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사를 개척한 수메르

수메르문명을 세운 수메르인들은 자기들 나라를 ‘키엔기’라 하였다. ‘키’는 갈대, ‘엔’은 주인 혹은 지배자 그리고 ‘기’는 땅, 그래서 ‘갈대 지역의 주인 땅’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는 미국의 저명한 수메르 전문가 새무얼 크레이머(1897-1990) 박사의 해석이다. 수메르인들은 원래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란 고원의 산들을 넘어 메소포타미아로 이주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갈대가 무성한 것이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수메르인들이 다른 곳으로부터 이주해온 사람들이라는 것은 수메르인들이 남긴 유물들이 그 이전의 선주민 우바이드 문화의 유물들과 달랐다는 점으로 확인된다. 또 수메르인들은 주변의 셈족이나 인도유럽어족과는 다른 계통의 언어를 사용하였다는 것도 수메르 이주설을 뒷받침해주는 사실이다.

수메르문명은 가장 오래된 문명으로 꼽히지만 수메르문명이 남긴 기록은 다른 어느 문명보다도 많다. 그것은 점토판에 글을 쓰는 그들의 독특한 기록방식에 기인한다. 진흙으로 점토판을 만들고 점토판이 마르기 전에 갈대촉으로 문자를 새긴다. 글자를 새긴 점토판을 햇볕이나 그늘에서 말리면 문서가 만들어진다. 그렇게 말린 점토판은 부서지는 경우가 많았지만 굽거나 화재로 인해 구워지는 경우 점토판은 대단히 단단해져 좀처럼 부수어지지 않는다.

현재 수십만 점의 수메르 점토판이 전해온다. 수메르 문헌들의 대다수는 물건의 개수와 품목을 기록한 물목이지만 개인들간의 계약서도 더러 남아 있으며 신화를 주제로 한 다양한 문학작품들이 전해진다. 크레이머 박사는 이러한 점토판을 연구한 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의 《역사는 수메르에서 시작되었다》는 책은 우리말로도 번역되어 있는데 수메르인들이 남긴 다양한 문헌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수메르인들은 인류역사에서 최초로 여러 가지 제도들을 만든 사람들이다. 처음으로 문자를 만들었으며 최초로 글을 가르치는 학교를 세웠다. 문자와 학교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명의 수단이다. 당시에도 좋은 직업을 갖기 위해서는 학교에서 글을 배우는 것이 필요하였다. 수메르인들이 남긴 기록들 가운데에는 학교와 관련된 것이 적지 않다. 학교에서 사용한 교과서는 말할 것도 없고 글자 연습을 한 습자본, 학교생활을 묘사한 에세이도 있다. 크레이머 박사에 의하면 그 에세이에는 어느 학생이 글씨가 엉망이라는 이유로 선생으로부터 매를 맞았는데 그 학생의 아버지가 선생을 집으로 초대하여 식사를 대접하고 옷과 반지를 선물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물론 선생은 학부모 앞에서 그 학생이 훌륭한 학생이라고 입에 발린 소리를 하였다. 최초의 촌지 기록인 셈이다.

책들의 이름을 적은 도서목록도 더러 발견되었다. 점토판 도서를 보관하는 도서관도 발굴되었다. 20세기 초에 미국의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수메르 도시 니푸르를 발굴하였는데 왕궁과 신전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던 수만 점의 점토판을 발견하였다. 크레이머 박사도 이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수집한 점토판을 연구하여 수메르학의 대가가 될 수 있었다. 수메르 시대의 것은 아니지만 고대 아시리아 제국의 아수르바니팔 왕(BCE 685-631)이 세운 도서관도 19세기 중반에 발굴되었다. 그곳에는 수만 점의 점토판이 보관되어 있었다. 아수르바니팔 왕은 도서수집광이었다고 하는데 관리들을 여러 도시에 보내어 책들을 베껴오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는 옛 문헌들을 읽기 위해 수메르어와 아카드어를 공부하였다고 한다. 아카드어로 쓴 수메르 서사시 《길가메시 서사시》와 바빌로니아의 창세기라 할 수 있는 《에누마 엘리쉬》도 그의 도서관에서 발견되었다.

