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별을 향해 가는 것, 오직 그것뿐!” -마르틴 하이데거
2. 후설과의 만남
하이데거 가족의 생활 형편은 흔히 “몹시 곤궁한 편”이란 완곡한 말로 애매하게 표현되고는 한다. 바로크양식의 성 마르틴 성당에서 보잘 것 없는 수입이 달린 관리인으로 일한 아버지는 때론 벌이삼아 술 창고지기를 겸하기도 하였다.
여섯 살 때 초등학교에 입학한 하이데거는 곧 최우수학생으로서 두각을 나타낸다. 4년 후 이러한 총명함 때문에, 또 아들이 교회 지기나 술 창고지기보다는 더 나은 삶을 살기를 바라는 바람에서 부모는 그를, 오늘날 그의 이름을 따 불리고 있는 메스키르히 시립 중등학교에 보낸다.
하이데거가 콘스탄츠에 있는 김나지움(1903)에 그리고 나중엔 프라이부르크의 김나지움에 진학할 수 있게 된 데는 일종의 사전 거래 덕분이다. 교회가 재능 있는 소년에게 김나지움 졸업 후에 성직자가 되기 위한 공부를 해야 한다는 조건으로 장학금 지급을 약속한 것이다.
하이데거가 정말로 성직자로서의 소명감을 느끼고 있는지, 아니면 단순히 대학에 진학할 생각으로 제안을 받아들인 것인지는 명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어쨌든 그가 펠트키르히/포알베르크(Feldkirch/Vorarlberg)에 있는 예수회 신학교에 머문 것은 불과 수주일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 후 프라이부르크 대학으로 옮겨 그곳에서, 역시 장학금 때문에, 신학을 공부한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철학을 함께 공부하고 있을 때다. 1911년 그는 마침내 신학을 포기하고, 그때부터 철학, 수학, 정신과학 등의 학과목들을 수강한다.
그러나 하이데거 자신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1907년에 이미 철학에 달려들려는 섣부른 시도를 했다. 이때 그에게 “칼”과 “창”이 돼 준 것은, 시인 클레멘스 폰 브렌타노(Clemens von Brentano)의 친척이며 전직 신부인 철학자 프란츠 폰 브렌타노(Franz von Brentano)의 논문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존재자의 다양한 의미에 대하여』이다.
1913년 하이데거는 『심리학주의의 판단에 대한 이론』이란 제목의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는다. 여기서 심리학주의란 말은 논리학의 근원은, 비록 그렇게 주장되고 있다 할지라도, 우리 마음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다고 여기는 입장을 가리킨다. 보다 분명하게 말하면, 심리학주의자들은 2×2=4란 인식은 심리 행위에서 기인한다고 말한다. 반면 예를 들어 관념론적 철학자들의 경우는 2×2는, 설사 그 값을 계산하고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 하더라도, 역시 4라는 입장을 취한다. 곧 전자는 논리학과 그 법칙들을 오직 인간 의식에 귀속시키는 반면, 후자는 논리학을 관념적인 것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에서 심리학주의를 비판한 청년 하이데거 또한 후자에 속한다.
1914년 전쟁[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하이데거는 일단은 군대에 징집된다. 그러나 그의 자그마한 신체(약 160센티의 신장)는 힘든 훈련을 감당하지 못했다. 한 차례의 심장발작이 있고 난 후 그는 잠정적인 것이기는 했으나 군복무 부적격 판정을 받는다.
프라이부르크로 다시 돌아 온 그는 중세의 프란체스코회의 수도사이자 철학자인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 1266~1308)를 주제로 한 교수자격 취득 논문을 완성한다. 머리가 비상하게 탁월한 이 스코틀랜드인은 분명 마르틴 하이데거를 이끈 길잡이 중 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명민한 박사(doctor subtilis)”라고 불렸던 그의 근본 믿음 중 하나는 앎의 목적은 존재의 인식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젊은 강사[하이데거]는 생존하는 한 철학자에게서 보다 강한 매력을 느낀다. 세기말 무렵에『논리연구(Logische Untersuchungen)』를 출간했던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 1859~1938)이다. 하이데거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후설의 작품에 압도당한 나머지 나는 그 이후에도 날 붙드는 힘이 과연 무엇인지 충분하게 깨닫지도 못한 상태에서 되풀이해서 읽고는 했다. 책에서 나오는 매력은 활자가 찍힌 지면과 표지 등 외적인 것들에게까지 뻗쳐 있었다.”
