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궐제국의 후예들

6세기 중반, 알타이 산맥 근처에서 제철업에 종사하던 일단의 투르크인들이 유연柔然의 지배에서 벗어나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 이를 이 투르크인들은 ‘괵투르크’라고 하였는데 ‘청靑투르크’라는 뜻이라 한다. 동양의 오행론에 의하면 청은 동쪽을 의미하므로 이들은 동부 투르크족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좌우간 이 나라와 이 나라를 세운 투르크인들을 중국에서는 그냥 ‘돌궐突厥’이라 불렀다. 돌궐은 중국이 북제와 북주로 분열되어 있을 상황을 틈타 세력을 크게 확대하였다.

돌궐은 몽골초원은 물론, 앞에서 다뤘던 훈족의 나라 에프탈을 격파하고 (570년경) 에프탈이 지배하던 중앙아시아 오아시스 지역과 초원을 장악하였다. 이로써 돌궐은 한나라 때의 흉노제국이나 서로마제국 말기의 훈제국보다도 더 광대한 제국을 건설하였다.

돌궐은 초기부터 광대한 영토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나라를 동서로 나누어 다스렸다. 동쪽은 돌궐의 왕인 카간이 직접 다스렸고, 서쪽은 카간의 동생이나 조카 등 일족에게 맡겼다. 서부 영역의 지배자는 ‘부왕副王’을 뜻하는 ‘야브구’라는 칭호를 사용하였으나 곧 ‘카간’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이로써 돌궐에는 두 명의 카간이 존재하게 되었고, 동서 두 카간이 대립하면서 돌궐은 두 개의 나라로 쪼개지게 되었다. 동돌궐은 건국자인 일리 카간의 아들 무한 카간 계통으로, 서돌궐은 일리 카간의 동생 실점밀의 자손들에게로 이어졌다.

돌궐제국이 동서로 완전히 분열한 583년은, 당시 중국에 수隋나라가 들어선 지 불과 2년이 지나지 않은 때였다. 수 왕실은 강력한 돌궐제국에 위협을 느껴 동서 돌궐의 대립을 부추기고 이용하는 전략을 구사하였다. 여러 차례의 고구려원정이 실패한 끝에 619년 수나라가 멸망하고 그를 이어 등장한 당唐도 초기에는 돌궐에 대해 낮은 자세를 취하였다. 그러나 태종 이세민은 동돌궐의 지배하에 있던 철륵, 설연타 등 투르크 부족들의 반란을 기회로 삼아, 돌궐과의 세력관계를 역전시켰다. 그는 동돌궐의 힐리 카간을 사로잡고, 동돌궐의 지배를 받던 여러 부족들로부터 ‘텐그리 카간’(天可汗)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이는 ‘하늘이 천명을 부여한 카간’이라는 뜻으로, 정관4년(630)의 일이었다. 역사에서는 이 해를 동돌궐이 멸망한 해로 본다. 당은 복속한 여러 투르크 부족들의 우두머리를 중국 관직인 도독과 자사 등에 임명하여 간접적으로 돌궐을 통치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는] 한족 관리를 통한 직접 지배가 아닌, 현지 부족 우두머리를 통한 간접지배였는데 굴레와 고삐를 이용하여 소나 말을 다루는 것에 비유하여 ‘기미羈縻’ 지배라 하였다.

서돌궐은 동돌궐이 멸망한 후에도 한 세대 정도 더 존속하였지만, 당나라의 군사적 공세를 견디지 못하고 카간이 파미르 고원 너머로 도주하였다가 포로가 되어 장안으로 압송되었다. 당나라는 동돌궐과 마찬가지로 서돌궐 지역에도 다수의 도독부와 도호부를 두었는데, 오늘날의 신장위구르 지역은 물론, 우즈베키스탄과 심지어 아프가니스탄 땅에도 도독부가 설치되었다.