수메르인들이 발명한 문자와 기록방식은 기원전 2000년경 수메르 도시국가들이 몰락한 이후에도 살아남았다. 수메르 도시들을 정복한 아카드와 바빌론, 아시리아, 엘람 등 주변의 여러 나라들이 수메르의 설형문자를 받아들여 자신들의 말을 기록하였다.

수메르인들은 최초의 도시 건축자라고 할 수 있는데 현재까지 알려진 것만 해도 20여 개에 달한다. 그들은 진흙으로 벽돌을 구워 집을 짓고 성벽을 세웠다. 다양한 신들의 신전도 많이 지었다. 그들의 신전은 여러 층으로 이루어진 층계탑의 모습을 띠었다. 이러한 신전을 ‘지구라트’라고 하였는데 아카드어로 ‘지구라트’는 높은 탑이라는 뜻이다.

수메르인들의 도시건축은 주변의 고대인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구약성서 〈창세기〉 11장에는 노아의 후손들이 동쪽에서 와서 ‘시날’ 평원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시날 평원은 수메르 지역을 말한다. 그들은 시날 평원에서 도시와 높은 탑을 건축하였는데 신들이 이를 보기 위해 천상에서 내려왔다. 신들은 하늘로 높이 솟은 지구라트를 신들과 같이 되려는 인간들의 교만함을 나타내는 것이라 여겼다. 그리하여 노아의 후손들을 지상에 흩어버려 이제 노아의 후손들은 서로 알아듣지 못하는 말들을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수메르의 도시는 규모가 상당하였다. 도시는 주변의 촌락들을 포함하여 하나의 도시국가로 발전하였는데 촌락들까지 포함하면 그 영역이 상당히 컸다. 라가시의 경우 면적이 약 3,000 제곱킬로미터 정도로 서울 면적의 다섯 배나 되었다. 인구도 큰 도시는 수십만에 달했다. 수메르 도시들은 영토와 패권을 놓고 서로 다투었다. 세력이 큰 도시는 주변의 도시들을 지배하에 넣고 심지어는 수메르 전체를 지배하였다.

〈수메르 왕명록〉이라는 문헌에는 왕권이 하늘로부터 내려왔다고 하면서 처음에는 에리둑, 다음에는 바드티비라, 라라크, 시파르, 슈루파크 등으로 왕권이 차례로 옮겨갔다고 한다. 그리고 대홍수가 있었고 그 후에는 키쉬, 우루크, 우르 등으로 다시 왕권이 옮겨갔다고 한다. 이는 수메르를 지배한 패권 도시들의 명단인 셈이다. 〈수메르 왕명록〉에서 언급되고 있는 대홍수는 〈창세기〉에 나오는 ‘노아의 홍수’와 같은 것으로 보인다. 고고학자들은 수메르 도시들의 지층에서 사람 사는 흔적이 없는 모래와 진흙이 뒤섞인 퇴적층을 발견하였다. 말하자면 홍수층인데 그 아래에는 토기조각 등 인간의 주거흔적이 나왔다.

수메르 도시들 가운데 유명한 도시들을 몇 개 들어보자. 우루크는 〈수메르 왕명록〉에 의하면 수메르를 다섯 번에 걸쳐 지배한 도시였는데 《길가메시 서사시》의 주인공 길가메시가 바로 우루크의 왕이었다. 길가메시가 나오는 또 다른 문헌에서는 우루크와 키쉬가 수메르의 지배권을 놓고 다투었는데 당시 키쉬 왕은 우루크가 키쉬의 지배권을 인정하지 않으면 전쟁을 일으키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러자 왕인 길가메시는 연장자들의 회의를 소집하여 그들의 의견을 물었다. 연장자 회의는 키쉬에 굴복하고 평화를 택할 것을 주장하였다. 길가메시는 그 제안을 거부하고 이번에는 젊은이들로 이루어진 전사들의 회의를 소집하여 그 의견을 물었다. 전사들은 무기를 들고 싸우자고 하였다. 길가메시는 젊은 전사들의 결정에 흡족해 했는데 길가메시에 관한 이러한 기록을 크레이머 박사는 기원전 3000년경에 우루크에 이미 민주주의 제도인 양원제가 있었던 증거라고 보았다.

