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목민이 세운 나라 불가리아와 헝가리

현재 유럽에는 바티칸을 포함하여 모두 47개 나라가 있다. 아시아의 48개와 비슷한 숫자이다. 아시아에는 몽골과 카자흐스탄처럼 초원 지대에 자리 잡은 나라가 여럿 있는데, 이들 나라의 주민들 중에는 여전히 유목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유럽에도 유목민이 세운 나라가 있다. 바로 불가리아와 헝가리이다. 물론 몽골과 중앙아시아 국가들과는 달리 이 두 나라에는 현재 유목민이 거의 없다. 그래도 한때 유목민이었던 자신들의 조상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고, 이러한 기억이 국민 정체성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는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유럽에도 유목민이 세운 나라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유목민족들이 역사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알 수 있다. 이번 달에는 이 두 나라를 세운 사람들과 그 건국과정을 간략히 소개하려고 한다.

 

불가리아

불가리아라는 나라 이름은 이 나라를 세운 불가르족에서 유래했다. 630년대 중반 쿠브라트라는 인물이 불가르족을 이끌고 아바르제국에서 독립하여 나라를 세웠는데 그리스인들은 이 나라를 ‘대불가리아’라고 불렀다. 9세기 초에 편찬된 비잔틴제국의 수도사 테오파네스의 《연대기》에는 쿠브라트가 ‘오노구르 불가르와 쿠트리구르의 우두머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오노구르’는 10개의 오구르(오구즈) 부족을 뜻한다. 그래서 여러 학자들은 ‘오노구르 불가르’가 특정 부족이 아니라 오구르 부족들의 연합을 의미한다고 본다. 불가르족이라는 어떤 민족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해석이다. 또한 쿠트리구르는 훈족에 속한 한 부족이었으므로 결국 쿠브라트는 투르크계 오구즈인들과 훈족으로 이루어진 유목민 세력의 우두머리였던 것이다.

쿠브라트 사후에 대불가리아는 또 다른 투르크계 나라인 카자르에 의해 멸망하였다. 이후 쿠브라트의 아들들은 각기 무리를 이끌고 여러 지역으로 흩어졌다. 그 가운데 3남인 아스파루크가 이끈 무리가 다뉴브강 하구 델타 지역에 정착하였으며, 바로 이로부터 중세 불가리아 왕국이 태동하였다. 이 부분은 지난 6월호 <슬라브족의 지배자 아바르> 편에서 언급한 바 있다. 이번 글에서는 이 아스파루크 집단이 어떻게 세력을 키워서 하나의 국가로 자리 잡았는지, 그리고 이 유목민의 나라가 중세를 거치며 어떤 중요한 변화를 겪었는지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아스파루크와 그의 무리가 다뉴브 델타 지역에 정착한 시기는 670년경이었다. 당시 비잔틴제국의 황제는 콘스탄티노스 4세(재위 668-685년)였다. 황제는 다뉴브 국경 지역에 ‘더러운 족속’이 정착하여 기독교인들이 살고 있던 인근 지역을 약탈하고 점령하였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는 이 새로운 적을 소탕하기 위해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였다. 그 자신도 직접 군을 이끌고 불가르인들이 정착한 ‘오글로스’ 즉 오늘날의 도브루자 지역으로 향했다. 대규모의 비잔틴 군대가 접근하자 불가르인들은 요새 안으로 피신했고, 밖으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글로스는 다뉴브 델타 지역이라 소택지로 둘러싸여 있었다. 제대로 된 전투를 하지 못한 채 며칠이 흘러갔는데 갑자기 콘스탄티노스 황제의 지병인 통풍이 악화되었다. 그는 다섯 척의 드로몬(갤리선)을 이끌고 남쪽 흑해 연안의 메셈브리아로 퇴각하였다. 그곳에 온천이 있어 온천욕으로 통증을 다스리기 위해서였다. 황제는 떠나면서 남은 군대에 불가르족을 유인해내어 공격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런데 비잔틴 군대 내에서 황제가 도망쳤다는 소문이 퍼졌고, 이에 놀란 병사들이 공포에 사로잡혀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자신들이 공격을 하지 않았는데도 도망치는 비잔틴 군대를 보고 불가르족은 요새에서 나와 이들을 추격하였다. 불가르족은 다뉴브강을 건너서 200km 이상 떨어진 남쪽의 바르나까지 진출하였다.

