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철학보다 깊다 4

  1. 널 사랑해영원성이여!

니체는 동아시아의 노자만큼이나 여성성과 관련하여 자주 언급되는 서구 사상가이다. 그는 반듯한 것은 기만적이고 굽은 것은 참이라고 한다. 전자는 남성적이며 후자는 여성적이다. 또 진리는 여자라고 했다. 동시에 그는 여성혐오론자로도 유명하다. 니체는 그의 저작 『선악의 저편(Jenseits von Gut und Böse)』과 같은 저서에서 여성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진정성이 결여된 존재, 본능적이고 교활한 존재, 남성을 조종하는 위험한 존재’. 또 이런 말도 있다. “남자들의 행복은 ‘나는 원한다’이고 여자들의 행복은 ‘그가 원한다’이다.” 이들보다 훨씬 유명하고 자극적인 여성혐오적 표현의 하나는 “그대 여자에게로 가려는가? 채찍을 잊지 말게”라는 구절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나오는 것으로 작품 속의 한 여성 캐릭터가 차라투스트라에게 한 말이다. 채찍의 용도는 모호하다. 당시 니체와 그가 사랑을 얻기를 원했던 루 살로메 그리고 그의 친구이자 연적戀敵인 파울 레가 함께 찍은 사진이 남아 있다. 사진 속 니체와 파울 레는 수레를 끌 듯 앞에 서 있고 루 살로메는 수레를 타고 있는 데 그녀의 오른손에 채찍이 쥐어져 있다. 다음 평가도 니체의 이런 양면적인 여성관을 반영한다. “니체 저술에서 찾아볼 수 있는, 풍부한 모성에 대한 언급들은 여성성의 특징에 대한 보다 폭넓은 접근을 나타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여자들을 주변으로 밀어낸다.”(NHT)

아마도 니체 여성관과 그에 대한 독자의 혼란과 모호함은 이후 논의에서 일정하게나마 해소될 것으로 기대한다. 여기서는 다음과 같은 말로 니체의 본래 의도를 눈짓하는 데 그친다. “내가 어떻게 영원성에 욕망하지 않겠는가, 반지 가운데 혼례의 반지-회귀의 반지를! 내가 아이를 원하는 여자를 찾지 못했다. 내가 사랑하는 이 여자가 아니라면. 왜냐하면 나는 널 사랑해, 오, 영원성이여!”(Also Sprach Zarathustra) 그의 뜻을 살펴 토를 달면 여성성의 영원성과 결혼하고 싶었기에 ‘진정성이 결여된, 본능적이고 교활하고 남성을 조종하는 위험한 존재’인 현실의 여자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뜻이겠다. 여기서도 구체적 개별자로서의 여자와 시원적이며 영원한 여성성의 구별이 중요하다.

니체 철학은 거칠게 말하면, 최고의 신적 존재자 혹은 최고의 가치를 정점으로 삼아 모든 것들을 근거 연관의 관계 안으로 몰아넣는 형이상학의 개념화, 이론화, 체계화에 반발한 사유로 집약된다. ‘망치를 든 철학자’ 우리는 앞에서 형이상학의 특성을 남성성으로 연결 지었다. 그렇다면 형이상학에 대한 니체의 공격에도 비형이상적인 여성적인 사유가 개입돼 있으리라 예상할 수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들여다보자. 형이상학의 남성적 사유가 지닌 힘의 원천은 이성과 논리이다. 니체는 이에 대해 가장 명확하게 반박한 최초의 철학자로 평가된다. 전통 철학에 대한 니체의 비난은 생명 없는 이론적 진리를 과대평가하며 자연과 인간 삶을 지배하려는 경향에 향해 있다. “형이상학은 모든 현상들을 하나의 통일적 본질로 증류하는 시도를 의미한다. 이것이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는 이유는 단순히 개념적 환상의 세계로 날아가기 때문이 아니라 개념들은 삶을 해체하는 데 쓰이기 때문이다.”(NHT) 이론적 진리는 이성에 알려질 수 있는 가지적이고 비질료적인, 즉 형상적인 것들을 대상으로 한다. 그러나 그것으로써는 아직 보이지 않지만, 그러나 저 알려지고 알려질 수 있는 것들의 의미와 근거를 이루는 존재를 만날 수 없다.

