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족과 로마제국

  1. 흉노와 훈족

로마제국은 4세기 후반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기 시작한다. 다뉴브 강 북쪽에 살던 게르만족인 고트족이 대거 난민으로 유입되면서였다. 376년 오늘날의 우크라이나 지역에 살던 20만 명이 넘는 고트족이 로마제국 북쪽 국경인 다뉴브 강변으로 몰려와 자신들을 받아줄 것을 간청하였다. 로마당국은 이들을 부족한 병력자원으로 이용할 수 있다는 계산 하에서 받아주기로 하였다. 그러나 지금도 그렇지만 대규모 난민을 관리하기는 쉽지 않았다. 2년 뒤인 378년 고트족은 로마당국의 비인간적인 대우에 분노하여 폭동을 일으켰는데 이는 로마군과의 대규모 충돌로 비화되었다. 역사에서 ‘고트전쟁’이라 불리는 이 전쟁에서 로마제국은 난민부대를 진압하지 못해 동로마의 발렌스 황제까지 전사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이것이 역사에서 유명한 아드리아노플 전투이다.

발렌스의 뒤를 이어 동로마 황제로 임명되었던 테오도시우스 1세는 군지휘관으로서 능력을 인정받아 황제의 자리에 올랐던 것이지만 고트족을 완전히 제압하지 못했다. 그는 결국 382년 고트족과 협정을 체결하고 이들에게 로마의 동맹으로서 로마영역 내에서 살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그리하여 고트족은 트라키아 일대에 정착하게 되었다.

고트족과 함께 알란족과 로마 영토내로 들어오게 되었다. 알란족은 게르만계인 고트족과는 달리 이란계 유목민족이었는데 흑해 북안에 살던 이 두 족속들을 압박하여 난민사태를 초래한 것이 훈족이었다.

훈족은 중앙아시아 초원지대를 거쳐 흑해 연안 초원으로 이주한 사람들이었는데 많은 전문가들이 한나라에 의해 만리장성 북쪽에서 쫓겨나 서쪽으로 이주한 흉노의 일부라고 보고 있다. BCE 200년경 한나라 건국 초부터 흉노는 한나라를 군사적으로 압도하여 한나라로부터 조공을 받아왔으나 BCE 1세기 중반에는 지배층 내의 내분으로 동흉노와 서흉노로 갈라졌다. 한나라와 동맹을 맺고 중국 북방에 거주한 동흉노와는 달리 한나라와의 타협을 거부한 서흉노는 중앙아시아 쪽으로 이주하였다. 다시 한 세기 후 동흉노는 남북으로 분열하였다. 남흉노는 중국 영토 내로 들어와 정착한 반면 몽골 초원에 남아 있던 북흉노는 한나라와 남흉노의 공세에 시달린 끝에 오늘날의 중국의 신장성 서북부의 일리 강 유역으로 옮겨갔다. 이들의 주력은 2세기 중반에는 다시 몽골리아의 신흥세력인 선비족에 밀려 서쪽의 카자흐스탄 초원으로 이동하였다. 여전히 알타이 지역에 남았던 일부 흉노는 ‘약한 흉노’라는 뜻의 열반흉노悅般匈奴로 불렸다. (󰡔魏書󰡕 권102 서역전)

4세기 후반 로마제국의 변경 지역에 갑자기 등장한 훈족은 중국 북방의 몽골 초원으로부터 중앙아시아로 이동한 흉노의 후손들로 추정된다. 물론 훈족이 유럽 초원지대에 등장한 것은 북흉노가 중국 기록의 시야에서 사라진 때로부터 200년은 족히 지나서였기 때문에 그 두 집단 사이의 정확한 계승관계를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유럽의 훈이 흉노의 후예라는 것은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부인하기 힘들다.

