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의 전환점이 된 탁발선비

《환단고기》에 12환국 가운데 선비국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이 태고적의 선비국이 후한後漢 시대부터 나타난 선비족과 관련이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사마천의 《사기》 흉노전에는 한나라 건국 시기 즈음 흉노의 동쪽에 동호東胡가 있었으며 흉노는 이 동호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고 한다. 중국인들은 후대의 오환과 선비가 이 동호의 후예라 보았다. 3세기 말 편찬된 《삼국지》와 5세기에 편찬된 《후한서後漢書》 등 중국사서 기록에 다양한 선비집단이 등장한다. 요동군과 요서군, 대군代郡 등 중국의 북쪽 변경에 인접한 초원지대에 살았던 선비집단은 후한 시대 말인 2세기 중반에는 단석괴檀石槐라는 지도자 밑에서 상당한 정치적 통일을 이루었다. 단석괴는 선비제국의 영토를 서부와 중부 및 동부로 나누어 통치하였다. 동부 선비는 부여와 접했으며 서부는 서역의 돈황군에 접하였을 정도로 단석괴의 선비제국은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였다. 중부에 속한 선비집단 가운데에는 모용선비의 이름도 보인다. 모용선비慕容鮮卑는 3세기 이후 옛 전국시대의 연燕나라 땅을 정복하고 고구려를 침공하는 등 동북아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탁발선비의 기원

중국사에서 모용선비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집단이 탁발선비拓跋鮮卑이다. 탁발선비 집단은 4세기 말 북위北魏(386-534)를 세우고 북중국을 통일하였다. 중국 땅에서 흉노를 비롯한 다섯 오랑캐들이 16개의 나라를 세우고 중국을 큰 혼란에 빠뜨렸다고 중국인들은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시대’(304-439)를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흥미로운 것은 선비족은 오호五胡 가운데 하나였으나 선비족에 속하는 탁발선비가 세운 북위는 오호십육국 가운데 들어가지 않는다. 다른 ‘오랑캐 나라들’처럼 단명하지 않고 150년 정도 존속하였기 때문이었을까? 북위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대국代國도 16국 가운데 들지 않으며 실제로 북방유목민이 세운 나라들 수는 16개가 넘는다고 한다. 이런 면에서 ‘오호십육국 시대’라는 말은 정확한 용어는 아니라고 할 것이다. 좌우간 탁발선비의 나라 북위는 단명한 다른 오랑캐 국가들과는 달리 중국사의 일시적 일탈이 아니라 하나의 중요한 시대를 이루었다는 것은 중국인들도 부인하지 않는다. 중국사에서 북방유목민족의 본격적인 첫 번째 왕조를 탁발선비가 세운 것이다. 탁발선비가 불교를 후원하여 불교가 중국에서 크게 번창하였다는 것도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또 북위의 뒤를 이은 수와 당도 그 지배층의 뿌리를 캐자면 북위로부터 나온 나라였다. 이런 면에서 보자면 탁발선비는 중국 역사의 한 획기적 전환점이 되었다.

그런데 탁발선비는 후한 시대를 기록한 중국 기록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이들은 중국의 대혼란기였던 4세기 초에야 중국의 역사무대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선비족 가운데 가장 늦게서야 등장한 집단이라 할 수 있다. 탁발선비는 중국 땅으로 내려오기 전에는 다싱안링(大興安嶺)산맥 주변의 삼림지대에서 수렵어로 생활을 영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980년 다싱안링 지구의 한 동굴에서 한자로 기록된 석각이 발견되었다. 이 석각은 북위가 북중국을 통일한 4년 후인 443년에 북위의 태무제 탁발도拓跋燾가 사람을 보내어 새긴 것이다. 가셴동(알선동嘎仙洞)이라고 불리는 이 동굴에서 태무제의 사신들이 황천신에게 제사를 올렸다. 석각에는 탁발선비 조상들이 남쪽으로 이동하여 중원을 통일하는 과업을 이룩하였다는 언급이 있다.

가셴동이 다싱안링 산맥의 삼림지대에 위치한 것으로 보아서 당시 탁발선비 조상들은 삼림 속에서 수렵과 어로를 하면서 순록을 키웠던 것 같다. 오늘날도 그 일대에는 순록유목으로 살아가는 어원커鄂温克이나 어룬춘鄂伦春 같은 소수민족이 살고 있다. 두 족속 모두 퉁구스계인데 어원커는 러시아어로는 에벤키라 부른다. 러시아에서는 어룬춘을 ‘오로촌’이라 한다.

