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들, 그들의 깊은 사유와 ‘웃픈’ 삶 26 프리드리히 니체, 망치를 든 철학자(1)

1. 인간 본질은 이성이 아니라 의지

 

독일 사상가 중 그는 최악의 평판을 가지고 있다. 그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벌써 기분을 상하게 하기에 충분하다. ‘프리드리히 빌헬름(프리츠Fritz)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그는 무신론자로서 대중적으로 유명하게 됐다. 모든 사람들을 위한 그러나 어느 누구를 위한 책도 아닌 ‘차라투스트라(Zarathustra)’에서 그가 ‘신은 죽었다.’라고 확정적으로 말했기 때문이다. 그는 또 여성혐오자로도 잘 알려져 있다. 같은 책에서 한 늙은 여인의 입을 통해 ‘사소한 진리’를 말했기 때문이다. “그대 여자에게로 가려는가? 그렇다면 회초리를 잊지 말게!” 그런가 하면 또 허무주의자란 명성도 갖고 있다. 기독교와는 대조적으로 그는 이렇게 선언했다. “현재의 삶이란 보이는 그대로 의미나 목적이 없다.” 현재의 삶은 “어떤 결말도 없이” 무로 나아간다. 오직 의미 없음만이 영원하다.

그에 비하면 “동일자의 영원한 회귀”에 대한 니체의 사상은 훨씬 덜 소개됐다. 이 철학자는 또 미래를 어둡게 보고, 헤겔이나 마르크스와는 다르게 이성의 진보에 대한 믿음을 거부했던 회의주의자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세계 2차 대전이 끝나고 독일을 점령한 연합군은 독일에서 앞으로 출간될 수 없는 도서 목록에 그의 저술들을 포함시켰다. 그 이유는 니체의 철학은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들이 탐욕스럽게 움켜쥐었던 선동적인 용어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란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1900년에 죽은 니체는 게르만의 살인광과는 전혀 무관했다. 그는 일찍이 24세에 바젤 대학에 언어학 교수로 초빙된 후에는 “프로이센 노예연대(preußischen Untertanenverbande)”를 떠났고, 그때부터는 마르크스가 그랬듯이 무국적자로 살았다. 그는 늘 자기 혈관 속에 흐르는 폴란드의 피에 대해 자랑스럽게 얘기했고 아리안의 영향이 세계를 타락시켰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신경질적인 민족감정”과 “반유태의 어리석음” 때문에 독일 사람들을 경멸했다. 그는 “인종이 섞여 있는 곳이 위대한 예술의 원천이다.”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니체와 나치”란 사건은 아직도 많은 비판자들에게는 아직도 종식되지 않는 논란거리로 남아 있다. 예컨대 하이델베르크 대학 교수인 카를 뢰비트(Karl Löwith)는 초인-예언자의 저술들은 특정한 것들이 가능하게 되는 정신적인 분위기를 형성했다고 설명했다. 또 니체의 작품들이 나치 정권동안 대량으로 발간 돼 대중들에게 보급된 것은 “결코 단순한 우연”이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불충한대로 이에 대해 설명하면, 니체는 뛰어나고 영웅적인 사람들로 이뤄진 정예집단이 지배권을 행사하는 그런 사회질서를 옹호했다. 이곳에서 지배계급은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서 천민들, 약한 자들과 비참한 자들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악용해도 괜찮다.

물론 이런 압축적인 말로써 니체의 사유가 다 드러났다고는 할 수 없다. 역사적으로 보면, 그는 생철학生哲學의 창안자중 한 사람이다. 훗날 “실존주의”가 생철학에서 발전돼 나온다. 그의 스승인 아르투어 쇼펜하우어가 그랬듯이, 그는 인간을 특징짓는 원리는 (이성이 아니고) 의지라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니체는 비관론적이었던 그의 선행자와는 달리, 위력적인 생명력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는 오히려 “권력에의 의지”, 넓은 의미에서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의지를 예찬했다. 그 의지를 통해서 인간은 참된 인간, 초인으로 올라서게 된다는 이유에서이다.

