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일상적 대화에서 ‘네 인생의 모토가 뭐니?’라고 물을 때가 있고 또 그런 질문을 받기도 한다. 이 말은 너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산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혹은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냐는 뜻이다. 즉 모토(motto)는 삶의 중요한 기준이나 방향을 한마디로 표현한 말이다. 예컨대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한 말이나, 예수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한 말이 대표적이다. 18세기 교육사상가이며 정치학자인 루소는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역설했다.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심오한 사상은 잘 몰라도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다 알고 있고 또 자주 사용한다.
이러한 말들은 평범한 진리를 역설적으로 말하고 있다. ‘너 자신을 알라!’는 말에 대해 우리는 ‘내가 나를 모른단 말인가?’라고 반문한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에서는 원수와 사랑은 서로 어긋난 개념의 조합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우리는 이미 자연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 않느냐’는 말로 핀잔을 준다. 그러나 과연 그런 말속에 포함된 의미가 그렇게 역설적인 것처럼 허망한가? 물론 그러한 성인과 철학자들의 말은 그저 우리의 상식을 무시하며 내뱉는 말이 아니다. 역설적이지만 그 속에 삶을 바라보는, 인간을 이해하는 깊은 진리가 숨겨져 있다. 쉬운 말이지만 실천하기 어려운 말들, 그래서 더 역설적으로 들리기도 한다.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란 말로 사랑이 갖는 무한성, 무경계성을 말하고 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소크라테스의 말은 진리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먼저 너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무지한 나’를 깨달을 때 나는 진리에 한발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리라. 이처럼 모토는 그 한마디로 그 사람의 사상을 알려주고, 또 그에 공감하는 많은 사람들의 태도를 규정짓는다. 모토는 나름대로 세상을 살아가는 중요한 화두가 되고 있으며 그 모토를 통해서 루소도 알고 소크라테스도 알게 된다. 짧은 한마디의 경구가 가진 영향력은 상상 밖으로 큰 셈이다.
현대 우리의 삶에서 우리 시대에 맞는 그런 모토를 찾아볼 수 있을까? 언제부턴가 우리는 기계적이고 수학적인 계산과 물질적인 이익에 매달리게 되었고, 생산이 필수이고 소비는 미덕인 사회가 되어버렸다. ‘돈 되는 일’이 유일한 관심사이고, 행복을 빙자한 ‘쾌락주의’가 삶의 지침이 되었다. 현대인들의 관심은 오직 경제에 있고, 올바른 행동이란 ‘경제원칙’에 부합하는 것이고, 어리석고 잘못된 행동이란 ‘경제원칙’을 모르거나 그에 위배되는 것을 뜻한다. 가난은 불편할 뿐 부끄러운 게 아니라는 생각은 이제 가난은 부도덕이고 죄라는 현실논리에 묻혀지고 말았다. 이러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삶의 가치를 높이거나 인생을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삶을 정신적으로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모토는 허무한(비생산적인) 메아리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기에 더 우리는 우리 삶을 올바르게 이끌어줄 한마디 진리를 요청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꼭 필요한 모토는 무엇이 적당할까? 삶을 기계적으로 만들고 계산하느라 하루도 머리가 쉴 날이 없는 현대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아름다운 별이 반짝이는 하늘을 바라보며 눈물짓는 정서와 맑은 물이 흐르고 푸른 초목이 우거진 들판을 거니는 감성이리라. 그런데 현실은 어떠한가? 하늘의 별조차 경제적으로 응용하고, 가장 경치가 아름다운 곳은 오히려 가장 좋은 투기의 대상이 된다. 이런 마음을 뜯어 고쳐서 모든 존재를 그대로의 가치로 사랑하고 아끼는 상생과 조화의 마음으로 되돌릴 수 있는 그런 모토는 무엇일까? 만약 그런 모토가 있다면 그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친숙한 개념이면서 또 그 말의 소중한 의미가 누구에게나 공감되는 개념이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현대의 문제를 반성하고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과 방향이 들어있는 개념이어야 할 것이다. 짧은 한마디의 말로 세상 전체를 풀어보고 해석하고 관조하는 힘도 있어야하고, 한편 그것으로 인해 삶의 태도와 가치관까지 바꿀 수 있는 힘도 있어야 한다.
그에 적당한 개념으로 우리가 ‘처음처럼’이란 말을 떠올린다면? 물론 이러한 주장에 회의적인 반응을 나타내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겨우 그 말로?’ 라는 반응이거나 ‘그거 뭐 다 아는 말 아닌가?’라고 과소평가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내포와 외연을 제대로 성찰해본다면 ‘처음처럼’이란 말이 가진 심오한 뜻에 공감할 것이다. 사실 ‘처음처럼’이란 말을 루소식으로 말하면 ‘처음으로 돌아가라’는 완성된 문장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 말을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근본으로 돌아가라’는 말이 될 것이다. 증산 상제님께서는 우주변화의 거대한 질서 속에서, 그리고 우리 인간의 변화무쌍한 삶 속에서 가장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원리를 ‘원시반본’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때는 원시반본(原始返本)하는 시대라.”(『증산도 도전』 2:26:1)라는 상제님의 말씀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누구나가 항상 염두에 두어야할 모토이다. 이 말씀은 바로 우주의 모습, 인간의 삶, 역사의 질곡, 자연의 변화, 문명의 방향 등 모든 것에 해당하는 이 말의 쉬운 풀이는 바로 ‘근본으로 돌아가라’이며 이를 일상적 모토로 표현하면 ‘처음처럼’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