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보는 하이데거의 생애와 사상 2

  1. 메스키르히(Meßkirch), 하이데거의 무덤으로부터

독일에 온지 이튿날이다. 오늘은 하이데거의 고향 메스키르히로 가는 날이 다. 이곳 프라이부르크에서 차로 2시간 30분 되는 거리에 있는 제법 먼 곳이다. 시간도 적잖은 시간이었지만 대관령 고갯길보다 더 험한 산길을 넘어야 하는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푸른 초원, 그 위에 한가로이 풀 뜯어 먹는 소들, 높지 않은 산, 작은 마을들이 차창 밖으로 스치듯 지나간다. 평온하고 싱그러운 풍경이다.

그림 1 메스키르히로 가는 길에서 보는 풍경
그림 2  슈바르츠발트 지역 주택은 지붕이 아래로 길게 경사진 게 특징이다

이 지역 집들의 지붕이 죄다 아래로 길게 경사져 있는 게 눈에 띄었다. 하이데거를 통해 그것이 겨울의 눈을 대비하기 위한 건축 방식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Bauen Wohnen Denken」이란 강연에서 슈바르츠발트(Schwarzwald) 지역의 농가를 이렇게 얘기했다.

“슈바르츠발트 지역의 농가農家는 바람을 막는 산기슭에 남쪽을 향한 채, 풀밭 사이와 샘 가까이 지어져 있다. 이로써 농가는 땅을 불러 모은다. 또한 농가의 지붕은 적당한 기울기로 깊숙이 아래로 드리워져 있어서 눈의 무게와 긴 겨울밤의 세찬 바람을 막아줌으로써, 하늘을 불러들이고 있다. 집 안의 식탁 뒤에는 십자가나 성모상聖母像을 모시는 자리를 둠으로써 신적인 것들을 가까이 머물게 한다. 또 출산과 임종을 위한 신성한 자리를 배치함으로써 죽을 자들이 시간을 거치며 지나가는 삶의 행로를 특징적으로 보여준다. 본질이 살림인 짓기를 통해 지어진 농가라는 사물은 이렇듯 하늘, , 신적인 것 그리고 죽을 자들이 본래대로 있도록 장소를 내준다.”

토트나우베르크에 있는 그의 산장도 그런 형태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나중 얘기이다. 어지러울 정도로 고갯길을 넘었다 싶었을 때 휴식 겸 또 독일의 시골도 감상할 겸 이름도 모르는 한 마을에 차를 세웠다. 마을은 한가했다. 사람도 거의 눈에 띠지 않았다. 이쪽저쪽 구경을 하다 이곳이 하이데거가 좋아하는 시인 중 한 사람인 헤벨(Johann Peter Hebel 1760-1826)의 연고지란 것을 알게 됐다. 잠깐 살펴 본 마을 이곳저곳에 그를 기념하는 팻말이 붙어있었다. 헤벨의 시는 표준 독일어가 아닌 남부 독일의 알레만 방언의 특색을 담고 있다. 알레만어는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 주, 스위스 독일어권 지역, 프랑스의 알자스-로렌 지방에서 사용되는 독일어의 방언 중 하나이다. 알레만어권에서 태어나고[그의 고향은 스위스 바젤이다] 활동한 그는 그 지역의 고유한 언어와 문화적 정신을 시로 형상화한 고향의 시인이라 할 수 있다. 같은 알레만어권 출신인 하이데거는 헤벨의 토착적 작품에서 나타나는, 알레만 지역의 고유한 문화적 특성과 언어적 아름다움을 높이 평가했다.

