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철학보다 깊다 2

  1. 영원한 여성성만이 우리를 높은 곳으로 이끈다.

 

성性으로 보면 형이상학은 아무래도 남성적이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과학 기술 시대의 위험이 이미 형이상학과 함께 시작된 것이라면 우리가 기다리는 구원은 형이상학의 남성성, 남성적 방식으로써는 이뤄질 수 없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남성과 여성의 성징性徵은 각기 하늘[건건]과 땅[곤], 양陽과 음陰으로 분류된다. 대체적으로 남성[하늘, 양]은 강건함, 밖으로 뻗어나감, 능동성, 이성, 경쟁, 독립성, 자기중심성 등의 성격을 갖는다. 여성[땅, 음]의 경우는 상대적으로 온유함, 안으로 감쌈, 수동성, 감성, 조화調和, 공감, 타자지향성 등이 그 특성으로 꼽힌다. 한 여성학자는 성별 차이에 대한 여러 학문적 의견들을 고려하여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남성이 보편성과 객관성을 추구하는 반면 여성은 개체 고유의 개별성과 주관성을 존중한다. 남성이 이성중심의 추론적 사고를 하는 반면에 여성은 직관적이고 종합적이며 감성적 사고를 한다. 남성적 사고가 인식중심적이고 정신주의적이라면 여성은 생 중심적인 물 중심적 사고이다. 남성이 계급주의, 권위주의적인 반면에 여성은 평등주의적이고 인간주의적이다. 남성이 자기중심적이라면 여성은 타인배려적이다.

딱히 반박을 살 만한 것은 없고 어지간히 공감되는 의견이다. 통상적 이해나 학문적 규정 모두 여성성을 조화와 공존에서, 남성성을 경쟁과 독자성에서 찾고 있다고 소략할 수 있겠다. 그런데 모든 남자들이 그렇지 않은 것처럼 여자가 다 그렇지는 않지 않는가? 남자 이상으로 탐욕스럽고 고집이 세고 권력지향적이며 대립과 싸움의 방식을 선호하는 여자도 있지 않은가? 이런 의문이 해소되려면 먼저 여자와 여성성의 관계가 밝혀져야 한다.

여자는 여성성을 구체적으로 구현하는 혹은 여성성을 담지한 다수의 개별자들[多]이라면 여성성은 여자들을 관통하며 하나로 아우르는 근본특성이다. 전자가 보이는 질서라면 후자는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것의 의미와 근거를 이룬다. 둘은 존재와 존재자, 도道와 물物처럼 서로 떨어지지도 않지만 뒤섞여서도 안된다. 플라톤의 설명을 끌어들여 말하면 여자들은 여성성을 다소간 나눠 갖는다. 다시 말해 여자들은 여성성에 참여하기에 또는 여성성을 닮았기에 여자이지만 그들의 참여나 모사模寫 정도는 각각이다. 그 정도가 크면 더욱 본질에 충실한 여자이고 그 정도가 낮다면 그 만큼 여성의 본질이라 할 여성성에서 멀어져 있다 하겠다. 남성성과 남자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만큼 성별에 따른 특성들은 칼로 무 자르듯이 구분되는 게 아니다.

성징의 발생 요인과 관련해서도 논란이 제기된다. 일부에서는 선천적, 즉 타고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가정과 교육, 사회 관습의 기대와 요구에 따라 형성되고 각인된 후천적인 것이라는 반론을 맞서 제기하고 있다. 또 한편에서는 절충적 의견도 제시하고 있다. 특히 여성 인류학자 피셔(Helen Fisher) 같은 이는 생물학적 해부적 자료를 바탕으로 두 진영의 논리를 넘어서거나 포함하려고 한다. 그는 남녀의 차이를 낳는 생물학적, 즉 선천적 요인을 인정한다. 예컨대 두 성 사이에는 좌뇌와 우뇌를 함께 연결하는 대뇌피질부위 넓이와 여기에 작용하는 X염색체의 영향이 서로 다른 점이 있다고 밝힌다.(참조 현대 비합리주의적 철학에 나타난 여성적 사유와 남성적 사유: 하이데거, 하르트만, 셸러의 예) 당연히 여성은 고유한 생물학적 요인에 기인한, 남성들이 갖지 못하거나 부족한 특성을 지닐 것이다. 그리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터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별의 차이는 상대적인 것으로서 차별의 이유가 아니라 서로의 보완을 필요로 한다는 점을 보여준다는 게 피셔의 주장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결정적으로 중요한, 그러나 흔히, 아니면 아예 간과되는 게 있는데, 남성성과 여성성이 상대적, 상반적인 것으로 잘못 이해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여성성에 대한 오해가 더욱 짙게 깔려 있다. 여성성은 남성의 특징과 상반되는 것도 남성성이 결여한 부분을 채우는 것도 아니다.