서구 사상을 추동한 것은 압도적으로 로고스 중심의 논리학이다. 서구 철학은 논리학을 절대시하며 논리의 개념과 형식으로써 분류될 수 없는 것을 철저히 외면한다. 그러한 그 전제 위에서, 그 한계 안에서 세계를 이해하고 나아가 통제가능하다고 여긴다. 다시 말해 그들에게는 이성으로 알 수 있는 것만이 현실적인 것이다. 나머지 것들은 비현실적인, 즉 없거나 추방돼야 할 신비 혹은 환영, 기만이다. 때문에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다. 이성으로써 세계를 포획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소크라테스부터, 즉 철학의 시작 이래 포기될 줄 모르는 철학의 허세, 오만이다. 이에 대한 니체의 말을 다시 기억한다. 전통 철학의 “사유는 존재의 가장 깊은 심연에 이르기까지 인과율을 실마리로 존재를 인식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교정’할 수 있다”라고 믿는다. 형이상학의 이성과 논리 주도에 대한 비판은 다시 이성과 의지의 주체인 인간에게 과도한 권력을 맡기는 주관주의, 인간중심주의를 해체하려는 시도라는 점은 앞서 밝힌 바와 같다.

니체는 서구 형이상학의 오만 또는 오류에 대한 설명을 그것의 모태이자 결과인 언어에서 구한다. 그는 서구 언어가 자신의 통찰을 표현하는데 적절한 어휘와 문법을 갖추지 못하고 있음을 거침없이 제기한다. 서구 언어는 그로 하여금 배후에 모종의 주체를 전제함이 없이는 작용을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모든 작용에는, 모든 술어에는 주체와 주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번개가 치는 것은 하나의 사건이다. 그러나 서구 언어의 체제로는 ‘번개’는 ‘치다’는 작용의 주체, 주어이고 ‘치다’는 번개의 작용, 술어이다. 이러한 언어관은 세상에 있는 것은 주체[실체]로 있거나 그에 속하는 술어뿐이라는 형이상학과 맞물려 있다. 상론할 자리는 아니지만 이런 주술 관계의 문제는 능동태와 수동태, 자동사와 타동사의 문법적 구분, 더욱 결정적으로 주객의 분리와 겹친다.

서구 형이상학에서 어떤 것을 말하기 위해서는 논리적 규칙이나 언어의 문법에 따라 그것의 한계를 정해야 한다. 존재를 하나의 개념이나 구상으로 환원하는 것은 제한 없는 것에 제한을 가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형이상학은 이러한 제약에서 도망치는, 즉 언어적 기호나 철학의 범주로 적절히 표현될 수 없는 것들을 “객관성”으로 가장한 채 추방하고 말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을 무의미한 것으로 취급했다.

니체가 보고 말하려한 것은 이런 반듯한 문법과 논리로써는 표현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참은 한계지어지지 않는, 형언될 수 없는, 말하자면 ‘굽은’ 그것에 있다. 그 때문에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한다. “철학적, 논리적 지식에 대한 니체의 비판에는 지식의 언어적 형태에 대한 노자와 장자의 비판이 울린다.”(NHT) 니체가 노자, 장자와 마찬가지로, 또 일정하게는 하이데거와 함께 개념보다 훨씬 유연하고, 또 고정된 일의적 규정이 아니며 끊임없는 재해석 가능성에 열린 은유나 시적 표현을 중시한 것은 우연만은 아니다.

형이상학적 접근에서 달아나는, 알려질 수 없는 존재의 불가지성不可知性은 단순히 우리의 무능이나 태만에 있는 것이 아니다. 존재 자체가 정태적인 것이 아니고 운동이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의 남성적 공세로부터 물러나는 참으로서의 존재는 주체와 객체, 능동과 수동, 개별과 전체 등의 분리 이전이자 그 너머의 살아 있는 과정, 운동이다. 때문에 존재를 ‘무엇이다’라고 명사적 개념으로 제시하는 주장은 그의 이성 안에서 이미지로서의 세계일 뿐이다.

니체의 비유를 빌려 말하며 형이상학의 직선적 존재 이해는 기만적이다. 도덕적 차원과 무관하게 그러한 이해는 대부분 사실을 무시, 외면, 왜곡, 가공하기 쉽다는 점에서 그렇다. 니체는 존재를 이성과 인간의 장악에 두지 말고 전체로서, 역동적 생명으로서 응대하라고 요구한다. 그리고 니체에게 생명은 여성성으로 이해된다. 니체의 철학은 자주 우주 자체의 힘과 여자 사이의 소리 없는 연결 고리를 본다. 형이상학의 이성적, 남성적 손길에 자신을 감추는 참인 여성성을 보는 것이다. “니체는 또한 여자를 단순히 하나의 생명으로서 기술하는 게 아니다. 여자는 자연과 문화의 구별을 아우른다고 주장하며 또한 지혜로서 기술한다.”(NHT) 니체는 모든 것을 배태하고 그것들의 개별화, 독립된 삶을 위해 뒤로 숨는 여성성에서 구원을 찾는 듯하다. 니체에게서도 구원은 비로소 그 자신이 되는 데 있다. 영원한 모성으로부터 태어난 모든 것들의 구원은 비본질적인 삶이란 쓰라린 유랑 끝에 저 시원적인 조화의 품으로 새롭게 돌아가는 데 있다는 것이다. 영원성과 결혼하려는 열망은 그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될 것이다.

