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처럼” 이란 말은 우리 일상에서 자주 볼 수 있으며, 또 자주 사용되는 하나의 모토라고 할 수 있다. 이미 그 말은 우리들에게 격언이나 표어처럼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인지 일반 가정에서도 “처음처럼”이란 말을 가훈으로 삼기도 하고 멋진 글씨의 액자로 거실 벽에 걸어놓기도 한다. 그렇다면 누가 언제 이 말은 처음 사용했을까? 아마도 누구랄 것도 없이 삶의 일상적 교훈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예전부터 전해 내려온 속담이나 우화들이 대부분 작자가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 내용이 모든 사람들의 공감을 받고 교훈적이어서 세대를 이어 오랜 시간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온 것과 마찬가지이다.
댱연하게도 ‘처음처럼’이란 말의 가치는 ‘처음’에 있다. 그 이유는 ‘처음’이란 말이 갖는 소중함에서 찾을 수 있다. 요즘 시중에 나와 있는 소주 이름 중에 ‘처음처럼’이라는 것이 있다. 왜 그렇게 이름을 지었을까? 아마도 그것은 처음에 가졌던 사랑이나 믿음이나 존경을 그대로 간직하는 마음으로 서로의 관계를 만들어 나가자는 동기에서일 것이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하든, 누구와의 관계를 맺든 처음 가졌던 마음, 의미, 상태를 잊지 말자는 말을 많이 한다. ‘작심삼일作心三日’이 아니라 작심한 것이 끝까지 유지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생이란 어디 그렇게 마음대로 되든가? 처음의 순수한 마음은 시간이 지나면서 식상해지고 흩어지며 희석된다. 그래서 처음 가졌던 의지는 어느새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라지고 만다.
남녀간의 사랑에서 특히 그 처음의 느낌과 감정은 너무나 소중하고 선명하다. 그녀의 의미는 우주보다도 크고 그녀의 영혼은 맑은 시냇물보다 투명하며 그녀의 눈동자는 별빛보다 빛난다. 그러나 그렇게 아름답고 애달픈 사랑의 느낌도 시간이 지나면서 희미해지고 만다. 서로의 관계가 발전하고, 서로를 알게 되고 익숙해질수록 신비함과 신선함이 조금씩 사라진다. 그녀의 생각이 나와 반대로 느껴지고 그녀의 습관이 귀찮아지며 심지어 그녀의 웃음도 가식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최대의 신비가 가장 흔한 일상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그런 순간에 가장 필요한 말이 무엇일까? 바로 ‘처음처럼’이다. 처음으로 돌아가자’이다. 사랑과 존경과 신뢰가 흩어지고 왜곡된 극단의 시점에서 다시 처음처럼, 처음의 상태로, 처음의 느낌으로 서로를 바라보자는 것이다.
우리는 왜 ‘처음’에 대해 그렇게 아름답고 순수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가? 그것은 아마도 맨 처음의 상태나 마음은 언제나 가장 근본적이고 순수한 의미에서 출발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처음 학교에 입학을 할 때, 그리고 처음으로 취업을 했을 때, 그리고 처음으로 사랑을 할 때 우리의 마음은 얼마나 순수하고 아름답고 소중한가? 자연의 모습도 원시림의 상태는 그 속에 조화와 균형을 내포한 통일의 상태이다.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서로 은혜를 주고받으며 조화로운 삶을 영위한다. 이렇게 인간의 처음 마음이나, 자연의 처음 상태는 조화롭고 순수하고 아름답다.
천체물리학에서도 이러한 처음의 문제는 매우 중요한 가설로 자리 잡고 있다. 최근의 천체물리학적 성과에 따르면 우주의 변화는 완전의 상태에서 무질서의 상태로, 그리고 다시 처음의 완전과 질서의 상태로 되돌아가려고 하는 성질이 있다고 한다. 즉 우주의 탄생 초기는 완전한 질서의 상태였는데 빅뱅을 통해 거대한 우주가 생겨나면서 점점 무질서가 커지는 방향으로 팽창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무질서로의 운동이 무한한 것은 아니다. 어느 순간에 가서 우주는 다시 수축할 것이고 이 때 우주의 변화는 완전한 무질서에서 다시 질서의 방향으로 움직일 것이라고 가정한다.
철학적, 종교적으로 처음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처음이란 말은 원래 시작을 뜻한다. 그러나 단순히 시간적 의미에서 시초나 시원을 뜻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말로서 ‘처음’에는 시간적 의미와 함께 공간적(존재적)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시간과 공간은 서로 분리되어서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이란 말은 그래서 곧 ‘처음의 상태’를 말한다. 그리고 ‘처음의 상태’는 곧 원형이나 근본, 본질 등과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다. 철학적이든 종교적이든 처음은 본질을 뜻한다. 철학의 시작은 ‘세계를 구성하는 본질로서의 아르케(arche)’를 찾는 것에서 출발했다. 그리고 아르케는 세계를 만드는 ‘최초의 물질’인데, 이는 가장 ‘근원적인 물질’이란 말과도 같다. 여기서 최초와 근본은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
종교적으로 처음은 가장 순수하고 완전한 것을 의미한다. 성경에서는 인간을 만들 때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가장 아름답고 완전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인간의 본성이란 바로 완전한 ‘불성’과 같다. 인류 시원의 경전 <삼일신고>에서 원래 인간은 삼신이 내린 온전한 품성인 삼진(성명정)을 가진 존재였다가 살아가면서 삼망三妄과 삼도三途의 퇴락에 젖어들고, 다시 수행과 깨달음으로 처음의 상태로 찾아 돌아가는 존재라고 하였다. 예수는 늘 ‘어린 아이처럼 되라’고 하지 않았는가? 이렇게 처음은 곧 순수함, 무결함, 완전함을 뜻한다.
그러나 그 처음이란 영원하지 않다. 사랑도 변하고, 직장생활도 점점 고단해지고, 어린아이는 어른이 되어간다. 인간은 자연을 파괴하고 오염시키며 우주는 점점 무질서와 혼동 속으로 들어간다. 모든 것은 시간이 흐르면서 변하게 되고 훼손되게 된다. 처음에서 멀어지고 순수에서 멀어지고 조화에서 멀어지고 본질에서 멀어진다. 그래서 다시 그 처음을 돌이켜보자는 의미에서 ‘처음처럼’이란 말이 나왔을 것이다. 또 그 말은 이제 처음을 반성하는 누구에게나 익숙한 아름다운 표현으로 느껴지는 격언이며 모토가 되었을 것이다. 처음은 모든 생명의 근본이며 문명의 원형이고 역사의 시원이다. ‘처음처럼’이란 말은 그러한 처음의 상태로 돌아가고 싶다, 혹은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내포한 말이다. 원시반본에 대한 이야기는 이처럼 처음과 관련해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