그의 사유는 세속적 행복의 증대를 또는 좀 더 낫게 얘기하면, 생명감의 고양을 의도했다. 그의 철학은 소수의 강자들, 용기와 활력, 확고한 실천력을 갖고 태어난 사람들의 행복만을 염두에 둔다. 그리고 니체에 따르면, 누구보다도 나폴레옹이나 희랍의 장군 알키비아데스(Alkibiades, BC 450~404)같은 정복자 유형의 사람들이 그러한 강자들에 속한다.

이런 입장은 필연적으로 그를 이웃사랑(“노예의 도덕”)의 이념을 가진 기독교를 그리고 당연하게도 당시 대중 속에 파고들기 시작하던 사회주의를 경멸하게 만들었다. 약자들, 열등한 자들이 조직화 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서 소수의 강자들보다 강력한 힘을 갖게 될 수 있다는 것은 그의 철학에 극단적으로 배치됐기 때문이었다. 이밖에도 니체는 또 사회주의 운동이 그가 보기에 살아 있는 것의 본질인, 인간의 인간에 대한 착취를 종식시킬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그는 착취란 세력 추구, 권력에의 의지로부터 나오는 피할 수 없는 결과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같은 그의 견해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좌파 사상가들 또한 니체를 숙고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예컨대 베오그라드의 유명한 철학 잡지인 「실천(Praxis)」의 동인同人인 단코 그리에(Danko Grlie)같은 이는 “우리에게 그는 창조적 인간의 공표자란 점에서 중요하다.”라고 서술했다. 또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주도적 사상가인 막스 호르크하이머(Max Horkheimer)는 나아가 어쩌면 니체가 마르크스보다도 더 위대한 사상가가 아니었을까 하고 진지하게 고려보기도 했다. 니체가 더 위대한 문명비평가임은 확실하다. 그는 동시대의 어느 누구보다도 예민하게 그 사이 대중사회가 처한 위험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미국의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는 “자기의 천재성 때문에 그렇게 혹독한 대가를 치른 예는 드물다.”고 적고 있다. 니체는 지금까지도 좀 더 상세한 것이 알려지지 않고 있는 두통으로 고통을 겪었다. 극심한 편두통이 수반된 두통은 결국에는 그를 정신착란에 빠지게 했다. 그의 극단적인 자기 과대평가 성향도 아마 이 여기서 기인했을 것이다.

“나는 다이너마이트다. … 나는 불길한 인간이다.” 또 이렇게도 말했다. “언젠가 내 이름에서는 어떤 섬뜩함, 일찍이 이 세상에 없었던 어떤 위기가 연상되게 될 것이다. … (나에 의해) 진리가 수천 년간의 거짓과 싸우게 될 때, 사람들은 꿈에도 생각해보지 못한 동요, 지진의 진동, 산과 골짜기의 뒤바꿈을 겪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나로부터 지상에는 비로소 위대한 정치가 존재하게 된다.” 그는 『우상들의 황혼(Götzendammerung)』이란 작품에 이런 부제를 붙였다. ‘망치를 가지고 철학을 하는 법’

한 조사의 추정치에 따르면, 종교개혁(1517년)부터 1900년 사이에 생존했던 독일 작가들 중 약 4분의 1이 개신교 목사 집안 출신이다. 니체 또한 이 중 한 사람이다. 그는 1844년 10월 15일 작센 지방의 뢰켄(Röcken)이란 곳에서 태어난다. 진지하고 겸손했던 그의 아버지는 마을의 목사였다. 역시 목사의 딸이었던 젊고 경건한 어머니 프란치스카는 니체 아래로 2명의 아이를 더 낳는다. 니체가 훗날 한편으론 그녀의 참을성 때문에, 다른 한편으론 그녀가 입에서 내뱉는 독설 때문에 ‘라마’라고 부르던 엘리자베스와 태어나 불과 2년을 살다 죽은 요셉이다.