불가르족이 진출한 지역은 남쪽에 동서로 길게 뻗은 발칸산맥(당시에는 하에무스 산맥이라 불렸다), 북쪽에 다뉴브강, 동쪽에 흑해가 있었다. 방어하기에 매우 유리하다고 판단한 불가르족은 이곳을 아예 자신들의 근거지로 삼았다. 불가르인들은 그 주변에 살고 있던 일곱 개의 스클라비네 부족을 정복하여 공납을 바치도록 하였다. 불가르족은 이들을 서쪽과 남쪽 국경 지대에 배치하여 국경수비대로 활용하기도 했다. 당시 불가르족은 오늘날 불가리아 땅의 북쪽 절반을 차지하였으며 남쪽으로는 비잔틴제국, 서쪽으로는 발칸의 아바르제국과 국경을 접하였다.

비잔틴제국의 콘스탄티노스 4세 황제는 결국 불가르족과 평화협정을 맺었다.(681년) 당시 소아시아에서 아랍인들의 공세가 계속되어 심지어 수도인 콘스탄티노플도 위협받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비잔틴제국으로부터 정복을 인정받았던 아스파루크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테르벨(재위 700-721) 칸은 비잔틴제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불가르족은 동방유목민이라서 우두머리를 ‘칸’이라 불렀다. 테르벨 칸은 심지어 반란군에 의해 쫓겨났던 비잔틴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2세를 도와 그 제위를 되찾게끔 군사적 및 재정적 지원을 하였을 정도로 비잔틴제국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는 그러한 지원에 대한 대가로 유스티니아노스 2세로부터 부황제에 해당하는 ‘카이사르’라는 칭호를 받았다. 불가리아 동쪽의 마다라 절벽에 새겨진 ‘마다라 기사상’은 바로 이 테르벨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그림 1 마다라 기사상

 

테르벨은 그후 비잔틴황제 테오도시우스 3세와 조약을 체결하였는데(716년) 이 조약에서는 양국 사이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국경선을 확정하고 교역의 장소와 교역품 및 교역량 등을 상세히 규정하였다. 유목민인 불가르족에게는 비잔틴과의 교역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다. 양국간의 관계는 교역을 통해 더 밀접해졌다.

그후 계속 세력이 커진 불가리아 왕국은 10세기 초에 전성기를 맞아, 그리스와 크로아티아를 제외한 발칸반도 대부분을 지배하게 되었다. 테르벨 사후 비잔틴제국은 국경을 강화하고 그곳에 시리아와 아르메니아 이주민들을 정착시켰다. 이 때문에 양국 간의 갈등이 다시 시작되었다. 10세기 후반에는 비잔틴제국이 바이킹족인 루스를 끌어들여 불가리아를 공격하게 하였다. 968년 키예프 루스 군대는 불가리아 수도 프레슬라프를 공격하고 당시 불가리아의 보리스 칸을 포로로 잡아갔다. 1014년에는 비잔틴 군이 불가르 병사들을 대거 포로로 잡아서, 백 명당 한 명씩만 남겨두고 모두 눈알을 빼버리는 잔인한 짓도 서슴지 않았다. 불가리아 왕국은 이때 멸망하고 말았다.