수메르의 유명한 또 하나의 도시는 우르이다. 우르는 〈수메르 왕명록〉에 의하면 세 번에 걸쳐 수메르를 지배하였던 도시였다. 페르시아 만에 접한 해안 도시였는데 학자들에 의하면 당시에는 오늘날에 비해 2.5m나 해수면이 높았다고 한다. 그 후 기후변화로 해수면이 낮아지고 토사도 쌓여 우르 지역은 바다에서 250km나 떨어진 내륙 도시가 되었다.

구약성서의 〈창세기〉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족장 아브라함이 바로 이 우르 출신이었다고 한다. 이 기록에 근거한다면 유태인과 아랍인의 조상으로 여겨지는 아브라함은 수메르인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르 사람 가운데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은 우르-남무 왕이다. 기원전 2100년경에 살았던 우르의 왕으로서 주변의 여러 도시들을 정복했던 사람이다. 우르의 지구라트도 그가 건립하였다고 하며 또 법전도 편찬하였다. 그가 남긴 우르-남무 법전은 함무라비 법전보다 약 300년 이전의 법전이다. 커다란 섬록암 비석에 새겨져 모든 법조항을 알 수 있는 함무라비 법전과는 달리 우르-남무 법전은 깨어진 점토판에 전해져 단지 몇 개의 조항만을 알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런데 그 조항 하나에는 신체상해에 대한 금전보상이 규정되어 있다. 상대방의 이빨을 부러뜨리면 피해자가 가해자의 이빨을 부러뜨리는 식의 복수형이 아니라 돈으로 상해를 보상하라는 내용이다. 이는 복수법 단계를 넘어선 수메르문명의 발전 정도를 보여주는 지표의 하나가 될 것이다.

〈수메르 왕명록〉에는 비수메르 계통의 왕조들도 보인다. 아카드 왕조가 그러한 왕조들 가운데 하나인데 이 왕조를 세운 사르곤 왕(기원전 2270-2215)은 수메르를 처음으로 통일한 인물이다. 그는 키쉬라는 도시에 와서 왕에게 술을 따라주는 역할을 하다가 출세한 사람이다. 미미한 집안 출신인 그가 어떻게 해서 왕이 되었던지는 불확실하다. 좌우간 사르곤 왕은 수메르 북쪽에 아카드를 세우고 이를 기반으로 수메르 도시들을 지배하에 넣었다. 여러 족속들과 나라들이 포함되어 있던 사르곤 왕의 나라를 역사학자들은 ‘제국’이라 칭한다. 그런데 이 아카드 제국은 수메르 문자를 비롯한 수메르문명을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수메르문명은 아카드인들에 의해 ‘수메르-아카드’ 문명으로 이어진 것이다. 역사에서는 이처럼 정복자가 피정복자의 우월한 문화를 받아들여 그 문화의 계승자와 전파자가 되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는데 아카드 제국이 그런 경우에 해당할 것이다.

아카드 왕조의 지배는 약 200년 정도 지속하다가 구티인들에 의해 끝이 났다. 점토판 문서 중에서 〈아카드의 저주〉라는 글이 전해온다. 사르곤 왕의 손자 나람신 왕이 니푸르의 엔릴 신전을 훼손하는 바람에 엔릴 신이 진노하여 구티인들을 불러들여 아카드 제국을 멸망시키고 수도 아카드가 영원히 폐허로 남도록 저주를 내렸다는 내용이다. 그래서 그런지 아카드는 아직까지 발굴되지 못하고 모랫더미 속에 묻혀 있다.

구티인들은 이란의 자그로스 산지에서 살던 유목민들로 추정되는데 그들은 본거지를 버리고 수메르로 이주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생활방식을 바꾸지 않았던 것이다. 단지 수메르 도시들에 총독을 임명하여 통치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이런 총독을 ‘엔시’라고 불렀는데 그러한 엔시들 가운데 유명한 사람이 ‘구데아’로 라가시의 엔시였다. 기원전 2100년경의 인물로 추정되는데 자신의 조각상 만드는 것을 좋아하여 그러한 상이 지금까지 무려 30여 개나 남아 있다. 대부분 섬록암 같은 것으로 만들어져 땅 속에 묻혀 있다가 온전한 상태로 발굴되었다.

