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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와 세계사
흉노는 중국 고대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북방 유목민족이다.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은 것도 흉노의 침입을 막기 위한 것이었으며, 진秦나라를 계승한 한漢나라는 건국 초부터 흉노와 대결해야 하였다. 한고조 유방은 흉노와의 싸움에서 흉노군에 포위되었다가 가까스로 탈출하는 수모를 겪었다. 한고조는 평화를 위해 흉노에게 매년 비단과 술, 곡식을 보내고 심지어는 왕실의 공주도 흉노 선우에게 보내야 하였다. 이러한 치욕적인 관계는 오랫동안 계속되다가 유방의 증손자인 한무제(재위 BCE 141-87) 때 와서 공세로 전환하였다.
한무제가 흉노를 정벌하기 위해 치른 전쟁은 40여 년간 계속되었다. 한때 서역과 황하 만곡부의 오르도스를 빼앗는 데 성공하였지만 이는 일시적 승리에 불과하였다. 흉노와의 전쟁은 한나라 백성들의 생활을 궁핍하게 만들고 국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대정복 군주였던 한무제가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고 다시는 대외원정을 하지 않겠다는 ‘윤대輪臺의 조서’를 발표한 것은 흉노와의 전쟁에서 실패하였음을 자인한 것이다.
중국 북방으로부터 서역 오아시스 지대와 몽골 초원까지 광대한 지역을 지배하였던 흉노 제국은 BCE 1세기 중반 내분으로 약화되기 시작한다. 한 때는 다섯 명의 선우가 난립하는 사태를 겪은 후 결국 동흉노와 서흉노로 분열되었다. 동흉노는 한나라의 지원을 받는 쪽으로 선택을 하였다. 서흉노는 한나라의 공격으로 궤멸되어 중국사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로부터 한 세기가 지나 동흉노 내에서 권력 다툼이 일어나 동흉노 역시 남북으로 분열되었다. 남흉노는 아예 국경을 넘어 한나라 영토로 들어와 정착하였다. 한나라에 귀부하였다고 하나 남흉노는 자신들의 통치조직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남흉노는 삼국시대가 막을 내린 후 등장한 사마司馬씨의 진晉나라가 혼란 속에 빠지자 자신들의 나라를 세우고 중국을 지배하게 되었다. 중국인들이 ‘5호16국 시대’(304-439)라고 일컫는 시대가 이로부터 열렸다.
370년경 흑해 북안에 살던 알란족과 고트족을 공격하여 이들을 로마 제국 영토 내로 도주하게 만든 훈족은 흉노의 일파다. 2세기 중반 몽골 초원의 새로운 강자 선비족에 의해 밀려난 북흉노는 카자흐스탄 초원 쪽으로 이주하였다. 이들 가운데 일부가 다시 흑해 북안의 초원지대로 진출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을 라틴어 사서에서는 ‘훈니’, 그리스어 사료에서는 ‘훈노이’라고 하였다.
훈족은 378년 동고트족, 알란족과 함께 로마제국의 영토였던 판노니아 지방으로 들어갔다. 이들이 로마 제국의 병력요청에 의해 그곳으로 들어갔는지 아니면 로마제국의 뜻에 반하여 침략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분명한 것은 훈족이 몇 년 뒤에는 로마 제국의 동맹군으로 게르만계의 알레만족을 격퇴하고 로마제국의 권력투쟁에서 한쪽 편의 동맹으로 참전하였다는 사실이다. 테오도시우스 황제(재위 379-395)는 자신의 제위에 도전하던 ‘찬탈자’ 막시무스, 에우게니우스 등을 물리치는 데 훈족 군대를 동맹군으로 사용하였다.
로마가 위급 시에 군사적 원조를 요청하였을 정도로 훈족은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였다. 5세기 초 훈족의 지배 영역은 로마와의 다뉴브-라인 국경선에서 북쪽으로는 발트해까지, 동쪽으로는 흑해 북안까지 펼쳐져 있었다. 게르만계의 대다수 족속들을 포함하여 50여 개에 달하는 족속들을 지배한 훈제국은 동로마제국으로부터는 평화를 유지한다는 조건으로 공납을 받았으며 서로마 제국에게는 동맹으로서 북방의 야만족들을 제어하는 역할을 맡아 그 대가를 챙겼다. 440년대에는 몇 차례에 걸쳐 동로마 제국이 공납 납부를 거부하자 동로마 영토로 진격하여 수십 개의 도시들을 폐허로 만들어 버리기도 하였다.
아틸라 왕(재위 435-453)이 사고로 급사하자 훈제국 내부에서 권력투쟁이 벌어지고 그것을 기화로 피지배 민족들의 봉기가 일어나 훈제국은 여러 집단으로 급속히 해체되었다. 그 동안 훈족의 통제를 받아오던 게르만 여러 부족들이 독립하고 서로마 제국은 이 게르만족들에게 결국 망하고 말았다. 서로마 제국을 멸망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진 오도아케르는 게르만 용병부대의 대장으로서 부친은 훈족 출신이고 모친은 게르만계인 스키리족 출신이었다고 한다.