그러나 당나라의 지배 밑에 있던 돌궐 부족들은 쿠틀룩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682년 당나라의 지배를 벗어버리고 돌궐제국을 재건하였다. 쿠틀룩은 후일 일테리쉬 카간이 되었으며, 그는 예전 돌궐제국을 건국한 일리 카간의 후손이었다. 새로운 돌궐은 순식간에 동돌궐 제국의 옛 영토를 되찾았다. 이 새로운 나라를 흔히 ‘제2돌궐제국’ 혹은 ‘후돌궐제국’이라 하는데, 682년부터 744년까지 대략 60년 정도 존속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세워졌던,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698-926)보다 그 존속연도가 훨씬 짧다.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 근처에는 2개의 석비가 서 있다. 이 비석은 제2돌궐제국의 부흥을 이끈 명재상 톤유쿠크(한자로는 돈유곡暾欲谷)이 714년에 스스로 세운 비석이다. 이 두 개의 석비에는 당나라에 대한 반란부터 시작해서 오구즈 투르크, 온오크, 예니세이 키르키스, 투르게시, 키탄 등과 싸워 승리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말하자면 돌궐의 적대세력 목록이라 할 수 있다.

오구즈 투르크는 회홀, 복골, 동라, 발야고 등 여러 투르크 부족들의 연합으로, ‘오구즈’라는 말 자체가 여러 부족을 의미한다. 이 연합세력을 중국사서에서는 ‘철륵鐵勒’이라고 불렀는데 철륵도 돌궐처럼 투르크를 소리나는 대로 적은 말이다. 오구즈는 돌궐의 지배에 순순히 복종하지 않은 투르크 부족들의 연합체로, 그 족장들이 605년 서돌궐 카간에게 조공을 바치러 갔다가 살육당하는 등 돌궐과 갈등이 깊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구즈 투르크는 때로는 ‘토구즈 오구즈(9성 부족)’, 때로는 ‘온오크(10성연합)’로도 나타났다. 키르키스는 시베리아의 예니세이 강 주변에 살던 유목민 집단으로, 돌궐 북쪽에 위치한 부족이었다. 오늘날에는 더 남쪽으로 내려와 중국의 신장위구르 지역과 파미르 고원 너머의 초원지대에서 유목생활을 하며 살고 있다. 투르게시는 파미르 고원의 양쪽 영역을 차지한 유목민 집단으로서 제2돌궐 제국의 서쪽에 위치하였다. 한문사서에서는 이들이 ‘돌기시突騎施’로 나오는데, 투르크족이 아니라 이란계인 오손烏孫의 후예라고 한다. 키탄은 돌궐의 동쪽 지역인 내몽골 지역의 거란을 말한다. 톤유쿠크 비문에서는 중국을 ‘타브가치’로 표현하였는데, 이는 원래 탁발선비를 뜻하나, 이후 중국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위구르제국

위구르는 톤유쿠크 비문에 나오는 오구즈 투르크 연맹의 한 부족으로, 카를룩 및 바스밀과 연합하여 740년 제2돌궐제국을 무너뜨렸다. 세 부족 가운데 처음에는 바스밀이 주도권을 잡았으나, 위구르와 카를룩이 곧 바스밀의 칸을 축출했고, 얼마 후 위구르는 카를룩마저 서쪽으로 몰아내며 몽골 초원의 패권을 장악하였다. 그 중심인물은 쿠틀룩 빌게 퀼 카간(재위 742-747)이었다. 그 뒤를 이은 아들 바얀 초르(재위 747-759)는 여러 투르크 부족은 물론 거란까지 굴복시켜 제국의 기반을 튼튼히 다졌다.

751년, 당나라 고선지 장군이 이끄는 군대는 텐산산맥 서쪽 탈라스 전투에서 아랍군에게 패배하였다. 당나라가 서역에서 패배한 틈을 타 위구르는 남쪽의 타림분지 일대를 장악하여 오아시스 도시들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수년 뒤인 755년, 당나라에서는 안록산의 난이 일어났다. 안록산은 오늘날의 북경 지역을 장악하고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을 공격하였다. 위기에 처한 당은 위구르에 사절을 파견하여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였다. 바얀 초르 카간은 4만의 병력을 파견하여 반란군을 제압하고 당나라를 구원하였다. 그 대가로 당은 많은 물자를 [위구르에 넘겨야 했고, 왕실의 공주도 카간에게 보냈다. 위구르는 이처럼 당나라와의 관계를 통해 자신들의 권세를 과시했고, 엄청나게 비싼 값으로 말을 팔고 비단을 받아오는 견마무역으로 큰 부를 축적하였다.

이러한 무역활동은 소그드인들이 주도하였다. 소그드인들은 이란계통의 족속으로, 오아시스 도시들을 중심으로 상업 활동을 하였는데 당나라에도 많이 정착하였다. 이들은 아람어에서 파생된 자신들의 문자를 갖고 있었으며 그러한 문자문화를 바탕으로 유목제국인 위구르 카간국에서 행정요원으로도 활약하였다.

