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 초원은 동서로 수천 킬로미터 이어져 오랫동안 동서교통로의 역할을 하였다. 아시아쪽 유목민들이 서진하여 유럽쪽 초원으로 들어간 예들이 있는 것처럼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유목민 족속들이 동쪽으로 이동하여 오늘날의 중국의 신강위구르 자치구와 감숙성의 초원지대까지 들어와 정착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신강지역 박물관들을 가보면 코카서스 인종의 미라를 발굴하여 전시하는 것도 볼 수 있다. 또 신강 지역에는여러 곳에서 서양인들과 비슷한 생김새의 사람들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다. 첫 번째 연재기사에서 소개하였던 스키타이의 일족이었던 사카인들도 이러한 인도유럽어 족속에 속한 사람들이었으며 본고에서 다룰 대월지大月氏도 그러한 계통의 족속이다.
박트리아를 정복한 유목민 대월지
사마천의 《사기》 「대원전大宛傳」은 대원국 뿐 아니라 서역의 여러 나라들에 대한 기록을 담고 있는 책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대원국이라 하기도 하고 대완국이라 하기도 한다) 실크로드의 개척자 장건張騫이 한무제에게 올린 보고서를 토대로 하여 작한 중국과는 수천 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는 서역의 여러 나라들에 대한 기록이다. 그에 따르면 월지月氏는 한나라 초기에 돈황과 기련산맥 사이의 초원지대에 있다가 흉노의 공격을 받아 대원을 지나 대하大夏를 점령하였다고 한다. 대하는 아크메네스 왕조가 지배했던 페르시아 제국의 동쪽 끝 속주의 하나로서 BCE 4세기 말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점령되어 그리스계 왕국이 세워진 곳이다.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을 중심으로 하였는데 수도는 아프가니스탄의 서북에 위치한 ‘발흐’라는 곳에 있었다고 한다. 1960년대 이후 프랑스 고고학자들에 발굴되었던 아프가니스탄의 동북쪽 끝의 아이하눔 유적은 박트리아의 한 도시 유적으로서 완전히 그리스식 도시로 판명되었다.
사마천의 기록에 의하면 박트리아를 정복한 대월지는 ‘규수嬀水’의 북쪽에 있었다고 한다. 규수는 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과 투르크메니스탄의 경계를 이루는 아무다리아가 그것으로 고대 서양인들은 그 강을 옥수스 강이라 부르고 그 주변 지역을 ‘옥시아나’라고 하였다. 대월지는 규수 북쪽을 정복한 후 강을 건너 아프간 지역을 정복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규수 근방의 토지는 비옥하여 그곳에 정착한 월지인들은 풍요로운 생활을 영위하였다. 월지인들이 모두 박트리아로 이주한지는 않았다. 《사기》에 의하면 하서회랑 지역에서 남쪽 티베트 근처로 이동하여 강족羌族 주변에 정착하였는데 이를 ‘소월지小月氏’라 하였다. 대월지보다는 작은 세력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대월지가 대하 즉 박트리아 왕국을 점령한 것은 흉노의 공격으로 하서회랑에서 밀려난 후 삼사십년 정도 지난 BCE 139년경이었다. 반고의 《한서》에 의하면 대월지는 신강서북부의 일리 강 지역으로 이주하였다가 그곳에서 다시 오손烏孫이라는 유목민 족속에 의해 밀려나 대하로 오게 되었다고 한다. 대하를 정복한 대월지는 아마 다른 유목민 제국처럼 여러 부족의 연맹이었던 것 같다. 《한서》에는 다섯 ‘흡후翕侯’가 땅을 나누어 지배하였다고 한다. 흡후는 ‘샤브구’ 혹은 ‘야브구’를 음사한 것으로 여겨진다. 후일 돌궐제국에서도 ‘카간’ 다음의 권력자를 야브구라 하였다. 대하를 정복할 당시 대월지를 모두 지배하는 왕은 없었던 것인데 곧 다섯 흡후 가운데 하나가 ‘귀상貴霜 흡후’가 대월지의 왕권을 세운 것이다. 귀상은 쿠샨을 음역한 것인데 쿠샨 섭호인 쿠줄라 카드피세스라는 인물이 다섯 부족을 통합하여 쿠샨 제국을 세운 사람이다. 중국의 《후한서》에는 ‘구취각丘就卻’으로 나온다. 그 아들인 염고진閻膏珍 때에는 천축天竺을 멸망시켰다고 하니 대월지는 아프가니스탄과 간다라를 정복한 후 남쪽의 인도로 세력을 확대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중국의 하서회랑 지역에서 출발한 대월지는 그로부터 한참 먼 인도 땅에도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인더스 강 유역의 펀잡 지역을 넘어 데칸 고원과 동쪽의 갠지스 강 연안 일대까지 지배하였다.
