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어둠의 복권
베르너 마르크스는 또 다른 차원에서 ‘빛의 형이상학’의 좌초를 얘기한다. “‘빛의 형이상학’으로 이해된 전통 철학은 스콜라 철학적으로 말하면 모든 존재자가 ‘진리’라는 데서 출발한다. 그러나 그 전통은 진리를 탈은폐[빛; 밝게 트임이란 의미]와 은닉의 투쟁으로 보는 하이데거의 이해와 함께 종료된다.” 존재를 빛의 차원에서 설명하는 하이데거와 “빛과 드러남의 세계”에 집중하는 ‘빛의 형이상학’ 사이에서 깊은 골짜기와 같은 차이를 보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존재의 밝음은 언제나 어둠과 은닉으로부터의 탈은폐이며 탈은폐의 밝음은 언제든 어둠과 감춤 속으로 달아날 수 있다. 언제나 빛과 밝음은 어둠으로부터 드러남이고 어둠은 이미 밝음을 감싸 간수하고 있다. 따라서 하이데거에서 존재는 은닉과 탈은폐, 빛과 어둠의 공속성 혹은 둘의 투쟁이나 놀이의 사태이다. 거칠게 말하면 형이상학은 회중전등을 비추며 걸어가는 사람처럼 밝게 비추는 곳만 바라보고 뒤로 물러난 어둠은 주시하지 못한다. 이런 측면에서 하이데거는 형이상학에 의해 철저히 배제된 은닉과 어둠의 존재론적 권리를 복원한다고 말할 수 있다.
빛의 형이상학을 이끈 플라톤에서 빛의 비유와 하이데거에서 존재의 밝음에 대해 전자는 사물을 윤곽을 선명히 하는 빛이고 후자의 경우 밝음은 윤곽을 흐릿하게 하는 것이라고 구별해 말하기도 한다. 또 어둠과 밝음이 포개진 하이데거의 존재 진리를 낮과 밤이 교차하는 혹은 혼재하는 “노을”에 비교할 수 있다. 플라톤과 그 이후의 형이상학은 밝은 이성의 빛으로 모든 것이 하나의 궁극적인 것으로 환원돼 체계와 질서 속에 투명하게 자리 잡도록 한다. 그러나 참은 그러한 명료한 질서에서 구할 수 없다. 니체는 반듯한 것, 직선적인 것은 기만적이며 참은 굽은 데 있다고 했다. 자연적이고 천진한, 다시 말해 인위人爲로 때 타지 않은 시원적 진리는 오히려 문장보다 여백, 눈부신 밝음보다 어둠, 명석판명함보다 모호함에 있다. 밝음을 감싸며 밝음을 위해 어둠과 감춤 속에 물러나 있는 진리는 오히려 거뭇하다[玄]. 하이데거는 니체와 함께 꺼지지 않는 이성의 광공해에 익숙한 눈을 감고 스스로를 감추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속눈을 뜨자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들의 제안은 포스트모더니즘에서 큰 반향을 얻었다.
하이데거가 빛의 형이상학과 차이를 빚는 또 하나의 측면은 다음과 같은 데 있다. ‘빛의 형이상학’은 근거 구하는 사유 방식에 따라 태양을 정점으로 한 수직적 관계가 문제가 된다. 이에 비교하면 하이데거의 존재 물음에서는 빛과 빛을 맞아들이는 장場인 사유[인간 본질] 또는 인간 사이의 수평적 관련을 주제화 한다. 이 수평의 지반은 하이데거 사유의 전개에 따라 점점 더 깊어진다. 말하자면 ‘빛의 형이상학’의 인간이 태양을 향한 자라면 하이데거에서 인간은 존재를 사유하는 자는 깊이의 인간이다. 다음의 설명도 같은 얘기를 하고 있다. 하이데거는, 플라톤적 태양이라는 주어져 있는 사실로부터 “주어져 있음을 가능케 하는 줌 혹은 주는 것 자체로 소급해가려는 것이다.” 그의 존재 물음은 존재와 사유가 그로부터 그리로 속하는 어둔 심연을 향한다.