 

그림 3 메스키르히 가는 길에 우연히 마주친 시인 헤벨의 연고지

‘이것도 우연인가?’ 시인 헤벨은 고향을 간직하고 있는 인간은 “우리가 기꺼이 인정하려 하거나 그렇지 않든, 뿌리와 함께 대지로부터 솟아올라 에테르에서 꽃피고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자라고 묘사했다. 이때 에테르는 “높은 하늘의 자유로운 공기와 정신의 열린 영역”을 뜻한다. 하이데거는 그 곳을 “존재 자체의 가까이(nähe)”혹은 “근원에 가까운 장소(Ort)”라고 밝힌다. 그래서 “고향은 근원 가까이로 귀향”이다.

얼마가지 않아 우리는 메스키르히로 접어들었다. 먼저 그의 무덤이 있는 시립묘지(Friedhof)부터 가기로 했다. 의도치 않게 우리 여행은 그의 죽음부터 생애를 되밟아가는 것이 되었다. 독일어 ‘Friedhof’의 독일어 Fried는 평화, 평온, 안녕을 뜻하고 ‘Hof’는 뜰, 안마당, 농장, 궁정을 의미한다. 시립묘지는 말 그대로 평화로웠다. ‘평화로운 뜰’, ‘안식의 마당’이었다. 조금 넓은 뜰 정도 크기라고 할까? 새들 지저귀는 소리가 생생히 들릴 정도로 주위는 조용했다. 거기에 밝은 햇빛이 묘비들 앞에 단장된 화단의 꽃들을 비추었다. 중앙의 작은 예배소는 몇 십 년 전 그대로인 것 같았다. 아마도 이곳에서 유족과 조문객들을 고인을 위한 마지막 기도를 올렸을 것이다.

그림 4 메스키르히 시립묘지 정문. 마주 보이는 건물은 고인을 위한 마지막 예배를 보는 교회로 보였다.

처음엔 하이데거의 묘지를 과연 쉽게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염려도 있었지만 그곳을 찾는 데는 한 마디면 됐다. 묘지에는 일요일을 맞아 찾아온 4, 5명의 참배객들이 있었다. 모두 일행으로 보였다. 그들을 향해 ‘하이데거?’ 하니 바로 손짓으로 알려준다. 그들이 가리키는 데로 가니 과연 하이데거 묘지가 있었다. 부인 엘프리데(1893-1992)와 합장된 그의 무덤 좌우에 역시 합장을 한 동생(Fritz Heidegger) 부부와 부모의 무덤이 있었다. 투박하게 쪼개고 깎이어 겨우 비석으로서 구색을 갖춘 묘비는 돌의 질감, 시간의 퇴적이 그대로 느껴졌다. 세련되고 매끄럽게 연마되고 조형미를 갖춘 다른 많은 묘비들과 대조적이었다.

그림 5 하이데거 일가 묘비

 

그림 6  하이데거 묘비. 상단의 별은 그에 뜻에 따라 새겨진 것이다.
그림 7 묘지 중앙에 물뿌리개가 배치돼 있어 참배객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묘비에는 이미 알고 있던 대로 별이 양각되어 있었다. 그의 뜻이었다. “하나의 별을 향해 가는 것, 오직 그것뿐!” 그가 그의 책 사유의 경험으로부터 앞부분에 적어 놓은 잠언과 같은 글귀이다. 더 말하지 않아도 별은 그의 사유를 이끈 존재 물음이다. 더 정확히는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이다. 전통 형이상학은 존재자를 앞에 두고 그것이 왜 있는지, 그러한 것으로 존재하는 것은 무엇인지, 즉 존재자의 본질과 근거를 물었다. 그에 비하면 하이데거는 존재자가 존재하는데, 이때 ‘존재’란 무슨 의미인지 묻는 것이다. 그가 문제 삼는 의미는 무엇이(이 경우 존재가) 그 자체로서(이 경우 존재 자체로서) 있는 장場, 영역과 같은 것이다. 하여 그의 존재 물음은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이고 그것은 곧 존재가 그 자체로서, 달리 말하면 다른 무엇이 아닌 그의 본질로서 참되게 있는 영역을 묻는 것이다. 그곳은 인간의 사유이다. 존재의 사유는 어떤 것을 대상으로 맞세우는 표상함이 아니라 그리로 마음을 모으는 유의함이다. 존재가 존재로서 있도록 하는 지킴이고 기다림이다. 존재는 오직 그 사유에서만 존재로서 현성한다. 밤이 깊을수록 빛나는 별은 바라보면 우리를 바라본다. 눈맞춤이다. 이때 별의 빛나는 존재와 그를 향한 우리의 바라봄은 하나로 물든다. 별은 천문학적 관측의 대상이 아니라 그를 향해 마음을 모으는 순전한 사유에서 비로소 별로서, 그 자체로서 머문다. 사라지지 않는 고유한 시간이 존재사건, 눈맞춤의 인사가 일어나는 영역이다. 하이데거는 그 별이 밝히는 한길을 걸어갔다. 때로 에둘러가고 때로 체류하면서.