다시 말해 여성성을 대표하는 조화, 공존은 지금까지 지배적인 남성성[대립, 경쟁]을 갈아치우고 또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게 아니다. 그런 배타적 조화에는 여전히 대립 구도가 온존한다. 이는 여성성 자체에 반하는 화해 방식이다. 한편 서로 다른 장, 단점을 지닌 두 성이 서로 보완하며 공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서로의 공존 가능성을 모색하는 편에서의 주장은 이런 식이다. ‘생물학적으로든 후천적인 학습 혹은 조작을 통해서이든 남자들 너희는 이런 장점을 가진 반면 저런 점은 결여돼 있다. 우리들 여자는 너희가 지니지 못한 것을 가진 반면 남성성의 보완을 필요로 하는 단점이 있으니 서로 메워주고 또 양보하면서 조화롭게 살자. 그것이 인류의 번영과 공존의 약속된 길이다.’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지지하는 의견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타협적인 화해는 충분하지도 않고 올바르지도 않는다. 무엇보다도 이런 방식은 이번에는 남성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 식의 화해는 기득권을 차지한 남성 자신의 방식도 아니려니와 또 그들에게 권력과 이익을 얼마라도 내줘야 하는 현실을 말한다.

남성성과 여성성의 조화에 관한 위 두 입장은 성적 성향을 안이하게 보고 있다. 양자 모두 스스로 남성, 여성의 분리와 대립의 시각에 갇혀 있다. 무엇보다도 여성성을 여전히 시원성에서 주목하지 않고 남성성과 대조되는 관점으로만 보고 있다. 여성성은 여성, 남성 이전의 혹은 그 너머의 시원적인 것, 모성적母性的인 것으로 봐야 한다. 시원의 여성성은 남성을 낳고 또 남성의 개별화와 자립을 위해서는 뒤로 물러서거나 어둠 속에 자신을 감춘다. 그러다 때에 이르러 형이상학의 남성성이 그 본성상 결국 전지구적인 위기를 초래하고 이를 떠맡아 해결할 수 없다면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새롭게 도래할 비형이상학적인 여성적, 수용적 사유만이 당면한, 또 이어질 겉잡을 수 없는 위기에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 하이데거는 레싱이 기억하는 구원의 오랜 의미를 상기시킨다. ‘구원은 단순히 위험에서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본질로 존재하도록 해줌이다.’ 여성의 조화는 존재자를 침범하여 그것들을 자신을 위한 가치로 체계화, 서열화하는 남성적, 형이상학적인 공세적 사유와 무관하다. 그런 의지를 비워내고 존재자가 들어서도록 자리를 내주고, 기다리며, 오히려 자신을 내맡긴다. 그 안에서, 그 품에서 여성을 억압하고 학대한 남성을 포함해서 유정, 무정의 것의 온갖 것들이 하나로 어울리며 비로소 각기 저의 참됨으로 존재한다. 남성성도 여성성에 감싸여 비로소 처음으로 온전함을 얻고 여성성도 모든 것을 안아 구원함으로써 마침내 제 고유함을 실현한다. 바꿔 말하면 여성성의 본질 혹은 본질적인 여성성에서 그 자신을 비롯한 모든 존재하는 것들이 이윽고 그 자체로서 존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구원은 어둠 속에 숨은 여성성에서 자란다. 독일의 위대한 작가 괴테의 대표작에 속하는 『파우스트』는 다음의 말로 끝을 맺는다. “영원한 여성성만이 우리를 높은 곳으로 이끈다.”(Das Ewig-Weibliche zieht uns hinan)(파우스트의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는 장면에 나오는 구절이기에 뜻을 살려 ‘높은 곳으로 이끈다’ 대신 ‘구원한다’로 옮길 수도 있겠다.)

인류의 황금시절이 있었다면 모계사회였을 것이다. 이때는 가부장적인 문화가 아니었기에 내 씨, 남의 씨, 내 집안, 네 것, 내 것 등의 소유도 차별도 부재했거나 부진했을 것이다. 모계사회에서 누구의 자식은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아직 모계사회의 영향이 역력했을 고조선의 단군왕검이 그랬듯이 뭇 자식이 있을 뿐이다. 그러다 청동기 시대와 함께 가부장적 남성 주도의 사회가 들어서면서 부권父權이 성립되고, 혈통도, 성姓도 생겨 나 서로 경쟁적으로 나의 씨, 내 집안, 내 가문을 챙긴다. 자신과 자신의 후손들이 세세토록 안전하고, 우월한 지위와 신분을 누리도록 분투한다. 남성적 야망이 뿌리 깊게 뻗어나가면서 소유와 차별, 정복욕이 문화를 이끌고 생사를 건 분란과 학대, 전쟁이 일삼아 일어났을 터이다. 서양 신화는 이때 벌어진 하늘과 땅, 정신과 물질, 낮과 밤, 남성신과 여성신 사이 대립과 갈등의 역사[‘유럽적 균열’]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더불어 신의 세계 역시 “모성에 대한 신중한 삭제”(NHT)와 함께 인격적 유일신인 남성신이 최고의 신으로 자리 잡게 됐을 것이다.

