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철학보다 깊다 5

  1. 또 다른 사유로의 도약

우리는 지금까지 반형이상적인 것으로서의 여성적 사유를 살펴보고 그 실례를 노자와 니체에서 구했다. 포용성, 조화, (타자에 대한) 개방성, 치유, 현실긍정 등이 여성적 사유의 특성으로 드러났다. 그래서 하이데거 진리에서 여성성을 확인하는 일은 앞의 두 사례[노자, 니체]에서처럼 저 여성성의 측면들이 과연 그리고 얼마만큼 나타나는지 검토하는 데 있을 것이다. 하이데거의 저작에서 여성 캐릭터가 모종의 역할을 하는 것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물론 하이데거 사유를 주도하는 존재의 본질인 알레테이아[비은폐]가 여신의 이름이고 인간 현존재의 존재인 염려(Sorge; care)의 어원인 쿠라(Cura) 역시 여신이다. 알레테이아에서 당연히 존재의 여성성을 상기할 수도 있거니와 쿠라의 얘기는 “인간이 시간적 실존을 통해 여자로 인격화된 염려(care)에 의해 각인돼 있음(stamped)을 드러낸다.”(하이데거와 여성적 진리) 그런데 사실 하이데거의 설명에 따르면 존재 자체가 감쌈, 존재하게 함, 전체와 조화 등으로 작용하는 사건으로서 이미 여성적이다.

John Caputo는 하이데거의 사유가 어떤 궁극적인 것에 기반을 두기를 거부하고 이성적인 논증의 영역을 떠나라고 호소하고 있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하이데거는 “다양한 전통 철학의 어떤 것과도 깊은 차이가 있는, 비개념적, 비설명적, 비표상적인 사유를 떠맡기 위해 근거 제시의 영역을 뛰어넘을 것을 요구한다.”(The Mystical Element in Heideggers Thought) 근거를 따지는 전통 철학을 벗어나는 또 다른 사유는 여성적이란 점을 다시 설명할 일은 아니다.

존재[있다는 것]보다 가까우면서 그러나 그보다 낯선 것은 있을 수 없다. 전통 형이상학은 이성에 친숙하지 않은, 비가지적인 것을 추방하려고 시도한다. 그들은 흐릿하고 어두운 모든 것들은 철학적 담론에서 제외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형이상학의 태도는 알려지지 않는 것에 대한 깊은 두려움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또 하이데거는 이성중심의 형이상학이 궁극적으로 오늘날 기술시대의 위험에 궁극적인 책임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이성의 행진이라는 헤겔적인 이상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진보에 대한 믿음이 “현대의 기술과 허무주의에 심각하게 연결돼 있다”(Heidegger and East Asia: Continuing the Dialogue)라고 파악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형이상학의 존재 망각을 제기하는 사유를 통해 숨겨진 흐릿함, 경이와 신비를 다시 끌어들인다. 이는 바꿔 말하면 하이데거는 주체와 인간, 더 정확히 말해 남성을 동일시하는 형이상학의 수렁에서 벗어나는 길을 여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남성적으로 이해된 전통 형이상학을 떠나 여성적 진리로의 도약을 촉구하는 셈이다. 그 때문에 형이상학과 존재에 대한 그의 새로운 사유는 여성학이 여성학자들에게 여성성, 모성에 대한 우리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보는 중요한 기회를 줄 수 있다고 평가되는 것이다. “존재가 좋게 말하면 가려져 있고 심하게 말하면 잊혀 있다는 그의 개탄은 여성이 배제되고 종종 침묵해야 하는 철학의 타자로 간주됐다고 주장하는 많은 현대 페미니스트들의 불만”(NHT)과 공명한다는 주장이다.

곧바로 하이데거에서 존재 진리의 여성성을 바로 다루기보다 한 여성학자의 하이데거에 대한 반론을 먼저 소개하고자 한다. 김지하 시인이 그의 페미니즘을 ‘신성 페미니즘’이라 부르며 남성 가부장 문화의 반동이 거센 유럽 안에서 “푸른 새싹으로” 자라고 있다고 평한 이리가레이(Luce Irigaray)이다.