4. 심연深淵으로
심연의 독일어는 ‘Abgrund’이다. 여기서 하이데거는 ‘Ab’와 ‘Grund’ 사이에 ‘-’을 집어넣는다.(‘Ab-grund’) ‘Ab’는 ‘~으로부터 떨어진’이라는 부정의 뜻을 갖고 있고 ‘Grund’는 근거라는 말이다. 따라서 하이데거가 의도한 것은 자신의 사유가 당도할 심연은 비근거요 근거를 거부하는 것이란 점을 밝히고자 함이다. ‘무엇은 무엇을 낳고 그 무엇은 다시 다른 무엇이 낳고’ 식의 근거를 캐묻는 물음은 심연의 침묵 속에 빨려 들어간다.
하이데거가 자신의 존재물음으로써 묻는 것은 존재가 존재로서 있는 의미이다. 여기서 의미는 어떤 것이 그 자체로서 머무는 지평적인 개념이다. 존재 의미와 존재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각각 자유롭고 열려 있다는 의미의 ‘밝게 트임’과 그와 같은 열린 장으로써 드러나는 ‘밝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말하자면 존재 의미와 존재는 환한 터와 그것을 채우는 빛과 같다. 나아가 그 장은 스스로 밝게 드러나는 비은폐의 ‘본질 유래’이다.
그런데 앞서 말했듯 하이데거가 존재를 가리키는 비은폐 혹은 밝음[빛]은 언제나 숨김과 감춤으로부터의 드러남이다. 어둠과 밝음은 서로를 붙잡고 도는 둥근 원이며 놀이이다. 또 어둠과 밝음의 투쟁이다. 하이데거의 예술론에서는 밝음의 요소는 세계에, 감춤과 어둠은 땅[대지]으로 나타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예술의 탁월함은 세계와 대지의 투쟁이 극단적으로 발현돼 고요한 정적에 이르는 데 있다. 이때 은닉, 어둠은 단순히 비은폐, 밝음에 상반되는 것이 아니다. 은닉은 밝음을 감싸고 또 밝음을 위해 뒤로 물러나는 시원적인 것이다. 하이데거는 어둠과 밝음이 함께 속하는 ‘밝게 트임’의 장을 황금빛의 광채로 기술하기도 한다.
“‘밝게 트임’에서 눈에 띄지 않는 밝음의 금빛 광채는 파악될 수 없다. 그것 자체는 단순히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발현이기 때문이다. 밝게 트임의 눈에 띄지 않는 빛남은 역사적 운명이 뒤로 물러나 스스로를 감추는 성스런 자기 보존에서 솟아나온다.”
놀이라면 놀이의 판이나 마당이 투쟁이라면 싸움판이 있어야 한다. 저 밝게 트임은 존재에서 어둠과 밝음이 투쟁하고 놀이하는 판이며 마당이다. 밝게 트임의 장이 없으면 빛(Licht)도 밝음(Helle)도, 빛의 부재不在인 어둠도 없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빛을 넘어서 최상의 것은 환히 열리는 밝게 트임 자체”라고 밝히기도 한다.
하이데거는 심지어 밝게 트임은 ‘밝은’, ‘환한’을 의미하는 ‘light’와 관계가 없다고도 말한다. “자유롭고 열려 있다는 의미의 ‘das Lighte’는 언어적으로나 사태에 있어서나 밝다(hell)는 의미의 형용사 ‘light’와 어떤 공통점도 없다.”
그렇다고 영역이 존재에 대해 형이상학적인 근거와 같은 것으로서 있다는 말은 아니다. 영역과 존재[비은폐] 사이는 영역이 근거로서 앞서고 존재가 그 결과로 뒤따르는 인과적인 관계가 아니다. 오히려 근거는 영역에 닿지 않으며, 그곳에서는 근거가 사라진다. 영역은 근거를 삼킨다. 하이데거는 비근거로서 심연처럼 벌려진 이곳을 괴테의 말을 빌려 “근원현상”(Urphänomen)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영역성은 존재의 본질에 속한다. 영역은 존재가 비은폐로, 즉 자기의 본질이나 진리로 머무는 방식과 지평이다. 그리하여 “존재가 그 자체 안으로 전향하는” 영역은 또한 존재 자체이다.