“아빠, 여기” 하이데거 묘를 떠나 나서는데 딸아이가 부르며 물뿌리개를 내민다. 묘지 한 쪽에는 샘이 있었고 거기에 물뿌리개들이 줄지어 걸려 있었다. 묘 앞에 가꿔진 작은 꽃밭들이 다들 생기를 띠고 있었는데 아마도 참배객들이 저기에 물을 받아 자신과 연고 있는 무덤 앞의 꽃들에 물을 주어서 그랬나 보다. 그런데 물론 작은 돈이지만 동전을 넣고서야 물뿌리개를 뺄 수 있었다. 꼭 돈 때문만은 아니고 ‘그렇게까지 할 일인가’하는 생각에 멈칫하고 말았는데 딸아이는 그것을 오해했던 모양이다. 그렇지만 아무 말 없이 딸 아이의 성의에 웃으며 물뿌리개에 물을 받아 세 ‘하이데거’ 묘 앞에 화단에 물을 가득 주었다. 하이데거의 사상이 마르지 않는 한, 물기 머금어 더욱 빛나는 그의 무덤 앞 꽃과 풀들은 영영 시들지 않을 것이다.

그림 8 메스키르히 성 안을 들어섰을 때 마을 행사 준비가 한창이었다.

시립묘지를 떠나 마을의 중심으로 향했다. 성문을 들어서니 마을 축제를 벌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먹을거리나 소품을 파는 사람들도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들을 지나치니 시청이 보이고 교회가 보였다. 마을 이름 ‘메스키르히’는 ‘Messe’(미사: 가톨릭의 예배)와 ‘Kirche’(교회)의 합성어로서 이 도시의 종교성을 보여준다. 메스키르히는 1080년에 작성된 한 문헌에 처음 언급되었지만, 그보다 훨씬 더 오랜 정착 역사를 가진 것으로 보고 있다. 교회는 ‘성 마르틴 교회’로 불렸는데, 지금은 프랑스 지역인 투르에서 활동한 성인의 이름에서 취한 것이다. 하이데거를 찾는 여정 동안 드물지 않게 만나는 이름이다. 사실 하이데거 이름 자체도 마르틴이다. ‘마르틴 하이데거’ 교회 맞은편에 있다는 그의 생가도 이 근처일 것이다. 시청은 하이데거가 고향을 방문해서 강연을 했던 곳이다. 교회는 그의 아버지가 관리인으로 근무하며 종치는 일을 맡아했던 곳이다. 늘 마주치는 집 앞의 교회, 종소리, 예배 등 기독교적 배경은 당연히 하이데거 유소년 시절의 사고와 정서에 간과할 수 없는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신에 대한 그의 입장이 모호하다 해도 이러한 신학적 배경은 그의 사상 형성의 한 유래가 되었을 것임에는 틀림없다. 그 자신 이와 관련해 유래는 언제나 도래로 남는다고 밝혔다. 또 그는 존재의 성스러움에서 빛나는 신성, 장차 도래할 마지막 신 그리고 신의 구원에 대해 막힘없이 얘기했다. 적어도 그가 자신이 애호하던 횔덜린의 시에 붙인 ‘신전 없는 사원’이란 표현은 그의 철학에도 해당되리라.