가셴동 석각에서 언급되어 있듯이 탁발선비는 1세기경부터 ‘대택大澤’ 주변의 초원지대로 내려오기 시작하였다. 대택은 오늘날 내몽골 자치구에 있는 ‘후룬호呼倫湖’를 말하는데 그 주변에는 사방 천여 리에 달하는 넓은 초원지대가 펼쳐져 있다. 이곳에서 탁발선비는 순록 대신 양이나 소, 염소 등을 키우는 유목생활을 영위하였다. 탁발선비는 대택 지역에서 약 200년 정도 머물다가 다시 남쪽으로 내려왔다. 6세기 중반 북제北齊 때 편찬된 북위의 역사서《위서魏書》에 의하면 새로 도착한 곳은 ‘흉노고지匈奴故地’였다. 옛 흉노가 살던 곳인데 흉노가 약화되면서 흉노의 주력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였기 때문에 탁발선비 집단은 이곳을 손쉽게 점령할 수 있었다. 당시 이곳에는 흉노 십여만 호가 남아있었는데 이들은 탁발선비 집단에 흡수되었다. 이로써 탁발선비 집단은 단기간 내에 큰 세력이 되었다. 물론 수만 가구를 이끌고 남천南遷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위서》에는 그 남천 과정이 ‘높은 산과 깊은 계곡을 넘는 험난한 과정’이었다고 한다. 당시 무리를 이끈 사람은 탁발힐분拓跋詰汾이었는데 그는 하늘에서 내려온 여인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아들이 탁발선비국의 시조인 탁발역미拓跋力微이다.

《위서》의 흉노고지는 만리장성 이북의 내몽골 초원지대로 추정된다. 오늘날의 내몽골자치구 바린좌기(巴林左旗) 북쪽 인근에서 탁발선비족의 고분들이 많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바린좌기 일대가 아닌가 싶다. 이곳은 후일 거란의 상경이 위치했던 지역이기도 하다. 이곳을 중심으로 탁발역미가 이끈 탁발선비 집단은 내몽골 초원지대 일대로 세력을 확대하였을 것이다. 《위서》의 기록에는 탁발부 주변에는 ‘서부西部’, ‘몰록회부沒鹿回部’ 같은 다른 선비부가 있었다. 서부와는 전쟁을 하고 몰록회부와는 동맹관계를 맺었다. 탁발역미는 몰록회부의 부족장인 두헌의 눈에 띄어 그의 사위가 되었는데 종국에는 몰록회부를 흡수할 수 있었다. 당시 내몽골 지역의 유목민들은 탁발선비는 말할 것도 없고 흉노, 투르크계인 정령, 몽골계인 유연, 동호계인 오환 등 다양한 부족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그 수가 80개 이상이 되었다고 한다. 사서에는 이러한 유목민 집단을 ‘부락部落’이라 표현하였다.

북위의 전신 대국代國

탁발역미는 다시 탁발선비의 근거지를 현재 내몽골의 후허하오터(呼和浩特) 부근의 성락盛樂으로 옮겼다. 탁발역미는 당시 중국 북쪽을 지배하던 위나라(조조의 위나라)와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힘을 썼는데 이러한 우호적 관계는 그의 아들과 손자 대에도 이어졌다. 아들 녹관은 탁발선비의 영역을 동부와 중부, 서부로 삼분하고 중부와 서부는 조카들에게 맡겼다. 혼자서 다스리기에는 영토가 상당히 광대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서부의 경우는 그 영역이 하서주랑까지 펼쳐져 있었다.

