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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질 무렵, 슐로스베르크(Schlossberg; 城山)
로마에서 유적, 유물을 보고 그리고 토스카나에서 풍경을 관광하고 바젤로 향했다. 보존된 로마 문화에서 인간의 능력을 능가하는 신성을 느꼈지만, 동시에 로마 제국의 위력이 가공스럽다는 생각도 피할 수 없었다. 여전히 그 흔적과 자취만으로도 우리를 압도하는 저 로마제국의 강성함은 어떤 그늘을 숨기고 있을까? 멀리서 보면 위대함이지만 가까이 보면 탐욕의 덩어리는 아닐까? 토스카나 여행은 영화의 배경 속으로 들어가는 듯했다. 로마를 비롯해 이탈리아 전체가 일부의 현대식 주택이나 자동차를 무시한다면 온통 ‘로마의 휴일’ 같은 영화를 보는 느낌이다. 아마도 몇 십 년 전 혹은 그보다 훨씬 이전에도 그랬듯이 몇 십 년 후에도 같은 모습이리라. 이를 두고 서양, 유럽의 황혼을 얘기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바젤 공항의 햇살은 뜨거웠다. 그러나 공항 내부까지는 가까웠다. 수속도 간단하고 사람도 많지 않았다. 예약해둔 렌트카(독일 볼프스부르크의 티구안)를 찾아 바젤로 들어섰다. 도시는 아늑하고 조용했다. 커다란 성당의 지붕이 단연 눈에 띄는 것은 여는 유럽 도시와 같다. 스위스의 북서쪽 라인강변에 위치해 독일과 프랑스의 국경과 접해 있는, 인구 약 20만 명의 작은 도시 바젤은 화학과 제약 산업의 중심 도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도시 전역에 약 40개에 달하는 크고 작은 박물관이 모여 있는 문화 예술의 도시로서도 각광을 받고 있다.
바젤은 독일에서 자리를 잡지 못한 니체가 희랍어문학 교수로 재직할 수 있었던 도시. 그가 대학에서 전공한 언어학을 “유물더미” 속으로 내팽개치는 사이, 스승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리츨의 추천을 받은 바젤 대학이 아직 박사 학위도 받지 않은 그에게 교수 초빙을 제의하기 때문이다. 또 박주호 전 축구 국가대표 선수가 2011년 처음으로 스위스 리그에 진출하여 활동했던 명문 FC 바젤이 연고지로 삼고 있는 도시. 그가 아리따운 스위스 출신의 아내를 만난 것도 이곳이다. 당시 구단의 임시직원이던 아내가 경기장을 찾은 박주호의 가족을 안내한 것이 인연이었다고 한다. 그녀는 6개 국어에 능통했고 한국어 실력도 출중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유명한 예능 프로그램 ‘슈돌’(수퍼맨이 돌이왔다)에서 귀엽고 사랑스런 남매의 아버지로 널리 알려졌지만 한국 축구 역사상 처음으로 올림픽 메달(동메달)을 획득한 2012년 런던 올림픽 축구대표팀 선수였다. 그리고 그는 2010년 월드컵 원정 경기 최초로 조별리그를 통과했던 남아공월드컵을 포함 3회 연속 월드컵에 출전했다. 스위스 리그와 유럽 대항전, A매치 등에서의 활약으로 독일 분데스 리가(마인츠 05)에 진출하기도 했다.