이리가레이는 기존의 남성적 형이상학이 망각하고 있는 존재에서 배후로 밀려나 침묵하는, 침묵을 강요당하는 여성성을 떠올린다. 지금까지 잊힌 존재를 다시 소환하는 하이데거의 시도는 그에게 비슷한 망각에서 여자를 상기하도록 하는 영감을 주는 것이다. 우리는 어둠을 추방하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하이데거의 경고는 이리가레이에게 어둠 속에 울고 있는 소리, 여성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한다.”(NHT) 이리가레이는 그런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급기야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 사상의 주요 원천인 하이데거를 향해 날 선 지적을 한다. 그는 하이데거 역시 형이상학적이며 개념적인 사유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다고 간주한다.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 서구 철학이 존재 물음을 감추었다고 주장한다면 이리가레이는 하이데거의 철학을 포함하여 서구 철학이 여성을 가리고 있다고”(NHT)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다.

이리가레이는 하이데거가 존재와 동일시한 무가 더 이상 물을 수 없는 바닥이 아니라 모성적 기반을 가지고 있다고 밝힌다. 그리고 무의 뿌리는 아이가 태어나 처음으로 세상과 접촉하는 첫 번째 공기의 호흡으로 경험된다고 말한다. 그는 하이데거가 이 점을 간과함으로써 그 자신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로고스의 지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존재나 무 ‘개념’을 통해서도 공기와 같은 모성이 감춰져 있다는 비판이다. 그는 하이데거를 빗대어 존재가 아니라 ‘공기와 같은 모성의 소리가’ 우리를 향한 첫 번째 부름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하이데거는 생명의 첫 번째 공간인 모태와 공기, 즉, 첫 번째 ‘존재의 집’을 망각했다는 것이다.

그의 비판은 다음의 등식으로 요약된다. ‘무의 근원=공기=여성성=모성’. 이리가레이의 지적은 신선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없지 않지만 하이데거에 대한 상당한 오해를 드러내고 있다. 이리가레이는 하이데거의 존재나 무를 보다 심원한 공기, 모성을 추상화한 개념이라고 이해하는 데서부터 잘못된 길로 들어선다. 하이데거는 여전히 서구 철학에 만연한 개념화, 추상화의 진창에 빠져있다는 것이다. 존재를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은 하이데거가 극구 만류하는 일이다. 그에 따르면 그것이 전통 형이상학의 존재 망각이며 존재와 존재자의 혼동이다. 그러나 이리가레이가 불공정하게 덮어씌운 규정을 벗겨내면 하이데거를 만날 수 있다. 그 점에서 이리가레이는 하이데거 이해에 기여한다.

하이데거에서 존재는 모든 것의 유래로서 철학을 가능하게 하지만 철학의 이성적 방식으로써는 결코 파악될 수 없다. 그것은 ‘무엇’으로 개념화할 수 없는 모든 것 가운데 가장 어두운 것이다. 하이데거가 보기에 철학이 자신의 유래를 잊고 배회하는 것은 그 시원을 너무나 많은 개념들로 둘러쌌기 때문이다. 존재는 어떤 개념에도 잡히지 않고 어떤 근거 추궁도 회피하는 심연이다. 물론 이리가레이가 그런 뜻으로 말하지는 않았으리라고 보지만, 말꼬리를 잡아 그에게 되물으면 ‘추상화된 개념이 무와 같은 공기에서 나온다’면 공기는 어디서 비롯되는가? 하이데거에게는 아이가 처음으로 우주를 경험하는 매개라고 하는 공기 또한 어떤, 그것도 질료적인 것으로서 존재자이다. 그러는 한 자기의 존재 근거를 제시해야 하는 것이다. 하이데거에서 존재는 이리가레이가 모성, 공기로써 생각하듯 모든 것의 최초의, 최종의 것이며 늘 상주하는 것이다. 우리가 비로소 구원 받았다고 느끼는 시원의 품이다. 하이데거 사유의 여성성, 시원성, 모성을 드러내기 위해 그의 사유를 다 고려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가 새롭게 밝히는 존재와 사유에 대한 해명을 듣는 것으로써 충분하다. 모든 사유는, 특히 그의 사유는 분명히 존재와 사유 사이로 난 길로 들어서기 때문이다.

