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도아케르와 테오도릭

5세기 중엽 ‘신의 채찍’으로서 로마 제국을 뒤흔들었던 훈제국의 아틸라 왕의 측근 인사들 가운데 후대의 역사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인물이 두 사람 있다. 한 사람은 로마인 오레스테스로 아틸라 곁에서 외교문서와 서한을 작성하는 등 아틸라의 서류작업을 맡아 수행한 비서였다. 또 한 사람은 훈제국의 고위인사로서 아틸라 사후 스키리족의 왕이 되었던 에데코이다. 두 사람은 아틸라의 외교사절로서 449년 동로마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하기도 하였는데 자신들보다는 아들들 때문에 역사가들의 주목을 받았다.

아틸라의 측근으로서 서로마제국의 실권자가 된 오레스테스

오레스테스는 판노니아의 명문가 출신이었는데 판노니아가 훈족에게 넘어가자 아틸라의 궁정으로 들어갔다. 그가 어떻게 해서 아틸라의 신임을 받는 측근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던 지 정확한 사정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오레스테스는 아틸라의 최고위 측근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동로마제국 사절단의 일원으로서 판노니아의 아틸라 본영으로 가서 그를 직접 만나보았던 동로마의 역사가 프리스쿠스는 그를 ‘로가데스’라고 칭하였다. 로가데스는 훈제국의 높은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로마인으로서 아틸라의 심복부하가 되었던 오레스테스는 453년 아틸라가 갑자기 죽고 훈제국이 해체의 길을 걷자 로마로 돌아갔다. 당시 서로마는 율리우스 네포스(재위 474-475)라는 인물이 황제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그는 오레스테스를 ‘파트리키우스’라는 칭호와 함께 로마대장군으로 임명한다. 당시 파트리키우스는 로마의 재상이나 대장군 등의 소수 사람들에게 로마황제가 부여한 칭호였는데 오레스테스가 어떻게 하여 네포스 황제 하에서 이렇게 출세를 할 수 있었던지는 모르겠다.

좌우간 서로마제국의 대장군이 된 다음 그는 율리우스 네포스 황제를 쫓아내고 서로마제국의 실질적 권력자가 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어린 아들 로물루스를 황제로 앉혔는데 이 어린 로물루스가 서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다.

오레스테스가 권력을 잡았을 당시 이탈리아에는 다양한 만족蠻族 출신들로 구성된 군대가 로마군의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훈제국이 무너진 후 그 휘하에 있던 다양한 게르만 부족 출신들이 로마의 용병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그러한 게르만 용병부대를 이끈 사람이 오도아케르였는데 오도아케르는 위에서 언급한 아틸라의 최측근 가운데 한 사람인 에데코의 아들이었다.

스키리족의 왕자 오도아케르

에데코는 아틸라의 사후 게르만계 부족의 하나인 스키리족의 왕이 되었다. 그의 스키리족은 469년 판노니아 지배를 놓고 동고트족과의 싸움에서 패배하였다. 이 전투 후 에데코의 아들 후눌프 왕자는 동로마제국으로 넘어갔는데 그곳에서 출세하여 동로마의 요충지 일리리쿰 속주의 장군이 되었다. 스키리족의 또 다른 왕자 오도아케르는 그 동생이었는데 470년경 스키리족과 헤룰족 등의 게르만 병사들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들어왔다. 당시 서로마제국의 실권자 리키메르 장군과 안테미우스 황제(재위 467-472) 사이에 벌어진 내전에서 리키메르의 요청으로 온 것으로 보인다. 리키메르도 오도아케르처럼 로마인이 아니라 만족출신이었다.

스키리족 왕자였던 오도아케르는 이탈리아에 오기 전에 어떠한 삶을 살았을까? 6세기 투르의 그레고리우스 주교가 쓴 《프랑크족 역사》에는 오도아케르가 451년 아틸라의 갈리아 원정 이후 갈리아에 남아 프랑크족 킬레릭 왕과 동맹을 맺고서 갈리아를 침략한 알라만족을 격퇴하였다고 한다. 이 진술이 사실이라면 그는 훈제국의 갈리아 지역 책임자 같은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아틸라 사후 그는 판노니아로 돌아와 그곳에서 스키리족의 왕이 된 부친의 통치를 도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동고트족과 스키리족이 싸운 469년 볼리아 전투에서 부친 에데코는 전사했던 것 같다. 그 이후 에데코는 사료에서 더 이상 언급되지 않기 때문이다. 오도아케르는 전투에서 패배한 스키리족, 헤룰족 병사들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간 것으로 보이는데 도중에 노리쿰(오늘날의 오스트리아에 위치한 로마의 속주)의 유명한 성자 성聖세베리누스를 방문하였다. 지혜롭고 신통력 있는 것으로 소문난 성세베리누스는 자신을 찾아온 젊은 오도아케르의 인물됨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그는 오도아케르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하였다. “이탈리아로 가거라. 너는 지금은 초라한 옷을 입고 있지만 곧 많은 사람들에게 귀한 선물들을 주게 될 것이다.”

