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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육질’의 형이상학
꽤 오래전, 적어도 내비게이션이 대중화되지 않은 때의 이야기이다. 당시 영국 런던의 남성 운전자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를 접한 적이 있다. 응답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운전 중 길을 잃거나 모를 때 다른 사람에게 길을 묻지 않고 혼자 헤매는 편을 택한다는 내용이다. 아마 조수석에 여자 친구나 아내가 동승하고 있었다면 ‘아니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면 될 일을 저렇게 고집을 피우나’하고 답답했을 것이다. 글의 복선이 될 수도 있겠다 싶어 이 ‘가벼운’ 에피소드를 글머리에 올렸다.
‘여자는 철학보다 깊다.’ 여자도 알겠고 철학이 뭔지도 아주 모르는 바 아니지만 두 개념이 결합된 ‘여자는 철학보다 깊다.’는 말은 얼른 이해가 안된다. 이는 여자에 대한 칭송인가? 철학에 대한 폄하인가? 저 단순한 형식의 문장이 알리려는 소식을 들으려면 먼저 ‘여자’와 ‘철학’이란 말이 여기서 어떻게 쓰이는지 따로 설명이 필요하다. 철학부터 살펴보자.
여기서 철학은 형이상학으로서의 철학이다. 그리고 형이상학은 근거를 쫓는 “근거(로고스)의 학”(Identität und Differenz)이다. 그러나 철학 일반이 사실은 진리나 미美의 원천과 한계를 밝히든, 소망스런 행위의 규범을 마련하든 본질적으로 형이상학이다. 형이상학은 “모든 철학을 규정하는 중심과 핵에 대한 이름”(Einführung in die Metaphysik)이다. 철학의 어떤 분야나 주제이든 비물질적이며 본질 규정적인, 최고의 또는 가장 일반적인 근거나 원리를 이성적으로 개념화하고 그것을 정점으로 삼아 다른 나머지 것들을 연관들의 체계 안에 욱여넣으려 하는 한 그렇다. “존재자의 존재는 철학의 시작 이래, 또 철학과 더불어 근거로서 드러났다.”(Zur Sache des Denkens) 니체는 이런 경향을 “고대의 가장 아름다운 산물인 질병”(Jenseits von Gut und Böse Vorrede)으로 부른다. “어떤 종착지에 이르고자 하는 필요, 이것이 서구 형이상학을 감염시킨 병통이다.”[Nietzsche, Heidegger, Daoist Thought(이하 NHT로 약함)] 인간은 “그를 둘러싸고 영향을 미치는 모든 것들에서 근거들을 구한다. 흔히 가장 가까운 근거들만을 그리고 때로는 훨씬 뒤떨어진 것들이라도 제시한다. 그러나 이는 결국은 최초이자 최종의 근거들을 찾는 것이다.”(Der Satz vom Grund)
근거를 캐는 형이상학의 의도는 분명하다. 자신을 둘러싸고 존재자가 없지 않고 이러저러하게 존재한다는 사실은 형이상학에게 놀라움이고 두려움이었다. ‘왜 오히려 무가 아니고 존재자이지?’ 형이상학은 이 가깝고도 생경함을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다시 말해 이성에 알려질 수 있는[가지적可知的인; intelligible] 대상으로 만듦으로써 이를 해소하려 한다. 그리고 이는 그것들의 근거를 어떻게든 이성적 사유를 통해 때려잡아 개념화하는 작업으로 나타난다. 확보된 가지적 근거는 형상적(formal)이며 본질과 같은 것이다.
형이상학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게 모자를 씌우듯 옴짝할 수 없는 개념을 붙이고, 그것들을 매크로한 근거 연관 속에 체계화하고 서열화한다. 형이상학의 이성적 사유는 개념들의 ‘탑’을 쌓는다. 판단과 추론을 통해 모든 존재자를 하나로 환원한다. 그리고 이러한 처리과정은 모든 것들의 타자성을 삭제하며, 이성과 동질화시키는 것으로써 진행된다. 이는 이성이 타자에게 집어넣은 자신의 개념과 질서를 확인하고 정립하는 방식으로써 이뤄진다. 이성의 거침없는 행진에 저항하는 어떤 차이나 구별도 용납되지 않는다. 형이상학은 타협 없는 끈질긴 분투로써 기어이 모든 것들로부터 승복을 받아내면서 목표로 행군한다.