‘die lichtende (ver)bergende’는 ‘발현’과 더불어 존재 진리를 부르는 호칭으로써 가장 자주 쓰이는 ‘Lichtung(밝게 트임)’에 대한 설명이다. 동사 ‘bergen’을 현재분사화한 ‘bergende’란 꾸밈말에 대한 우리말 번역의 상당수는 존재가 자신을 밝게 트이면서 또한 자신을 ‘감추는’, ‘숨기는’ 등으로 옮긴다. 동사 ‘bergen’의 사전적 의미가 그렇다.

그러나 이 말에는 다른 의미도 있는데 ‘~을 감쌈, 간수함’의 뜻이다. 이 경우 ‘die lichtende bergende’는 ‘존재가 자신을 밝게 트이면서 그 밝음 안에 존재자를 감싸 그 자체로 있도록 하는’이 될 것이다. 물론 두 경우 모두 존재가 자신을 열어 밝히는 밝음의 품 안에 존재자를 간수하여 그 자체로 있도록 하는 동시에 자신은 그[존재자]를 위해 물러나는 진리 사태를 말할 터이다. 그리고 ‘숨기다’, ‘은닉하다’의 뜻 자체도 ‘~을 감싸 구호해준다’는 뜻이다. 또 그 때문에 두 경우 모두를 한 낱말로 지시할 것이다. 그럼에도 후자의 해석이 존재자와 관련된 문맥에서는 존재의 ‘존재하게 함’, ‘존재를 줌’이라는 존재의 충만성을 더 드러낸다고 본다. 즉 ‘(ver)bergen’은 단순히 자신을 숨기거나 감추는 사태만으로 언급하고 이해할 게 아니라 밝게 트이면서 존재자를 감싸 존재자 자체로 현성하도록 내주면서 뒤로 물러남, 숨김의 놀이까지 유의해야 한다.

존재의 ‘존재하게 함’은 존재가 존재자를 비로소 그 자체로서 들어서도록 자신을 내주고 수락하고 감싸는 사태이다. 은총이며 존재 가능의 충만함이다. 또 진정한 사랑의 의미이다. 그래서 하이데거가 그의 제자이며 연인이었던 한나 아렌트에게 보낸 편지에 나오는 “나는 그대가 그대 자신으로 있기를 원합니다.”는 얼른 듣기에 달달하지 않지만 하이데거로선 사랑의 표현이다.

존재에 상응하는, 즉 존재를 맞아들이는 사유의 성격에서도 어쩌면 당연하게 여성성을 확인한다. Jean Graybeal에 따르면 “사유의 비형이상학적 방식에 대한 하이데거의 추구는 아버지 신의 가부장적 상징에서 벗어나는 운동을 격려하고 언어에서 여성성의 표현 혹은 ‘기쁨을 느끼는 어머니(la mère qui jouit)’를 위한 공간을 연다.”(NHT) 특히 사유가 후기로 접어 들면서 그러한 점이 더욱 두드러진다. “[그리고] 그의 후기 사유는 『존재와 시간』에서 나타나는 계급적 분석(hierarchical analysis)의 방식을 포기하는 것으로써 성격 규정된다.”(Heidegger and Thinking of Place) 가부장적 신관이나 계급화는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남성성에 속하는 것이다.