현실에서 우리는 어머니로부터 처음으로 생명을 받기에 그녀를 우주 자체와 동일시하는 위험스런 경향이 있는 게 사실이다. 나아가 우리가 한때 어머니와 나눠질 수 없었다는 사실에 대한 인정이 우리 모두에 숨어 있다. 그러나 우리를 낳고 기른 어머니와 구원의 영원성인 여성성은 아주 다르지도 않지만 동일시될 수 없다. 이 둘의 혼동에서 니체가 여성성에서 진리와 자유를 보는 동시 여자를 혐오하는 니체의 이중성을 해명하기도 하기도 한다. 모든 사람들은 심리학적으로 개별화 과정에서 모태에서 벗어나기에 어머니를 미워하면서도 동시에 안전이 보장되고 어떤 걱정도 할 필요가 없었던 원래의 결합을 되찾고 싶어한다. 여자를 사랑하면서도 증오했던 니체의 이중성을 그같은 심리적 기제에서 접근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형이상학을 극복하는 새로운 사유들에 대한 니체의 언급들은 그의 사상이 지닌 진리의 여성성을 보여준다. 우리는 니체 철학에서 존재자의 존재인 ‘동일자의 영원한 반복’에서 이를 다시 확인할 수 있다.

 

“보라 이 순간을, 이 관문으로부터 길고 영원한 골목이 뒤로 이어진다. 영원성이 우리 뒤에 남는다. 달릴 수 있는 모든 것들은 이미 한 번 이 골목을 따라 달렸던 것이 아니겠는가?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들은 이미 한 번 일어났고 행해지고 지나가는 것 아니겠는가?”(Also sprach Zarathustra)

 

니체가 존재자의 존재로서 말한 ‘동일자의 영원한 반복’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며, 그래서 개념적 범주로 잡히지 않는다. 니체의 존재 이해에서는 ‘움직이는 가운데 단일함’, 또 ‘과정으로서의 전체’가 강조되며 ‘개별성이나 차이’의 중요성이 복원된다. “니체에게는 전체를 역동성에서 사유하는 게 중요하다.”(NHT)는 것이다. 동일자의 영원한 반복은 모든 것이 모든 것과 연관을 맺는 연관 자체 또는 일종의 우주적 연결망(cosmic web)과 같은 것이다.

여기에는 시작도 끝도 앞섬과 뒤섬도 없고, ‘이것이 저것’이며 ‘저것이 이것’이다. 모든 것이 주변이고 부분이면서 또한 중심이고 전체이다. 동일성에서 차이를, 차이에서 동일성을 견지하는 것이다. 또 여기서는 앞으로 일어날 일은 이미 일어났던 것이다. 돌아간 것, 있었던 것과 도래하는 것, 있게 될 것, 초월과 내재가 하나로 어울린다. ‘두 상이한 것이 동시성’, ‘동일성과 차이의 동일성’. 모든 것들은 동일성이 무한히 반복되는 과정의 부분들일 뿐이다. “내가 얽혀 있는 원인들의 연관망은 되풀이 되는데 이것이 나를 다시 창조할 것이다. 나 자신 영원 회귀하는 원인들에”(Also sprach Zarathustra) 속한다. “모든 것은 가고, 모든 것은 돌아온다. 존재의 수레바퀴는 영원히 돈다. 모든 것은 죽고, 모든 것은 다시 꽃핀다. 존재의 나날은 영원히 흐른다.”(Also sprach Zarathustra) 이에 따라 니체의 존재도 마땅히 비가역적인 직선의(linear) 시간이 아니라 시작과 끝을 물을 수 없는 둥근 원(circular)의 시간으로부터만 존립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은 둥글다.’

‘동일자의 영원한 반복’이 보여주는 이러한 특성은 생명의 근본적 힘을 상징하는 여성적 원리, 여성의 창조력을 지시한다. “이러한 관점으로부터 니체의 영원한 반복이 우주에 대한 매우 여성적 이해, 즉 우주의 총체성이 아니라 다른 개별자들에 대한 연결의 의미에 기반을 둔 매우 여성적 이해를 제공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NHT)

 

여자는 철학보다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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