그로부터 70년 후인 1185년 불가르 귀족 테오도르 형제에 의해 불가리아는 비잔틴제국으로부터는 다시 독립하였지만 1396년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 정복되어 또다시 멸망하고 만다. 이로써 중세 불가리아는 막을 내리고 이후 불가리아는 19세기 후반까지 오스만제국의 지배하에 고통받게 되었다.

불가르족은 다뉴브 하류지역에 정착하여 국가를 건설한 이후에도 자신들의 전통을 상당 기간 유지하였다. 물론 불가르족의 고유한 종교에 관해서는 ‘텐그리’라고 불리던 천신에 대한 숭배 외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앞에서 언급한 마다라 기사상 주변에는 그리스어로 새겨진 비문이 남아 있는데, 이 비문에서 불가르족의 종교와 관련된 일부 단서를 확인할 수 있다. 글씨가 심하게 마모된 상태라서 전문의 해독은 불가능하지만 불가르 칸은 자신의 왕권이 텐그리 신으로부터 주어졌다고 믿고 제물을 바쳤다는 내용이 남아있다. 이때의 제사는 동물을 제물로 바치는 방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 세기 뒤 비잔틴제국의 수도사 테오파네스는 자신의 《연대기》에서 당시 불가리아의 크룸 칸이 군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플 성벽 근처에서 올린 제사의식을 “더러운 악마적 의식”이라고 비난하였다. 비잔틴 사람들이 보기에 좀 더 끔찍했던 관행도 있었다. 크룸 칸은 전사한 비잔틴의 황제 니케포로스의 머리를 잘라 그 두개골로 술잔을 만들었다. 이는 스키타이나 흉노 등 유목민들에게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관습으로, 불가르족이 동방 유목민의 관습을 따르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러한 불가르인들의 나라도 결국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나아가 기독교를 국교로 삼게 되었다. 기독교는 그리스인 포로들이나 망명자들을 통해 불가리아로 전파되었다. 동방 유목민의 후예였던 불가르 귀족들은 처음엔 대체로 기독교에 반감을 가졌지만 왕실 내에서도 개종자가 나왔다. 예를 들어, 오무르탁 칸(재위 814-831)은 비잔틴의 고위 성직자 몇 사람과 장군들을 비잔틴제국의 스파이로 몰아 처형했던 사람인데 그의 장남은 자신의 노예를 통해 기독교를 접하고 개종하였다. 그러나 그는 기독교도라는 이유로 왕위계승에서 배제되었을 뿐 아니라 죽임을 당했다.

처음으로 기독교로 개종한 불가리아 칸은 보리스 1세(재위 852-889)이다. 그의 여동생은 오라비보다 먼저 기독교도가 되었다. 보리스 칸이 귀족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기독교를 받아들인 배경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정치적 이해관계가 작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당시 불가리아는 슬라브족의 모라비아,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등과 서쪽에서 연이어 전쟁을 치르고 있었고, 이런 상황에서 비잔틴제국을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한 외교적 방책의 하나로 기독교로 개종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힘들다. 좌우간 그는 비잔틴의 미카엘 3세 황제를 대부로 삼아 세례를 받았다. 이로써 비잔틴의 성직자들이 불가리아에 들어와 선교활동을 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그러나 보리스 칸은 기독교로 개종했더라도 불가리아 교회의 통제권이 비잔틴제국으로 넘어가도록 허용할 생각은 없었다. 그는 비잔틴교회 즉 콘스탄티노플 총주교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로마교황청과도 접촉하였다. 그가 로마 교황에게 보낸 편지에는 기독교의 교리와 의례에 대한 많은 질문이 담겨 있었다. 심지어 당시 국가통치와 관련되어 비잔틴의 성직자들이 가르치던 내용에 대해서 교황청의 의견을 구하기도 했다. 교황청은 보리스 칸의 질문들에 대해 109개 장에 달하는 긴 답신을 보내왔다. 이 서한을 통해 당시 불가르족의 신앙을 일부 엿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제35장에서는 불가르족이 전쟁에 나가기 전에 점을 치고 주문을 외우는 관습이 있다고 하였는데, 교황청은 이런 이교적 관습을 버리고 교회에 가서 죄를 회개하고 기도한 후 전쟁터로 나가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런데 당시 상황은 보리스 칸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로마의 니콜라스 교황과 비잔틴의 포티우스 총주교 사이의 관계가 악화되어 서로를 파문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로마 교황청과 콘스탄티노플 교회 사이에서 저울질하던 보리스 칸은 로마 교황이 불가리아 교회의 독립을 허용할 생각이 없음을 깨닫고 다시 비잔틴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는 콘스탄티노플 총주교로부터 불가리아 교회의 독립을 인정받았고, 이것이 불가리아 정교회의 시작이 되었다.

