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바르족의 출현
슬라브족은 게르만족보다는 훨씬 늦게 사서에 등장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사서는 슬라브계 국가들이 등장한 이후인 11세기나 12세기의 연대기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몇 세기 이전 로마인들이 남긴 기록을 말한다. 슬라브인들에 대한 로마인들의 초기 기록으로 대표적인 것이 앞에서도 인용하였던 6세기 비잔틴 역사가 프로코피우스가 남긴 《유스티니아누스 전쟁사》이다. 프로코피우스는 동로마제국 벨리사리우스 장군의 자문관으로서 여러 전쟁에 직접 종군하여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재위 527-565)가 치른 전쟁들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남겨놓았다. 그의 기록에 의하면 550년을 전후하여 다뉴브 강 이북에 살던 슬라브족이 강을 넘어 비잔틴제국(동로마제국)을 여러 번 침략하였다. 550년에 있었던 침략의 경우 3천 명의 슬라브족이 다뉴브강을 넘어 발칸반도로 들어왔다. 이들은 곧 두 패로 나뉘어 일리리아와 트라키아 지방을 약탈하였으나 비잔틴 군대는 이들을 제지하기는커녕 오히려 싸움에서 패배하였다. 당시에 슬라브인들은 ‘토페이로스’라는 그리스 도시를 함락하고 주민 1만 5,000명을 학살하였다고 한다. 프로코피우스의 말에 의하면 슬라브 침략자들은 주민들을 잔인하게 학살하였을 뿐 아니라 여자와 아이들을 포로로 잡아 자신들의 땅으로 귀환하였다.
그로부터 몇 년 뒤 동로마제국의 변경 너머에 새로운 유목민 집단인 아바르족이 출현하였다. 아바르족은 비잔틴 사람들에게는 완전히 생소한 족속이었는데 이들은 유라시아 초원을 가로질러 서진하여 흑해 북안에서 알란족과 접하게 되었다. 아바르인들은 알란족의 왕에게 비잔틴제국과의 외교적 교섭을 주선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알란족 왕의 주선으로 아바르족 사절단이 558년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하였다. 아바르 사절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게 자신들이 무적의 족속으로서 국경 지대의 만족들로부터 어려움을 겪고 있는 비잔틴제국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 하면서 동맹을 맺자고 제안하였다. 비잔틴 제국이 군사적 지원을 받는 대신 비잔틴제국은 아바르족에게 공납과 땅을 제공한다는 조건이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원로원의 토의를 거쳐 이 제안을 수락하였다.
당시 아바르 사절단의 모습은 콘스탄티노플 주민들에게 대단한 구경거리였다. 이들은 머리를 길게 땋아 늘어뜨리고 복장은 훈족과 흡사했다고 한다. 동방에서 온 이 낯선 족속과의 동맹은 즉각 효과를 낳았다. 아바르인들은 훈족에 속한 집단으로서 당시에는 ‘잘리’라고 불리던 ‘우니구르’와 또 다른 유목민 ‘사비르족’을 격파하였다. 이는 프로코피우스보다 조금 후대의 역사가인 ‘경호대원 출신 메난드로스’가 남긴 기록이다. 메난드로스에 의하면 아바르는 곧 안테스족을 공격하여 약탈과 포로를 노획하였다. 안테스는 스클라베노이와 함께 당시 비잔틴인들에게 알려져 있던 슬라브족의 한 부족이다. 안테스족은 사로잡혀간 포로를 데려오기 위해 아바르에 사절을 보냈다. 그런데 그 사절은 외교관으로서는 자질이 떨어지는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아바르족의 왕 즉 아바르 카간은 외교적 관행을 무시하여 사절을 죽여버리고 안테스족을 다시 한번 공격하였다.
비잔틴의 바람대로 골칫거리 만족들을 처리한 아바르에게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제2 판노니아를 정착지로 주려 하였다. 오늘날의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지역이다. 게르만계 헤룰족이 살던 땅이라 한다. 그러나 유목민인 아바르는 유목을 할 수 있는 평탄한 초원지역을 원했다. 아바르는 곧 제2 판노니아 너머에 있는 헝가리 초원으로 진입하여 그곳을 자신들의 근거지로 만들었다. 게르만계인 롬바르드족과 협정을 체결하고 이들과 함께 게르만계인 게피다이족이 차지하고 있던 헝가리 초원을 공략하였던 것이다.