구데아 왕이 살던 시기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수메르인들이 구티인들의 지배에 반기를 들고 독립을 쟁취하였다. 우르가 중심이 되었는데 앞에서 언급한 우르-남무 왕이 독립에 큰 역할을 한 사람이다. 그 아들은 ‘술기’라는 이름의 왕인데 수메르 전역을 통일한 것을 강조하고 싶었는지 ‘수메르와 아카드의 왕’, ‘사방세계의 왕’이라고 자칭하였다. 그는 특이하게도 자신이 학교에서 공부를 잘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내세웠다. 왕이 공부까지 잘하는 경우는 당시에는 드물었던 모양이다.

 

술기 왕의 원통형 인장이 발견되었다. 수메르인들은 도장을 단단한 원통형 돌이나 보석에 그림과 글자를 새기고 그것을 점토판에 굴려 찍었는데 술기의 도장에서는 그가 엔릴 신과 대화를 하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신과 대화하는 사람이니 자신을 신격화하는 것도 꺼리지 않았다. 후에는 자신을 ‘모든 나라의 신’으로 선포하였다.

 

수메르인들이 높은 수준의 문명을 이룩하였다는 것은 상당한 수준의 경제활동을 영위하였음을 의미한다. 사유재산도 상당히 발전되어 있었다. 예전에는 수메르의 토지는 대부분 신전이나 왕이 소유하였고 생각하였는데 실제로 문서들을 조사해보니 개인들이 토지나 가옥을 사고 판 경우가 많았다.

수메르인들은 관개농업을 통해 높은 수준의 농업 생산력을 달성하였으며 수공업과 상업도 번창하였다. 먼 지역들과도 무역이 활발히 행해졌는데 도장을 만드는 데 사용된 청금석(라피스 라줄리)는 아프가니스탄 지역에서 수입한 것이다. 신전이나 왕궁 같은 고급 건축물을 짓기 위해 레바논 백향목을 수입하였으며 조각상이나 비석을 만들기 위해서는 섬록암을 수입하였다. 수메르문명은 청동기 단계의 문명으로서 청동을 제련하여 사용하였다. 청동 창검, 조각상 등이 남아 있는데 청동의 원료인 구리나 주석, 비소 등은 충적토 지역인 수메르에서는 생산되지 않아 모두 외부에서 수입, 조달하였다.

 

수메르인들의 상업활동이 상당한 수준에 달했다는 것은 금과 은을 화폐로 이용했다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그리스·로마 문명에서처럼 주화를 만들어 사용한 것은 아니고 금과 은을 작은 덩어리로 잘라서 사용하였다. 그 중량단위로 미나와 세켈이 있었다. 미나는 약 500그램에 해당하고 세켈은 그것의 1/60에 해당한다. 이 단위와 용어는 후대에 그대로 계승되어 고대 바빌론 인들과 히브리인들도 이 단위를 사용하였다.

화폐의 발전은 금융의 발전을 가능하게 한다. 수메르인들은 상당히 복잡한 금융도 영위하였다. 영국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된 우르에는 대금업을 하는 은행가들과 상인들의 사무실이 모여 있는 금융 지구가 있었다. 이곳에서 기원전 1800년경의 금융문서가 수십 점 발굴되었는데 당시에 이미 대금업이 발전하였으며 사업가들은 투자금을 빌려서 사업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수메르에서 금융은 상거래를 촉진하고 부의 축적에도 기여하였던 것으로 평가된다.

수메르문명이 문명사에 기여한 바는 많다. 문자사용을 비롯한 기록문화는 말할 것도 없고 상당히 뛰어난 기술들도 수메르에서 나왔다. 토기를 만들 때 사용하는 녹로, 바람을 이용하는 범선이 그들이 처음 발명한 것이라 하며 아치라든지 돔 같은 상당히 정밀한 수학적 계산 위에서 가능한 건축기술도 수메르의 발명품이다. 그리고 첨단기술 시대를 사는 우리들이 시간과 각도를 잴 때 사용하는 60진법도 수메르로부터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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