구원의 여성성은 영원한 생명성과 동일시된다. 여자는 우주의 설명될 수 없는(inexplicable) 우주의 힘과 연관된다. 무엇보다도 여자는 어머니로서 생명을 낳기 때문에 영원성과 연결된다. 어머니와의 시원적 연대와 우주의 통일성에 대한 자각을 결합하는 일이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자리 잡았을 것이다. “한 개별적 생명의 가장 명백한 유래는 어머니”이기에 “어머니는 너무나 쉽게 모든 생명과 존재의 원천”으로 간주되는 것이다(NHT).

그렇지만 여성성에서 발견되는 영원성, 생명성은 여성성에 대한 감사와 숭배를 낳기도 하지만 여자들에게 유해한 결과, 즉 그들에 대한 (남성의) 질시와 분노를 불러일으킨다. 모성母性, 여성성의 영원성은 개념적, 논리적 접근을 회피하고 자신을 감춘다. 이성은 영원한 생명의 신비를 벗겨내 이성적인 것으로 만들려 하지만, 그런 남성적 방식으로써는 끝내 원하는 곳에 이를 수 없다. 그렇게 해서는 신비한 골짜기의 문은 열리지 않는다. 여성성의 회피와 거부는 우리[남성]를 좌절시키고 확고한 앵커 없이 영원히 배회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남성은 그 형이상학 좌절에 대한 질시와 분노를 여자에게 돌린다. 그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차별이나 형벌로써 앙갚음한다는 주장이다.

이는 여자와 여성성을 혼동하는 데서 비롯한다. 남성을 능가하는 삶과 죽음의 과도한 힘, 즉 여성성과 모성의 신비한 생명력을 여성성에 다소간 참여하는 현실의 여자에게 귀속시키는 실수를 범한다. 여자는 우주가 아니라 하나의, 때에 따라 변덕스럽고 고집 센 존재자이기 때문이다. “여자는 인간보다 더 우월한 것으로, 결국에는 [우주적 힘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려는 시도 속에서 인간보다 열등한 것으로 간주된다.”(NHT) 모든 고통을 여자의 탓으로 돌린다.

이러한 이중성은 서구 형이상학의 모태인 동시에 그 결과로서 지적되기도 한다. “여자들은 남성이 처하게 된 존재론적 궁지에서 나오는 저주의 대상이 되고 이런 판타지가 서구 철학의 상당 부분을 형성했다.”(NHT)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서구 형이상학이 그들의 이성으로써 해명될 수 없는 ‘불가사의한’ 것에 대한 깊은 두려움을 갖고 흐릿하고 모호한 모든 것을 철학의 영역으로부터 추방하는 방식으로 전개됐다는 주장이다.

흔히 여자 가운데 인류사를 이끈 사상가도 도통한 현인도 없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여자의 약점이 아니라 강점이다. 영원한 생명성에 참여하는 여자는 하늘을 쳐다보다 발이 물웅덩이에 빠진지도 모르고, 딸린 식구들이 어떻게 끼니를 때우는지 굶지나 않는지, 자식들이 어디 가서 기죽지는 않는지 몰라라 하며 혼자 떨어져 진리를 깨치고 수행에 정진하는 일에 전혀 흥미가 없다. 그런 ‘허황한’ 것들에 관심조차 주지 않는다. 세상이나 자기와의 불화, 유한한 제약으로 인한 고통과 불안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철학적, 도적인 분투, 끊임없는 권력 확장의 필요성도 심각하게 느끼지 못한다.

그들은 남자들처럼 쿵쿵대며 요란스럽게 휩쓸리는 대신 표면 위를 유유히, 평화롭게 “미끄러지듯 가는”(NHT) 사람들이다. “여자들은 극복해야 할 한계가 없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도를 깨달으라고 가르치지도 않는다. 그들은 도道로 돌아가라고 이끌 수도 없다. 그들은 도에서 새거나 벗어난 적이 없기 때문이다.”(NHT) 또 이렇게도 말한다. “여자들은 성인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리로 갈 필요가 없다. 다시 말해 그들은 이미 거기에 ‘있는’ 것으로 여긴다.”(NHT) 더욱이 노자가 여성성과 남성성에 귀속시키는 특징들을 볼 때 『노자』 속 현자들은 남성적이라기보다는 여성적으로 보인다는 해석도 제기되는 마당이다.

이런 사정을 아는지라 집에서 아내와 철학 얘기하는 것을 자제한다. 그럼에도 어쩌다 무슨 자극으로 철학적 상상력이 발동하는 때가 있다. 어진 아내는 철학 얘기를 싫은 기색 없이 들어준다. 소크라테스보다 아내 복은 있는 셈인가. 눈치가 보여 말을 서둘러 맺고 나면 공감하는 리액션도, 질문도 없이 아내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난다. “아, 당신은 요즘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살고 있군요.”라는 말과 함께. 쓸데없는 얘기는 애초에 하지 말았어야 했다.

우리가 이어서 다루게 될 노자, 니체, 하이데거는 존재자를 향한 공세적 접근을 재앙으로 여긴다. 이들은 세상의 중심에서 형이상학적 이론을 오만한 목소리로 강변하지 않는다. 대신에 그런 남성적 사유에서 물러나고 철학적 이기주의를 포기할 것을 호소하며, 숨죽인 여성성의 말에 응답한 사상가들이다.

여자는 철학보다도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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