니체가 성장기를 보낸 목사관사에는 부모와 형제들 외에도 두 분의 고모와 성실하고 목가적인 생활의 분위기를 주도하던 할머니가 함께 살았다. 1849년 아버지가 뇌연화증 혹은 뇌종양으로 죽자, 소년 니체는 완전히 할머니의 엄격한 감독 아래 놓인다.

니체가 어른이 된 후 여자들에 대해 분열적 태도를 보이게 된 데는 어쩌면 엄격한 할머니에게도 책임이 있을 것이다. 그는 여자를 욕구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는 지나친 두려움으로 확실한 애인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다. 이에 비해 그는 자기의 작품들 속에서는 훨씬 더 자주 여자에 대한 남자의 지배를 예찬한다. “남자들의 행복은 ‘나는 원한다’이고 여자들의 행복은 ‘그가 원한다’이다.”

1850년 니체가家의 여자들은 나움부르크(Naumburg)로 이사를 하고 그곳 철도운송업자 오토의 집 뒷방들을 빌려 거처한다. 방들은 침침하다. 이것은 근시인 니체에겐 좋지 않은 환경이다. 게다가 아마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을 두통이 심해진다.

니체는 일곱 살이 돼 시립 남자 초등학교에 들어가는데 그때 이미 읽고 쓰는 법을 익힌 상태다. 그는 힘겹게 학교생활에 적응한다. 동료들은 너무나 난폭하였고 교칙은 그에겐 너무나 엄격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모든 규칙들을 위반함이 없이, 오히려 지나칠 정도로 세심하게 행동하였다. 한번은 소나기로 귀가하던 학생들이 모두 황급히 뛰기 시작하였는데, 그는 자세를 흩트리는 법 없이 계속 예의바른 태도로 걸어갔다. 귀가하는 중에는 뛰고 달리는 것을 금하는 규정이 학교 교칙에 들어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음악을 매우 좋아한 그는 피아노 교습을 받기도 하고 여덟 살 때는 그의 첫 음악 노트를 만들기도 한다. 또 김나지움(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헨델의 메시아 공연을 보고 작곡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실제로 그는 사후 약 70곡을 유작遺作으로 남겼지만 전문가들은 이 중 불과 몇 곡만을 가치가 있는 작품이라고 평가한다. 그러나 훗날 니체는 음악의 철학자로서 그를 앞선 모든 사상가들을 능가한다.

괴테의 작품들은 그에게 시인이 되겠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열 살 때 이미 습작시를 쓰고 열네 살 때는 자기의 생각과 관찰들을 일기장에 정리하기 시작한다.

성당 부속의 김나지움을 4년간 다닌 후, 그는 1858년 장학금을 받고서 나움부르크 부근에 있는 왕실 국립학교 포르타(Pforta, ‘슐포르타Schulpforta’)로 옮긴다. 이 인문계 학교는 유명한 곳인데, 무엇보다도 학교 담장 안을 지배하고 있던 가혹할 정도로 엄격한 규율 때문이다.

훗날 니체는 정해진 일정에 일률적으로 따라야 하는 김나지움 시절의 강압을 생각할 때면 몸서리를 쳤다. 그는 향수병에 걸렸고, 무엇보다 우선 그에게는 친구가 없었다. 그는 집을 그리워하며 방학이 오기를 고대한다. 상급반에 진학하면서 성적이 다소 떨어지지만 그래도 그는, 흔히 가장 열심히 노력한 학생이 1등을 품행이 좋은 학생이 2등을 특출한 학생이 3등을 하듯이, 3등의 자리를 유지한다.

그는 슐포르타에서 6년간 머물렀다. 갑자기 엄습하곤 하던 두통은 더욱 빈번하게 일어나고 고통도 더욱 심해져, 이제 식이요법을 해야 되고 심지어 치료를 위해 귀가 조치되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그를 치료하던 의사는 깊이 응시하는 눈이 인상적인, 작달막하고 다혈질적인 사람이라고 그에 관해 적고 있다. 니체는 자기 병이 뇌질환이지 않을까 겁낸다.

