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을 되돌아본다

동학은 1860년 경주 사람 수운 최제우가 상제님의 말씀을 듣는 종교적 체험으로부터 탄생하였다. 상제님의 말씀은 일년 이상 계속되었다. 상제님은 당신이 내리는 영부와 주문으로 사람들을 질병에서 건져내고 사람들을 가르치라고 하였다. 수운은 이 가르침을 받들어 동학을 세우고 포교를 하기 시작하였다.

동학은 조선을 오랫동안 지배한 유학과는 다른 가르침을 펼쳤다. 무엇보다 하느님을 지극히 위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내린 성품이 인간에게 있으니 그것을 지키고 닦으며 또 하느님의 가르침을 받들어 주문을 읽고 수행을 하라고 하였다. 추상적인 하늘은 믿어도 인격신을 이야기하지 않는 유교와는 달리 동학은 수운에게 명을 내린 인격신 상제님을 믿었다. 또 현 세상이 그 운수를 다하였으니 조만간 새로운 좋은 세상이 도래할 것이라고 가르쳤다.

유학과는 다른 가르침을 편 동학은 조선의 민중에게 큰 호소력을 발휘하였다. 무엇보다 동학은 신분에 관계없이 사람들을 대우하였는데 이는 조선 사회의 근간이 되는 양반 중심의 신분질서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물론 교주인 수운 최제우가 조선을 뒤집어엎고 새로운 국가를 세우려는 혁명운동을 벌이거나 그러한 운동을 선동한 것은 아니다. 아마도 신분질서를 거부하는 동학의 평등 지향성이 동학의 성장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동학 교세의 폭발적 성장에 놀란 조선 정부는 ‘잘못된 도로써 정치를 문란하게 만들고 백성들을 선동하였다’고 하여 수운을 잡아 처형하고 동학을 불법화하였다. 그러나 조선 정부의 바람과는 달리 동학은 사라지지 않았다. 교주의 처형과 함께 지하로 들어간 동학은 점조직의 형태로 공부하고 수련하는 모임을 유지하여 수년 뒤에는 차츰 교세를 회복해 나갔다. 교세회복과 함께 새로 입도한 자들 가운데에는 개인적 수련과 공부에 그치지 않고 동학을 조선 사회를 정치적으로 변화시키는 데 이용하려는 혁신파들이 적지 않았다.

혁신파들은 교주인 최제우가 억울하게 처형되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명예회복 즉 신원伸冤을 정부에 요구하자고 주장하였다. 1865년 수운 최제우가 처형된 지 불과 몇 년 지나지 않은 1871년 이필제를 주모자로 한 일부 동학교도들의 반란이 경상도 문경 일대에서 일어났다. 이들은 지방 관아를 습격하여 그곳의 무기고를 털어 무장을 한 후 서울로 진격할 계획을 세웠다. 무장혁명을 획책한 것이다. 그러나 참여자 수가 미미하여 수백 명이 거사에 가담하는 것으로 그쳐 반란은 간단히 진압되었다.

그로부터 21년 뒤인 1892년 동학은 대규모 교조신원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그 동안 동학은 크게 변모하였다. 경전도 몇 차례에 걸쳐 간행하여 배포하였으며 교인들의 수는 수만 명으로 늘어났다. 동학의 혁신파들은 2대 교주인 해월 최시형에게 교조의 신원을 구실로 한 대규모 시위를 벌일 것을 강하게 요구하였다. 당시 일부 지역에서 동학교도들에 대한 당국의 탄압이 지나칠 정도로 가혹하였기 때문에 동학을 합법화하기 위해서는 교조신원이 선결과제의 하나였다. 해월도 그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다.

1892년 동학교도들이 공주로 몰려가 충청감사에게 올린 문서에서는 교조신원과 감옥에 갇힌 동학도들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여기에는 신원운동과는 무관한 외세 배격 요구도 담겼다. 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보국안민輔國安民’과 널리 백성들의 삶을 구제한다는 ‘광제창생廣濟蒼生’의 구호도 담겼는데 이는 동학이 이제 단순한 종교운동에 그치지 않고 사회·정치 운동의 성격을 띠기 시작하였음을 보여준다. 혁신파들의 영향이 만만치 않았음을 드러내주는데 1890년 전후 호남 지역에서 입도한 사람들 가운데 이러한 혁신파에 속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공주에서의 신원요구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자 한 달 뒤에는 전라도 삼례에서 집회가 열렸다. 2년 후 갑오년 동학혁명군의 대장 역할을 하게 되는 전봉준이 이 집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전라감사에게 제출된 요구를 정부에서 다시 거부하자 동학도들은 다음해 정월에는 궁궐 정문인 광화문 앞에서 시위를 하였다. 동학도들은 연이어 충청도 보은과 전라도 삼례, 원평에서 군중집회를 열었다. 그리고 일본세력 배척, 민씨 정권 타도, 조세제도 개혁 등을 요구하였다.