위구르인들은 유목민으로서는 특이하게도 도시를 세워 정착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몽골초원의 바이발리크와 카라발가순 등이 그런 도시들이다. 셀렝게 강 북쪽에 위치한 바이발리크는 한 변이 235m인 정사각형 모양의 성으로 주변에는 소그드 상인들과 중국 상인들을 위한 것으로 보이는 또 다른 두 개의 성이 있었다.] 카라발가순은 중국 사료에는 ‘회골선우성回鶻單于城’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위구르 지배층의 성으로 사용된 것 같다. 성벽의 높이는 바이발리크 성과 비슷한 7m 정도였다. 위구르제국의 수도 역할을 한 이 도성 남쪽에는 수 킬로미터에 걸쳐 시가지가 펼쳐져 있었으며 또 근처에는 상당히 넓은 농경지도 있었다. 이처럼] 위구르제국은 다른 유목 국가들과 달리 정착해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나라로 변해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위구르제국은 오래가지 않았다. 유목제국들에서 흔히 보이는 지배층 내부의 권력 투쟁이 몰락의 주된 원인이었다. 795년, 전통적으로 카간을 배출하던 야글라카르(藥羅葛) 씨족이 아닌 에디즈(硤跌) 씨족 출신의 인물이 카간이 되면서 두 씨족 간의 갈등이 폭발하였다. 결국 한쪽이 외부 세력인 키르키스 인들을 끌어들였는데 이 키르키스에 의해 840년 위구르제국이 멸망하였다.

당시 몽골 초원에는 극심한 자연재해가 발생하여 위구르인들에게 큰 시련이 닥쳤다. 겨울에 기온이 크게 내려가고 눈이 많이 오면 초원의 가축들이 대거 죽는 사태가 일어나는데, 이때도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내외의 재난 속에서 키르키스인들이 침입해오자 위구르인들은 몽골의 초원을 버리고 남쪽으로 도주하였다. 일부 집단은 황하 연안의 오르도스로 내려와 당나라 공주를 인질로 잡고 당나라에 식량과 병력을 요구하며 중국 변경을 소란스럽게 하였으나 당나라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그 우두머리인 위게 카간은 3천 명의 패잔병을 이끌고 흑룡강 근처까지 이동하여 실위족에 투항하였으나 그곳에서 피살당하고 말았다.

또 다른 집단은 카간의 조카 팡 테긴이 이끌었는데, 이들은 파미르 고원 서쪽의 추강 일대로 이동했다. 그곳에 있던 카를룩 부족에게 항복하였다가 내부 불만이 커지자 팡 테긴은 당나라 안서도호부가 있던 베슈발리크(别失八里)로 이동하였다. 텐산산맥 북쪽에 인접한 베슈발리크에서 팡 테긴은 당나라의 제후로 책봉을 받았다. 그는] 곧 텐산산맥을 넘어 투르판 분지로 진출하여 옛 고창국 지역에 성을 쌓고 그곳을 수도로 삼았다. 중국사서에 서주회골西州回鶻(850-1209)로 등장하는 이 위구르 집단은 텐산산맥 남북에 걸쳐 있었기 때문에 ‘텐산위구르’라고도 불린다. 텐산위구르의 카간은 겨울은 투르판 근처의 고창에서, 여름에는 북쪽의 베쉬발리크에서 보냈다. 베쉬발리크는 당나라 때 북정도호부北庭都護府가 있던 곳으로, 주변에는 초원지대가 펼쳐져 있었다. 오늘날 신장위구르 자치구의 짐사르현에 북정도호부의 성을 비롯하여 옛 성터들이 있는데, 베쉬발리크는 위구르어로 ‘다섯 성’이라는 뜻이라 한다.