이를 통해 형이상학은 자신의 안전을 확보하고 자유를 확장해가는 것이다. 형이상학은 근거를 움켜쥐고 체계를 마련함으로써 모든 것을 놀라울 게 없는, 설명 가능한 것으로, 나아가 통제와 조종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고 여긴다. 의지로서의 형이상학적 사유는 힘에의 의지이며 의지에의 의지, 곧 자기 의지인 셈이다. 서구 형이상학으로서의 서구 철학은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이고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이라는 헤겔의 사유에서 절대적 주관성, 절대지라는 형태로 정점을 찍고 “니체의 형이상학에서 완결에 이른다.”(Vorträge un Aufsätze)
이와 함께 이성에 알려지지 않은 것, 말로 표현될 수 없는 것, 전체로 환원되지 않는 개별적 특수성은 손가락 사이로 고스란히 빠져 나간다. 이성의 창이자 방패인 엄격한 논리학은 개념이나 범주로써 분류될 수 없는 모든 것에 문을 잠근다. 그러한 논리의 규제를 벗어나는, 다시 말해 이성으로써는 알 수 없고 제어될 수 없는 어둡고 흐릿한 것들을 끊임없이 우리 의식으로부터 지워나간다. ‘제비 날고 물고기 뛰어 오르는’, 저 윤슬처럼 빛나는 실상은 단순히 이론과 실용, 심미의 대상이 된다. 니체는 소크라테스란 인물에서 처음 나타난 형이상학의 흔들리지 않는 믿음, 즉 “사유는 존재의 가장 깊은 심연에 이르기까지 인과율을 실마리로 존재를 인식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교정’할 수 있다”(Die Geburt der Tragödie)라고 믿는 과도한 ‘망상’을 지적한다. 그는 또 개념으로 고정할 수 역사와 생성에 대한 철학의 반감을 ‘이집트주의’라고 부르며 이렇게 애기한다. “그들(철학자들)은 하나의 사태에서 살아 숨 쉬는 내장을 파내는 것[미라]을 영원의 관점에서 그것에 경의를 표하는 것이라고 믿는다.”(Götzen-Dämmerung)
이성을 타고 있는 주체는 결국 인간이다. 이성중심적이란 말은 인간이 세상의 중심을 차지한다는 얘기이다. 그래서 형이상학은 ‘휴머니즘’이다. 이때 ‘휴머니즘’은 다음과 같은 의미로 쓰인다. “‘휴머니즘’은 형이상학의 시작과 전개, 그 완결에 결합되어 있는 경과, 즉 인간이 매번 다른 관점에 따라, 그렇지만 그때마다 고의적으로 존재자의 중심으로 옮겨가지만 그렇다고 해서 최고의 존재자가 되지 못하는 과정을 가리킨다.”(Wegmarken)
이렇게 인간이 혼자서 모든 존재자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다시 말해 제 중심으로 세상의 판을 짜는, 휴머니즘으로서의 형이상학에는 동전의 양면처럼 주객분리가 동행한다. 형이상학적 사유는 전통적으로 사유하는 존재와 물질적인 세계를 분명하게 갈라 세우는 이원론적 전제에 기초한다. 이성이나 영혼, 의지를 주체로 놓고 표상적인 방식으로 그 밖의 것들은 모두 주체 맞은편에 있는 것으로 대상화, 객관화한다. ‘대상’에 해당하는 독일어 ‘Gegenstand’[gegen(향하여)+stand(서있음)]의 뜻 자체가 ‘맞은편에 있음’, ‘마주함’의 의미를 갖는다. 독일에서 ‘Gegenstand’는 18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라틴어 ‘obiectum’의 번역어로서 나타났다. 그리고 라틴어 ob-jectum은 앞에-이리로 던져져 있음, 놓여 있음[대상화]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정복과 조작, 변형되어야 할 장애물의 뜻을 갖는다(Irrational Man).