흉노는 유라시아 대륙 동쪽의 중국, 서쪽의 로마제국에서만 나타난 것은 아니다. 5세기 후반 아프가니스탄 지역에 있던 박트리아 왕국을 정복하고 사산조 페르시아를 공격하였으며 인도로 쳐들어가서는 북인도 지역을 장악하였다. 산스크리트어 사료에서는 이들을 ‘후나’, 페르시아 사료에서는 ‘에프탈’이라 하였다. 중국 사서에 나오는 ‘엽달嚈噠’이 에프탈이다. 이들은 5세기경 선비계 유목국가인 유연柔然의 지배를 받던 흉노로서 몽골 초원으로부터 트란스옥시아나와 소그드 지역을 정복한 후 박트리아로 진출한 것으로 보인다.
흉노는 이처럼 몽골 초원으로부터 중국으로, 또 카자흐스탄과 남러시아-우크라이나 초원을 거쳐 동유럽으로, 소그드와 트란스옥시아나를 거쳐 박트리아, 북인도로 진출하여 그 지역들의 역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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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족 지배 가문의 성씨
5세기 중반 유럽을 뒤흔들었던 훈족 왕 아틸라의 씨족에 대한 정보는 당대의 사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예를 들어 449년 동로마 황제의 사절단의 일원으로 판노니아 초원의 아틸라 본영을 방문하였던 프리스쿠스의 기록에는 아틸라의 모습에 대한 묘사는 있지만 그 씨족에 관한 언급은 없다. 또 고트족과 훈제국과의 관계에 대해서 상세한 기록을 담고 있는 6세기 역사가 요르다네스의 《게티카》에서도 아틸라 가문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뜻밖에도 15세기에서 16세기 사이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불가리아 칸 명부〉라는 문헌에서 그 가문의 이름을 찾아볼 수 있다. 이 문서는 7세기 초반 불가리아를 건국한 쿠브라트를 4대 왕이라고 한다. 비잔틴 사료에 따르면 쿠브라트는 오노구르, 쿠트리구르, 우티구르 등으로 이루어진 불가르 연합세력의 우두머리로서 아바르의 지배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인물이다. 그렇다면 불가리아의 초대 왕은 쿠브라트가 되겠지만 그 문서에서는 초대 왕을 ‘아비토홀’이라고 적고 있다. 전문가들은 아비토홀을 훈제국의 왕 아틸라로 본다. 3대 왕이 이르닉으로 아틸라의 아들 가운데 하나인 에르냑이기 때문이다. 불가르족은 중세 불가리아 왕가의 기원이 훈족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실제로 쿠트리구르와 우티구르는 흑해 북안에 자리잡았던 훈족 집단이었다.
그런데 〈불가리아 칸 명부〉에서는 쿠브라트 가문의 이름을 ‘둘로Dulo’라고 기록하였다. 둘로는 중국사서에 나오는 투르크인들의 부족연합인 ‘철륵鐵勒’과 같은 이름이라 보는 학자도 있고 서돌궐 제국에 속했던 투르크계 부족인 ‘돌육咄六’을 가리킨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이러한 입장들은 쿠브라트 가문을 투르크계라고 보는 근거가 되는데 아틸라 가문의 성씨가 과연 ‘둘로’였는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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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사서에 보이는 흉노의 성씨
사마천의 《사기》 흉노전에는 흉노의 관직들을 소개하면서 흉노 귀족성을 셋 들고 있다. 호연呼衍씨, 난蘭씨, 수복須卜씨가 그것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5세기 후에 편찬된 범엽의 《후한서》남흉노열전에는 위 세 성 외에 구림丘林씨를 더 들고 있다. 구림씨는 남흉노 시대에 등장한 새로운 귀족성으로 추정된다. 《후한서》는 이 네 성이 국가 안의 명족名族으로 항상 선우 씨족과 혼인한다고 하였다. 이 책에서는 선우 씨족의 이름도 들고 있는데 ‘허련제虛連題’가 그것이다. 물론 여기서 한자의 뜻은 앞의 귀족 4성에서와 마찬가지로 의미가 없고 음을 묘사한 것이다. 반고의 《한서》 흉노전에는 선우의 성을 ‘연제攣鞮’라 하였다. 일반적으로 역사학자들은 선우 가문을 연제씨라고 본다.
연제씨가 선우직을 독점하였지만 전한 말기의 왕망은 수복씨를 선우로 세우려고 하였는데 이는 수복씨가 친한나라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적지 않은 흉노인들이 수복씨 선우를 지지하였다는 것을 보면 선우 직책이 반드시 연제씨에게만 한정되어 있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연제씨 가문이 전통의 힘으로 선우직을 독점한 것이다.