아바르의 슬라브족 지배
가리 초원을 정복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아바르는 비잔틴제국과 동맹조약을 체결하기는 하였지만 비잔틴제국의 허수아비가 되지는 않았다. 아바르는 훈족의 후예인 우티구르와 쿠트리구르를 정복하고 이들이 비잔틴제국으로부터 받던 공납 즉 군사적 지원금을 비잔틴제국이 자신들에게 바치도록 요구하였다. 당시 비잔틴의 새로운 황제인 유스티누스 2세가 이를 거부하자 아바르족과의 전쟁이 일어났다. 아바르는 다뉴브 강변의 요충지인 시르미움을 공격하여 그곳을 장악하였다. 비잔틴 황제는 시르미움을 아바르에게 넘겨주었을 뿐 아니라 매년 8천 개의 금화를 공납으로 지불하는 굴욕적인 협정을 체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공납액은 10여년 뒤인 585년에는 10만 개로 인상되었다. 당시 비잔틴제국은 페르시아와의 오랜 전쟁 때문에 발칸반도에 충분한 병력을 주둔시킬 수 없어 아바르의 요구를 거부하기 힘들었다.
얼마 후 아바르는 자신들에게 공납을 바치기를 거부하는 다뉴브 하류의 슬라브 족속을 공격하여 굴복시켰는데 이 공격시 비잔틴제국의 함선과 군사도로를 이용하였다고 한다. 이제 아바르는 슬라브족의 지배자가 되었는데 당시 슬라브족과 아바르족의 관계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기록이 전해진다. 7세기경에 프랑크 왕국에서 편찬된 《프레데가르 연대기》이다. 저자에 대해서는 이름 외에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이 연대기에 의하면 아바르족은 다른 족속과 전쟁을 할 때에는 슬라브인들을 앞세워 싸우게 하였다. 슬라브인들이 이기면 자신들은 적들을 유유히 약탈하고 만일 슬라브족이 패하면 다시 싸움에 나가도록 뒤에서 지원하는 역할을 하였다. 슬라브인들에게 더욱 굴욕적이었던 것은 매년 아바르인들이 슬라브족에게 와서 겨울을 보내는데 그때마다 슬라브족의 부인들과 딸들을 데리고 잤다는 것이다. 당시 슬라브인들은 아바르의 노예처럼 공납도 바치고 여자도 바쳐야 했던 것이다.
슬라브족을 지배하게 된 아바르는 슬라브족을 앞세워 예전의 동맹국 비잔틴제국을 공격하였다. 6세기 말과 7세기 초에 걸쳐 비잔틴제국은 군사적인 면에서 아주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뿐 아니라 시리아와 이집트로 세력을 뻗쳐오는 아랍의 이슬람 세력과도 맞서야 하였다. 발칸반도를 지킬 비잔틴제국의 군사가 대거 동방으로 투입되었기 때문에) 슬라브족을 앞세운 아바르 세력은 손쉽게 비잔틴 영토로 진격할 수 있었다. 614년에는 달마티아 해안의 살로나 뿐 아니라 북부 발칸의 나이수스, 세르디카 등의 주요 도시들이 슬라브-아바르 세력에 함락되었다. 심지어 슬라브족은 통나무 배를 타고 그리스 남쪽의 펠로폰네소스 반도까지 진출하여 약탈행각을 벌였다. 624년에는 비잔틴제국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이 포위공격을 받았다.
이 시기 슬라브족은 단순한 약탈로 그치지 않고 발칸반도와 동유럽 여러 곳에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동유럽의 슬라브화가 본격화된 것이다. 오늘날 불가리아, 북마케도니아,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등 발칸 지역의 상당 부분이 슬라브어 지역이 된 것은 그러한 정착의 결과였다. 비잔틴인들은 자신들의 영토 내에 정착한 슬라브인들을 슬라브족의 한 족속 이름을 따라 ‘스클라비나이’(sklavenai)라고 불렀다. 영어로 노예를 뜻하는 ‘슬레이브(slave)’는 이 단어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스클라비나이는 그리스인들에 의해 천민집단으로 취급되었거나 위급시에 용병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슬라브족은 발칸의 다뉴브강 이남 지역 뿐 아니라 서쪽으로는 판노니아 너머의 체코와 슬로바키아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이들을 서슬라브족이라 하는데 이들 역시 아바르족의 후원 아래 이주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슬라브족의 이주와 생활권 확대는 아바르제국의 범위를 보여준다. 동유럽 슬라브족에 대한 아바르의 지배력이 어느 정도까지 광범하게 행사되었는지 드러내주는 기록이 있다. 7세기 비잔틴 역사가 테오필락트 시모카타에 의하면 발트해 근처에 살던 일부 슬라브 부족장들은 먼 거리 때문에 아바르 카간에게 군사적 도움을 주지 못한 것을 사죄하였다고 한다. 아바르제국의 지배가 발트해까지 미쳤음을 드러내주는 기록이다.
