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에서 존재, 존재자, 신

1. 존재와 존재자의 차이: 함께 속함

‘왜 없지 아니하고 오히려 있는가?’

‘있음’[존재]은 서구 시원의 희랍인들이 경험하듯 놀랍고 단순한 것이다. 그렇지만 존재는 어떤 것(something)이 아니다. 그렇다고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존재 덕분에 존재자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고 만지고 접하는 모든 존재자들은 존재(에 속하는) 존재자이다. 반면 존재가 머무는 유일한 장소는 존재자이다. 존재는 존재자를 넘어 혹은 배후에 따로 떨어진 초월적인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로 보면 존재는 존재자(에 속하는) 존재이다. 존재와 존재자는 이렇게 서로 속해 있다. 따로 떨어지지도 않지만 섞이지도 않는다. 존재는 존재자와 다르다고 할 때, 그 차이는 단순히 구별만은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같은 공속성을 말한다. 즉 여기서 차이는 ‘다르지만 동일한 것’을 말한다. 이를테면. ‘不相離 不相雜’ 혹은 ‘不二不一’의 사태이다.

 

2. 존재, 놀랍고 단순한 것

어떤 것이 아닌 존재는 개념적으로 규정할 수 없다. 흔히 어떤 것에 말하듯 ‘Es ist ~ ’(그것[존재]은 ~이다)라고 말할 수 없다. 존재자가 아닌 존재는 명사적 포착을 항상 벗어난다. 그런 접근은 무용하다. 존재를 망각한 서구 형이상학의 틀 안에서 “‘이성’ 속에서, ‘정신’ 속에서, ‘사유’ 속에서, ‘로고스’ 속에서, 모종의 ‘주체성’ 속에서 근거 짓고자 하는 어떤 시도도” 결코 존재의 본질을 구제할 수 없다. 그럼에도 형이상학적으로 파악하려 할 때 저 놀랍고 단순한 것의 매혹은 어둠 속에 숨는다. “자연은 모든 현실적인 것들에 현존하는 ‘놀라운’ 것이다. 그렇지만 자연은 결코 현실적인 것들 사이 어딘가에서 하나의 개별적인 것으로 만날 수 있는 게 아니다. … 도처에 있는 ‘놀라운’ 것 자체는 현실적인 것들로부터 구성된 어떤 설명에서도 빠져나간다. 이미 현재하면서 모든 낱낱의 접근을 눈에 띄지 않게 거절한다. 인간의 조작이 이를 기도하거나 신의 작용을 끌어들이면 놀랍고 단순한 것은 부서지고 만다.”

‘道可道非常道.’ 노자에게 상주常住하는 도는 어떤 무엇이 아니라 현묘한 조화이다. 하이데거에서 존재는 명사가 아니라 늘 머무는 ‘함’이며 그 ‘함’의 현묘함은 비은폐, 탈은폐에 있다. ‘열어 밝혀짐’, ‘스스로를 밝힘’, ‘밝게 트임’ 등. 또 하이데거는 말로 할 수 없는 존재(Sein)의 동사적 의미를 살리기 위해 옛 말인 ‘Seyn’으로 적기도 하고 나중에는 이 말에 ‘☓’를 긋기도 한다. 이밖에도 주어가 숨겨진 ‘Es gibt Sein’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이 독일어 문장은 영어의 ‘There is ~’에 해당한다.

 

3. 비은폐로서의 존재가 말해주는 것

존재의 본질이 비은폐라는 데는 다음의 사실들이 이미 함축돼 있다.

첫째, 비은폐는 언제나 은닉 또는 감춤에서 열어 밝혀짐을 말한다. 밝음은 어둠과 망각을 찢고 스스로 내보이는 것이다. 동시에 비은폐는 다시 은닉으로 물러서기 마련이다. 그래서 비은폐로서의 존재는 은닉과 비은폐 사이의 머묾이다.

둘째, 위의 머묾이란 규정에는 존재가 시간함축적, 공간함축적이란 것을 말해준다. 언제나 머묾은 머무는 때와 머무는 곳으로써 일어난다.

셋째, 존재와 존재자의 차이, 즉 둘의 함께 속함은 다음과 같은 것으로 드러난다. 둘의 차이는 존재가 스스로 열어 밝히면서 그 밝음 안에 존재자를 감싸 그 자체로 존재하게 하는 존재 진리로써 일어난다.