보리스 칸은 불가리아 교회의 독립을 위해서는 비잔틴에서 파견된 그리스인 성직자들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리스어가 아니라 불가리아인 다수가 사용하는 슬라브어로 교리서와 문서가 번역되고 보급되어야 했다. 이 일에 큰 역할을 한 사람들이 바로 ‘슬라브 사도들’ 즉 키릴(826-869)과 메토디오스(815-885) 형제의 제자들이었다. 키릴은 원래 이름이 콘스탄틴이었는데, 후일 로마에 가서 키릴로 개명을 했다. 형제는 비잔틴 황제의 명으로 862년 모라비아 왕국으로 파견되어 선교활동을 하다가 동생 키릴은 로마에서 수도사로 생을 마감했고, 형 메토디오스는 모라비아에서 주교로 활동하다 죽었다. 두 형제에게는 클리멘트와 나움 등 여러 제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885년 독일 교회의 압력으로 모라비아에서 쫓겨났다. 보리스 칸은 이들을 적극 환영하고 마케도니아의 오리드 지역에 정착시켰다. 오리드의 신학교에서 클리멘트와 그 동료들은 전에 키릴 형제가 만든 글라골 문자(Glagolitic)를 개선하여 키릴 문자를 완성했다. 이것이 오늘날 러시아를 비롯하여 동유럽 일대에서 널리 사용되는 문자이다. 클리멘트 일행은 교회 문서와 성경, 예배서 등을 키릴 문자로 번역하여 보급하였다. 그 결과 불가리아 교회는 그리스 문자로 된 교회전례서에 의존할 필요가 없어져 보리스 칸이 바라던 대로 불가리아 교회의 독립이 유지될 수 있었다. 클리멘트는 이러한 공로로 보리스 칸에 의해 불가리아 교회의 초대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기독교로 개종한 보리스 칸은 장남인 블라디미르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자신은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처럼 기독교를 따를 마음이 없었다. 블라디미르는 전통적인 신앙을 유지하려했고, 이 과정에서 플리스카 주교를 비롯하여 많은 기독교도들이 학살되었다. 자신의 아들이 저지른 학살에 분개한 보리스 칸은 수도원에서 돌아와 아들을 왕좌에서 몰아내고 귀족들 전부를 소집하여 회의를 열었다. 소위 893년의 ‘프레슬라브 회의’인데 이 회의에서 블라디미르를 퇴위시키고 그의 동생 시메온을 왕으로 앉혔다. 그리고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하고 교회에서 사용되던 슬라브어 즉 클리멘트 일파가 표준화한 슬라브어를 국가의 공용어로 선언하였다. 시메온 왕은 젊은 시절 콘스탄티노플에 유학하면서 그리스 학문을 배웠는데 그리스 학문에 상당히 능숙하여 ‘반(半)그리스인’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그는 클리멘트 일파의 슬라브어 문예운동을 적극 후원하였다.