308년 녹관이 병사한 후 서부의 탁발의로拓跋猗盧는 중부와 동부를 모두 차지한 후 당시 사마씨의 서진西晉 왕조가 내부적 혼란에 빠진 틈을 타서 만리장성 남쪽의 산서山西로 들어가게 된다. 당시 중국 북방을 지키고 있던 병주자사 유곤劉琨은 북방에서 외롭게 중국 땅을 지키고 있었는데 당시 철불흉노와 백부선비 등 북방유목민의 공격으로 어려움을 겪자 탁발의로의 선비족을 동맹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지난 호에서 보았듯이 로마제국이 훈족을 동맹으로 삼아 게르만족의 침략을 막으려고 하였던 것과 같은 전략이었다. 탁발의로는 유곤의 요청을 받아들여 침략자들을 격퇴하였는데 그 대가로 서진 조정은 탁발의로를 대공代公에 봉하였다. 탁발의로는 곧 대왕代王의 지위로 승급되었는데 그의 대국은 중국의 혼란을 틈타 서진으로부터 독립된 나라가 되었다. 이 나라가 ‘대국代國’이다.

대국은 338년 탁발부의 우두머리에 오른 십익건什翼犍 때에 와서는 중국식 관직과 법률을 가진 중국식 국가로의 변신을 시도하였다. 성낙에도 성을 지었는데 아마 중국식 성이었던 것 같다. 그는 모용선비와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여 혼인관계도 맺었으나 서쪽의 전진前秦과는 대립하였다. 376년 전진前秦 왕 부견의 공격으로 십익건은 전사하고 대국은 사라졌다가 10년 후인 386년 십익건의 손자 탁발규가 나라를 다시 세우고 이름을 위魏라고 하였다. 중국인들은 이 나라를 전국시대의 위나라와 구분하기 위해 ‘북위北魏’라고 부른다.

북위의 건국과 한화정책

탁발규는 북위를 세운 후 북위에 대해 가장 큰 위협이 되는 또 다른 선비족 국가인 모용선비의 연나라와 싸워 연나라를 멸망시키고 북중국을 통일하였다. 중국사에서는 이 모용선비의 나라를 후연後燕이라고 한다. 탁발규의 시호는 도무제道武帝인데 도무제는 수도를 성락성에서 평성平城으로 옮겼다. 오늘날의 다퉁(大同)이다. 성락은 초원지대에 가까운 곳이었지만 평성은 중원에 가까운 곳이었다. 평성은 6대 효문제 때 낙양으로 다시 천도하기까지 근 100년간 북위의 수도 역할을 하였다.

소위 중국사의 ‘5호16국 시대’는 탁발규의 손자인 3대 탁발도에 의해 끝이 났다. 도무제 탁발규처럼 청소년 시기에 왕이 되었던 태무제 탁발도는 조부처럼 많은 무공을 세웠다. 430년 혁련씨의 하夏, 436년 후연의 계승국 북연, 439년 흉노계 저거씨의 북량北涼 등을 차례로 멸망시키고 북중국을 통일하였다.

북위는 유목민의 나라로서 5호16국 시대를 종식시키고 북중국을 통일하였다는 역사적 의미도 가졌지만 새로운 통치체제를 시도하였다는 데서도 주목할 만하다. 탁발선비는 자신들보다 수가 훨씬 많은 한족을 다스려야 하였는데 한족의 제도와 관습을 채택하여 한족을 다스린다는 한화정책을 펼쳤다. 효문제(재위 481-499)는 한화정책을 본격적으로 펼친 인물인데 당시 수도인 평성이 북쪽에 치우쳐 있다는 구실을 들어 494년 낙양으로 천도를 하고 낙양 천도 후에는 대대적인 한화정책을 시행하였다. 선비식 복장을 금지하고 한족과 같은 옷을 입도록 하였다. 선비어도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조정에서 선비어를 사용하는 관리는 면직시켰다. 왕실의 성인 탁발씨도 원元씨로 고치는 등 심지어는 선비성을 버리고 중국식 성을 취하게 하였다. 이러한 한화정책은 일부 선비귀족들의 반발을 사서 결국은 북위의 몰락에 상당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북위의 멸망을 초래한 ‘육진六鎭의 난’도 한화 정책의 부작용이 표출된 한 예이다. 육진은 태무제 때부터 북방의 유연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북방에 군대를 주둔시킨 군사기지를 말한다. 육진의 선비족 군인들은 자신들에 대한 조정의 소홀한 대우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켜 서쪽의 진주秦州와 농주隴州로부터 동쪽의 유주幽州와 기주冀州까지 하북 지방을 휩쓸었다. 수년간 지속된 이 봉기는 결국 진압되기는 하였지만 이주영爾朱榮 같은 군벌이 대두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주영은 선비족의 한 추장으로서 많은 병력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는 당시 황제인 효명제와 호태후 사이의 모자간 갈등에 개입하여 호태후를 죽이고 세 살배기 아이를 효장제로 앉혔다. 이주영은 대승상의 자리에 오른 후 정국혼란을 초래한다는 구실로 호태후와 왕족들을 2천 명이나 죽였다. 이주영은 황제 측에 의해 곧 죽임을 당했으나 그의 이주씨爾朱氏 추종자들은 효장제를 죽이고 연달아 새로운 허수아비 황제를 옹립하였다.