오도아케르가 이탈리아로 게르만족 병사들을 이끌고 온 지 몇 년 지나지 않아 대장군 오레스테스는 네포스 황제를 축출하고 자기 아들을 황제로 세웠다. 그런데 오레스테스는 게르만 용병들이 정착할 땅을 요구하자 그 요구를 거절하였다. 동로마 역사가 프로코피우스에 의하면 당시 게르만 병사들은 이탈리아 땅의 1/3을 요구하였다고 한다. 일부 역사가들에 의하면 그들은 땅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그 땅에서 나오는 세금을 요구한 것이라 한다. 좌우간 게르만 용병들은 자신들이 이탈리아를 지켜주는 대가를 요구한 것이다. 갈리아에서는 점령자인 프랑크족이 그렇게 갈리아 땅을 받았다고 하는데 이탈리아 용병들도 갈리아 소식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도 갈리아의 프랑크족과 같은 대우를 요구한 것이다. 당시 로마제국에는 정규군은 무너지고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게르만 용병들만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로마제국은 이 게르만 병사들에게 급료를 꼬박꼬박 지불할 재정적 능력이 없었다. 게르만족 병사들이 땅을 달라고 요구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레스테스가 보기에 이탈리아 땅의 1/3을 달라는 게르만 용병들의 요구는 지나친 것이라 들어줄 수 없었다. 요구가 거절되자 게르만 병사들은 폭동을 일으켜 오레스테스를 죽이고 스키리족 장교인 오도아케르를 자신들의 왕으로 세웠다. 이리하여 오도아케르는 졸지에 왕이 되었다.

이탈리아 왕 오도아케르

권력을 잡은 오도아케르는 오레스테스의 아들인 어린 황제를 죽이지 않았다. 어린 황제 로물루스에게 연 6,000 솔리두스의 연금을 주고 나폴리 근처의 성으로 보내버리는 것으로 그쳤는데 새로 권력을 잡은 사람이 전임 황제를 죽이는 일이 다반사였던 로마에서는 보기 힘든 관대한 조처였다. 솔리두스는 로마의 금화를 말하는데 요즘의 금시세로 따지면 6,000 솔리두스면 30억 원이 넘는 액수이다. 오도아케르는 어린 황제를 죽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자신이 그 자리에 오르지도 않았다. 그는 원로원을 설득하여 동로마의 제논 황제에게 원로원 사절단을 보냈다. 사절단은 어린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입던 황제복을 비롯한 여러 가지 황제의 상징물들을 동로마 황제에게 바쳤다. 이는 서로마제국에는 더 이상 황제가 존재하지 않으며 황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오도아케르는 동로마황제의 대리인으로서 이탈리아를 통치하는 데 만족하였다. 칭호도 로마황제가 제국의 실권자와 로마군 최고지휘관에게 내리던 ‘파트리키우스’라는 칭호로 만족하였다. 그는 또 게르만족의 왕들을 일컫는 칭호인 ‘렉스’라는 칭호도 사용하였는데 물론 그가 지배한 이탈리아의 왕을 의미한다. 이탈리아 반도 외에도 주변의 일부 지역이 그의 관할 하에 있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노리쿰 주였다. 노리쿰은 그가 이탈리아로 올 때 거쳐 왔던 곳으로 그곳에는 게르만계인 루기족이 장악하여 자신들의 왕국을 세웠다. 오도아케르는 군대를 파견하여 이 루기족 왕국을 공격하여 그 왕국을 무너뜨렸다. 그러나 군대를 주둔시켜 통치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그 주민들을 이탈리아 반도로 이주하도록 조처를 취하였다.

로물루스를 폐위시킨 476년부터 오도아케르가 살해되는 493년까지 이탈리아 왕 오도아케르의 통치는 만족 왕의 통치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상당히 온건하였다. 이탈리아 지주들의 땅을 일방적으로 빼앗지 않았으며 로마제국의 중요한 통치기관이었던 원로원도 유지하고 또 로마 귀족들 사이에서 콘술(집정관)을 뽑아 통치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물론 게르만족 병사들의 유지비용은 로마인들이 부담해야 하였기 때문에 오도아케르는 이탈리아 귀족들을 설득하여 그 토지의 일부를 받아내어 병사들에게 나눠주었다. 그의 이러한 통치방식 때문에 이탈리아인들은 오도아케르에게 별로 반감을 갖지 않았다. 오도아케르는 로마인들이 보기에는 이단에 불과한 기독교의 분파 아리안주의를 신봉하였지만 가톨릭 교인들과 가톨릭 교회도 박해하지 않았다.

그림1.  오도아케르가 라벤나에서 주조한 솔리두스 금화. 앞면(왼쪽)의 명문은 라틴어로 ‘우리의 주인 영원한 아우구스투스 제논’이라는 뜻으로 오도아케르가 제논 황제의 이름으로 이탈리아를 통치했음을 나타낸다. 뒷면의 명문은 ‘황제들의 수호자 승리의 여신’을 나타낸다. COMOB는 주조된 지역의 이름이다.