 

  1. 훈족과 로마제국의 동맹관계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고트족과 382년에 체결한 협정에 의하면 로마가 영토내로 들어온 고트족을 로마의 동맹으로 삼고 그들에게 정착할 땅을 주는 대신 고트족은 로마가 요청하는 경우에는 로마에 군사력을 제공해야 하였다. 고트족은 공식적으로 로마제국의 동맹이 된 셈인데 고트족은 자신들의 우두머리를 중심으로 자치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고트전쟁 초기에 알란족, 고트족과 함께 판노니아 지방에 들어갔던 훈족도 당시의 서로마 황제인 그라티아누스 황제와 비슷한 협정을 체결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384년 게르만계 유퉁족이 오늘날의 남부 독일과 스위스에 해당하는 라에티아 속주를 침략하자 로마는 훈족과 알란족 기병대를 동원하여 이들을 격퇴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로마는 그라티아누스 황제가 죽고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동서 로마를 모두 통치하고 있었는데 그는 몇 년 뒤에 황제자리에 도전하는 황제 참칭자 막시무스를 훈족의 도움으로 무찔렀다. 테오도시우스에게 도움을 준 훈족은 당시 판노니아에 자리잡은 훈족 집단으로 보인다. 훈족의 주력은 아직 흑해 북안인 우크라이나 지역에 있었고 일부만 판노니아로 진출하였다.

405-406년 라다가이수스라는 인물이 이끄는 중부 다뉴브 지방에 살던 고트족 집단이 이탈리아로 침략한 일이 있었는데 당시 서로마제국의 실권자 스틸리코 장군은 로마군만의 힘으로 이들을 격퇴하지 못하자 훈족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당시 울딘이라는 이름의 왕이 이 훈족 집단을 다스리고 있었는데 울딘은 이탈리아로 들어온 라다가이수스의 고트족 집단을 이탈리아 북부에서 격퇴하였다. 울딘 왕은 수년 전인 400년에는 다뉴브 강을 건너 도주해온 또 다른 고트족을 공격하여 그 우두머리인 가이나스의 머리를 베어 콘스탄티노플로 보낸 적이 있다. 울딘은 로마의 동맹자로서 이렇게 로마를 도왔던 것이다.

 

  1. 로마의 실권자 아에티우스와 훈족

테오도시우스 황제(테오도시우스 1세)가 395년 죽고 나서 두 아들이 동서 로마의 황제가 되었다. 장남인 아르카디우스는 동로마를 통치하고 11세에 불과한 차남 호노리우스는 서로마 황제가 되었다. 호노리우스는 423년에 죽었는데 후사가 없었다. 그가 죽자 황제 자리를 차지한 것은 요한네스라는 문관 출신의 인물이었다. 그러나 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는 그를 황제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기 가문의 사람 즉 고모인 갈라 플라키디아의 어린 아들 발렌티아누스가 있었기 때문이다. 테오도시우스 2세에게는 요한네스는 정통성이 없는 찬탈자에 불과하였다. 그래서 그는 네 살짜리 발렌티아누스를 서로마 황제로 임명하고 찬탈자 요한네스를 정벌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였다.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는 하였지만 정통성이 약해서인지 요한네스의 부하 장군들 중에서 일부가 동로마 군대에 합세하자 요한네스는 절망적인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에게는 남은 병력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요한네스는 심복인 아에티우스를 훈족에 급파하였다. 당시 아에티우스(390-454)는 황궁의 관리를 맡아보는 직책을 맡고 있었는데 그가 훈족에게 특사로 파견된 것은 훈족의 지도자들과 친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에티우스는 서로마 군대 고위인사의 아들이었는데 그 때문에 청소년기에 훈족에게 볼모(obses)로 가서 몇 년간 지낸 적이 있었다. 당시 국가들 사이에 조약을 체결하면 그것을 성실히 지키겠다는 보장의 의미로 고위 인사의 아이들을 볼모로 보내는 관행이 있었는데 아에티우스는 로마의 볼모로서 수년간 훈족의 왕자들과 함께 지냈다. 그는 그 전에도 서고트족에 가서 3년간 볼모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아에티우스는 기마술과 궁술도 능했고 훈족과 통역 없이 대화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하는데 이는 수년간 훈족 사이에서 지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에티우스가 훈족에게로 간 사이 요한네스의 부하들이 배반하여 요한네스는 처형당하고 말았다. 심지어는 아에티우스의 부친도 처형되었는데 이 사실도 모른 채 그는 훈족 부대를 이끌고 이탈리아로 들어와 자신이 반란군의 수괴가 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토벌대상이 되었던 그는 발렌티아누스의 모친이었던 갈라 플라키디아 측과 담판을 벌여 훈족을 돌려보내는 대신 자신은 갈리아 사령관 직을 얻어내는 데 성공하였다. 당시 한 역사가에 의하면 아에티우스가 데리고 온 훈족 병력은 무려 6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러한 훈 부대 때문에 갈라 플라키디아는 아에티우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후 아에티우스는 서로마제국의 정치를 좌우하는 실권자가 되었다.