그러나 하이데거는 “인간의 표상함이란 형이상학적으로 각인된 방식은 도처에서 단지 형이상학적으로 건립된 세계만을 볼 뿐이다.”(Vorträge und Aufsätze)라고 말한다. 그 세계는 끝내 하나의 상像[세계상]에 그치지 사물事物 자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니체의 지적은 더 적나라하다. 그는 세계를 그 자체로 놔두지 않고 인간에 의해 정립된 상으로 만드는 것은 의인화라고 주장한다. 이때 인간은 주체이며, 아마도 유럽인이며 남성이 될 것이다. 모든 것이 의인화된 세계에서 신은 인격적 유일신이고 남성신이라는 사실이 이를 잘 보여준다 하겠다. “일원론적 종교들은 모든 것들이 유일한 남성 신 덕분에 존재한다는 관념을 중심으로 그들의 신학적 체계를 정립한다.”(NHT)
이성 중심주의, 인간 중심주의, 주객분리는 사상과 과학, 문화의 기반인 형이상학의 꺼지지 않는 동력으로서 형이상학을 관통한다. 형이상학의 본질을 구성하는 세 가지는 서로 밀접하게 관계 맺고 서로 부추기며 궁극적으로 세계를 자기 만족의 대상 또는 자원으로서 통제하려는 욕망을 떠받친다. 오늘날의 근대 기술 시대 형이상학은 모든 것을 유용한, 좀 더 드러내 말하면 돈이 되는 부품이나 자원으로 몰아세우며, 이러한 가치 실현에 미치지 못하고 방해되고 고장난 것들을 치우고 갈아 끼운다. 모든 것들이 그러한 방식으로 드러나도록 강요한다. 그리고 인간도 그같은 존재론적 형세 아래 쓸모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가치가 결정되고 의지에의 의지라는 보이지 않는 질서로부터 조작되는 신세에 놓인다.
위와 같이 간략히 살펴본 형이상학의 특성들을 고려할 때 형이상학은 젠더적 관점으로 나누면 남성적이다. 모든 존재자를 남김없이 인간을 중심으로 줄 세우는 ‘근육질적인’(muscular) 형이상학의 시도는 타자인 존재자로부터 인간의 해방과 자유에 가장 크게 기여한 것처럼 보였다. 형이상학의 가공할 업적은 부인하기 힘들다. 그러나 형이상학의 성취는 점점 개별자들의 전체성으로부터의 고립이며 자기 본질로부터의 소외로서 분명하게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그만큼 소외가 서구 영혼의 한 부분이란 사실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진리를 일상적 경험과는 분명히 구별되는 초월적 영역에 있는 것으로 말하기 때문이다.”(NHT) 개념과 체계, 위계를 통한 이성의 포획은 이제 자연과 인간 그리고 모든 것들의 고유한 존립과 그들 사이의 넉넉한 소통을 억압하는 ‘구속복’과 같은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하이데거는 역사를 이성의 승리에 찬 행진으로 보는 진보관이 유럽적 사유의 전지구적 지배를 구축하는 토대가 되었다고 분명하게 지적한다. 이들을 이끈 인간 중심주의를 근대 형이상학이 남긴 유산으로 본다. 또 진보의 결실이라 할 근대 기술은 형이상학의 ‘끝판왕’으로서 허무주의와 깊숙이 연계돼 있다고 하면서, 통제할 수 없는 이러한 존재론적 형세를 ‘위험’으로 진단한다. 그가 말하는 허무주의나 위험은 우리가 본래대로 있지 못한다는 점에서 ‘실향失鄕’이다. 그 고향상실은 형이상학에서 존재자의 존재가 떠나버린 황무지의 번성에서 온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고향상실은 세계의 운명”(Wegmarken)이다. 수백 년 전 아니 그보다 가깝게 수십 년 전에 겪지 못하고 겪으리라 예상하지 못한 기상이변과 자연재해, 공동체 의식의 붕괴, 화려한 자극과 분망함으로 도피하는 비본래적 인간 삶 등. 우리를 옥죄는 모든 척박한 현실에서 하이데거가 말하는 위험을 실감한다.
도대체 누가 인간에게 그런 권한을 허용했는가?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는 살 수 없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