이러한 기독교화 정책은 슬라브족과 불가르족의 통합을 촉진하였던 것으로 평가된다. 기독교를 받아들인 이후 불가리아는 불가르 전사귀족이 지배하던 유목민 스타일의 국가에서 기독교를 기반으로 하는 중세 유럽 국가로 차츰 변모해 나가게 되었다. 수적으로 소수였던 불가르 전사귀족은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슬라브족의 문화에 동화되어 갔다. 그리하여 슬라브족과 별개의 종족으로서 국가와 사회를 지배하던 불가르족의 종족적 정체성과 그 전통적 종교도 점차 모습을 잃게 되었다.

 

그림 2. 성 클리멘트가 세운 수도원 학교터. 북마케도니아 오리드에 위치해 있다.

 

헝가리

헝가리는 불가리아와는 달리 현재 한국과 경제적으로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불가리아와 헝가리 모두 유럽연합 회원국이지만 헝가리는 동서 유럽이 만나는 교차점에 위치해 있다는 지리적 이점을 가지고 있다. 또한 헝가리 정부는 정책적으로 한국기업들의 투자를 적극 환영하여 현재 삼성전자와 한국타이어, SK온 등을 비롯하여 한국의 여러 기업들이 헝가리에 공장을 세우고 사업을 펼치고 있다. 한국기업의 투자로 인해 헝가리인들도 한국에 대해 상당히 우호적인 태도를 갖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오늘날 헝가리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마자르족은 9세기 말 오늘날의 우크라이나 지역으로부터 헝가리로 들어와 이 지역을 정복하였다. 당시 이 지역은 ‘판노니아’라고 불렸는데, 로마제국 시대에는 훈제국의 본영이 있었던 곳이며 6세기 중엽 이후에는 아바르족이 자리 잡고 있던 곳이기도 했다. 아바르제국은 9세기 초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 대왕의 공격으로 멸망하고 그곳에는 판노니아 변경령(변경령을 ‘마르카’라 하였다)이 세워졌다. 후일 샤를마뉴의 손자대에 프랑크 왕국이 동서로 분할되면서 판노니아는 동프랑크 왕국에 속하게 되었다. 판노니아를 정복한 마자르족은 언어 분류상으로 우그르어(Ugric)족에 속한다. 우그르어는 핀란드인들이 사용하는 핀어와 함께 우랄어족에 속하는 언어이다. 우그르어에서 나온 오늘날의 헝가리어는 유럽인들이 사용하는 언어들과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언어이다. 그래서 마자르족의 헝가리를 ‘언어학상의 고립된 섬’이라고 부른다. 마자르족은 우랄어라는 명칭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원래는 우랄산맥 동쪽에서 살던 수렵민족이었다. 이들은 차츰 유목민의 생활방식을 받아들여 유목민화 되어갔다. 그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사람들은 투르크 유목민들이었는데 이는 목축과 관련된 헝가리어 단어들이 투르크어로부터 왔다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마자르인들은 우랄산맥 삼림지대로부터 남하하여 카프카스 산맥 북쪽의 초원지대로 이동하였다. 당시 이 지역은 서투르크계의 카자르 제국이 지배하고 있었다. 마자르인들은 카자르 제국의 북쪽 국경을 지키는 번병의 역할을 맡았다.

