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괴츠만의 《금융의 역사》 (위대선 역, 지식의 날개, 2019)
(1) 은광과 아테네의 번영
윌리엄 괴츠만의 금융사 책은 우리말로는 ‘금융의 역사’라는 제목을 달고 출간되었지만 원제는 ‘Money Changes Everything’이다. 돈이 모든 것을 바꾼다는 의미일 텐데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도 돈이 모든 것을 바꿀 수 있을 정도로 막강하다는 데에 동의할 것이다. 그래서인지 ‘돈이 도道보다 더 높은 자리에 있다’는 농담도 있을 정도이다. 저자는 미국 예일 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금융사를 강의하는 금융사 전문가라고 한다. 그가 지은 이 책은 금융의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가진 일반인들을 위한 금융사 교과서라고 할 만한 책으로 금융의 역사를 두루 다루고 있다. 인류 역사에서 금융이라는 것이 어떻게 발전해 왔고 또 어떤 역할을 하였는지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추천할 만한 좋은 책이다. 한국어판에서는 ‘문명을 꽃피운 5천년의 기술’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지만 영어로는 ‘금융은 어떻게 문명을 가능하게 하였는가(How Finance Made Civilization Possible)’로 되어 있다. 영어 부제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금융은 문명을 발전시킨 필수적 요소였다고 저자는 본다.
물론 금융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금융이 자본주의 시스템을 좌우할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또 금융을 통해 막대한 불로소득을 얻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금융에 대해 적대적인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도 있다. 특히 좌파들은 금융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가진 경우가 많다. 자본주의가 겪은 여러 심각한 위기들도 금융 때문에 일어난 경우가 적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그러한 태도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물에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섞여 있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증권투기는 부정적인 것이지만 증권시장의 원활한 작동을 위해서는 그러한 투기행위를 일정 부분 용납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을 편견 없이 모두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본서의 저자는 금융의 역사가로서 금융의 부정적인 면이 있는 것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본서는 치우치지 않은 책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4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는 수메르 문명으로부터 고대 그리스, 로마의 금융제도를 다루고 있다. 제2부는 중국에 할애되어 있는데 저자는 동서양의 비교에서 중국을 동양의 대표적 사례로 생각하는 듯하다. 저자 스스로 고백하듯이 저자는 중국에 관심이 많다. 제3부는 자본주의를 낳은 중세와 근대 유럽의 금융사를 다룬다. 마지막 제4부는 19세기와 20세기 국제금융시장의 출현을 다룬다. 필자에게는 이 책의 전반부인 제1부와 제2부가 특히 재미있었다. 괴츠만 교수는 학부에서 전공이 미술사와 고고학이라서 고대사에 더 조예가 깊어서 그런 것일까?
수메르문명은 현재까지 밝혀진 바로는 문자를 가장 먼저 만든 문명이다. 수메르의 설형문자로 기록된 점토판들이 수십 만 점 이상 발굴되었는데 그 가운데 상거래 기록이 많으며 금융계약을 담은 기록들도 더러 보인다. 수메르인들은 금과 은을 화폐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는 무게를 달아 사용하는 칭량화폐라고 할 수 있고 균일한 형상과 무게를 가진 주화와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역사가들에 의하면 금화와 은화 같은 주화는 BCE 6세기 경 아나톨리아 반도에 있던 나라들에서 처음으로 주조되었다. 귀금속이 주화로 대량 변신하게 되면 화폐량은 크게 늘어 상거래를 촉진하게 된다. 한마디로 경제발전을 자극하게 된다는 것인데 고대 그리스·로마 문명은 이러한 주화를 사용하여 그로부터 큰 혜택을 본 문명이다.
아테네는 그리스 도시국가들 가운데 가장 크고 번영한 나라로 발전하였는데 고대 그리스의 유명한 학자들과 예술가들은 아테네 출신이거나 타지역 출신이지만 아테네에 와서 활동한 사람들이었다. 아테네가 그리스의 주도적인 국가로 부상하는 데에는 은광의 발견이 큰 역할을 하였다. 아테네에서 수십 킬로미터 남동쪽에 위치한 라우리온 광산은 청동기 시대부터 채굴되었던 광산이지만 6세기 중반 아테네 지도자 페이시스트라토스 때부터 풍부한 광맥이 발견되어 많은 양의 은을 채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채굴된 은은 대부분 은화로 주조되어 아테네의 많은 개인들과 더 나아가 국가에 부를 안겨다 주었다. 아테네의 은화는 그리스 세계 뿐 아니라 흑해 연안과 지중해 전역에서 환영을 받았다. 지금도 올빼미가 새겨진 드라크마화가 많이 남아 있는데 올빼미는 아테네의 수호신인 아테네 여신을 상징하는 새이다. 드라크마는 하루 일당에 해당되는 액수인데 무역에서 많이 사용되었던 4드라크마화 같은 경우 무려 1억 2,000만 개나 주조되었다고 한다. 드라크마를 일당 10만원으로 잡으면 그 액수는 무려 48조원에 달한다.
아테네에서는 국가가 라우리온 광산을 직접 경영하지는 않았다. 국가가 채굴권을 개인들에게 팔고 또 채굴된 은의 1/24을 채굴세로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채굴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앞에서 은이 화폐로 변신하여 거래의 도구로서 경제를 촉진하는 효과였다. 경제학에서는 이를 ‘승수효과(multiplier effect)’라고 하는데 화폐가 손에서 손으로 넘어가며 투입된 화폐액의 몇 배에 해당하는 거래를 일으킨다고 해서 그렇게 불린다.