이주씨에 반대하는 세력으로 등장한 것이 하북대사 고건高乾과 육진장군 고환高歡 등이었다. 발해 고씨인 고환은 선비족화된 한인이라는 주장도 있고 고구려 계통이라는 설도 있다. 고환이 세운 황제인 효무제는 고환을 소탕하기 위해 이주영의 옛 부하인 우문태 등을 끌어들이게 되었다. 고환은 효무제가 우문태에게로 도망가자 효정제를 황제로 세우고 수도를 낙양에서 업鄴으로 옮겼다. 그리하여 두 사람의 탁발씨 황제가 병립하는 형세가 초래되었는데 물론 두 황제는 고환과 우문태의 허수아비에 불과하였다. 이로써 북위는 동위와 서위로 분립하게 되었다.

수⦁당의 뿌리

고환의 작은 아들 고양高洋은 동위 황제를 폐하고 북제北齊를 세웠으며(550) 서위 우문태의 아들 우문각 역시 서위 황제를 폐하고 북주北周의 창건자가 되었다. (557) 북주는 577년 북제를 정벌하여 다시 북중국을 통일하였다. 북주는 황실의 인척이었던 양견楊堅의 수중에 넘어가는데 그는 곧 수隋나라를 개국하였다.(581) 한족 출신인 양견이 북주의 권력을 찬탈하였기 때문에 중국이 다시 한족의 지배로 돌아왔다고 한족 역사가들은 그를 칭찬한다. 그러나 양견의 5대조는 육진 가운데 하나인 무천진武川鎭의 사마司馬로서 그곳에서 대대로 산 사람이었다는 것을 고려해본다면 양견도 선비화된 한족이었다고 볼 수 있다.

서위의 권력체제는 6인의 주국柱國을 중심으로 한 집단지도체제였는데 6인 주국 가운데 한 사람이 당나라를 연 이연의 조부인 이호이다. 6주국 아래의 12장군 가운데 한 사람이 양견의 아버지 양충이었다. 모두 우문태 밑의 무천진 군벌에 속하는 인물들이다.

수와 당도 선비국에서 나왔다는 말은 이런 면에서 보자면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다. 또 수와 당은 선비족의 나라가 고안한 중요한 제도들을 받아들였는데 부병제와 균전제가 그것이다. 균전제는 국가가 농지를 농민에게 나누어주는 제도로 북위에서 처음 시행된 토지제도이다. 한화 정책을 추구한 효문제 때 처음 시행되었는데 전란으로 유망하는 농민들을 국가의 지배하에 포섭하려는 의도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부병제는 서위에서 처음 시행되었는데 국가로부터 농토를 받은 균전농민 가운데 일부를 농한기에 부대로 불러 훈련하고 복무시키는 제도였다. 균전제와 부병제, 그리고 균전제와 결합된 조세제도인 조용조租庸調 제도는 수와 당 재정제도의 근간이 되었다.

유목민인 탁발씨가 세운 나라 북위는 또 다른 북방 유목민 집단과 대치하였는데 중국사서에서 ‘유연柔然’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유목민 국가가 그것이다. 유연은 처음에는 탁발선비에게 복속되어 공납을 바치던 집단이었으나 점차 북위로부터 벗어나 몽골초원으로 세력을 확대해나갔다. 몽골 북부 초원의 고차高車를 복속시킨 유연은 남쪽으로는 424년 북위의 옛 수도 성락을 함락시켜 북위를 일시적으로 곤경에 빠뜨리기도 하였다. 북위는 그 후 여러 차례에 걸쳐 유연을 공격하였으나 유연을 끝내 정복하지 못했다. 유연을 무너뜨린 것은 그 지배하에 있던 알타이 지역의 투르크계 돌궐 유목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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