판노니아를 정복하기 이전 마자르족의 초기 역사에 대해서는 비잔틴제국의 유명한 학자이자 황제였던 콘스탄티노스 7세가 쓴 《제국통치론》(De administrando imperio)에 비교적 자세히 나와 있다. 10세기 중반에 나온 이 책은 황제가 자신의 아들이 황제가 되었을 때를 대비하여 제국 주변의 여러 민족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다뤄야 할지를 정리한 지침서이다. 페체네그, 카자르, 마자르 등 비잔틴제국과 접한 다양한 종족들에 대한 귀중한 정보를 담고 있어 이 책은 중요한 역사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마자르족에 대해 ‘마자르’나 ‘헝가리인’이라고 하지 않고 ‘투르크인’이라고 부르고 있다. 콘스탄티노스 황제만 그렇게 쓴 것이 아니고 당시 비잔틴제국 사람들은 모두 마자르족을 투르크인이라 불렀는데 이는 마자르족이 투르크족이 세운 카자르 제국에서 갈라져 나온 사람들이라는 사실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콘스탄티노스 황제에 의하면, 마자르족은 페체네그족의 공격으로 인해 살던 곳에서 쫓겨났다. 그들은 두 갈래로 나뉘어, 한 무리는 카프카스 산맥을 넘어 페르시아쪽으로 이동하였고, 다른 한 무리는 서쪽으로 도망쳐 “에텔쿠즈” 지역에 정착하였다. 동쪽으로 간 사람들을 《제국통치론》에서는 그리스어로 ‘사바르토이 아스팔로이’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마자르족이라기보다는 투르크 계통의 사비르족이었던 것 같다. ‘에텔쿠즈’는 《제국통치론》에 따르면, 두 강, ‘에텔’과 ‘쿠즈’에서 이름을 딴 곳으로, 흑해 북안 드네프르 강 서쪽의 우크라이나 지역에 해당한다.

당시 마자르족은 일곱 개의 부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마자르족 전체를 통솔하는 왕은 없었으며 대신 부족마다 전쟁을 이끄는 지휘관이 있었다. 콘스탄티노스 황제는 이러한 전쟁지휘관을 ‘보이보데’(voivode)라 부르고 있는데 이 칭호는 슬라브족들의 우두머리를 지칭하는 말에서 온 것이다. 마자르인들은 판노니아를 정복하기 이전에 이미 그 지역을 잘 알고 있었다. 860년대에는 프랑크인들과 대립하고 있던 모라비아 대공이 마자르족을 지원군으로 불러들여 마자르족이 비엔나 근처까지 진출하여 싸운 적도 있었다. 마자르족의 원정이 시작된 894년에도 모라비아 대공은 프랑크-불가리아 동맹에 대항하기 위해 마자르족을 불러들였다. 이러한 원정경험을 통해 마자르족은 당시 카르파티아 분지 즉 판노니아를 둘러싼 여러 세력들의 복잡한 관계와 그곳의 사정을 훤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러한 여러 세력들 간의 다툼을 이용하여 그 지역을 정복하기 위한 원정에 착수하였다.

마자르족의 헝가리 원정은 다뉴브강을 따라서 서쪽으로 이동하지 않고, 그보다 훨씬 북쪽에 위치한 카르파티아 산맥의 고개를 넘어가는 길을 택했다. 이 고개가 바로 ‘베레크 고개’인데, 오늘날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슬로바키아 국경이 만나는 곳이다.