아에티우스는 서로마제국의 동맹 훈족의 도움을 받아 서로마제국의 적대세력들을 하나씩 공격해갔다. 라인 강 중류의 상부 벨기카를 침공한 부르군트족은 아예 나라가 없어져버렸다. 오늘날의 프랑스 땅 서남부에 정착하였던 서고트족은 남프랑스 쪽으로 영토를 확대하려고 하였는데 역시 훈족의 활약 앞에 그 시도는 좌절되었다. 갈리아 서북부를 휩쓴 민중반란인 바가우데 반란도 아에티우스는 해결하였다. ‘바가우데’는 갈리아의 도망노예, 탈주병, 빈농 등으로 이루어진 집단으로서 로마의 지주계급 뿐 아니라 로마제국의 지배에 저항하였는데 이 반란의 진압에도 훈족 기병대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다.

 

  1. 훈족과 로마제국의 전쟁

물론 로마제국과 훈제국의 관계가 계속 원만했던 것은 아니다. 특히 동로마 제국과는 탈주자 송환문제로 여러 번에 걸쳐 충돌이 빚어졌다. 435년에는 동로마는 훈족의 탈주자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과 몸값을 지불하지 않고 로마로 도망쳐오는 로마인 포로들을 소환하겠다고 약속하였다. 훈족은 로마의 시장에서 로마인들과 동등한 권리로 물건을 사고 팔 수 있는 권리도 보장받았다. 여기에 더해 동로마는 평화조약이 지켜지는 대가로 700 리브라의 황금을 매년 바치기로 하였다. 그러나 동로마는 약속한 공납도 제대로 지불하지 않았고 훈족 탈주자들도 돌려보내지 않았다. 441년 훈족의 아틸라 왕이 동로마 제국으로 쳐들어간 것은 이러한 약속위반에 대한 응징이었다. 발칸반도의 많은 도시와 요새들이 함락되었다. 동로마는 공납을 배로 올려줄 것을 약속하고 평화를 얻었지만 또 다시 약속을 지키지 않아 443년에도 훈의 침략을 받았다. 공납 액수와 포로의 몸값을 각각 50퍼센트 인상하고 싸움이 종결되었다.

447년에도 훈족의 공격이 있었는데 역시 동로마제국의 약속 불이행 때문이다. 447년의 원정은 훈족 뿐 아니라 훈족에 복속된 게피다이족, 고트족 등 여러 족속들이 동원되었다. 당시 훈족의 공격으로 함락된 도시만 백 개가 넘었다고 한다. 아틸라의 군대는 이번에는 그리스 본토 깊숙한 곳까지 내려가 약탈을 하였다. 동로마제국은 448년 훈제국과 평화협정을 체결하였는데 이 조약의 자세한 내용은 전해지지 않지만 하나의 조항은 역사가 프리스쿠스에 의해 전해져 온다. 신기두눔 즉 오늘날의 세르비아 수도 베오그라드로부터 불가리아 북부의 노바에까지 거리상으로는 550km가 넘는 다뉴브 강 남쪽 지대를 따라 150km 정도 폭의 무인지대를 만든다는 조항이었다. 실제로 이 완충지대는 만들어졌다. 물론 그곳에서 몰래 농사를 짓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 다음해 훈제국의 아틸라 본영을 향해 다뉴브 강 남쪽의 이 지대를 지나갔던 프리스쿠스에 의하면 중간의 나이수스 같은 큰 도시에도 주민이 없었다고 한다.