게르만족 가운데 롬바르드(랑고바르드)족은 아바르와 함께 헝가리 평원을 정복하여 헝가리에 정착하였다가 곧 이탈리아 반도로 이동하였는데 물론 평화스런 이주는 아니고 아바르의 지원하에서 이루어진 군사적 정복이었다. 당시 이탈리아는 동고트족이 세운 왕국이 붕괴하고 비잔틴제국의 영역으로 편입되어 있었다. 롬바르드족은 비잔틴의 영토였던 이탈리아 북부를 정복하여 자신들의 땅으로 삼았다. 오늘날 이탈리아 북부의 ‘롬바르디아’라는 지명은 이 게르만족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당시 롬바르드족의 왕 알보인은 아바르의 바얀 카간과 동맹을 맺고 함께 판노니아를 정복하였지만 아바르족에 대해 상당히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그가 이탈리아를 정복하기로 결심한 이유는 아바르족 세력이 점차 커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알보인은 568년 율리안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진출하여 베네치아, 밀라노 등 주요 도시들을 크게 힘들이지 않고 정복할 수 있었다.
당시 헝가리 평원을 근거지로 삼은 아바르제국은 다뉴브강 하류지역 뿐 아니라 발칸반도로 세력을 확대하였다. 동로마제국 헤라클리우스 황제(재위 610-641)는 사산조 페르시아제국과의 전쟁을 치르느라 어떻게든 아바르와의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려 하였다. 1623년에는 22만 냥의 금화를 아바르 카간에게 공납금으로 보내고 자기 아들까지 질자로 보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전략은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여, 626년에는 아바르가 그 휘하의 슬라브족, 게피다이족, 불가르족을 대거 동원하여 콘스탄티노플로 진격해왔다. 동쪽에서는 페르시아군이 해상으로 공격해왔는데 당시 페르시아 군은 육상의 아바르군과 연락하여 협공을 도모하였다. 비잔틴제국은 페르시아 해군과 싸워 해전에서 승리하여 국가 존망의 위기를 벗어났다.
동유럽 아바르제국의 약화
626년 7월말 10일간 계속된 아바르 연합군의 콘스탄티노플 공격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는데 그로부터 아바르제국은 동유럽에서 지배권이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오늘날의 동부 독일 엘베강 주변에 정착하였던 슬라브인들이 먼저 독립의 움직임을 보였다. 당시 이 족속을 ‘조르벤’이라 하였는데 오늘날 세르비아의 주류를 이루는 ‘세르브’와 같은 말인 것 같다. 앞에서 언급하였던 《프레데가르 연대기》에 의하면 당시 슬라브인들과 무역거래를 하던 ‘사모’라는 이름의 프랑크 상인이 아바르에 대한 슬라브인들의 반란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슬라브인들은 사모를 자기들의 지도자로 세웠다. 사모는 35년 동안 슬라브족을 이끌었는데 그의 뛰어난 용기와 신중함 덕분에 슬라브인들은 아바르와의 여러 차례 대결한 끝에 아바르를 물리칠 수 있었다. 사모 왕은 제왕의 분위기를 좋아했는지 슬라브인 부인을 12명이나 두었고 그들로부터 22명의 아들과 15명의 딸을 낳았다고 한다.
아바르제국으로부터 서쪽의 독일 지역 슬라브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독립하자 이번에는 동쪽의 불가르족이 들고 일어났다. 632년 훈족의 후예들로 이루어진 불가르족이 아바르에 대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그전까지는 아바르의 동맹으로서 아바르인들의 정복전쟁에서 충실한 역할을 하였던 불가르족은 쿠브라트라는 인물의 주도하에 반란의 기치를 올렸다. 아바르와 함께 626년 비잔틴 제국의 공격에 나선 바 있던 불가르 왕 쿠브라트는 아바르 카간이 죽자 이번에는 카간의 자리를 불가르족이 차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요구가 불가르인들과 아바르인들 사이의 내전을 촉발하였다고 한다. 아바르에게 승리를 거둔 쿠브라트는 오늘날의 우크라이나 지역의 돈강으로부터 흑해 북안에 걸친 아바르제국의 동부를 차지하고 불가리아 제국을 세웠다. 이것이 비잔틴인들이 말하는 ‘옛 대불가리아’였다. 이후 아바르제국은 판노니아와 발칸 지역으로 그 영역이 축소되었다.
