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는 『사유란 무엇인가?』에서 흔히 사유와 동일시되는 표상함(Vorstellung)에 대해 묻는다. 그는 이때 지식이 많은 오만이 아니라 무지의 조심스러움이란 이유를 달아 비학문적으로 문제에 접근한다. 표상함(Vorstellung)을 ‘앞에’(vor)와 동사 ‘세우다’(stellen)으로 해체한다. 그리고서는 한 꽃피는 나무를 두고 ‘표상하다’ 대신 ‘나무가 스스로를 우리 앞에 세운다.’, ‘나무가 우리 앞에 서 있다.’라고 말한다. ‘나무와 우리는 마주하고 있다.’ ‘Vorstellung’을 어떤 이론적 지식이나 통상적 이해의 개입 없이 문자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우리 머릿속을 어지럽게 돌아다니는 표상들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것은 하이데거에게 학문의 통상적 영역에서 뛰어내리는 것이다. 이때 하이데거는 우리가 어디로 뛰어내린 것인지 자문하면서 그곳은 깊이 모를 나락이 아니라 하나의 토대이며 단지 하나의 토대가 아니라 “인간이 살고 죽는 곳”이라고 밝힌다. 그렇다면 우리는 원래 서 있던 곳으로 도약한 셈이다.
새롭게 뛰어내린 본래의 터전에서는 머리나 의식을 가진 주관이 아니라 존재하는 그대로의 우리가 꽃피는 나무 앞에 서 있고 이러저러한 무엇이 아니라 나무로서의 나무가 우리 앞에 서 있다. 여기서 주체가 우리인지 나무인지, 아니면 둘 다이거나 둘 다 아닌지, 나무와 우리 사이 누가 혹은 무엇이 선행하는지 묻는 것은 의미 없다. 도약하기 이전, 달리 말하면 나무와 우리를 있는 그대로 세우지 않고 어떤 식으로든 제약을 가하고 나서야 가능한 2차적인 물음일 따름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들 자신인 인식 주관에서 마주한 꽃피는 나무에 대한 표상이 어떻게 나타나고 구성되며 과연 주체내재적인 그것은 외부의 실재하는 것인지 물으며 여전히 학문에, 나아가 철학에 매달리고 있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이데거는 묻는다. “아니 나무가 의식 안에 있는가 아니면 초원 위에 있는가? 초원은 체험으로서 영혼에 있는가 아니며 저 대지 위에 펼쳐져 있는가? 대지는 머리 속에 있는가 아니며 우리가 대지 위에 있는가?” 그리고 하이데거는 우리가 나무에 대한 물리학적, 생리학적 지식을 위해 쓰러뜨려서는 안 되며 그것이 원래 서 있던 곳에 서 있게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때 그곳에 우리도 비로소 우리의 본질로 대지 위에 거주한다. 나무도 우리도 참답게 들어선 곳은 의식이나 머리, 영혼이 아니라 오늘 강연에 오려고 했으나 아침에 죽기도 하는 ‘인간이 살고 죽는 곳’이다. 아니 본래의 내가 살고 비본래의 내가 죽는 곳이다. 그래서 죽기 전에 죽어 죽을 때 죽지 않는 곳이다.
코이치 츠지무라(Koichi Tsujimura; 1922-2010)는 1969년 하이데거의 고향 메쓰키르히에서 개최된 하이데거 80회 생일 축하 모임에서 축사를 한다. 그는 일찍이 교토대학에서 하이데거에 관해 세계 최초로 주해서를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타나베 하지메의 지도 아래 철학을 공부하고 또 그의 후임 교수가 되었던 인물이다. 그 또한 하이데거 사유와 선불교 텍스트를 서로 조명하면서 양자에 대한 참신한 해석을 내놓았으며 선불교와 유럽 철학의 관계에 대한 그의 연구는 그의 작업은 독일의 철학 교수들이 동아시아 불교의 텍스트들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하이데거 생일을 기리는 축사에서 하이데거와 일본의 선불교 사이 독특한 관계에 대해 설명하며 ‘꽃피는 나무’에 상응하는 또 다른 나무를 든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조주趙州 선사의 ‘뜰 앞의 잣나무’이다. 조주 선사는 “무슨 이유로 중국 선종의 개조開祖인 달마 대사가 중국에 온 것입니까?”라는 한 승려의 물음에 “뜰 앞의 잣나무니라[庭前柏樹子].”라고 답한다. 승려는 한 객체를 빌려 가리키지 마라고 따지며 다시 묻는다. “무슨 이유로 중국 선종의 개조인 달마 대사가 중국에 온 것입니까?” 선사는 똑같은 물음에 똑같이 대답한다. “뜰 앞의 잣나무니라.”
코이치 츠지무라는 선사의 답에서 달마가 동쪽으로 온 까닭을 온갖 분별을 여의고 뜰 앞의 잣나무를 그 자체로서 보라는 가르침을 펴고자 하는 데서 찾는다. ‘나무가 잘 자랐어.’, ‘이 나무는 사과나무야.’, ‘올해는 나무의 결실이 얼마 안 돼.’, ‘고운 소리로 노래하는 새들이 이 나무를 찾지.’ ‘이 나무는 학명學名이 뭐고 주요 서식지는 어디야’ 등. 나무에 덧댄 이러저러한 나무 외적 규정들을 떼어내고 내가 표상하는 주체라는 의식마저 내던지면 적연寂然한 가운데 빛이 트이며 나무가 나무로서 들어서고 우리 역시 비로소 참답게 대지에 거주한다. 그런데 승려는 번개처럼 한 순간에 내리치는 선사의 답을 알아듣지 못하고 질문을 되풀이했다. 코이치 츠지무라는 승려가 그와 잣나무가 이미 서 있는 지반에 도약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표상함’으로부터 ‘앞에 세움’으로 뛰어 들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그 때 승려와 잣나무가 그 자체로 존재하는 영역, 바로 우리가 살고 죽는 존재 진리의 장이 열린다고 말한다. 그는 그 얘기에 앞서 선불교에서 이런 말을 인용한다. “당나귀는 우물을 들여다보고 우물은 당나귀를 들여다본다. 새는 꽃을 바라보고 꽃은 새를 바라본다.” 굳이 한 마디 보태면 ‘대관절 여기에 뭐가 더 있는가?’
그런데 노래하는 작곡가인 악뮤의 리더인 이찬혁이 조주선사보다도 코이치보다 어린 나이에 ‘낙하’를 노래한다. 그가 아예 두 사람을 모를 수도 있다. 아이유와 콜라보로 발표한 노래에서 이찬혁은 이렇게 말한다. “… 눈 딱 감고 낙하- 하-/ 믿어 날 눈 딱 감고 낙하/ 초토화된 곳이든/ 뜨거운 불구덩이든/ … 보여주자 웃을 준비를 끝낸 그들에게/ 아무것도 우리를 망가뜨리지 못해 … 셋 하면 뛰어 낙하- 하-/ 핫 둘 셋 숨 딱 참고 낙하” 하이데거와 선은 우리가 뛰어내린 곳은 사실 우리가 이미 있는 곳이라고 말한다. 어린 시절에 집 안의 웃음을 떠맡았을 만큼 명랑하던 동생(이수현)이 뒤늦게 극심한 슬럼프로 힘들어하자 그녀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만든 노래라는 후문도 들린다. 우리도 이찬혁의 구령에 맞춰 아이유랑 이수현이랑 눈 딱 감고 냅다 뛰어들 일이다. 핫 둘 셋 낙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