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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 개념의 성격
서양 고전철학에서는 ‘존재’와 ‘존재자’를 구분하지 않았다. 오직 현상계의 생성변화하는 것을 야기하는 ‘근원=시작’ 점이 무엇인가를 탐구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이오니아 철학과 엘레아 철학으로 구분되는데, 전자의 경우는 ‘근원’이 분할하여 현상계의 다양한 것들이 생겨나온다는 주장이고, 후자의 경우는 ‘근원’은 논리적으로 불변하고 나눠질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존재’란 개념은 후자의 입장에서 쓰여지게 된다.
‘존재’ 개념을 처음으로 쓰기 시작한 자는 이탈리아 엘레아(Elea) 지방 태생의 철학자, 파르메니데스(Parmenides, BCE 515?~450?) 이다. 그는 소크라테스 이전 그리스의 주요학파 중 하나인 엘레아 철학의 비조鼻祖이다. 그의 일반적인 학설은 주요저작 중에 남아 있는 약간의 단편들이 있다.
파르메니데스는 진정으로 실재實在하는 ‘근원’에 대한 것을 ‘존재’란 개념으로 정의한다. ‘존재’는 그리스어로 ‘존재하는 것(to on)’이고, 영어로는 ‘The Being’이다. 그가 말하는 ‘존재’의 본질적인 규정은 논리적으로 불생불멸不生不滅하는 것이고, 불변부동不變不動하며, 또한 쪼개질 수 없는 유일한 ‘하나[一者]’라는 특성으로 정의된다.
‘존재’가 만일 생겨났다면, 이는 ‘없는 것[無]’으로부터 생겨나든가, 아니면 ‘있는 것[有]’으로부터 생겨난다. 전자의 경우라면, 이는 자기 모순矛盾이다. 왜냐하면 ‘없는 것을 있다고 주장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없는 것’도 ‘존재’의 범주에 귀속될 수밖에 없다. 후자의 경우라면, 이는 동어반복同語反復으로 주장의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있는 것이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기 때문이다. ‘존재’가 소멸한다는 주장도 같은 논리로 증명된다.
‘존재’는 불변부동이다. 왜냐하면 ‘존재’가 변하거나 움직인다면, 이는 아무 것도 없는 빈 공간이 ‘있어야’ 하는데, 빈 공간은 ‘존재’이든가 ‘무’이든가 둘 중의 하나이다. 전자의 경우라면 동어반복이고, 후자의 경우라면 자기 모순이다. 또한 ‘존재’는 쪼개질 수도 없다. 만일 ‘존재’가 쪼개진다면 둘로 나누어질 것이고, 그러려면 제3의 것이 있어야 한다. 제3의 것은 결국 ‘없는 것’이어야 하는데, 없는 것이 있다면, 이 또한 ‘존재’이다. 따라서 ‘존재’는 전체적으로 불생불멸하고, 불변부동하는 오직 ‘하나’일 뿐이다. 그렇다면 생멸에 종속되는 현상계의 모든 것들은 전적으로 허상이요 허구로 귀결된다.
그러므로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는 불생불멸이라는 의미에서 생멸계를 넘어서 영원히 항존하는 것이고, 불변부동이라는 의미에서 사유의 진정한 대상이요, 참된 인식認識으로 자리매김 된다. 그럼에도 ‘존재’가 논리적으로 펼쳐지는 형이상학적인 진리로서, 허상으로 보이는 생멸계의 존재 근거根據가 된다는 것이다. 파르메니데스의 ‘존재’ 개념은 후에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으로 영향을 주고, 곧 서양의 형이상학적 사유의 전통으로 이어진다.
2. ‘존재’ 개념의 역사적 흐름
파르메니데스의 ‘존재’ 개념을 계승한 플라톤(Platon)은 자신의 이데아(Idea)론을 전개하게 되는데, ‘이데아’는 ‘사물을 본다’는 뜻의 ‘이데인(idein)’에서 나온 개념이고, 보는 대상은 ‘형상(eidos)’을 보는 것이고, ‘형상’은 개념으로 인식된다. 진리 인식의 대상은 감각으로 확인되는 형상이 아니라 이것들의 근원이 되는 ‘형상’, 즉 파르메니데스가 불생불멸하고 불변부동한 것으로 말한 ‘존재’와 같은 ‘이데아’들이다.
플라톤은 우선 ‘이데아계’와 ‘현상계’로 구분한다. ‘이데아계’의 ‘존재’는 각기 독립적이고, 자체로 불변적이고, 자존하므로 진리의 대상이다. 반면에 ‘현상계’의 것들은 유동적이고, 서로 혼융되어 있고, 의존해서 존재하는 것들이다. 따라서 현상계에 생멸하는 것들은 모두 임시적이고, 가시적으로 존재하는 것들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생멸계의 존재를 ‘이데아의 모상’ 내지는 ‘이데아의 그림자’라고 말한다.