쿠샨 제국
쿠샨 제국은 구취각의 증손자인 카니슈카 왕(재위 CE 127-150) 때 전성기를 맞았다. 현재 그의 상 일부가 남아 있는데 인도보다는 북방유목민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의 모습을 새긴 금화도 주조되었는데 수염을 길게 기르고 창을 든 모습이다. 금화의 명문은 이전 박트리아인들이 사용하던 그리스 문자를 사용하였다. 왕을 뜻하는 단어로 그리스어인 ‘바실레우스’ 뿐 아니라 페르시아어인 ‘샤’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쿠샨 제국은 세력이 강해지자 파미르 고원의 동쪽으로도 진출하였다. 현재 중국인들이 카스(喀什)라고 부르는 카슈가르뿐 아니라 그보다 동쪽에 있는 호탄(和田 : 옛 于闐國) 근처까지 진출하였다.
쿠샨 제국은 불교를 후원하고 진흥한 것으로 일컬어지지만 불교만 숭상하지 않았다.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 북부의 수르흐 코탈 유적은 카니슈카 왕이 세운 사원의 유적인데 불교 사찰이 아니라 배화교 신전으로 추정된다. 카니슈카와 관련하여 중요한 비문이 1993년 수르흐 코탈 근처에서 발견되었다. 그 지명을 따라 ‘라바타크 비문’이라고 하는 이 비문에서는 카니슈카 왕이 인도 및 페르시아의 여러 신들을 섬겼음을 말해준다. 힌두교 신들을 위한 신전을 건립하라고 했으니 힌두교에 우호적이었던 것 같다. 카니슈카 주화에서는 그리스와 페르시아, 박트리아, 인도의 신들뿐 아니라 석가모니도 드물게 새겨져 있는데 카니슈카는 다양한 족속들을 다스렸던 터라 종교적으로 대단히 포용적이었던 것이다. 이는 쿠샨 제국이 실크로드 상의 교차로인 박트리아뿐 아니라 여러 문화권에 걸친 지역을 포괄하고 있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보인다.
쿠샨 제국이 불교의 발상지인 북인도로부터 박트리아와 타림분지 일대를 지배함으로써 인도의 불교가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으로 대거 유입되었던 것도 주목할 만한 점이다. 쿠샨 제국은 이런 면에서 불교사와 문명교류사에서 큰 역할을 하였다.
대월지에서 나온 쿠샨 제국의 번영은 그렇게 오래 계속되지 못했다. 3세기 중반부터 사산 왕조 페르시아 제국이 다시 동쪽으로 세력을 뻗쳐와 결국 쿠샨 왕은 페르시아에 신속臣屬되고 만다. 인도의 영토도 인도의 여러 나라들에 빼앗겼다.
키다라 훈
중국기록인 《위서》 「서역전西域傳」에는 대월지국의 왕으로 ‘기다라寄多羅’라는 사람이 등장하는데 쿠샨 왕조에 복속해 있던 집단의 우두머리로 보인다. 4세기 말 쿠샨 제국이 약화된 틈을 타 독립된 나라를 세우고 힌두쿠시산맥 북쪽과 남쪽을 지배하였다. 《위서》기록에 의하면 그는 “북천축을 침공하여 간다라 이북의 다섯 나라가 모두 그에게 복속하였다.” 기다라 왕국은 사산조 페르시아와 싸워 5세기 중반에는 힌두쿠시산맥 북쪽의 영토를 빼앗겼지만 산맥 남쪽의 땅은 5세기 말까지 유지하였던 것 같다. 페르시아 기록에 의하면 기다라 즉 키다라 왕은 ‘쿠샨샤’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키다라가 쿠샨제국의 계승자로 자처했음을 말해준다.
