을 것인데 함무라비 왕이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자율의 상한을 법으로 정한 것은 고리대에 대한 민중들의 불만을 사전에 차단하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수메르에서 국가가 직접 궁핍한 서민들에게 돈을 빌려주지 않고 개인간에 대부가 이루어진 것은 은행업의 발전에 유리한 작용을 하였다. 단지 개인간의 자유로운 계약이라 하더라도 지나치게 높은 이자는 금지하여 사전에 금융위기나 사회적 불만 폭발을 막는 것이 필요하다고 여긴 것이다. 함무라비 왕의 이자제한법은 그런 취지에서 제정되었다고 보인다.

수메르인들이 남긴 금융계약서들을 통해 볼 때 금융은 수메르의 무역과 상공업에 도움이 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사업 감각이 있는 상인들은 돈을 빌려서 무역을 하고 여러 다른 사업들에도 투자를 하였을 뿐 아니라 서민들을 상대로 고리대금업도 하였다. 금융은 수메르에서 유능한 상인들의 재산 축적을 촉진하였다. 그러나 수메르에서도 금융은 오늘날의 발전된 자본주의 사회에서처럼 빈부격차를 확대하는 부정적인 역할도 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가끔씩 터져나온 채무말소령이나 이자제안법 등으로 확인된다.

 

함무라비 법전비는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모두 282개의 조문이 기록되어 있다. 형법과 민법에 관한 조문들인데 그 가운데 제88조가 이자율 관련 조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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