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철학보다 깊다 3

3. 골짜기의 신은 죽지 않는다

 

노자의 사상은 동서의 어떤 사상가보다 일찌감치, 또 비교적 활발하게 여성성의 관점에서 조명되었다. 여성성을 노자 사유의 중심 주제로 꼽기도 한다. 노자를 비롯한 도가 사상은 인위적으로 존재자를 공략함이 없이 스스로 그러하도록 놔두는, 또 일체의 억압적 규범에 삶이 갇히지 않도록 하는 자유의 사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입장에 담긴 여성성은 당시 정치나 사상의 주도권을 쥐어 가는 유학과의 비교 속에 한층 뚜렷해진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유학은 신분과 계급의 구분과 바람직한 인륜과 의례를 체계적으로 설정하고 명분을 부여함으로써 사회 통합을 이끌려는 학문이었다. 엄중한 위계와 질서를 통해 개별적이고 자유로운 삶을 인위적 규범에 맞춤으로써 개별자들을 전체, 체계 안에 가두는 유가의 학문적 성향은 노자에 비하면 다분히 남성적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보면 유가의 남성적 특성은 대략 다음과 같은 것으로 지적된다. 인위적인 규범과 예법을 통한 적극적인 사회 통제 / 강력한 위계질서와 명확한 사회적 역할 강조 / 직접적인 행동과 적극적 참여를 중시 /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접근 / 권력 지향적 태도 / 경쟁과 성취를 통한 사회적 지위 상승 추구 / 패권 지향 등. 또 이같은 성격상 유가는 기득권의 유지, 확장에 기여했다. 그리고 이때의 기득권 세력은 이미 가부장적이며 남성적인 것이다. 사상과 정치가 서로 뒷받침하면서, 가부장적 문화와 문명은 스스로를 관철시키며 확산시켰다.

반면 도가의 여성적 원리는 유가의 그것과 다음과 같이 대조된다. ‘소극적 개입과 자연스러운 흐름 / 인위적 개입을 최소화하고 자연의 흐름에 내맡기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원칙 / 직관적이고 수용적인 접근 / 고정된 규범보다 유연성 중시 / 지적 성취보다 내면의 조화 강조 / 권력 지향이 아닌 조화와 균형 추구 / 경쟁이 아닌 상호 포용 등.

이에 따라 노자나 장자에서는 수용성, 개방성, 모성으로 대표될 여성적 덕이 환영받고 합리성, 명확성, 논리적 일관성은 별로 대접받지 못한다. 도가 사상은 유가의 체면과 명분에 숨은 가식, 개별자에 대한 전체의 억압, 허례허식, 패권적 야욕을 고발하고 또 조롱했다. 이들이 존재자 전체나 비인간적 자연의 세계를 경시한다고 받아들였다. 장자는 자연의 영역을 무시하고 모든 것을 오직 인간의 이해관계라는 관점으로 해석하는 공자의 사유를 질타했다.

그만큼 인륜이나 명분에 대한 도가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오히려 인의仁義로 대표되는 규제와 규율이 부상하는 만큼 대도大道는 무너진다고 보았다. 타자를 억압하는 강제 등의 공세적, 남성적 사유나 정치는 그들이 보기에는 도의 몰락이었다. 이때 그들의 시선은 다분히 여성적일 터이다. 노자에 따르면 진정한 지혜와 통치는 강제가 아니라 부드러운 포용과 자연스러운 흐름을 통해 이루어진다. 노자는 또 “평화, 수용성, 타자에 대한 개방성 등의 여성성이 어떤 경우의 남성적 갈등과 야만적 힘보다 영속적이라고 주장한다.”(NHT) 이제 『노자』에 나오는, 몇 가지 원문 구절을 통해 이를 확인해보자.

먼저 『노자』에서는 여성, 여성성의 은유가 많이 등장한다. 제28장에서 노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수컷을 알고 암컷을 지키면 천하의 골짜기가 되고 천하의 골짜기가 되면 늘 가까운 도에서 떠나지 않는다[知其雄, 守其雌, 爲天下谿, 爲天下谿, 常德不離].” 제6장에서도 이와 유사한 개념을 찾아볼 수 있다. “골짜기의 신은 죽지 않는다. 이를 일러 거뭇한 암컷이라 한다. 거뭇한 암컷의 문은 천지의 뿌리이니, 흐릿하지만 이어지고 아무리 써도 마르지 않는다[谷神不死. 是謂玄牝, 玄牝之門, 是謂天地根. 綿綿若存, 用之不勤.” ‘현빈’은 ‘거뭇한( 가물한, 현묘한)’ 암컷’, ‘넓고 깊은 여자’, ‘미묘한 모성’ 등으로 번역된다. 두 구절에서 ‘암컷’[현빈], ‘골짜기’, ‘문’은 비어있음을 통해 자연스러운 변화를 이끌어내는 수용적이며 창조적인 여성적 원리 또는 여성성의 고요한 힘을 의미한다.