아틸라는 451년에는 서로마 쪽으로 방향을 돌려 50만 명에 달하는 대군을 이끌고 갈리아 원정을 하였다. 이제까지 서로마제국과 동맹관계를 유지하던 아틸라 왕이 서로마제국의 갈리아로 원정을 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역사가들이 여러 가지 설명을 내어놓고 있다. 갈라 플라키디아의 딸 호노리아 공주가 아틸라에게 청혼을 하자 그것을 구실로 서로마제국 영토의 절반을 요구하며 원정에 나섰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이보다 유력한 설명은 당시 프랑크족의 일부가 훈제국의 지배로부터 이탈하자 그 반발세력을 징벌하기 위해 갈리아로 갔다는 것이다. 훈제국은 여러 게르만족들을 지배하고 있었는데 프랑크족의 일부가 반란을 일으키면 다른 게르만족들도 동요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훈족에 반기를 든 프랑크족은 아에티우스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예전에는 친밀한 동맹이자 친구 관계를 유지하던 두 사람 사이에 충돌은 피하기 힘들게 되었다.

갈리아 원정에서 아틸라는 프랑크족이 사는 지역들을 평정한 후 알란족 도시 오를레앙을 공격하였으나 함락에 실패하자 동쪽으로 물러나 샬롱에서 아에티우스 부대와 싸우게 되었다. 동고트족을 비롯한 여러 게르만족이 아틸라 편에서 싸웠으며 아에티우스의 로마군 편에는 서고트족과 알란족이 가담하였다. 양측에 엄청난 사상자를 남기고 끝난 이 전투는 그 결과가 모호하였다. 아틸라는 판노니아로 회군하였는데 아에티우스측도 그를 뒤쫓지 않았다.

다음해인 452년 아틸라는 이탈리아 북부를 침공하였으나 이번에는 로마군과의 접전 없이 중간에 회군하고 만다. 로마교황이 아틸라를 찾아가 공격을 만류해서 돌아갔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믿기 어렵다. 훈 원정군내에 질병이 발생하여 회군했다는 주장도 있고 동로마제국에서 보낸 원군이 훈제국 본영이 위치한 판노니아를 공격한다는 정보 때문에 회군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이쪽이 더 설득력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동로마 군대는 훈제국에 별다른 타격을 가하지는 못했다. 아틸라는 판노니아로 귀환한 즉시 동로마에 사절을 보내 미납된 공납금을 지불하지 않으면 동로마를 황폐화시켜 버리겠다는 위협을 하였다. 역사가 우연에 많이 좌우되는지 어이없게도 아틸라는 그 다음 해에 급사하고 만다. 게르만 처녀를 새로운 신부로 맞아들이는 결혼식 날 과음해서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정확한 사인은 모른다.

 

  1. 프리스쿠스의 기록에 나오는 훈족의 모습

그리스 역사가 프리스쿠스는 동로마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가 아틸라에 보낸 사절단의 일원으로 449년 아틸라를 방문한 사람이었다. 학자인 그는 대사인 막시미누스를 수행하는 비서관이자 서기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사절단은 콘스탄티노플을 출발하여 근 한 달의 여정을 거쳐 판노니아에 있는 아틸라의 본영에 도착하였다. 프리스쿠스 사절단은 아틸라 본영에 도착하기 전 하루는 폭우를 만나 훈족 마을에 들어가 신세를 지게 되었다. 우연히도 그 마을은 아틸라의 죽은 형의 부인 관할 하에 있던 곳이었는데 그녀는 로마의 사절들에게 환대를 베풀어 주었다. 음식은 물론이고 잠자리를 같이 할 미녀들도 보내주었다고 하는데 로마사절단은 이 호의에 대해서는 숙고 끝에 정중히 사양하였다고 한다. 낯선 방문객에게 음식을 주고 잠자리도 제공하는 유목민의 관습에서 나온 환대였을 것이다.