플라톤의 철학에서 말하는 ‘이데아’는 모두 참된 ‘존재’이다.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는 ‘일자’이지만, ‘이데아’로서의 ‘존재’는 개념 만큼이나 무한히 많다. 그럼에도 ‘이데아’들 중의 최고의 이데아가 있다. 즉 최고의 이데아는 ‘존재 자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데아의 세계는 ‘최고의 존재’로부터 ‘나누어 가짐(diairesis)’으로 인해 분화分化하여 최 하위의 이데아들로 구성된다. ‘이데아’들은 독립적이고 자존하는 존재이지만, 서로서로 참여하는 방식으로 관계를 맺고 있다. ‘이에아’의 세계는 피라미드의 형태로 구성되어 있어서 최 상위에 최고의 ‘이데아’가 있다. 이는 최고의 존재로 절대적으로 선善하고, 일자로서 모든 이데아들의 존재 근원根源이고, 제1원인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이데아들이 현실적인 감각세계에 내재한다는 형이상학을 전개한다. 이것이 현상계에서 찾은 그의 ‘실체(ousia) 철학으로 ’본질적인 형상‘이다. 즉 이데아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감각적인 것들의 형상으로 드러나는데, 이는 유동하는 형상이 아니라 불변적인 본질적인 형상을 뜻한다. 그래서 사물들은 본질적인 형상을 온전하게 실현하기 위해 끈임없이 운동변화하는데, 그 중심 원인은 형상인, 질료인, 작용인, 목적인으로 규명된다. 그러나 본질적인 형상은 현실에서는 온전하게 실현되지 못하고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면서 불완전한 형상으로 지속될 뿐이다. 예컨대 인간이 인간을 낳아 지속하지만 온전한 인간의 본질을 실현하지는 못하는 이치와 같다. 그럼에도 아리스토텔레스는 운동변화의 근원으로 형상들의 형상, 최고의 형상을 전제한다. 이는 온전하게 실현된 것으로 운동변화가 전혀 없는 ‘부동의 원동자’이다. 이로부터 ‘부동의 원동자’는 후에 형이상학을 연구하는 자들에 의해 진정으로 존재하는 ‘일자’요, 근원의 존재로서 ‘신’이라고 부르게 된다.
그리스 말기에 기독교 철학의 플로티노스가 등장한다. 그는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들 중의 이데아를 존재자체라 하여 ‘일자’로 본다. ‘일자’는 절대적인 존재로 선이요, 곧 기독교에서 말하는 절대적인 ‘신’이다. 그는 현상계의 모든 것들이 ‘일자’로부터 수많은 이데아(형상)들이 유출되어 나오고, 그 형상들로부터 감각적인 사물들이 유출되어 창조되는데, 형상들을 얼마만큼 온전하게 받아내느냐에 따라 인간, 동식물, 무기물, 그리고 암흑들이 나온다고 주장한다. 이는 마치 빛의 근원인 ‘태양’에서 빛이 흘러나오고, 멀어지면 어두어지는 이치와 같다는 것이다.
플로티노스 이후 서양 중세기에 접어들자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계승한 교부철학의 선구자 아우구스티누스가 등장한다. 그는 이데아들을 신국으로 옮겨놓는다. 그리고 신국과 현상계의 지상국으로 나누어 기독교의 신론을 정립하는데, 여기에서 신은 이데아들 중의 이데아다. 즉 완전한 것, 절대적인 것, 불생불멸하는 것은 ‘선한 것’이고, 선한 것들 중의 선은 ‘선 자체’요, ‘존재 자체’요, 진리자체요, 최고의 ‘신’으로 규명한다.
3. 하이데거(M. Heidegger)에서 ‘존재(Sein)’와 ‘존재자(Seindes)’
하이데거는 서양철학의 사유에서 탐구의 중심과제가 ‘존재란 무엇인가’를 묻는 것으로 보고, 자연철학자들이 역동적으로 생동하는 ‘자연’에 대한 존재를 무었다고 본다. 그리하여 그는 이러한 전통적인 존재론의 역사를 뒤집는다. 그는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에서 “도대체 존재는 왜 있고 오히려 무無는 없는가?”라고 묻는 것을 자신의 철학적 연구과제임을 선언한다. 그래서 그는 유럽 전통의 철학이 “존재Das Sein)”에 대한 탐구가 아니라 “존재자(Das Seiendes)”에 대한 탐구였다고 하면서 존재망각의 길을 걸었다고 역설한다.
하이데거는 전통적인 존재론을 파기하고, 존재 자체의 의미를 물어 새롭게 밝히려고 시도하는데, 여기에서 ‘존재’와 ‘존재자’를 명백히 구분짓는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론은 ‘존재자’가 ‘무’ 가운데서 개시되는 ‘존재’의 의미를 해명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존재자’는 사물의 현상이나 존재양식을 말한다. ‘존재자’는 하늘, 땅, 신神, 바다, 책상, 나무, 행위 등, 개념으로 ‘존재하는 것’을 지칭하고, 반면에 ‘존재’는 “존재자를 존재자이게 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이성적으로 사유하여 개념으로 만들어 낸 모든 것은 단지 ‘존재자’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에 최고의 존재자인 신을 포함하여 ‘존재자’가 어떻게 참다운 존재자가 되는가에 대한 물음, 즉 ‘존재자의 근원’이 되는 의미의 ‘존재 자체’에 대한 물음을 제기한다.
‘존재 자체’는 모든 존재자를 근원적으로 밑받침 하는 지주支柱이다. 이것이 만유萬有에 깃들어 있는 진정한 ‘존재’의 의미이다. ‘존재’에 대한 파악의 방법은 모든 존재자의 근원을 묻는 상태에서 ‘무’를 꿰뚫어가는 과정에서 ‘존재 자체’를 체험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무’는 존재자에 대한 ‘무화無化’로서 타자他者를 뜻하는 ‘무’인데, 하이데거는 이를 ‘존재의 면사포(der Schleier des Sein)’라 부른다. ‘존재의 면사포’란 ‘무’를 꿰뚫어가는 과정에서 ‘존재’가 스스로 참모습을 드러내기도 하고, 은폐하기도 하는 단면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면사포’에 감춰진 ‘존재 자체’는 대상화될 수 없고, ‘존재자’로 표현되는 개념이나 사유에 의해서도 파악될 수 없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입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