저자는 이 라우리온 광산의 운영에 대해서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라우리온 광산 채굴권의 매각과 인허가를 담당하는 기관이 있었는데 이를 ‘파는 사람’이라는 뜻의 ‘폴레타이’라고 불렀다. 아테네를 구성하는 열 개 부족 대표 10명으로 이루어진 위원회로서 이 기관의 청사인 ‘폴레테이온’은 아테네의 중심지인 아고라에 있었다. 2004년에 고고학자들이 그 건물을 발굴하였을 때 4드라크마 은화가 400개 넘게 발견되었다고 한다.
아테네 시민들은 개인적으로 사업을 벌이기도 하였지만 조합을 결성하여 채굴권을 매입하고 채굴을 한 경우가 많았다. 노동력으로는 노예를 투입하였다. 채굴지의 상태가 미탐사지인지 이미 광산으로 개발된 곳인지에 따라 채굴권의 가격은 다양하게 책정되었다. 채굴에 뛰어든 조합이나 개인들은 자금을 빌려 사업을 벌이는 경우가 많았다. 기대와는 달리 은이 많이 나오지 않으면 대출금도 갚지 못하고 또 채굴권을 빌린 경우는 그 대여료도 갚지 못하는 일이 벌어지곤 하였다. 그런 경우에는 채권자와 채무자 사이의 소송이 일어나게 되는데 아테네의 법률가들에게 좋은 수입거리를 제공하였다. BCE 4세기 후반 흥기하는 마케도니아 왕국의 압력에 대항하여 아테네의 자유 수호를 외친 정치가 데모스테네스도 법률가로서 이러한 소송에 더러 관여하였던 것 같다. 그가 관여한 소송사건 가운데서 가장 복잡한 소송이 은광 채굴권 대여 소송이었다고 한다.
아테네에는 법원이 우리나라처럼 전문적인 법관으로 구성되지 않았다. 시민들 가운데서 추첨으로 뽑힌 수백 명의 배심원들로 이루어진 시민법정이었는데 배심원들은 원고와 피고 양측으로부터 변론을 듣고 표결로 판결을 내렸다. 소크라테스도 이러한 시민배심원단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아 처형되었다. 그의 제자인 플라톤 같은 사람에게는 이성적인 판단 능력이 떨어져 선동에 좌우되기 쉬운 일반 시민들로 구성된 법정이 좋게 보일 리 없었다. 소크라테스 재판처럼 정치적인 재판에서는 플라톤의 염려가 타당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와 사상과는 무관한 금융사건에 관해서는 그렇게 말하기는 힘들 것이다. 괴츠만 교수에 의하면 당시 아테네인들의 소송사건에 대한 기록을 보면 상당히 복잡한 계약을 담은 내용이 많은데 배심원들은 금융쟁점에 대해 놀라울 정도의 이해력을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에 아테네는 국제무역의 중심지이기도 하였다. 흑해연안 지역에서 생산된 곡물도 다량 수입하고 올리브유나 포도주를 항아리에 담아 지중해 여러 지역에 수출하였다.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으로 항해를 하여 거래를 하는 데에는 많은 위험이 뒤따랐던 것은 물론이다. 국가가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은 이러한 모험에 가까운 사업에 금융이 뒷받침되지 않았더라면 거래는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주화가 아나톨리아에서 처음 주조된 지 몇 십 년 되지 않아 그리스 도시국가들도 대거 주화제도를 도입하였다. 아테네 역시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은화를 다량으로 주조하여 경제적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이러한 경제적 번영은 아테네에서 민주주의의 발전을 촉진하였다. 은광개발로 인해 재정이 풍부해진 국가가 시민들에게 돈을 뿌림으로써 시민들이 민회나 법원 및 여러 관직에도 참여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예전에는 돈 많은 귀족들이나 정치에 관여할 수 있었지만 국가가 주는 관직 수당, 민회 참석 수당, 배심원 수당 등 갖가지 수당들로 인해 일반 민중들의 정치참여가 가능해진 것이다. 시민들의 인기에 영합하는 사람들은 그 외에도 다양한 명목으로 시민들에게 돈을 뿌리려고 하였는데 국가에서 여는 제전祭典에서 연극을 관람하는 사람에게도 수당이 주어졌다고 한다. 이 단계의 아테네는 상당한 복지국가가 아닐 수 없다. 아테네 민중들은 이런 국가를 자신들의 것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아테네 민중들(데모스)은 국가가 자신들의 것이며 국가의 운영을 좌우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스사를 연구했던 필자의 대학 스승님은 고대 아테네는 주식회사와 비슷했다고 말씀하셨는데 국고에 들어온 돈을 회사가 주주에게 배당금 지급하듯 시민들에게 나눠주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아테네는 페르시아의 침공위협에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동맹을 조직하고 동맹국들이 함선을 내거나 돈을 내도록 하였다. 그렇게 모인 기금을 델로스 섬에 두었기 때문에 역사가들은 이 안보동맹을 ‘델로스동맹’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그리스 세계의 패권을 장악한 아테네는 동맹의 본부와 기금을 아테네로 이전하고 동맹의 이해와는 무관한 용도에 기금을 전용하였다. 아크로폴리스의 아테나 여신 신전도 이 돈으로 짓고 시민들에게 뿌린 관극수당도 여기서 나왔다고 한다. 아테네는 기금전용에 불만을 표시하고 동맹에서의 탈퇴를 주장하는 동맹국 정치가들을 잡아와 재판에 회부하기도 하였는데 물론 그들을 재판한 사람들은 그 기금전용으로 혜택을 누린 아테네 시민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