마자르족의 판노니아 원정은 902년까지 계속되었다. 판노니아를 차지한 뒤에는 옆에 있던 모라비아 공국을 공격하여 마침내 그곳까지 정복하였다 (906년). 이후 마자르족의 원정은 정복보다 약탈이 주된 목적이 되었다. 서쪽의 독일과 이탈리아 북부, 심지어 프랑스까지 약탈원정의 대상이 되었는데, 프랑스의 저명한 중세사가인 마르크 블로크에 따르면 당시 주변 지역 연대기에는 거의 매년 빠짐없이 ‘헝가리인들의 약탈’에 대한 기록이 있다고 한다. 924년에는 남프랑스의 ‘님’이란 도시를 공격하기 위해 이탈리아 북부에서 알프스 산맥을 넘기도 하였다. 또 시메온 칸이 죽어 불가리아가 약해진 927년에는 비잔틴제국의 트라키아 지방까지 멀리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마자르족의 서유럽 원정은 955년 오토 1세의 동프랑크 왕국 군대에 의해 마자르족이 패배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러한 원정 가운데 가장 먼 곳까지 간 것은 942년의 스페인 원정이었다. 그 거리는 거의 2천 킬로미터에 달하여, 451년 훈족의 갈리아 원정 거리보다 더 멀었다. 당시 스페인은 북아프리카에서 건너온 이슬람 세력이 지배하고 있었는데 마자르족의 이 원정에 대한 기록은 유럽측 사료에는 없고 오로지 ‘이븐 하얀’(987-1075)이란 이슬람 역사학자가 남긴 사서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그의 기록을 통해 당시 마자르 기병대가 어떤 경로로 이동했는지를 알 수 있다. 마자르인들은 예전의 훈족처럼 헝가리에서 독일을 거쳐 프랑스로 가는 길 대신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반도로 들어가 거기서 남프랑스로 넘어갔다. 하지만 마자르족은 코르도바 왕국의 심장부인 안달루시아 지방까지는 가보지도 못하고 피레네 산맥 근처에 이르렀다. 초원과는 전혀 딴판인 곳이라 말에게 먹일 꼴과 식량, 물이 부족하여 며칠 만에 퇴각하였는데 갑자기 나타났다가 바람처럼 사라진 마자르족의 일부 병사들이 잡히지 않았더라면 이들이 어디서 온 사람들이었던지 당시 스페인을 지배하던 무슬림들은 전혀 몰랐을 것이다. 그런데 포로로 잡힌 다섯 명의 마자르 병사를 심문하자 마자르족이 어디에서 왔고, 누가 그들을 다스리는지 알게 되었다. 하얀에 의하면, 이 다섯 포로는 모두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칼리프의 호위병이 되었다고 한다.

그 이후에도 마자르인들의 공격은 계속되어 954년에 마자르족은 독일을 침공하였다. 당시 동프랑크 왕국에서는 여러 제후들이 국왕 오토 1세에게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 반란 세력이 외세인 마자르족을 끌어들인 것이다. 마자르족은 동맹 제후들의 적들을 공격하고 약탈하였다. 심지어 라인강 너머 동프랑크 왕국과는 무관한 벨기에와 프랑스 땅도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도시들과 수도원이 약탈당했고, 부르고뉴를 따라 남하한 마자르 부대는 프로방스까지 진출하였다. 당시 프로방스의 해안 지역은 이슬람 세력이 점령하고 있었는데 이곳에서 마자르족은 이슬람 세력과 싸웠다.

다음 해인 955년 여름 재차 독일을 침공하였다. 마자르족은 바이에른과 그 북쪽에 있는 프랑코니아(프랑켄) 지방을 공격하고 8월에는 슈바벤 지방의 중심도시 아우크스부르크를 공격하였지만 함락시키지는 못했다. 8월 10일 아우크스부르크 남쪽 레흐 강변에서 마자르족과 오토 1세의 독일 군대 사이에 결전이 벌어졌다. 오토 1세는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가까운 거리에서 싸우는 근접전으로 마자르 기병대를 물리치는 데 성공하였다. 말을 타고 활을 쏘며 빠르게 움직이는 마자르족은 자신들의 장기인 치고 달아나는 식의 전술을 마음대로 구사할 수 없었다.

이 ‘레흐펠트 전투’에서 마자르족은 많은 병사를 잃고 흩어져 달아났다. 말이 지쳐서 더 도망갈 수 없었던 병사들은 인근의 마을에 숨었다가 불에 타 죽기도 하고 주민들에게 잡혀서 죽기도 하였다. 이 전투에서 마자르족은 5천 명의 희생자를 내었으며 세 명의 족장도 붙잡혀 처형되었다.

이후 마자르족은 더 이상 서유럽을 공격하지 않았다. 대신 동쪽의 비잔틴제국으로 공격의 방향을 바꾸었는데 959년에는 비잔틴제국이 약속한 공납을 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침략을 감행했다. 마자르족의 비잔틴 공격은 970년경까지 계속되었으나 10세기 말 이후 유럽 국가들에 대한 약탈을 그만두고 점차 유럽인들 사이에 동화되어 갔다.