투르판 근처에 정착한 위구르인들은 유목생활을 버리고 그곳의 비옥한 땅에서오아시스 농업에 종사하였다. 유목민에서 농민으로 전환한 이들의 후손은 오늘날에도]텐산산맥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지하수로로 끌어들여 생산성 높은 관개농업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현재 타림분지의 위구르인들은 대부분 이슬람교(회교)를 신봉하지만, 위구르제국 시대 위구르인들은 다양한 종교를 받아들였다. 페르시아에서 전해진 마니교는 후일 중국에서는 광명을 지향한다고 하여 명교明敎로 불렸는데, 페르시아에서 극심한 탄압을 받았던 것과는 달리 위구르 왕실의 보호를 받았다. 예전에 페르시아의 국교였던 배화교, 즉 조로아스터교도 자리잡았고, 기독교 신자들도 있었다. 기독교는 시리아에서 전해진 네스토리우스파로, 당나라 시대 중국에 전파되어 ‘경교景敎’라고 불렸다. 텐산지역에 정착하였던 위구르인들은 이곳에 뿌리내려 있던 불교도 받아들여 불교의 몇 가지 경전도 위구르어로 번역하였다. 위구르인들 사이에는 투르크인들이 예전부터 가졌던 천신 신앙 즉 텐그리 신앙도 널리 퍼져 있었다. 위구르인들이 오늘날처럼 이슬람교도가 된 것은 14세기 텐산위구르가 칭기스칸의 몽골제국 계승국인 차가타이 한국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부터이다.

텐산위구르는 실크로드상에 위치해 있었기에 국가정책적으로 무역을 장려하였다. 카간이 직접 대상隊商을 조직하기도 했으며, 카간이 중국에 보낸 물품에는 중앙아시아와 초원은 말할 것도 없고 티베트와 인도의 제품까지 포함되어, 당시 교역망의 폭이 매우 넓었음을 알 수 있다.

칭기스칸의 몽골의 지배하에 들어간 후 위구르인들은 예전 소그드인들이 위구르제국에서 그러했듯이, 몽골제국에서 관료로서 활약하였다. 위구르인들이 자신들의 문자를 갖고 있었고 문자생활에 익숙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몽골제국은 위구르 문자에서 영향을 받아 몽골문자를 만들었다.

 

카라한 칸국

제2돌궐 제국을 멸망시킨 세 부족 가운데 하나인 카를룩 부족 역시 위구르와 마찬가지로 투르크계였다. 카를룩은 원래 알타이 산맥 근처 초원에서 살았으나 위구르가 강성해지면서 점차 서쪽과 남쪽으로 이동하였다. 이들은 텐산 북쪽의 ‘세미레체’ 지역을 장악하였는데, 세미레체는 ‘칠수七水’ 즉 일리, 추, 탈라스 등 일곱 강이 흐르는 지역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카를룩은 탈라스 전투(751년)에서 당나라 고선지 장군의 군대를 배반하고 아랍군 편에 가담함으로써 전투의 승패를 갈랐다. 당시 카를룩 연맹의 우두머리는 위구르 카간의 야브구로, 형식적으로는 위구르제국에 복속되어 있었다.

카라한 칸국(840-1212)은 이 카를룩 부족이 세운 나라인데 그 건국자는 위구르제국의 야브구였던 빌게 퀼 카디르이다. 중국사서에는 그의 이름이 ‘골력배라(骨力裴羅)’로 나온다. 그는 위구르제국이 멸망하자 독립하여 새로운 나라를 세웠고, 야브구라는 칭호 대신 ‘카라한’이라는 새로운 칭호를 사용하였다. ‘카라’는 투르크어로 ‘검다’는 뜻이지만 ‘용감하다’는 의미도 있다. 그는 돌궐제국의 후예를 자처했는데 돌궐의 왕가였던 아사나 씨족 출신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그로부터 시작된 카라한 왕조는 유목민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방식을 따라 나라를 동서로 분할 통치하였다. 동쪽의 카간은 ‘아르슬란 카라 카간’이라 하고 서쪽의 카간은 ‘부그라 카라 카간’이라 하였다. 아르슬란은 사자를 말하고 부그라는 수낙타를 뜻한다. 빌게 퀼 카디르 카간의 장남 바지르는 ‘사자왕’ 즉 대칸으로서 발라사군을 수도로 삼았고, 동생 오굴차크는 ‘낙타왕’으로서 탈라스에 수도를 정했다. 두 도시는 모두 오늘날의 키르키스스탄에 있다.

카라한 왕조는 창건자의 손자인 사투크 부그라 칸(927-955) 때부터 이슬람으로 개종하였다. 사투크는 투르크 군주들 가운데 가장 먼저 이슬람으로 개종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인근의 무슬림 상인들이 가져온 물건뿐 아니라 그 상인들이 신봉하는 이슬람에도 큰 관심을 가져, 이슬람을 공부하였다. 비밀리에 이슬람으로 개종한 그는 칸의 자리에 오르자 이슬람을 합법적 종교로 선포하고 백성들에게 이슬람을 믿으라고 권했다. 그러나 별 반응이 없자 강권을 동원하여 강제로 개종을 추진했고, 이슬람을 거부하는 발라사군의 대칸을 상대로 성전을 일으켜 승리했다. 이후 이슬람을 국교로 선포하였다.