시내를 둘러보고 스위스 전통 음식으로 점심을 마친 후 도시에서 멀지 않은 미술관을 산책하고 도착지 프라이부르크로 향했다. 20년이 넘는 2004년산차에 익숙한 나로서는 생전 처음 접하는 버튼식 기어에 당황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차는 같은 것 아닌가, 브레이크 밟으면 서고 떼면 나아가고 악셀을 밟으면 속도가 붙고, 핸들을 돌리는 방향대로 가는 게 차 아닌가? 그보다 연료 게이지의 빨간색이 훌쩍 줄어있는 게 더 신경 쓰였다. 내 상식으로는 이것은 연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고 또 렌트카 회사들이 차를 대여할 때 최소한의 연료만 채우고 빌려준다는 얘기도 들은 바 있었다. 주유소를 찾아야 한다. 다행히 주유소는 가까운 곳에 있었다. 걱정한 것에 비해 연료 탱크를 여는 버튼도 쉽게 찾았고 셀프 주유는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아 무난히 오일 밸브를 넣고 주유를 시작했다. 그런데 잠깐 들어가는 것 같더니 그만 멈춘다. 다시 몇 번 반복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왜 그러지 뭐가 문제인가?’ 난감한 순간에 저쪽에서 호방한 목소리와 함께 한 독일인이 부인과 함께 우리를 도와주러 왔다. 자신이 한국에 있었던 과거를 큰 목소리로 얘기하며 우리 사정을 살펴보던 그는 딱히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대안을 제시했다. 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사람이 근무하는 또 다른 주유소가 있으니 그곳으로 가면 될 것이다. 우리는 그에게 감사를 표하고 그가 말한 곳에 가니 과연 사람이 근무했다. 그런데 그는 주유 업무를 보는 사람이 아니라 주유소에 딸린 가게를 보는 어린 여성이었다. 차의 문제를 듣고 살펴보더니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자기로서는 알 수 없으니 렌트카 회사에 연락하는 것이 방법일 것 같다고 얘기한다. ‘하 이럴 어쩌나? 그것은 시간이 걸리고 최후의 방법일 것이다.’
이때 주유를 위해 들어온 고급 세단에서 내린 역시 한 나이든 아저씨가 참견을 한다. 얼굴만 봐서는 스위스인지 독일인인지 또 다른 나라의 유럽인인지 알 수 없다. 차 번호판을 보면 안다는데 그때는 그런 생각도 안 들었다. ‘다행이다’ 하는 표정으로 아가씨는 제 자리로 돌아가고 잠깐 문제를 확인한 아저씨는 약간 자신 없는 목소리로 “주유 밸브와 연료 주입 입구가 서로 맞지 않는데,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다른 주유소에는 차에 맞는 밸브가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헉 이런 일은 생각도 못한 것이고 대체 그런 주유소는 어떻게 찾는다는 말인가?’ 그러자 이번에는 어디서 나타났는지 풍채가 있는 젊은 사람이 티셔츠와 반바지만 입고 끼어든다. 국적을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몇 번 주유를 시도한 그가 드디어 문제의 핵심을 포착했다. 이 차는 기름이 완전 차 있어 더 이상의 주유를 거부하는 것이란 얘기이다. ‘맙소사! 얼마 남지 않은 게이지의 빨간색은 정반대의 사실을 가리켰던 것이다.’ 모든 문제가 일소에 사라지는 것 같았다. 안도와 조금은 가라앉은 흥분 속에 주위에 진심으로 감사하며 차에 올라탔다.
그런데 이번에는 연료 뚜껑이 닫히지 않는다. 힘으로 누를 일이 아니라 뭔가 합리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그제서야 미리 인터넷으로 찾아본 티구안 차량의 주유 방법이 생각났다. 잠금장치를 해제하는 것이다. 드디어 뚜껑이 닫히고 차는 출발할 수 있었다. 이미 상당한 시간을 지체하고 몸도 마음도 지쳤다. 멘탈을 부여잡고 목적지 프라이부르크로 향했다. 국경을 넘어. 도로와 차창 밖 풍경이 다시 기운을 차리게 한다. 생각하면 어처구니없고 실소가 나오는 해프닝이다. 그러나 난감한 처지에 놓인 타인, 그것도 이방인을 저토록 우호적으로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유럽인들의 친절함이란. 그들이 없었더라면 아찔한 일이다. 실로 우리가 맞은 난국의 타개는 다국적 협업이 낳은 글로벌한 결실이다. 일일이 거론할 수 없지만 사실 이태리, 스위스, 독일에서 우리 가족의 자유 여행에는 그 밖에도 많은 유럽인들의 도움이 있었다. 그들에게 감사한다.