정복 시기에 마자르인들에게는 아직 국가라고 할 만한 조직은 없었다. 물론 마자르 부족연합 전체를 대표하는 지도자는 있었다. 비잔틴제국의 콘스탄티노스 7세 황제에 의하면, 최초의 마자르족 우두머리는 아르파드였다. 헝가리인들은 아르파드를 건국시조로 여기는데, 이 아르파드 가문은 그 이후로도 전체 부족연합의 지도자 자리를 대대로 이어갔다. 아르파드 후손들로부터 자연스럽게 헝가리의 왕권이 형성되어 갔다. 드디어 서기 1000년 아르파드의 후손이 기독교를 받아들여 로마 교황으로부터 ‘왕’이라는 칭호와 왕관을 받았다. 그의 세례명은 ‘스테파노’인데 헝가리어로는 ‘이스트반’이라고 한다. 이스트반 왕은 죽은 후에는 가톨릭교회의 성인으로 추존되었다. 그의 축일인 8월 20일은 헝가리의 건국기념일이 되었을 정도로 이스트반 왕은 헝가리인들에게 존경을 받는다.

한편, 헝가리라는 국명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한다. 일부 사람들은 헝가리를 로마제국 말기에 판노니아에 본영을 두었던 훈족과 연관시켜 ‘훈’에서 온 것이라고 한다. 이런 생각은 요즘뿐만 아니라, 중세 때부터 있었고, 특히 마자르인들이 그런 믿음을 강하게 가졌던 것 같다. 아틸라 이야기는 동유럽의 유목민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는데 마자르족은 자신들이 아틸라의 후예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또한 아틸라가 지배하던 곳을 자신들이 다시 정복하여 지배하게 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전문가들의 생각은 좀 다르다. 헝가리 초기 역사 전문가인 로나타스 교수에 따르면, 당시 슬라브어 문헌에서는 마자르족을 ‘오노구르’ 혹은 ‘온구르’라고 하였다고 한다. 대불가리아 건국자 쿠브라트에서 보았듯이 오노구르는 10개의 오구르 부족을 뜻하는 말이다. 7세기경 슬라브인들은 투르크 유목민과 비슷한 생활을 하던 흑해 북부의 다른 부족도 ‘오노구르’ 혹은 ‘온구르’라고 불렀다. 슬라브인들이 쓰던 유목인들에 대한 이 포괄적인 명칭은 서유럽에도 전전해져서 서유럽에서는 마자르를 ‘웅가리’로 불렀다. 예를 들어 마자르인들의 판노니아 정복이 시작되기 전인 860년 동프랑크 왕국의 루드비히 왕이 오스트리아의 한 수도원에 토지를 기증한 문서에는 마자르인들을 ‘웅가리’로 지칭하고 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서유럽의 기록들에서는 차츰 ‘웅가리’가 ‘훙가리’가 되어 갔다. 당시 프랑스어에서는 ‘h’ 발음이 사라지는 현상이 시작되었는데 이 때문에 기록하는 사람에 따라 ‘웅가리’에 원래 ‘h’자가 있다고 생각하여 ‘훙가리’라고 ‘h’ 자를 붙여 표기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마자르 왕국이 훙가리가 된 것이다.

9세기 초 프랑크왕국의 샤를마뉴 대제는 서로마 황제를 자처하기 시작한 최초의 프랑크 왕인데 헝가리 땅에 있던 아바르제국을 정복하여 그곳을 자신의 제국에 편입시켰다. 그런데 후대 중세 서유럽 사료들은 샤를마뉴가 ‘훙가리의 왕국을 정복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샤를마뉴 시대에는 마자르족이 아직 그 땅에 살지도 않았기 때문에 이는 엄밀히 말해서 시대착오적인 기록이다. 당시 그 지역에 있던 왕국은 훙가리 왕국이 아니라 아바르인들의 왕국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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