쿠브라트 사후 대불가리아는 볼가강 지역에 근거지를 둔 카자르에 의해 멸망하였다.(668) 카자르는 서돌궐에서 떨어져 나온 투르크인들의 나라였다. 쿠브라트의 다섯 아들은 아버지가 세운 나라가 망하자 제각기 무리를 이끌고 흩어졌다. 큰아들과 둘째가 이끄는 집단은 러시아 초원에 정착하였던 반면 셋째 아들 아스파루크가 이끄는 무리는 다뉴브 하구의 델타 지역에 정착하여 후일 중세 불가리아 왕국으로 발전하였다. 넷째 아들 쿠베르의 무리는 서쪽으로 가서 다뉴브강을 건너 아바르제국으로 들어가 아바르 카간의 신하가 되었다고 한다. 이는 9세기 비잔틴 제국의 수도사이자 역사가인 테오파네스(c.760-817)의 연대기에 나오는 기록이다. 이 시기 판노니아의 아바르 영토로 이주한 대불가리아 주민들의 숫자는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헝가리 고고학자들은 이 시기에 주민의 인종 구성이 크게 달라졌다고 하는데 아마 이러한 이주도 주요 원인 중 하나였을 것이다.
아바르제국은 7세기 중반 동유럽에서는 위축되었지만 서유럽에서는 여전히 위세를 유지하였다. 당시 이탈리아 북부에 자리잡은 롬바르드족의 왕들은 아바르 카간을 상전으로 생각하여 내란이 일어나면 아바르로 도망친다든지 혹은 아바르 카간에게 군사적 원조를 요청하였다고 한다.
프랑크제국과 아바르제국
6세기 중반 아바르족이 판노니아 평원을 넘어 서쪽으로 진출하였을 때 아바르족은 프랑크족과 충돌하였다. 당시 프랑크제국은 오늘날의 프랑스와 독일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는데 아바르 사절단이 비잔틴 제국의 수도에 모습을 드러낸 지 몇 년 지나지 않은 562년경 벌써 아바르와 프랑크족의 충돌이 벌어졌다. 당시 프랑크왕국은 여러 명의 왕들이 영토를 나누어 다스렸는데 그것은 왕자들 모두에게 왕국의 영토를 나누어주는 프랑크족의 상속관습 때문이었다. 시기베르가 가장 동쪽 땅인 오스트라시아를 차지하고 있었다. 시기베르 왕은 아바르의 2차침입에서 포로가 되었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가 쓴 《프랑크족의 역사》에 의하면 이 프랑크 왕은 아바르족에게 많은 선물을 주고 아바르와 강화조약을 맺을 수 있었다. 당시 아바르족은 갈리아 영토를 정복할 의도는 없었던 것 같다. 그들은 시기베르로부터 공납을 약속받고 물러갔다. 이후 상당 기간 아바르는 프랑크 왕국의 영토를 존중하여 더 이상 침략행위를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프랑크왕국과 아바르의 관계는 8세기 후반 샤를마뉴 때 바이에른공국 문제로 급속히 악화되었다. 바이에른 공작 타실로(Tassilo)가 프랑크족의 종주권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바르족과 손을 잡았던 것이다. 샤를마뉴는 그의 봉건가신인 타실로가 이교도인 아바르족과 손을 잡고 자신을 배반한 것을 용서할 수 없었다. 샤를마뉴가 바이에른 공작의 지위를 박탈하자 아바르족이 프랑크왕국을 공격하였다. 당시 아바르 군은 알프스 너머의 프리울리를 공격하고 바이에른 국경 지역을 침략하였다. 아바르족과 프랑크 왕국의 전쟁은 8년간(791-799)이나 계속되었다. 아바르족은 샤를마뉴의 지배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던 작센족과 손을 잡기도 했지만 전쟁은 결국 샤를마뉴의 승리로 끝났다.
아바르제국이 패배한 이유로는 아바르족 사이에서 일어난 내분을 무시할 수 없다. 카간과 투둔 ― 투둔(tudun)은 아바르 부왕副王 칭호 가운데 하나였다 ―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 투둔은 샤를마뉴의 수도에서 세례를 받기까지 하였다. 여러 아바르의 수령들이 샤를마뉴 측과 개별 협상을 벌일 정도로 아바르 제국의 통일적 권력체계가 무너져 내렸던 것으로 보인다. 샤를마뉴 군대는 아바르족의 본영으로 진입하여 그동안 아바르족이 쌓아놓았던 엄청난 부를 약탈하였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각기 네 마리의 황소가 끄는 열다섯 대의 수레로 보물들을 샤를마뉴의 궁으로 옮겼다고 한다. 이는 9세기 말 성갈렌 수도원의 수도사 노트커가 저술한 《샤를마뉴傳 Gesta Caroli Magni》에 나오는 기록이다. 아바르 전쟁에 참여한 한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아바르인들의 영토는 아홉 겹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모두 나무로 이중의 방책을 만들고 그 사이에 돌과 석회를 다져넣은 견고한 방책이었는데 맨 바깥의 성벽은 아바르제국 전체를 에워싸고 있었다. 이 진술은 다소 의심스럽지만 최근 오스트리아 엔스 강변에서 발견된 아바르인들의 참호를 보건대 그것이 사실일 가능성도 있다고 보인다.