프리스쿠스는 아틸라를 접견하기 위해 밖에서 기다리던 중 한 그리스인을 만났다. 그는 다뉴브 강 주변의 도시 출신으로서 부유한 상인이었지만 훈족의 원정 때 포로로 끌려왔다가 후일 전쟁에서 공적을 세워 자유로운 몸이 되어 훈족 여자와 결혼하여 자식도 낳고 만족스럽게 살고 있다고 하였다. 그 그리스인은 훈 사람들은 전쟁이 끝나서 돌아오면 누구의 괴롭힘도 받지 않고 편안하게 산다는 것이다. 로마에서는 돈이 없는 사람은 법에서 보장한 권리도 누리지 못하고 무거운 세금에 찌들려 살지만 훈족 사회에서는 훨씬 삶이 만족스럽다고 말하여 프리스쿠스를 놀라게 만들었다.

 

  1. 킬데릭 무덤의 부장품

아틸라는 그에게 신속한 게르만족 왕들에게 후한 선물을 베풀었던 것 같다. 아틸라의 시대로부터 천년 이상이 지난 1653년 벨기에 국경 근처 도시 투르네에서 프랑크족 왕의 무덤이 발견되었다. 투르네는 아틸라 시대에 프랑크족의 수도였다. 발굴된 무덤은 킬데릭(440-481) 왕의 무덤이었는데 그 이름이 새겨진 반지로 인해 무덤의 주인을 알 수 있었다. 한 연대기에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그는 여자문제로 프랑크 귀족들의 분노를 사서 오늘날의 동부 독일에 속하는 투링기아(튀링겐)에서 8년간 망명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투링기아는 당시 훈족이 지배하던 영역이다. 그가 투링기아에 망명하였다는 것은 그가 아틸라의 도움을 받았음을 의미한다. 그는 분명 샬롱 전투에서 아틸라 편에서 싸웠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훈족의 무덤에서 흔히 발굴되는 장식품들과 마구들이 그의 무덤에서 대거 출토되었다. 특히 벌과 매미 모양의 브로치는 300개 이상 발견되었다. 브로치의 몸체는 금으로 되어 있고 양 날개 부분은 금 윤곽선 안에 보석을 끼워 넣는 ‘클르와존네’ 기법을 사용하였다. 이러한 부장품은 아틸라의 제후였던킬데릭이 아틸라 왕으로부터 하사받은 선물일 가능성이 있다. 킬데릭은 훈제국 내에서 프랑크족을 관할하는 역할을 부여받은 사람이 아니었을까? 투르의 그레고리우스 주교의 󰡔프랑크족의 역사󰡕에는 킬데릭이 투링기아에 망명해 있는 동안 투링기아의 왕비 바시나와 친해졌는데 킬데릭이 귀국할 때 그녀는 남편을 버리고 킬데릭을 따라왔다고 한다. 바시나가 킬데릭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클로비스이다. 그는 갈리아 정복을 완수하여 오늘날의 프랑스 땅에 프랑크 왕국을 세운 사람으로서 프랑스인들은 이 클로비스를 프랑스의 첫 왕국을 세운 프랑스의 건국시조로 여긴다. 중세 프랑스 왕국의 기원에서 우리는 유럽에 들어온 아시아 유목민 훈족의 자취를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프랑크왕 킬데릭 무덤에서 발견된 매미모양 황금 브로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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