1893년 3월의 이러한 대규모 집회를 정부는 군대를 동원하여 해산하려고 하였다. 동학도들은 정부의 위협에 굴복하여 해산하였지만 내부적으로 조직을 결속, 강화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여러 지역에 포소包所와 도소都所를 정하고 그 우두머리인 접주를 임명하였다.

1894년 갑오년의 동학혁명은 고부군수 조병갑의 농민 수탈에 대한 항의로 시작되었지만 이는 동학혁명의 근본 원인은 아니다. 전봉준을 비롯한 호남의 접주들이 주동이 되어 민란을 기회로 조선 사회의 변혁을 위한 민중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1894년 3월 20일 전봉준과 손화중을 따르는 동학도들이 전라도 무장戊長에서 공식적으로 무장봉기武裝蜂起를 선언하였다.

동학도들의 무장봉기를 관군이 진압하지 못하자 조선 정부는 청나라에 군대파견을 요청하였다. 청나라가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자 이를 따라 일본도 1884년 임오군란 후에 청일 간에 맺어진 텐진조약을 구실로 조선에 파병하여 서울로 진격하여 경복궁을 장악하고 친일파 내각을 구성하였다. 일본군은 연이어 청나라 군대를 공격하여 한 달 반 사이에 청군을 조선에서 몰아내었다. 그리고 조선 관군과 함께 동학군을 진압하였다. 1894년의 동학혁명은 그 해를 넘기지 못하고 외세의 개입으로 끝나버렸다. 봉기를 주도한 동학 접주들은 체포되어 처형되고 교주 최시형은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

최시형은 1898년 결국 체포되어 처형되고 이후 동학의 주도권은 최시형을 가까이서 모시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의암 손병희(1861-1922)에게 넘어갔다. 당국의 추적을 피해 일본으로 망명한 의암은 일본이 이룩한 근대문명을 목도하였다. 그는 일본에서 동학이 근대문명을 받아들여 조선사회의 발전에 앞장서야 한다는 쪽으로 생각을 바꾸고 자신과 함께 망명생활을 하던 동학간부 이용구(1868-1912)로 하여금 귀국하여 동학신도들을 중심으로 조직을 만들어 문명개화운동에 나서도록 지시하였다. 그리하여 만들어진 조직이 진보회인데 회원수가 10만이 넘었다. 진보회는 전국 각지에 지부를 만들고 흑의단발 즉 의복을 서양식으로 바꾸고 상투를 자르고 머리 스타일도 서양식으로 바꿈으로써 문명개화노선을 천명하고 동시에 정부에 정치개혁을 요구하였다. 물론 진보회는 불법화된 동학의 조직이었기 때문에 진보회의 혁신운동은 정부의 탄압을 받았다.

진보회 의장 이용구는 갑오년에 동학군이 공주 우금치전투에서 패전한 후 교주 최시형을 모시고 피신하다가 관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동학의 접주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감옥에서 풀려난 뒤 일본으로 건너가 손병희와 함께 망명생활을 하였다. 러일전쟁 시기에 귀국하여 진보회를 조직, 문명개화 운동을 전개하던 그는 노골적으로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송병준과 가까워져 그의 단체인 일진회와 진보회를 하나로 통합하였다. 그리하여 진보회는 졸지에 일진회로 이름을 바꾸어 친일 행각을 벌이게 되는데 손병희가 1905년 귀국하여 동학을 갑자기 천도교로 바꾼 것은 이용구의 친일 행각에 분노하여 동학을 지키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이용구를 비롯한 일진회 간부들은 천도교에서 당연히 출교되었다.

손병희는 친일 정치행각을 벌이던 이용구 일파를 숙청하였을 뿐 아니라 동학의 교리를 현대화하는 사업도 벌였다. 그리고 종교와 병립하여 출판, 교육 등 문화 사업에도 힘을 기울이고 여성과 아동 운동에도 힘을 쏟았다. 일제하에서 천도교의 명망은 크게 높아졌으며 조선의 문화를 상당 부분 주도하게 되었다. 사회계몽을 위한 여러 잡지들을 간행하였는데 특히 문예지이자 종합교양지였던 《개벽》은 조선의 지식인 사회에서 큰 명망을 누렸다.

천도교에서 출교당한 일진회 의장 이용구는 천도교에 대립하는 시천교侍天敎를 세우고 그 교주가 되었다. 그는 최시형의 또 다른 주요 제자였던 구암 김연국(1857-1944)을 끌어들였다. 시천교는 동학의 적통을 놓고 천도교와 치열한 경쟁을 벌였는데 동학이 공식적으로 합법화되고 최제우와 최시형이 신원된 것은 시천교의 업적이라고 한다. 이용구가 러일전쟁에 협력한 대가로 일본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을 뿐 아니라 시천교 간부 송병준이 1907년 이완용 내각에 농상공부대신으로 들어가면서 교주 신원에 대한 시천교의 요구가 관철된 것이다.