계획보다 늦은 시간에 프라이부르크에 도착했다. 도시 근교에 위치한 숙소는 럭셔리하지 않지만 현대적이어서 편리했다. 맞은편에는 대형 마트가 있었다. 무엇보다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블랙 포레스트(Black Forest), 흑림黑林. 독일어로 슈바르츠발트(Schwarzwald)이다. 그래서 그런지 호텔의 기본색이 검정이었다. 시간은 저녁 6시가 넘었는데도 아직 한낮처럼 밝았다. 우리는 짐을 풀고 간단히 요기를 마친 다음 프라이부르크 시내로 향했다. 환상적인 그림이 그려진 트램을 타고 5, 6 정거장 가니 시내 중심이었다. 이 도시의 독특함인지 오래된 건물들이 무슨 쿠키나 크라운 산도 같은 모양이다. 색깔도 노랑, 고동색이 단연 눈에 띄었다.


성문을 지나 몇 걸음 옮겼을 때 옆으로 높지 않은 산으로 오르는 산책길이 보였다. 그 사이 해는 많이 기울고 저녁 그림자가 서서히 들어찰 때이다. 나는 번뜩 ‘저 산이 슐로스베르크?’하는 생각이 들었다. ‘성(Schloss,城)의 산(Berg, 山)’ 즉 성이 있는 산이라 불리는 이 산은 도심 가장자리에 위치해 있다. 그렇다면 저 언덕길은 틀림없이 하이데거가 프라이부르크 대학에 재직할 때 자주 오르던 산책길이다! 도로 위로 도시 끝자락과 나무 육교로 연결돼 있었다. 적어도 20~30년 이상 돼 보이는 꽤 연식 있는 다리였다. 나는 눈치껏 길을 건너[유럽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교통신호를 무시했다] 오솔길로 올라섰다.


걸을수록 이곳이 하이데거의 산책길로 유명한 곳이란 확신이 섰다. 그는 이 길을 걸으며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점점 도시 전체가 눈에 들어오는 걸 보면서 그에게 어떤 서정이 들어찼을까? 어쩌면 모종의 정조情調 속에 사유의 획기적 구상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몰라 산길을 오르는 여대생처럼 보이는 두 여성에게 토막난 독일어로 물었다. Ist hier der Schlossberg? 돌연한 질문에 잠시 놀란 기색을 보이던 두 여성은 이내 환하게 웃으며 ’Ja, Schlossberg’라고 대답했다. 그들의 쾌활하고 친절어린 목소리에 나도 웃으면서 내가 할 수 있는 독일말로 감사했다. “Danke, Danke” ‘그래 이곳이 슐로스베르크이다.’ 다소 벅차오르는 심정으로 좀 더 걷다 아래서 기다리던 가족과 합류했다.
여전히 여운이 가시지 않는 나는 이제 프라이부르크 대성당을 가보자는 모녀의 제안을 건성으로 듣고 그들을 뒤따랐다. 글쎄 몇 십 미터를 갔나? 성당이 광장과 함께 나타났다. 이태리에서 보던 교회의 첨탑이 르네상스 양식에 따라 둥근 지붕으로 지어진 반면 이 성당의 첨탑은 날이 뾰족뾰족 선 전형적 고딕식 건축이다. 성당의 크기는 엄청 났다. ‘아니, 이 작은 도시에 이렇게 큰 교회가 왜 필요하지?’ 의문이 들 만큼 그 위세가 대단했다. 일부 공사 중이기도 했지만 너무 커 교회를 다 돌 수도 없었다.

숙소에 돌아왔을 때는 저녁 9, 10시는 족히 되었을 것이다. 호텔 로비에 있는 자판기에서 독일산 맥주를 2병 꺼내 딸과 나는 각각 손에 들고 제 방으로 돌아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