또한 노자는 비이성중심적이며 언어, 개념에 대해 회의적이다. 노자나 장자를 반형이상학적이라고 단정할 수 없겠지만 개념의 엄격성에 대한 비판은 그들 사상의 주요한 특성이다. 위에서 지적했듯이 노자가 자신의 생각을 말할 때 자주 은유에 의지하는 까닭이다. 은유는 개념보다 훨씬 유연하며 그리고 아니 그 때문에 끊임없는 재해석을 요구하는 우주적 실재를 표현하는 수단으로 선호된다. “말이 드물면 절로 그러할 것이다[希言自然].”(노자23) 도가사상은 끊임없이 이름[호칭; 개념]의 한계를 유념하도록 가르친다. 그것은 이름들이 불가피하게 초래하는 왜곡 때문이다. 호명된 이름들이 한계를 넘어 사물을 대신하거나 능가할 경우 사물들의 개별성, 고유성이 외면되고 자발적 생성의 과정을 방해하게 될 것이라고 본다. 이름을 회피하는 혹은 이름으로써 닿을 수 없는 것에 한사코 호칭과 개념의 모자를 뒤집어씌우는 일은 다차원적이고 다의적인 사물과 세계를 하나의 작위적 굴레 안에 가두는 것이다. 길이가 고정된 침대에 사람을 맞추려는 프로크루스테스와 같이 한계가 없는 것에 한계를 부여하는 폭력이며 허상이다. 『노자』는 “도를 도라 부를 때는 이미 우리에게 늘 가까운 도가 아니다[道可道, 非常道].”(노자1)라는 구절로부터 시작한다.

노자나 장자는 명석판명한 답을 내놓기를 요구하는 서구 독자들을 곤혹스럽게 만든다. 시원의 ‘모호한’ 것은 나중에 마련된 개념과 논리로써는 잡히지 않는다. 언젠가 친구를 따라 하이데거를 방문한 한 기업가는 노자가 어렵다고 하며 ‘그 중국인은 왜 그런 식으로 말하느냐’고 질문한다. 옆에 있던 친구가 ‘논리학을 몰라서’라고 응답하자 듣고 있던 하이데거가 이렇게 말하며 끼어든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그들이 논리학을 몰라서.’ 『노자』를 까다롭게 여기는 ‘서구 독자’에는 동아시아인들을 포함하여 서구 사유에 적응되고 그들의 논리와 언어로 학습된 대로 자신들의 시원을 해석하려는 자들도 포함된다.

도가에서 언어를 부정하는 것은 단순히 해체가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경험의 영역을 연다. 도가 사상가들은 인식의 흐릿함, 모호함이 신비와 경이에 대한 여지를 연다고 이해한다. 다시 말해 말과 개념이 닳지 않는 혹은 그런 방식의 접근에는 회피하고 숨는[言語道斷] 영역은 내모는 것이 아니라 새로 맞이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새로움은 동시에 시원적인 것으로서 우리 가까이 머무는, 그러나 잊힌 것[常道]의 도래이다. 노자가 1. 2보다 3을 강조한 뜻이 거기에 있다. 3은 1의 시원을 새롭게 반복하는 또 다른 시원이다. 그래서 시원은 가장 오래된[1] 동시에 새로운 것[3]이다. “도는 늘 있어온 그러나 동시에 늘 새로운 어떤 시원의 것을 나타낸다.”(NHT)

그런 이유로 “이들의 저술에는 신의 계시나 논리적 입증, 방만한 서술을 찾아 볼 수 없다. 다만 도의 리듬에 대한 일종의 우아한 조율이 나타나 있을 뿐이다.” “학문은 매일 더하고 도는 매일 덜어낸다[爲學日益, 爲道日損].”(노자48) “아는 자는 말이 없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知者不言 言者不知].”(노자56) 말을 아낄수록, 말이 적을수록 숨어있는 것의 내보임과 말 건넴에 응대할 수 있다.