서양의 비잔틴인들은 페르시아를 통해 키다라를 알게 되었다. 아틸라와 교섭하기 위해 449년 사절단의 일원으로 훈제국의 본영을 방문하였던 그리스 역사가 프리스쿠스는 당시 페르시아와 싸웠던 키다라를 ‘키다라 훈’이라 하였다. 프리스쿠스는 키다라를 훈족에 속한 족속으로 여긴 것이 분명한데 그렇다면 키다라 훈족은 대월지를 계승한 것이 된다.
에프탈 훈 제국
키다라 훈의 나라는 5세기 말 또 다른 유목민 세력인 에프탈에 의해 정복되었다. 이 에프탈도 훈이라 불렸다. 6세기 비잔틴 역사가 프로코피우스는 페르시아인들이 에프탈을 ‘백白훈’이라 부른다고 하였다. 다른 훈족 사람들과는 달리 피부가 희었던 모양이다. 중국사서 《위서》 「서역전」에는 에프탈을 ‘엽달嚈噠’이라 하면서 대월지에 속하는 종족 혹은 투르크계인 고차高車의 별종이라고 하였다. 《위서》 기록은 정확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에프탈의 지배하에 대월지, 고차 등의 다여러 족속들이 혼재되어 있었던 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한다.
에프탈은 몽골 초원이나 알타이 초원지대에서 살다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남쪽으로 내려온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몽골 초원지대를 지배하던 유연의 지배하에 있다가 그로부터 떨어져나온 것인데 괵투르크 즉 돌궐도 얼마 후 유연의 지배로부터 벗어났다. 5세기에 몽골 초원에서는 우리가 잘 모르는 어떤 격변이 있어 유연의 지배체제를 흔들었던 것 같다. 좌우간 에프탈은 몽골 초원으로부터 소그드 지역을 거쳐 박트리아로 내려와 박트리아를 지배하던 키다라 훈을 정복하였다. 박트리아에 자리잡은 에프탈은 서쪽의 페르시아와도 싸웠다. 프로코피우스의 《유스티니아누스 전쟁사》 1권에는 페르시아와 에프탈의 전쟁을 다루고 있는데 우리는 비잔틴 역사가의 기록을 통해 중앙아시아 지역의 사정을 듣게 되는 것이다. 그 기록에 따르면 사산조 페르시아의 페로즈 1세는 에프탈과 여러 차례 전쟁을 하였는데 마지막 전쟁에서 퍠배하여 484년 전사하였다. 페르시아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에프탈은 페르시아의 내정에 간섭하기까지 하였다. 페로즈의 아들 카바드가 왕위를 빼앗기고 에프탈로 도주해오자 에프탈은 3만의 병력을 파견하여 그를 다시 왕으로 세워주었다. 에프탈에게 신세를 진 카바드는 에프탈에게 상당한 영토를 넘겨주었을 뿐 아니라 에프탈의 왕을 주군으로 모셔야 하였다. 에프탈 왕에게 공납을 바친 것은 물론이다. 에프탈은 페르시아뿐 아니라 동쪽으로는 오늘날의 신강 일대까지 지배하고 남쪽으로는 인도 서북부로 진출하였다. 당시 인도에는 굽타 왕조가 인도대륙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에프탈과의 충돌은 피할 수 없었다.
에프탈을 인도 기록에서는 ‘스베타 후나’라 하였는데 이는 페르시아 사람들이 에프탈을 ‘백훈’이라고 불렀듯이 백훈이라는 뜻이다. 에프탈을 훈족으로 본 것이다. 굽타 왕조의 스칸다굽타 왕(재위 455-467)이 에프탈과 싸웠다는 것을 언급한 비문이 갠지스 강변의 가지푸르(우타르프라데시 주)와 서인도의 유나가드(구자라트 주)에서 각각 발견되었다. 이는 에프탈 훈족이 인도에 처음 진출했을 때의 기록이다. 에프탈이 북인도를 넘어 남쪽으로 진출했음을 입증해주는 것으로는 중인도의 비디샤(마드야 프라세시 주)에서 발견된 비문이 있는데 거기에는 에프탈 왕 토라마나의 이름이 나온다. 토라마나는 펀잡과 카슈미르 등 북인도를 정복하고 통치하였다. 이렇게 에프탈 훈족은 예전 쿠샨 제국의 영토를 거의 다 차지하였다.