넷째, 존재에 대해 ‘존재는 밝게 트임이다.’, ‘존재는 열어 밝혀진다.’라고 기술하는 한편 ‘존재는 스스로를 환히 열어 밝힌다.’, ‘존재가 스스로를 내준다.’라고 말할 수 있다. 존재의 밝게 드러남이란 자동의 사건은 스스로를 밝힘, 내줌이란 타동의 사건이기도 하다. 하이데거 존재 사유에서 자동과 타동이나 주어와 목적어 등의 구별은 해체된다. 존재와 존재자의 공속성을 포함하여 하이데거의 존재 진리에 대한 설명은 서구 로고스와 그에 의해 규정된 언어와 문법으로써는 그의 사유를 올바로 대면할 수 없다는 것을 알려준다.

다섯째, 존재는 현상학의 주제가 된다. 현상학에서 ‘현상’의 형식적 의미는 ‘그것 자체로부터 스스로를 내보임’이다. 그래서 비은폐, 즉 열어 밝힘인 학문으로서의 현상학이 다뤄야 할 “탁월한 의미의 현상”이다. 현상학은 “존재론의 주제가 돼야 할 것에 대한 접근 양식이며 그것을 증명하며 규정하는 양식”이 되고 존재론은 오직 “스스로 내보이는 것이 그것 자체에서부터 나타나는 그대로 그것 자체로부터 보이게” 하는 “현상학으로서만 가능하다.”

현상은 인간을 포함하여 자기 바깥의 다른 어떤 것의 작용이나 개입 없이 그 자체로부터 그리고 숨기거나 왜곡 없이 온전히 스스로를 내보이기에 참이다. “사실 자체에로” 그래서 현상학에서는 내보이는 현상인 사실 그대로가 진실이다. 卽事卽眞이다. 하이데거가 현상학을 통해 존재 물음을 위한 방법을 찾고 서구 시원의 그리스에서 피시스로 이해된 존재가 알레테이아로 경험되었다는 것을 발견하면서, 그의 사상은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뚫는 데 성공한다.

여섯째, 비은폐 또는 발현으로서의 존재는, 마치 빛이 공기를 필요로 하듯 밝게 트임이 일어날 수 있는 개방된 장을 요구한다. 인간은 존재를 향해 열린 사유로써 그 역할을 떠맡는다. 인간은 존재의 터[현존재]로써 자신을 바치는 것이다. 인간의 존재론적 우월함은 여기에 있다. 그리고 인간 현존재가 여는 개방성은 존재가 현성하는 시공간의 영역과 동일하다.

 

4. 존재와 신

신은 서양 철학에 다음과 사정으로 들어왔다. 근거들의 연관을 수립하여 세계를 가지적可知的인(intelligible) 것으로 만들려는 형이상학은 그 자체 사고의 특성상 근거가 계속해서 꼬리를 잇는 무한퇴행의 위기에 처한다. 이런 논리적 궁지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다른 모든 것의 최종 원인이면서 그 자신의 근거는 자기 밖에 두지 않는 최고의 존재자가 요구된다. 신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신은 스스로가 자기 존재의 원인인 최고의 존재자[causa sui]이다. “형이상학은 사유의 사실이 존재이고, 그러나 이 존재는 로고스, 기체基體, 실체, 주체 등 다양한 방식으로 근거로서 있기에(wesen) 신을 향해 사유해야 한다.” 결국 근거를 캐묻는 논리적 추론이 신을 끌어들인 혹은 ‘낳은’ 셈이다. 따라서 형이상학의 신론神論은 엄밀하게 보면 “논리적인 지평과 존재론적 지평 또는 ‘우리에게로’와 ‘있는 그대로’의 혼동”이다.

하이데거는 형이상학의 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이 신에게는 우리는 기도할 수도 없고 자신을 바칠 수도 없다. causa sui 앞에서 두려움으로 무릎을 꿇을 수도 없고 음악을 연주하거나 춤출 수도 없다.” 하이데거는 아마도 그런 입장에서 신에 관한 한 정직한 철학이라면 무신론의 입장을 취한다는 얘기를 했을 것이다. “철학적 연구는 무신론이며 무신론으로 남는다. 오직 철학이 적절하게 무신론일 때 신 앞에 정직하다.” 하이데거는 심지어 ‘기독교 철학’이란 ‘나무로 된 얼음’이란 말처럼 어울리지 않는 개념이라고까지 말한다.