1912년 이용구는 일본에서 병사하였는데 그 후 시천교는 김연국파와 송병준파로 나뉘어 대립하였다. 김연국은 1920년 자신의 신도들을 이끌고 충남 계룡산 밑 신도안으로 들어가 그곳에 집단신앙촌을 세웠다. 교단의 이름도 상제교로 개명하였다. 계룡산 밑으로 들어간 것은 사회참여와 정치계몽 활동보다는 종교적 수련을 중시하였기 때문이다. 서울에 있던 본부를 계룡산 밑으로 이전한 것은 사회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자신들의 이상세계를 세우려는 방안이었다. 상제교는 신도수가 한창 때는 20만 명이 넘었다. 그러나 교세는 해방 이후 계속 위축되어갔다. 1980년대에 정부에서 3군본부를 신도안으로 이전하는 6·20 사업을 벌였는데 그곳에 살던 상제교도들은 자신들의 터전을 정부에 넘겨주고 다른 곳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필자가 만난 그 가운데 한 사람은 한학자로서 뛰어난 서예가이기도 하신 분인데 신도안과 가까운 동네에 정착하였다. 그는 필자에게 신도안 주민들은 정부로부터 토지보상금을 제법 넉넉하게 받아 토지수용에 대한 반대는 별로 없었다고 하였다.

상제교인들이 모여 살던 곳에는 현재 육군인쇄창이 들어서 있다. 옛날 그곳이 상제교의 집단취락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리는 푯말이 하나 외롭게 남아 있다. 신도안에서 나간 이후 상제교는 내분으로 상처를 입고 본부도 이곳저곳으로 몇 번 옮겨 다녔다. 현재 본부는 충청도 청양군 낙지리라는 시골 마을에 있다. 칠갑산에서 가까운 외딴 곳에 있었는데 이렇게 외딴 곳까지 신도들이 찾아올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상제교는 김연국의 아들인 4대 교주 김덕경(1907-1985)에 의해 교명을 1961년 ‘천진교天眞敎’라고 바꾸었는데 현재 본부 입구에는 ‘동학대종원東學大宗院’이라는 현판도 함께 걸려있어 천진교가 동학의 계승자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야트막한 산 밑에 있는 작은 터전이었지만 성전 앞마당은 잔디를 깔아 아주 단정하게 보였다. 필자가 방문했을 때 마침 그곳에 치성이 있는 날이었는지 필자도 치성에 참여할 수 있었다. 물론 치성 참여자는 필자와 필자의 동료를 포함하여 열 명도 되지 않았다. 한 동안 우리 역사에서 적지 않은 역할을 하던 동학의 한 후예가 이렇게 몰락해 있다는 사실에 필자는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천진교 성전의 천단에는 수운 최제우를 ‘제세주濟世主’로, 해월 최시형은 ‘대신사大神師’로, 3대 교주 김연국은 ‘대법사大法師’로 봉안하고 있었다. 낯선 필자의 질문에 본부를 지키는 분들은 친절하게 대답을 해주었다. 심지어 몇 가지 자료도 챙겨주었는데 그 가운데에는 시천교 교리서 《시의경교是儀經敎》 순한글본도 있었다. 《시의경교》는 감옥 생활을 하던 구암이 1904년 면회 온 동학 두목들에게 한 설법을 모아 시천교에서 1915년 국한대역으로 낸 교리서인데 당시의 국문을 현대식 국문으로 바꿔놓은 것이다. 참고로 하나 덧붙이자면 동학의 초기 역사를 담고 있는 《도원기서道源記書》라는 귀중한 자료도 김연국 선생 집안에서 보관해오던 것을 1978년 세상에 공개한 것이다.

천도교는 상제교만큼 몰락한 것은 아니지만 교세가 크게 위축된 것은 매한가지다. 한국역사에서 큰 역할을 하였지만 해방 이후 천도교는 계속 몰락의 길을 걸어왔다. 한 때 대학가에서 김지하 같은 지식인들이 동학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지만 천도교 교세의 성장으로 이어지지는 못하였다. 서울 창덕궁 앞 경운동에 천도교본부가 있다. 그곳에 가면 수운회관이라는 15층짜리 고층건물과 3·1 운동을 전후하여 지어진 근사한 서양식 건물 천도교중앙대교당을 볼 수 있다. 수운회관은 사무실을 빌려주고 돈을 버는 임대사업을 하는 것 같이 보여 종교적으로는 별 의미가 없다. 중앙대교당은 독일 사람에게 설계를 의뢰하여 지었다고 하는데 당당한 근대 건축유산의 하나이다. 천도교가 근대지향적 성격을 띠고 있음을 드러내주는 이 멋진 건물과는 달리 경운동의 천도교본부는 방문해보면 별로 활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천도교가 근대화의 길을 추구하였지만 한국사회의 너무나 빠른 발전을 따라잡지 못해 몰락한 것일까? 동학의 큰 아들이라고 할 수 있는 천도교가 이렇게 쇠락한 반면 천도교가 한 수 아래 미신적인 종교로 그렇게 공박을 그치지 않았던 일제시대 보천교의 후예인 증산도와 대순진리회가 천도교보다 훨씬 활발한 교세를 자랑하는 현실은 여러 가지로 동학의 역사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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