하이데거는 나중에 가서 영역을 “사역四域”으로 표현한다. 이로써 그는 존재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호명하는 한편 존재의 영역적 성격을 보다 분명히 전달한다. 아울러 하이데거는 ‘사역화四域化’(Vergegnis)란 말로써 스스로 발현하며 사역으로 트이는 존재의 이행적, 사건적 성격을 드러낸다. 그리고 또 다른 곳에서는 존재 발현의 장을 하늘, 땅, 신적인 것들, 죽을 자들인 인간이 하나로 어울리며 펼쳐지는 ‘사방 세계’(das Geviert)라고 규정한다. 존재는 비은폐하며 사역화하는데, 그것은 또한 하늘, 땅, 인간, 신적인 것들의 단일함인 사방으로 트이는 영역화라는 것이다.
또한 이때 유념해야 것은 ‘밝게 트임’의 성격을 규정하는 ‘판’이나 ‘마당’, 또 ‘밝게 트임’이란 말의 일상적 쓰임새 자체가 말해주듯 ‘밝게 트임’은 시간과 공간을 다 같이 지시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시간이자 공간으로서 열린다. ‘사역’이나 ‘사방세계’ 또는 ‘토포스’ 등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 그것은 존재가 그 자체로서 머무는, 다시 말해 환하게 비은폐로 들어서는 ‘동안(Weile)’이며 ‘폭(Weite)’이다. “노을”이 물드는 동안이며 물드는 곳이다.
여기서 ‘시공간’(Zeit-Raum)은 존재가 은닉과 감춤으로부터 스스로를 열어 밝히는, 다시 말해 은닉과 비은폐가 놀이하는 생기의 동사적 사건으로서 파악되고 있다. 그 점에서 “시간-놀이-공간”(Zeit-Spiel-Raum)으로 규정되기도 한다. “사역은 동안과 폭으로서 … 시간을 부여하는 동시에 공간을 연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후기의 저술들에서 사역을 존재의 ‘시간-놀이-공간’(Zeit-Spiel-Raum)으로 부르고 밝게 트임과 동일시한다.”
한편 존재의 영역화는 존재가 열린 터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이미 지시한다. 자연의 햇빛이 밝게 빛나는 데는 투명한 공기가 있어야 하듯, 영역화하는 것은 본성상 언제나 자신이 생기하고 머물 마당을 요구하는 것이다. 감춰져 있는 것이 열려지고 자유롭게 트이기 위해서는 ‘공간(space)’이 필요한 것이다. “사물의 남아 있는 것, 능동적으로 물러난 것을 사유하는 것이 사유의 과제이다. 감춤에서 스스로 열어 밝히는 존재를 맞이하여 그 놀이의 판과 마당이 열리는 개방성은 인간의 사유이다. 인간 본질인 사유는 ‘열려져 있음’ 혹은 개방성 자체로써 수행된다. 그러는 한 인간의 인간됨은 존재 진리에 속한다. 인간의 고유함은 “영역화하는 것 안에 머묾”이다. 그래서 우리들 자신인 인간이 존재의 필요에 따라 영역화의 자리로 쓰이는 일은 인간에게는 모든 것에 앞선다. 왜냐하면 그의 본성이나 가능성이 거기서 유래하기 때문이다. “존재는 자신을 보내주면서 시간-놀이-공간의 자유로운 장(das Freie)을 열고 이와 함께 인간을 비로소 그때그때 보내주는 본질가능성의 자유로운 장으로 해방시키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하이데거와 인도의 영성적 사유 사이의 대화가 시도되기도 한다. 영성적 사유의 특징은 장의 자각에 있기 때문이다.
끝으로 이상의 모든 내용은 다음의 말로 집약되고 또 그 말에서 풀려 나온다. “이성이 사유의 적대자가 됐을 때 비로소 사유는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