카라한 칸국은 같은 이슬람 국가였음에도, 국경을 접한 이란계 사만 왕조와 10세기 말에 두 차례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사만 왕조는 본래 압바스 왕조하의 이슬람 칼리프 제국에 속한 제후국이었다가 압바스 왕조의 세력이 약해지자 892년 독립하였다. 사만 왕조는 이란 동부의 호라산뿐 아니라 아무다리야강 너머의 트란스옥시아나를 지배하고 있었는데 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 지역이다. 당시 사만 왕조의 수도가 우즈베키스탄에 있는 부하라였다.

전쟁은 사만 왕조 내부에서 권력다툼이 발생하고 한쪽이 카라한을 싸움에 끌어들이면서 시작되었다. 이러한 싸움의 결과 투르크계인 카라한 칸국이 이란계인 사만 왕조를 무너뜨리고(999년) 사만 왕조가 지배하던 트란스옥시아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로써 카라한은 파미르 고원 동서 초원과 오아시스 지역에 걸친 큰 세력을 구축하였다. 카라한은 1006년에는 불교 국가인 호탄을 정복하여 타림분지까지 그 세력을 확대하였다.

사만 왕조는 초기부터 투르크 출신 노예들을 병사로 적극 활용하였다. 이들은 아랍어로 ‘굴람’이라 불렸는데 ‘노예’라는 뜻이다. 유목민인 투르크인들이 기마에도 능하고 용감하여 병사로서는 꽤 유용하였다. 그리하여 사만 왕조 군주들의 총애를 받아 군대에서 출세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중 일부는 장군이 되거나 지방 총독 자리까지 오르기도 하였다. 사만 왕조 말기에 등장한 알프 테긴이라는 인물은 굴람 출신으로서 호라산 지방의 방어를 책임지는 군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사만 왕조 내부의 분란을 이용하여 왕조가 혼란에 빠진 틈을 타 가즈나를 점령하고 독립적이 세력이 되었다. 그의 후손들이 세운 왕조는 아프가니스탄에 위치한 이 도시 이름을 따서 ‘가즈나 왕조’라고 불린다. 사만 왕조의 멸망 후 가즈나 왕조는 같은 투르크계인 카라한 칸국과 협상을 하여 국경선을 아무다리야로 정하고 그 남쪽 지역을 보장받았다.

카라한 칸국은 말기에 내부 분열로 인해 동서 카라한으로 나뉘었다. 예전의 돌궐제국과 같은 길을 간 것이다. 11세기 말 같은 투르크계인 셀주크 제국이 힘을 키우면서, 카라한 왕조는 사마르칸트를 비롯한 서부 지역을 상실하고 12세기에 들어서는 거란계 국가인 카라 키타이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후 칭기스칸 때 카라 키타이가 멸망하면서 카라한 왕조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셀주크 제국

오늘날의 투르키예는 셀주크 가문이 세운 나라로부터 기원하였다. 셀주크족은 돌궐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오구즈 투르크에 속한다. 돌궐제국이 해체된 뒤 혼란이 이어지자, 오구즈 투르크의 일부는 카를룩, 위구르, 키르키스 등 더 강한 부족들에게 밀려 서쪽으로 이동했고, 8세기 경에는 아랄해 동쪽의 초원지대인 시르다리야 주변에 정착하였다. 이들은 같은 투르크계인 카자르인들이 볼가강 주변에 세운 카자르 제국과, 카자르의 뒤를 이은 키예프 루스에서 용병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셀주크 가문은 이러한 오구즈계 투르크족 가운데 속했다. ‘셀주크’ 혹은 ‘살죽’이라고도 불리는 이들은 9세기 후반 카라한 왕조가 세워지던 무렵 활동한 셀주크라는 인물의 후손이다. 부족장이었던 그는 오구즈 야브구를 섬겼지만 둘 사이에 갈등이 생기자 시르다리야 강가에 있는 젠드 시로 피신했다. 그곳에서 그는 이슬람으로 개종했으며(985년), 그의 아들들 이름은 미하일, 이스라엘, 모세, 요나 등으로 유대식 이름을 가졌다고 전해진다. 이는] 인접한 카자르제국에 널리 퍼져있던 유대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들들 역시 부친과 함께 결국 이슬람으로 개종하였다.