사유는 곧 인간의 본질이다. 존재를 향한 사유는 ‘기억과 감사’, ‘숙고’, ‘사역에 대한 상응’, ‘기다림’, ‘내맡김’ 등 그것이 무엇으로 불리든, 공통적으로 ‘뒤로 물러남’과 ‘앞으로 향함’의 구조로 돼 있다. ‘뒤로 물러남’은 형이상학의 표상적이며 계산적인 ‘남성적’ 사유를 버리는 것이다. 또한 ‘앞으로 향함’은 우리를 향해 열어 밝히는 존재의 도래, 부름에 자신을 내맡기는, 청종하는 그리하여 존재 진리의 장소가 되는 사유 방식을 말한다. 인간은 모든 것 가운데, 심지어 신을 포함하여 유일하게 존재가 열어 밝혀지는 진리의 장場이 된다는 점에서 존재론적으로 우월하다. 그러나 이것은 전통 형이상학의 ‘휴머니즘’, 인간중심주의와 구별된다. 하이데거에서 인간의 존재론적 탁월함은 수동적인 것으로서 인간의 우위, 특히 유가 전통의 가부장적 군주의 우월성을 거부하는 것이다.(A Comparative Study of Heidegger and Taoism on Human Nature) 스스로를 열어 밝히고, 내주고, 부르는 존재를 비형이상학적인 방식으로 맞이하는 ‘수줍은’ 사유는, 그간의 남성적 사유 이전의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는 또 다른 사유로서 여성적이다.

형이상학이 추구했던 체계의 시대는 끝났다. 이제 그것을 위한 형이상학의 ‘완력’ 역시 더 이상 요구되지 않는다. 이성이 주도하는 증명과 확실성 대신 존재와의 공감, 대화가 장려된다. 하이데거는 노자나 니체처럼 흐릿하고 모호한 것을 철학 밖으로 밀어내지 않는다. 오히려 그 애매함의 중심으로 근원적으로 소급해감으로써, ‘쓸데없이’ 많은 개념들로 가려진 장막을 열어젖히고, 새가 날고 물고기 뛰어오르는 실상을 대면한다. 유도 무도 아니고 이성적 포획에 잡히지 않는 존재와 이에 상응하는 기다리고 내맡기는 사유는 여성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이데거 철학은 ‘여성성에 대한 가공할 입구’를 제시하는 것으로 충분히 해석될 수 있다고 본다. “하이데거 철학은 서구 철학에 깊이 각인된 모성[여성성]에 대한 분개를 넘어서는 가능성을 제공한다.”(NHT) 하이데거의 ‘여성적’ 사유는 “우리가 유일한 선택이라고는 지배냐 복종이냐 밖에 없는, 일종의 주인-노예의 역동성에 희생됨이 없이 세계와 관계 맺을 수 있는 법을 배울 수 있기를 희망한다.”(NHT)

글을 매조지하면서 한국의 시인이며 사상가인 김지하의 주장을 덧붙이고자 한다. 그가 중국 경제의 혁신을 주창하며 한 얘기이다. 그에 따르면, 그가 중국이 앞장서 이룩해주기를 제안하는 신경제의 세계는 율려에서 여울로, 태극궁궁이 아니 궁궁태을로, 오운육기론五運六氣論에서 보면 운정運情[오운의 운행에 따른 기운의 상태나 성질]에서 해문解門[육기의 변화 과정에서 특정 기운이 해소, 전환되는 시점이나 통로]으로써 열린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여기서 당장 필요한 것은 아니다. 다만 김지하는 율, 태극, 운정이 남이고 양으로서 기존 질서며 려, 궁궁, 해문은 여, 음으로서 새로운 세상 건설의 주역으로 밝힌다는 점이 이 글과 관련하여 주목된다. 후자는 이른바 노자老子의 ‘현빈玄牝’이다. 하이데거의 ‘존재’며 니체의 ‘동일자의 영원한 반복’이다. 그는 “부디 혼탁한 현대, 초현대의 대혼돈 속에서 그 상투적인 법고창신(法古創新)보다 훨씬 유연하고 창의력 넘치는 여성성 주도의 입고출신(入古出新)을 단행해주기를” 바란다. 그에게 여성성은 새로운 시장으로서의 신시神市, 호혜시장, 엄마들의 시장인 이른바 ‘비단 깔린 장바닥’이라는 여성 주도의 경제 체제를 주도할 힘이다. “세계 신문명, 그 화엄개벽과 모심의 호혜·교환·획기적 재분배의 따뜻한 자본주의를 복승(複勝)시키고 확충(擴充)시키는” 창조력이라는 것이다.

여길 봐도 저길 봐도,

여자는 철학보다 깊고 푸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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