동고트 왕 테오도릭

오도아케르의 평판과 영향력이 높아가자 동로마 황제 제논은 그를 점점 더 위험한 경쟁자로 여기게 되었다. 당시 두 개의 고트족 집단이 동로마제국 영토 내의 발칸 반도에 정착하여 동로마제국의 골칫거리였다. 콘스탄티노플에 인접한 트라키아의 고트족 집단 우무머리는 ‘사팔뜨기 테오도릭(테오도릭 스트라보)’이라고 불리는 사람이었는데 동로마로부터 많은 돈과 고위관직(트라키아 대장군직)을 받았다. 또 하나의 집단은 ‘아말 가家의 테오도릭’이 이끄는 고트족 집단이었는데 이 집단은 볼리아 전투 이후 판노니아를 떠나 남쪽으로 내려와 발칸반도 여러 지역을 장악하였다가 마지막으로는 아드리아 연안에 정착하였다. 당시 동로마 황제 제논은 이 두 집단으로 하여금 서로 싸우게 만들어 그 힘을 약화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제논의 의도는 빗나가 사팔뜨기 테오도릭이 콘스탄티노플 공격 후 사고로 죽고 그 아들마저 살해되는 바람에 두 고트족 집단은 아말 가의 테오도릭 하에 하나로 합쳐지게 되었다. 이제 수만 명의 병력을 거느리게 된 아말 가의 테오도릭은 동로마에 예전보다 훨씬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다. 제논 황제는 테오도릭에게 동로마 대장군직에 더해 콘술로도 임명하였다. 만족의 왕에게 콘술 직책을 준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로서 이는 당시 동로마 황제가 처한 다급한 상황을 말해주는 것이다. 제논은 이 골칫거리를 해결할 방안을 생각해내었다. 테오도릭으로 하여금 찬탈자에 불과한 오도아케르가 통치하고 있는 이탈리아를 정복하라고 부추기는 것이었다. 테오도릭으로서도 서로마제국의 본거지였던 이탈리아를 정복하여 로마인들과 동고트족을 모두 다스릴 수 있다면 멋진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하여 테오도릭 산하의 동고트족은 여자들과 아이들을 수천 대의 수레에 태워 이탈리아로 향했다.

오도아케르의 군대는 이탈리아로 들어온 테오도릭 군대와 맞서 싸웠으나 힘이 달리자 수도 라벤나를 비롯한 몇몇 도시에서 농성하는 전략을 택하였다. 양측의 세력이 비등해서였던지 공방전이 3년을 끌었다. 당시 서로마제국의 수도였던 라벤나는 강과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 함락이 쉽지 않았다. 오랫동안 양측의 승부가 나지 않자 라벤나 주교가 나서 중재를 하여 타협이 이루어졌다. 두 사람이 공동으로 이탈리아를 통치한다는 파격적인 협정이었다. 그러나 테오도릭은 그 약속을 배반하고 오도아케르를 연회에 초대한 후 살해해버렸다. 오도아케르의 부인과 형 후눌프를 비롯한 오도아케르 집안사람들이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 동로마제국의 역사가 프로코피우스에 의하면 오도아케르가 자신의 부하들에게 나눠줬던 땅들은 모두 고트족의 차지가 되었다고 한다. 테오도릭은 오도아케르의 뒤를 이어 ‘이탈리아의 왕’이 되었다. 그 두 세대 전에 서고트족에 의해 갈리아 서남부에는 이미 서고트족의 왕국이 세워졌고, 십여 년 전에는 갈리아 북부에 프랑크족의 왕국이 세워졌던 것처럼 이탈리아도 이제 만족의 왕국 즉 동고트족의 나라가 되었다. 테오도릭은 동로마제국의 황제가 직접 이탈리아로 와서 통치하기 전까지 황제를 대신하여 통치한다고 자신의 지위를 오도아케르처럼 동로마황제의 아래에 두었다. 공식적으로는 황제의 대리인이었기 때문에 그는 서고트 왕이나 프랑크 왕보다 더 우위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나라는 독립된 나라가 아니라 로마제국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물론 현실적으로 동로마 황제는 동고트 왕국을 지배할 힘이 없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자 동고트 왕국은 왕가 내에서 내분이 벌어지게 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재위 527-565)가 이를 기회로 삼아 이탈리아 원정에 나서서 결국은 동고트 왕국을 무너뜨리게 되었다.(540)

오도아케르가 이탈리아로 데려온 스키리족 사람들은 오도아케르 사후 어떻게 되었을까? 오도아케르의 부친 에데코는 훈족 출신으로서 아틸라 왕이 죽은 직후 스키리족의 왕이 되었는데 오도아케르는 그와 스키리족 여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었다. 그가 이탈리아로 데려온 스키리족 병사들의 적지 않은 수가 오도아케르가 살해당한 날 함께 희생되었겠지만 대다수는 피신하였을 것이다. 일부 학자들은 스키리족이 알프스 산맥 너머 독일 지역으로 피신한 것으로 추정한다. 이렇게 북쪽으로 도주한 스키리족이 중세 바이에른족이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림2. 동고트족 테오도릭 왕의 라벤나 궁. 당시 라벤나는 이탈리아의 수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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