도가 한정된 개념의 광주리에 다 담길 수 없는 이유는, 말하자면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키를 맞출 수 없는 까닭은 도란 상호 연관된 전체이며 나타나고 숨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실체가 아니라 과정으로서 이해돼야 하는 것이다. 인간이 마련한 인위적인 반듯한 척도로는 잴 수도 없다. ‘길’을 의미하는 ‘도’란 말 자체가 이를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비현실적이거나 세계를 부정하는 게 아니다. 도는 초월적이면서 내재적이고 가까이 있으면서 멀리 있다. 니체와 노자, 하이데거에게 “공통적인 것은 실체가 아니라 과정에 기반한 전체 개념이다.”(NHT)

도가사상의 지향처는 도와 하나 되는 경험을 여는 것이다. 도와의 합일은 전체가 개별자를 하나로 꿰뚫으며 동시에 감싸고 개별자들은 그 품 안에서 비로소 하나로 어울리며 참답게 있는 방식으로써 이뤄진다. 그것은 오늘날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이 혐오감을 숨김없이 노출하는 형이상학적 통일 개념[전체화(체계화; 계급화)]과는 분명히 구별되는 것이다. 형이상학의 단일함은 여전히 하나와 여럿, 동일성과 차이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놓여 있다. 그러나 노자나 장자에게서 그러한 선택은 답답한 노릇이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확실히 도는 공격, 자기주장, 강함, 이른바 남성적인 덕보다 일반적으로 수용성, 개방성, 약함, 조화 등의 특징을 지닌 여성성과 연관된다. 또 공세적인 개념 파악보다 말을 아끼는 ‘수줍은’ 접근에 자신을 드러낸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러나 이것이 반드시 수동성과 연관될 필요는 없다. 초월적이며 내재적인, 멀리 있으면서도 가까이 있는 그것은 능동과 수동, 남성과 여성, 아니 모든 구별 이전에 그 너머에 있다.

그래서 노자에게서 여성성은 시원성, 생명성, 영원성, 모성을 가리킨다. 노자에게 ‘죽지 않고 영속적으로 이어지고 마르지 않는’ “영원성은 여성적 개방성과 연결돼 있다.”(NHT) 노자는 도, 즉 우주의 어머니에게로 돌아가는 사람은 결코 죽지 않으며 그의 삶 내내 위험에 빠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우주의 여성적, 모성적 차원을 간직하고 있거나 다시 회복할 수 있다면 자유와 구원을 얻고, 그럼으로써 더 이상 생사가 문제되지 않는다는 의미로 영원성을 얻는다. “천지는 시작을 갖고 / 그것은 천지의 어머니가 된다. / 이미 어머니를 얻었기에 아들을 알고, / 아들을 알기에 다시 어머니를 지킨다. / 그러면 삶 내내 위험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 … 그 빛[도; 어머니]을 써 그 밝음에 돌아가면 몸에 화禍를 남기지 않으니 / 이를 ‘늘 그러함’을 익힘이라 한다[天下有始,以爲天下母. 既得其母,以知其子,既知其子,復守其母,沒身不殆 … 用其光 復歸其明 無遺身殃 是謂習常].”(노자52) 그리고 “다시 뿌리로 돌아감을 일러 고요함이라고 한다[歸根曰靜].”(노자16) 고요함은 언제나 자유와 안식, 평화에 깃든다. 나오는 곳이 그렇듯, 돌아갈 곳 또한 도이고 도는 여성성에 속한다면 여성은 생명의 문이며 골짜기이다.

물론 노장 사상에서 모성, 시원성으로서의 여성성에 대한 경의가 곧 여자[남성과 대립된 성으로서 여성]에 대한 존경으로 옮겨지지는 않는다. 이 점이 간과돼서는 안된다. 노장의 텍스트들에 나오는 주요 캐릭터는 남자이다. 기껏 『장자』에서 남자의 아내로서 또는 아름다움의 상징으로서 등장할 뿐이다. 여성성의 원리적 측면이 그렇게 환대를 받으면서도 그 성스러움의 구현일 여자는 숨겨져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여성을 시원적 신비로서의 여성성, 모성과 연결시킨다 해도 그것이 곧 여자에게 해방을 가져다주지는 않는 것이다. 그러나 뒤집어보면 이는 도가사상에서 여성성은 남성성과 대립되는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그것을 포함하는 모성, 시원성, 영원성을 의미한다는 점을 다시 확인해준다.

 

여자는 철학보다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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