그가 두각을 나타낸 과목은 라틴어, 희랍어, 히브리어 등 고대어이다. 반면에 영어와 프랑스어는 나중에 어른이 돼서도 사전 없이는 완전하게 해석하지 못했다.

그는 아이스킬로스와 소포클레스 등 고대 작가들을 연구하고 희곡 “오이디푸스”에 관한 작품 해설을 쓰기도 한다. 특히 기원전 5세기의 시인인 메가라의 테오그니스(Theognis)가 깊은 감명을 준다. 이 시인은 귀족주의적 성향 때문에 시민들에 의해 희랍에서 추방됐던 인물이다. 독일 시인으로는 그는 프리드리히 횔덜린(Friedrich Hölderlin)을 가장 좋아하였다. 그의 시들은 가장 순수하고 다감한 심정에서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나움부르크에서 그는 다른 두 명의 동료와 함께 ‘게르마니아’란 오만한 이름을 가진 문학과 음악 동아리를 결성하게 된다. 세 사람은 한 음악잡지를 정기 구독했는데, 여기에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란 작곡가 이름이 등장한다. 니체는 전혀 무비판적으로 이 음악가에게 빠져 든다. 그는 바그너와 곧 사귀게 되지만, 한 차례 질풍 같은 우정의 격정이 지나자, 그를 비판하며 적대적으로 돌아선다.

1861년 김나지움 학생인 니체는 견진성사를 받는다. 이 무렵 그는 사유의 발전에 결정적으로 작용하는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한다. 기독교가 사변의 학문이란 점이다. 신의 실재도, 영혼의 불멸성도 확고하게 증명될 수 없고, 성경이 말하는 기적이란 더 더욱 입증될 수 없다. 하지만 이같은 인식이 그를 위태롭게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믿음으로부터의 그의 이탈(‘해방’)은 천천히 그리고 어떤 내적인 소동도 없이 진행된다.

김나지움을 졸업하고(1864) 처음에는 어머니의 바람에 따라 본(Bonn) 대학의 신학과에 입학하여 두 학기를 보냈다. 그 후 그는 라이프치히 대학 고대 언어학과로 옮긴다. 이곳에서 고대 언어 말고도 예술, 정치, 신학 등에 관한 강의를 수강한다. 고대 세계에 대한 사유와 감성으로 향한 그의 재능은 특히 스승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리츨(Friedrich Wilhelm Ritschl)의 눈에 띤다. 그렇지만 고대 언어 연구가 유독 니체를 사로잡은 것은 아니다. 신학과 음악에 대해 훨씬 더 많은 관심을 보인다.

그는 폭넓게 대학생활을 즐겨보려 여러 번 노력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어쩌면 혼자 소외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학생조합에도 가입하고 심지어는 해학신문의 동인으로 참가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얼마 못가서 동료들과의 술자리는 그를 역겹게 만든다. 거기다 술자리에 계속 낄만한 돈도 그에겐 없다.

1865년 니체는 혼자서 쾰른으로 여행을 떠났다. 쾰른에서, 친구 파울 도이센(Paul Deussen)이 주장하는 것처럼, 사창가에 빠져 든다.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난 지는 완전하게 밝혀지지는 않지만, 도이센은 니체가 평생 여자와 성관계를 갖지 않았으리라고는 절대 믿지 않는다. 이 단정은 당시 학생들 사이에서 널리 퍼져 있던 농담과 연관돼 있다. 열아홉 살의 젊은이가 그때(아니면 그 후 라이프치히의 한 친구 집에서) ‘프랑스병’ 즉 매독에 걸렸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전염론’은 그 사이 신뢰성을 잃었다. 그보다는 다소 신경과민이었던 니체가 무분별하게 마취제, 특히 심각한 마약을 자주 삼켰고 이는 1889년 그의 정신적 붕괴로 이르게 되었다는 주장이 더 그럴 듯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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