흉노는 앞에서 언급하였듯 BCE 1세기 중엽 내분에 의해 동서 흉노로 갈라지고 동흉노는 다시 한 세기 후 남북 흉노로 분열되었다. 1세기 중엽 한나라로 귀부한 자는 일축왕 비였다. 그는 스스로를 자신의 조부와 같은 이름의 호한야 선우로 자칭하였다. 제2의 호한야 선우 밑에 있던 흉노 집단을 남흉노라고 하였는데 이들은 황하를 건너 산서山西 지역에 정착하였다. 남흉노는 중앙부를 관할하는 선우와 좌익을 관할하는 좌현왕, 우익을 관할하는 우현왕 등 흉노의 전통적인 통치체제를 모두 갖춘 소왕국이었다. 한나라 영토 내의 나라였던 셈이다. 한나라는 이 남흉노 집단을 북흉노와 다른 오랑캐들을 막을 번병으로 이용하였다. 삼국시대의 위나라 즉 조조 때 와서는 남흉노의 자치권을 빼앗고 남흉노를 5부로 재편하였다.
우리가 살펴볼 유연劉淵(250-310)은 이 흉노 집단의 우두머리가 된 인물이다. 그는 5부의 하나인 좌부左部의 부장 유표劉豹의 아들이다. 5부의 부장은 한나라가 흉노 집단을 통제하려는 뜻으로 제정한 것인데, 원래 유표는 어부라 선우의 아들로서 좌현왕으로 임명된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유연은 흉노 좌현왕의 아들로서 흉노 왕자였던 셈이다. 유연은 어린 시절 진晉나라의 수도에 질자로 보내졌다. 질자는 단순한 인질이 아니라 흉노 집단의 충성을 보장하기 위한 장치였다. 유연은 진나라 궁정에서 흉노 왕자로서 대접을 받아 높은 수준의 교육도 받을 수 있었다. 중국의 경서 뿐 아니라 중국의 사서와 제자백가도 공부하였다고 한다. 진나라 조정은 그를 흉노 좌부의 우두머리에서 흉노 5부 전체의 통솔자인 ‘5부 대도독’으로 임명하였다. 유연은 남흉노의 왕, 선우가 된 것이다.
유연의 명성은 널리 떨쳐졌다. 학식이 뛰어났을 뿐 아니라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도 훌륭하였다. 《진서晉書》 유원해전劉元海傳에 따르면 그가 진나라 질자 신세로부터 벗어나 고향인 산서로 돌아왔을 때 흉노 5부의 준걸들 중에 그를 찾아오지 않은 자가 없고, 먼 지역의 뛰어난 선비들 또한 천리 길을 멀다 않고 그와 사귀었다고 한다. 원해元海는 유연의 호이다. 당나라 초기에 편찬된 《진서》는 당고조 이연의 이름인 연을 피하기 위해 유연을 유원해로 불렀다.
유연은 진나라가 사마씨들 사이의 권력투쟁으로 정치적 혼란에 빠지자 이를 틈타 흉노국을 세웠다. 그는 흉노 왕의 칭호인 선우에다 클 대大자를 붙여 ‘대선우’라 하였다. 그러나 나라 이름은 ‘한漢’이라 하였는데 이는 자신의 가문이 한고조의 외손으로서 ‘삼조三祖’ 즉 한고조와 광무제, 소열제 유선(유비의 아들)의 가업을 이어받아 한나라를 되찾는다는 의미였다. 흉노 제국의 건국자 묵특 선우의 후손으로서 유연은 분명 연제씨였지만 한고조의 외손이라는 것을 내세워 유씨를 칭하고 나라 이름도 한이라 한 것이다.
중국인들은 유연이 세운 한나라를 기존의 한나라와 구분하기 위해 ‘북한北漢’이라 불렀다. 북한은 유연의 친척인 유요劉曜에 의해 국명이 조趙나라로 바뀌었다.