『논리연구』의 둘째 권에 붙여진 부제에는 하이데거 사유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한 개념이 등장하는데, “현상학(Phänomenologie)”이다. ‘현상학’이란 말을 처음 접하면서 하이데거는 “낯설고 그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정도는 보잘 것 없고 확실하지 않는 명칭”이라고 느낀다. 쉽게 표현하면, 현상학이란 지각하게 하고, 기억하게 하고, 판단하게 하고, 기대하게 하는 의식이 어떻게 작용하는 지, 다시 말해 사물의 나타남들(현상들)이 의식에 의해 어떻게 인식에로 이르게 되는지 기술하는 학문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내가 한 나무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고 하자. 이때 내 의식에 의해 결합된 나무의 많은 측면들 또는 관점들을 지각하게 된다. 곧 나의 의식은 나무의 새로운 관점들을 지각할 때마다 또 다른 나무를 문제 삼는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막아주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의식은 내가 모든 나타남들에서 언제나 오직 한 나무만을 지각하도록 해준다. 현상학은 곧 그러한 의식의 이행 과정을 설명하고자 한다.
1915년 하이데거는 국민군에 동원된다. 군사우편물들을 검열해야 하는 감독부서에 배치된다. 기근의 고통을 겪고 있는 후방 주민들이 전방의 군인들의 사기를 떨어뜨릴 만한 편지를 써 보내지 못하도록 하자는 게 이러한 기이한 제도가 생기게 된 배경이다.
근무 시간이 아침 7시에서 오후 5시까지인 탓에 콧수염이 있는 강사는 부득이 자기 강의 시간을 저녁으로 옮긴다. 엘프리데 페트리(Elfriede Petri)란 빼어난 미인도 그의 강의를 듣는 학생 중 한 사람이다. 그녀에게 반한 하이데거는 짧은 연애 기간 끝에 그녀와 결혼한다. 하이데거 부인은 남편이 온전히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인다. 남편의 하루 일과를 조정하고, 성가신 방문객들이 남편을 방해하지 않도록 하고, 또 기름기 없는 고기와 과일 같은 건강에 좋은 음식들로 식단을 꾸민다. 물은 늘 집 근처의 우물에서 길어 온다. 우물물이 수돗물보다 맑고 신선한 때문이다. 그녀는 1919년과 1920년에 두 아들을 낳는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 다시 한 번 전방근무의 적격여부를 심사받는데 하이데거는 합격 판정을 받는다. 수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처음에는 훈련병으로 베를린의 ‘전방기상대’로 파견되고, 그곳에서 훈련을 마친 후에는 프랑스의 베르됭(Verdun)이란 곳에 배치된다. 그곳은 일 년 전 세계사에 남을 참혹한 유혈전투가 벌여졌던 곳이다. 1918년 12월 전쟁포로로 붙잡히는 화를 면한 채 무사히 프라이부르크로 살아 돌아온 그는 곧바로 자기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 밑에서 조교로 일하게 된다. 에드문트 후설의 조교가 된 것이다.
이 시기에 하이데거는 많은 양의 책을,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들을 읽는다. 그밖에도 빌헬름 딜타이(Wilhelm Dilthey, 1833~1911)나 하인리히 리케르트(Heinrich Rickert, 1863~1936) 등 같은 시대 철학자들의 작품들에도 몰두한다. 딜타이가 그의 주목을 끈 이유는 자연과학과 정신과학에 있어서 인식 방식의 차이를 발견한 때문이다. 딜타이가 보기에, 자연과학의 방법이란 설명하는(어떤 것을 다른 것으로부터 이끌어 내는) 것이며 정신과학의 방법은 의미연관들을 다루는 까닭에 이해하는 것이다.
반면 유명한 바덴학파의 창시자 중 한 사람이며 임마누엘 칸트의 인식론을 이어받아 발전시킨(신칸트주의) 리케르트는 탁월한 인식이론가로서 하이데거의 관심을 사로잡는다. 이러한 사상가들과의 대결 속에서 하이데거는 자신의 길을 모색한다.
철학자 한스 게오르그 가다머와 같은 목격자들은 이때 이미 젊은 학자[하이데거]에게는 수많은 학생들에게 마치 “흥분제”와도 같은 구실을 한 매혹적인 힘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대개 이른 아침에 열리는 그의 강의 때면 사람들의 눈들이 커졌다. “분명 아리스토텔레스가 밀고 들어왔으며, 응집된 짙고 어두운 문장의 구름들과 그로부터 번쩍이는 섬광들은 우리들을 반 마비 상태로 만들었다.”
하이데거의 외모에서는 학자다운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다. 그의 모습은 오히려 농부에 더 가깝고 동료들과는 딴판으로 운동선수 같은, 특히 스키선수 같은 체격을 갖고 있다. 끝이 뾰족한 모자를 쓰고 죔쇠가 있는 구두를 신은 채 슈바르츠발트를 이리저리 돌아다니기도 하고, 토트나우베르크의 오두막 앞에서 불을 피우며 “밤의 불길 옆에서 깨어 있음”이라든가 “오두막 주위에 바람이 사나워지고 눈이 흩날릴 때 철학자의 시간이 온다.” 등과 같은 말을 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