또한 서양 형이상학에서 신은 최고 존재자이면서 존재 자체여야 한다. 그래서 플라톤의 최고 존재자인 선의 이데아는 가장 완전한 이데아로서 이데아 자체이며,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신은 형상 자체, 가장 순수한 형상이다. 두 철학자에게서 이데아와 형상은 각기 존재자의 존재에 해당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를 보면 모든 존재자는 물질인 질료와 해당 사물의 가지적 본질이라 할 형상으로 구성된다. 존재자의 존재는 질료를 통한 형상 실현의 활동이다. 여기서 질료는 유한성의 조건이다. 사물들은 질료를 통해 형상을 목적으로 추구하지만 또한 질료의 제약으로 형상의 완전한 실현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질료가 끼어들지 않은 순수 형상의 신적 존재자는 정신적인 것으로서 완전한 현실태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존재론에서도 신은 존재 자체이다. 피조된 모든 것들의 존재는 본질과 실존의 유비적 합으로 구성돼 있다. 피조된 것들은 그들이 품부한 형상적, 가지적인 본질과 그 본질을 실현하는 현실적 활동이 일치하지 않는다. 어떤 것도 제 본질로 존재하지 못하는, 이른바 ‘본질과 실존의 쓰라린 차이’가 유한성이다. 반면 신은 유일하게 본질과 실존이 같은 존재 자체이다.

최고 존재자인 신과 모든 존재자에 공통적인 존재가 다르다면 그래서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서로 포섭하지 않는다면 신은 아니고 모든 존재자에 존재는 존재가 아니다. 그럼에도 형이상학은 존재의 하이어라키에서 정점에 있는 최고 존재자, 신적 존재자가 동시에 모든 것에 내재하는 보편적 신성일 수 있는지, 다시 말해 양자의 동일성이 어떻게 가능한지 충분한 설명을 내놓지 못한다. 이는 무엇보다도 A는 B에 속하고 다시 B는 A에 속한다는 공속성 혹은 되먹임은 형식 논리학에서 순환의 오류로서 기각, 기피되는 것과 관련돼 있을 것이다. 이러한 답보 상태가 기독교 삼위일체론이 미제로 남는 가장 큰 이유가 될 것이다. 더욱이 그것은 신과 존재, 인격적 최고신과 내재적 보편적 신성이 서로 속하며 일치를 이루는 방식에 대한 깨달음이 없다면, 또 ‘필리오케’이란 말에서 나타나듯 동일한 삼위 사이에 서열을 짓는 형이상학적 사고와 시간은 불가역적이란 직선적 시간관을 버리지 않는다면, 삼위일체 해명은 영구미제로 남을 것임에 분명하다.

하이데거는 횔덜린과 함께 당시의 현실을 ‘이미’ 가버린 신들과 ‘아직’ 오지 않는 신들이라는 이중의 부재不在에 놓인 궁핍한 시대로 의식하면서, 존재에서 신을 눈짓하는 성스러움의 흔적을 본다. 그에 따르면 존재의 진리는 신의 도래가 결정될 터전이다.

하이데거에서 존재는 존재자와 관련해서 보면 존재하게 함이다. 존재는 존재자를 그 자체로서 존재하게 함이다. 그리고 그에 따르면 ‘~을 그 자체로 존재하게 함’, ‘~을 온전히, 제대로 있도록 함’은 구원이며 성스러움이다. 하이데거는 성스러움을 새로운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존재 또는 존재의 진리는 단지 중립적인 구조적 개방성일 뿐만 아니라 현존재를 구원으로 이끌고 그리하여 접근할 수 없는 신비를 통해 그 자신을 성스러움으로서 보여주는 것일 수 있다.” 나아가 성스러움은 신성과 신을 소환한다. 하이데거는 ‘존재하게 함’이 여는 성스러움은 신들이 떠나버린 흔적이자 신성이 나타나는 “신성의 본질공간”이며, 신성은 “그 자체 다시금 오직 신들과 신을 위한 차원만을 허용한다.”라고 말한다. 하이데거 설명 속에 존재[사랑]-성스러움-신성-신은 밝게 빛나며 일련一連의 고리를 이루고 있다. “존재의 진리로부터 비로소 성스러움의 본질이 사유될 수 있다. 성스러움의 본질로부터 비로소 신성의 본질이 사유될 수 있다. 신성인 지닌 본질의 빛 속에서 비로소 ‘신’이라는 낱말이 무엇을 가리켜야 하는지 사유되고 말해질 수 있다.”

하이데거에게는 존재의 진리가 새로운 신 혹은 “마지막 신”이 현현顯現할 장소이다. 그에게는 신성과, 성스러움이 깃든 존재를 잊고 사는 게 허무주의며 신들이 부재한 궁핍한 시대이다. 그래서 어떤 식으로든 신의 출현에 관한 결정은 “오직 존재의 가까움에서만 이뤄진다. 하이데거는 『철학에의 기여(Beiträge zur Philosophie)』에서 존재의 진리를 자기 출현의 공간으로서 필요로 하는 혹은 그 영접의 마당을 기다리는 “마지막 신”에 관해 언급한다. 이 밖에 하이데거는 사후死後 공개를 약속하고 진행된, 독일의 저명한 슈피겔지誌와의 인터뷰에서 “오직 신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라고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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