남흉노국의 나라 이름을 이렇게 중국식으로 지은 것이나 흉노 선우의 성을 유씨로 내세운 것은 남흉노가 중국화된 것을 드러내주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소수 이민족 집단인 흉노가 중국을 통치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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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김씨 왕가의 시조가 된 흉노 왕자
한국의 성씨 가운데 김씨가 제일 많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한국인 다섯 명 가운데 한 사람은 김씨이다. 김씨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은 금관가야의 김수로왕을 시조로 하는 김해 김씨이고 그 다음으로는 경주 김씨이다. 천년 왕국 신라의 시조는 박혁거세였지만 56명의 왕들 가운데 38명이 김씨였다. 13대 미추왕(재위 262-284)이 김씨로서 처음 왕위에 올랐다. 석씨인 점해왕이 아들이 없어서 미추를 왕으로 옹립했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미추는 처인 광명부인이 점해왕의 형이자 선왕인 조분왕의 딸이어서 그 덕을 보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에는 아직 김씨 세력이 강했던 것 같지는 않다. 미추왕 사후 왕권은 다시 조분왕의 아들에게로 돌아간다. 17대 내물왕 때 김씨가 다시 왕위에 올랐는데 내물왕은 미추왕의 사위였다. 당시 신라에는 족내혼 즉 친족 간에도 혼인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내물왕이 어린 아들을 남기고 죽자 같은 김씨인 실성이 왕이 되었다. 실성왕 역시 미추왕의 사위였다. 이후 김씨들이 왕권을 계속해서 장악하였다. 신라 말 박씨들이 15년간 잠시 왕권을 잡은 시기가 있었는데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 55대 경애왕) 이를 제외하면 내물왕 때부터 김씨 왕가가 줄곧 신라를 지배했다고 할 수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미추왕의 선조 즉 김씨 왕가의 시조는 ‘김알지’였다. 4대 임금인 석탈해 때에 계림 숲에서 발견한 금궤에서 아이가 나왔는데 그 아이가 바로 김알지였다. 금궤에서 나와서 성을 김씨라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알지가 세한을 낳고 세한이 아도를 낳고 아도가 수류를 낳고 수류가 욱보를 낳고 욱보가 미추왕의 아버지 구도를 낳았다고 계보를 들고 있다. 이를 보건대 《삼국사기》는 김씨 왕가의 시조를 알지까지 소급시키고 있다.
그런데 18세기에 발견된 신라 문무왕비에서는 신라 김씨 왕가의 뿌리를 언급하면서 ‘화관지후火官之后’로부터 내려와 ‘투후秺侯’에게로 이어진다고 하였다. 화관지후가 누구를 말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중국의 전설적 제왕 순임금을 말한다는 주장도 있고 소호금천씨를 말한다는 주장도 있다. 시조를 이렇게 고대의 전설적 제왕에 연결시키는 것은 한국의 성씨들에서도 많이 찾아볼 수 있는 현상이다. 그런데 ‘투후’는 다르다. 투후는 한무제 때 흉노 왕자인 김일제金日磾의 칭호로서 역사적 인물이기 때문이다. 김일제는 흉노 휴도왕의 아들로서 BCE 123년 기련산 전투에서 한나라 군대의 포로가 되어 한나라로 붙잡혀왔던 사람이다. 당시 그의 나이는 14세, 동생 윤과 함께 궁정의 말을 기르는 일을 하게 되었다. 키가 크고 용모가 준수했을 뿐 아니라 맡은 일도 잘 해내고 태도도 훌륭하였다. 그는 곧 한무제의 눈에 띄어 한무제의 최측근 신하가 되었다. 일제는 무제를 암살하려는 음모에서 임금의 목숨을 지켜낸 공로로 제후에 봉해졌는데 그 봉호가 ‘투후’였다.
한무제는 또 일제에게 김씨 성을 하사하였는데 이는 기련산 전투에서 한나라 군대가 일제의 부친인 휴도왕으로부터 약탈한 금인金人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문무왕비문에서 신라 김씨 왕가의 시조를 역사적 인물인 흉노 왕자 김일제로 언급한 것은 그냥 꾸며낸 이야기로 볼 수 없다. 신라인들이 굳이 흉노 왕자를 높일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신라 김씨들이 자신들이 김일제의 후손이라는 것을 믿고 있었음은 20세기 중반 중국에서 발견된 한 비문에서도 분명히 입증되고 있다. 1954년 중국 시안시 교외에서 출토된 당나라에 살던 김씨 부인의 비석이다. 이 비문에서는 김씨의 연원을 소호금천씨라 하고 그 다음 중시조로 김일제를 들고 있다. 그에 의하면 김일제는 시중侍中과 상시常侍의 직을 지냈고 투정후秺亭侯에 봉해졌으며 이후 김일제 가문은 7대에 걸쳐 한나라 조정에서 벼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한나라에서 난리가 일어나자 난을 피해 요동遼東에 숨어 살게 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요동은 먼 동쪽이라는 의미로 한반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문무왕비와 대당고김씨부인묘비 등에서 보이는 것처럼 김일제 후손들은 신라로 이주하여 신라 사회에서 유력한 집단으로 부상하여 결국은 신라 왕권을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 아닐까? 흉노계 김일제 후손들이 신라 왕권을 차지하게 되었던 것은 앞에서 본 남흉노의 유연이나 그 일족과는 달리 무력에 의해서가 아니었다. 그들은 우리가 모르는 어떠한 장점을 살려 사회적으로 성공을 거두어 유력 가문으로 부상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중국과의 무역을 통해 부를 쌓았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