이후 셀주크 가문은 이슬람의 ‘가지’(전사戰士)로서 이슬람 확산을 위한 전투에 앞장서게 된다. 같은 투르크족이지만 이슬람을 믿지 않는 부족들은] 그들의 주요 공격 대상이 되었다. 당시 트란스옥시아나 지역은 이란계인 사만 왕조와 투르크계인 가즈나 왕조, 카라한 왕조가 서로 힘겨루기를 하며 경쟁하던 곳이었다. 이러한 경쟁은 셀주크 가문이 세력을 키우는 데 좋은 기회를 제공했다. 그들은 가즈나 왕조의 땅을 빼앗고 셀주크 제국을 세웠다.(1040년) 셀주크 제국을 세운 인물은 셀주크의 손자인 토그릴이었다. 그는] 1055년, 이슬람 세계의 지도자인 칼리프로부터 그를 괴롭히는 이란의 부와이흐 왕조를 물리쳐달라는 요청을 받고, 바그다드로 진격하여 부와이흐 왕조를 멸망시켰다. 이에 칼리프는 그에게 아랍어로 권력자를 뜻하는 ‘술탄’이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당시 칼리프였던 카임 빈 오무룰라는 토그릴에게 ‘동서의 지배자’라는 상징으로 두 자루의 칼을 허리에 꽂아주었다고 한다. 중동과 투르크 지역의 지배자라는 의미였다. 투르크인인 셀주크 술탄이 이슬람 세계의 사실상 최고 권력자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셀주크 술탄국은 1071년, 오늘날 투르키예의 국경 근처인 만치케르트(투르크어로는 말라즈기르트)에서 비잔틴 제국 군대를 격파하고 비잔틴황제를 포로로 잡았다. 비잔틴 황제 로마노스 디오게네스는 몸값과 조공을 바치겠다는 약속을 하고 풀려났다. 이 전투 후 투르크인들이 다양한 규모의 집단을 형성하여 소아시아(아나톨리아)로 이주하기 시작했는데, 약화된 비잔틴제국은 이들을 막을 수 없었다. 당시 이지역으로 들어온 투르크인들을 주변 사람들은 ‘투르크멘’이라 불렀는데 학자들은 이를 ‘진짜 투르크인’ 혹은 ‘이슬람 투르크인’ 등으로 다양한 해석을 하고 있다. 11세기 카라한 칸국의 유명한 학자 마흐무드 알 카슈가리는 투르크멘을 오구즈 투르크와 동일시하였다.

셀주크 왕조는 이들 투르크멘 전사들을 동원하여 아나톨리아를 정복했으며, 트란스옥시아나로부터 이란, 이라크에 이르는 거대한 제국을 건설하였다. 이들은 11세기 말 지중해 연안까지 도달하였을 뿐 아니라 기독교도의 성지 예루살렘까지]점령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유럽의 기독교도들은 큰 충격에 빠졌고, 결국 성지탈환을 위한 십자군을 파견하게 되었다. 이것이 제1차 십자군이다.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팔레스타인과 시리아를 차지하였지만, 셀주크 제국에게 더 심각한 것은 셀주크 제국 내부의 분열이었다. 셀주크 술탄 제국은 12세기 초 네 개의 술탄국으로 분열되었다. 동부의 이라크-호라산 술탄국, 이란과 파키스탄의 케르만 술탄국, 시리아 술탄국 그리고 아나톨리아 술탄국이었다. 이 가운데 아나톨리아 술탄국(1077-1308), 셀주크인들이 부른 바로는 ‘룸 술탄국’이 가장 오래 존속했다. 룸은 동로마를 말한다. 그러나 룸 술탄국은 13세기 전반 몽골 군대에 패배하여 몽골제국의 속국이 되었다. 이후 아나톨리아 셀주크의 세력은 약화되고 많은 부족집단들이 사실상 독립세력이 되었다. 그 우두머리들은 형식적으로는 셀주크 술탄의 지배를 인정하여 ‘부족장’이라는 뜻의 ‘베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나중에 비잔틴제국을 정복한 오스만 가문도 이런 베이들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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