인도의 굽타 제국은 이러한 에프탈 훈의 침략을 계기로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굽타 제국의 약화를 틈타 지방의 권력자들이 도처에서 흥기하기 시작하여 인도는 봉건적 분열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수십년 간에 걸친 후나의 침략은 굽타 왕조의 번영 기반이던 유럽과 중앙아시아와의 무역활동에 큰 타격을 가하였다. 인도는 아라비아해를 통해 유럽에 다양한 사치품들을 수출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무역의 위축은 국가의 재정수입 감소를 초래하였다. 당시 불교는 이러한 무역에 종사하는 상인들의 후원에 크게 의존하였는데 무역의 쇠퇴는 인도에서 불교의 쇠락도 가져왔다.
앞에서 언급한 에프탈 후나의 토라마나 왕은 불교를 숭상하였지만 그 아들인 미히라쿨라 왕은 부친과는 반대로 불교를 탄압하고 힌두교에 우호적인 정책을 펼쳤다. 그를 계승한 후나 왕들도 마찬가지로 힌두교 사원을 건축하는 등 힌두교에 우호적인 행보를 보였다. 북방에서 내려온 훈족 왕조가 인도의 문화에 동화되어간 것이다.
굽타 제국을 몰락으로 몰아넣었던 에프탈도 그 뒤를 따라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것은 인도인들의 반격 때문이 아니라 페르시아 때문이었다. 6세기 중반 페르시아 왕 코스로우 1세는 당시 중앙아시아 초원지대에서 급속히 흥기하던 돌궐 제국과 손을 잡고 에프탈을 협공하였다. 결정적인 전투는 560년 부하라 근처에서 벌어졌다. 싸움에서 이긴 페르시아와 돌궐은 옥수스 강을 경계로 점령지를 분할하였다고 한다. 물론 이 전투로 에프탈의 세력이 일거에 사라지지는 않았다. 비옥한 트란스옥사니아는 빼앗겼지만 아프간과 북인도에서는 에프탈의 잔존 세력이 7세기 중반까지 살아남았다. 북인도에서는 토라마나의 후손 가운데 한 사람인 유디슈티라 왕(재위 633-670) 때에 와서야 후나의 북인도 지배가 카슈미르의 반란에 의해 끝이 났다고 한다.
당나라 때의 고승인 현장 스님은 630년부터 644년까지 구법승으로서 인도에 가서 불교를 공부하고 중앙아시아와 인도의 많은 곳을 여행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대당서역기》에는 오늘날의 아프간 지역에 위치한 바미얀(梵衍那)과 카피사(迦畢試) 등의 나라를 언급하고 있다. 그 나라들에는 불교가 매우 번창하여 불교사원도 많고 승려들도 많았다고 한다. 대승불교와 소승불교가 모두 그곳에서 유행하였다. 물론 이 지역을 거쳐 중국으로 들어온 불교는 종교적 상상력이 풍부하였던 대승불교였다. 당시 이 나라들을 지배한 것이 에프탈계였는지 아니면 돌궐계였는지 현장 스님은 언급하지 않았다. 북인도에서는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에프탈계가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프간 지역의 나라들도 에프탈계였을 것이다.
인도의 상당 부분을 지배한 에프탈 훈은 힌두교를 비롯한 인도문화에 동화되어 갔는데 인도 서부의 라자스탄은 이들이 정착하여 지배하였던 곳 가운데 하나였다. ‘라자스탄’이라는 말이 왕들의 땅이라는 뜻이다. 힌두교도가 되었던 이들 훈족의 후예들은 용맹한 전사로서 이름을 떨쳤는데 자신들이 인도인들을 다스릴 자격이 있는 왕자라는 자부심이 라자스탄이라는 땅 이름에 반영되어 있다. 이 지역의 전사지배층을 구성한 ‘라지푸트’는 ‘왕자’라는 뜻이다. 서북부 인도의 이 라지푸트족은 페르시아를 넘어 인도로 세력을 확대해오는 이슬람 세력을 막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 인도가 중앙아시아와는 달리 10세기경까지 오랫동안 이슬람화되지 않았던 데에는 이들의 공적이 적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