그림 9 메스키르히 ‘성 마르틴 교회’

유소년 하이데거는 자신의 미래가 어떻게 펼쳐질지 알고 있었을까? 자세히는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인생의 방향에 결정적인 작용을 할 모종의 시도는 있었다. 1907년 같은 고향 출신이자 아버지 친구였던 한 사제로부터 전직 신부이자 철학자인 브렌타노(Franz von Brentano)의 학위논문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른 존재자의 다양한 의미에 대하여』를 선물 받는다. 그는 이 책이 처음으로 “그를 철학에 파고들려는 서툰 시도”를 하게 만들었다고 회고한다. 또 책에 “김나지움[우리로 말하면 고등학교] 시절 그리스 철학을 관통해 가는 나의 첫 번째 실마리”라고 적어 놓는 것으로써 책의 기여를 기렸다. 공교롭게도 브렌타노는 나중에 프라이부르크 대학에 들어갔을 때 자신을 지도한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 1859-1938)의 스승이었다. 더욱이 인간의 의식이란 ‘이미 무엇에 관한 의식’으로서 의식 현상의 본질은 대상을 ‘지향’하는 데 있다는 것을 밝힌 그의 철학은 후설의 현상학 탄생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림 10 메스키르히 시청. 하이데거는 이곳에서 강연을 하기도 했다.

 

유소년 하이데거는 자신의 미래가 어떻게 펼쳐질지 알고 있었을까? 자세히는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인생의 방향에 결정적인 작용을 할 모종의 시도는 있었다. 1907년 같은 고향 출신이자 아버지 친구였던 한 사제로부터 전직 신부이자 철학자인 브렌타노(Franz von Brentano)의 학위논문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른 존재자의 다양한 의미에 대하여』를 선물 받는다. 그는 이 책이 처음으로 “그를 철학에 파고들려는 서툰 시도”를 하게 만들었다고 회고한다. 또 책에 “김나지움[우리로 말하면 고등학교] 시절 그리스 철학을 관통해 가는 나의 첫 번째 실마리”라고 적어 놓는 것으로써 책의 기여를 기렸다. 공교롭게도 브렌타노는 나중에 프라이부르크 대학에 들어갔을 때 자신을 지도한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 1859-1938)의 스승이었다. 더욱이 인간의 의식이란 ‘이미 무엇에 관한 의식’으로서 의식 현상의 본질은 대상을 ‘지향’하는 데 있다는 것을 밝힌 그의 철학은 후설의 현상학 탄생에 크게 기여하였다.

교회는 또 다른 의미로 그의 인생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이데거는 1903년 졸업 후 성직으로 진출한다는 조건으로 장학금을 받고 하인리히 주조(Heinlich Suso) 김나지움에 입학할 수 있었다. 또 1909년에 마찬가지 조건이 걸린 교회의 후원을 받아 프라이부르크대학 신학부에 진학했다. 2년 뒤 그는 철학부로 옮긴다. 한때는 후설이 현상학은 ‘나와 하이데거’라고 말한 정도로 후설과 하이데거는 학문적으로 공고한 동료 관계이고 사제지간이었다. 하이데거가 현상학을 통해 존재론으로 나아가는 길을 내며 독자적 사상 영역을 드러냈을 때 둘은 결별한다. 하이데거는 사유 후반기 한 강연에서 후설의 사상, 특히 그의 『논리연구』가 자신의 사상에 미친 영향을 설명했고 이보다 훨씬 전인 1927년 출간된 자신의 주저 『존재와 시간』을 후설에게 헌정함으로써 그에 대한 존경과 감사를 표했다.

그림 11 하이데거 기념관에 전시된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른 존재자의 다양한 의미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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