아바르인들은 비잔틴 제국과 피지배 족속들로부터 받은 재물들을 대부분 아바르의 본영에 보관하였다. 아바르족은 비잔틴의 티베리우스 황제(재위 574-582) 때부터 평화와 동맹의 대가로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금화 8만 개를 매년 받았다. 이 액수는 비잔틴이 슬라브족의 침략으로 곤경에 처했던 585년에는 10만 개로로 인상되었다. 이렇게 2세기 이상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받은 금화는 아바르 전사들에게 일부 분배되었겠지만 상당 부분은 아바르 본영에 보관되어 있었다. 샤를마뉴는 아바르로부터 약탈한 전리품을 자기 부하들에게 나누어주는 한편 수도원과 교회에도 많이 헌납하였다. 그리하여 비잔틴제국에서 나온 엄청난 양의 황금이 아바르제국을 거쳐 서유럽으로 흘러 들어가게 되었다.
샤를마뉴는 아바르족으로 하여금 그들의 우두머리인 카간의 지배 아래 모여서 살도록 허용하였다. 이러한 방식의 자치는 20여년 후에는 프랑크족의 직접 통치로 대체되었다. 자신들의 나라가 사라진 아바르 전사들은 예전에 자기들의 땅이었던 곳에서 프랑크 왕국에 세금을 바치며 사는 예속 농민이 되었다. 그 땅의 소유권은 대부분 독일 교회와 수도원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판노니아의 이러한 아바르 농민들은 점차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아바르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완전히 상실하지 않았던 사람들도 있었다. 9세기 말 아시아에서 온 새로운 유목민 전사들인 마자르인들이 판노니아를 정복하였을 때 티자 강 상류 지역에서 프랑크 왕국의 지배에도 예속되어 있지 않고 불가리아의 지배에도 예속되어 있지 않은 아바르족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맺음말
동양 유목민이었던 아바르인들은 훈제국이 멸망한 후 약 120년 후 동유럽 일대에 큰 세력을 구축하였다. 훈제국이 게르만 여러 족속들을 지배한 것처럼 아바르제국은 슬라브족을 지배하였는데 이 아바르제국 시기에 슬라브족은 유럽의 남쪽과 서쪽으로 크게 정착지역을 확대하였다. 아바르는 이러한 슬라브족의 움직임을 촉발하기도 하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의 이주를 지원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슬라브족의 초기 역사는 아바르족과 떼려야 뗄 수 없을 정도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고 하겠다. 유감스럽게도 슬라브인들이 직접 기록한 사서는 그로부터 몇 세기 이후에 나왔기 때문에 우리는 아바르와 슬라브의 자세한 관계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동양에서 온 유목민 아바르족이 유럽사에 남긴 또 다른 영향은 군사기술적인 것이다. 역사가들은 기마전사가 전투를 할 때 유용한 발걸이인 등자鐙子가 유럽에 도입된 것이 아바르족을 통해서라고 본다. 일견 굉장히 간단해 보이는 등자가 이 시기에야 비로소 유럽인들이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좀 의아하기는 하지만 7세기 초의 비잔틴제국 군사교범 《스트라테기콘》에 등자가 처음 언급되어 있다. 따로 등자를 지칭하는 말이 없어 그리스어로 사다리를 의미하는 ‘스칼라’라고 하였는데 아마 말을 탈 때 사다리처럼 이용한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을 것이다.
서유럽에서는 동유럽보다는 좀 더 늦은 시기에 등자가 도입되었다. 당시 서유럽을 지배하던 프랑크왕국이 등자 뿐 아니라 아바르의 기병대 조직과 전술 등 군사기술도 도입하여 프랑크왕국의 기마부대를 조직하였다고 여겨진다. 중세 유럽을 지배하던 봉건귀족계급이 기마전사로부터 나왔다고 한다면 아바르는 중세 유럽 봉건제의 흥기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하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