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과 이스라엘 관계 1

협력 시기부터 군사적 대립까지 : 배경, 갈등, 그리고 미래 시나리오

1. 서론
 

이란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중동에서 가장 복잡하고 긴장감이 높은 관계 중 하나로 간주된다. 이 두 나라의 관계는 이스라엘 건국 초기 수십 년 동안 정치적‧안보적 협력의 성격을 띠었으나, 1979년 이란 이슬람 혁명 이후 급격히 변화하여 이데올로기적, 안보적, 군사적인 대립으로 전환되었다. 그 이후 오늘날까지, 이란과 이스라엘은 서로를 반대하는 핵심적 지역 행위자로서 지속적으로 직접적‧간접적 갈등의 중심에 놓여 있다. 이란과 이스라엘 관계가 국제정치에서 중요한 이유는, 이 두 국가 간의 어떤 직접적인 군사 충돌도 중동 지역과 세계 안보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 러시아, 중국 같은 주요 강대국의 개입, 그리고 레바논의 헤즈볼라나 팔레스타인 무장 단체들 같은 대리 세력의 역할은 이 경쟁에 새로운 차원을 부여하고 있다. 이외에도 정보전, 사이버전, 표적 암살, 이란 핵프로그램을 둘러싼 상호 위협 등은 양국 관계의 극도의 복잡성과 민감성을 드러낸다.

 

 

 이 보고서의 주요 목적은 이란과 이스라엘 관계의 역사적 흐름과 분석을 통해, 협력 시기부터 적대적 시기로의 전환 과정을 살펴보는 데 있다. 이를 위해 이데올로기적‧전략적 대립의 뿌리, 지역 및 국제 강대국의 역할, 향후 지속
적 전쟁 가능성 등을 살펴본다. 이 보고서의 핵심 질문은 다음과 같이 제기된다.     

    ① 이란과 이스라엘 갈등, 누구의 주장에 타당성이 있을까?

 이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서는 양국 간의 역사적 갈등 구조, 현재의 군사적·외교적 긴장 수준, 그리고 지역 및 국제 정치의 역학 관계를 종합적으로 분석할 필요가 있다. 특히 핵 문제, 시리아 내전 개입, 레바논 헤즈볼라와의 연계 등의 요소는 충돌 가능성을 높이는 주요 변수로 작용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전면전의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동시에 국제사회의 중재 노력과 상호 억제 전략 또한 일정 부분 갈등을 통제하고 있는 점을고려해야 한다. 필자는 이 분야의 전문가는 아니기 때문에 모든 관련 내용을본 보고서에 담지는 못했으나, 이란과 이스라엘의 현 상황을 조금이나마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고자 글을 작성하고자 한다. 

 

 2. 이스라엘 건국의 역사적 배경

 

2.1. 건국의 역사적·종교적 배경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 국가를 세우려는 사상은 유대교의 종교적 가르침과 ‘약속의 땅’으로의 귀환에 대한 믿음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근대적이고 조직적인 실현을 위한 첫 시도는 19세기 정치적 시오니즘 운동을 통해 시작되었다. 19세기 말, 유대인 언론인이자 사상가였던 테오도르 헤르츨은 『유대국가』라는 책을 출간하고, 1897년 스위스 바젤에서 제1차 시오니스트 회의를 개최함으로써 이 운동의 사상적‧정치적 토대를 확립했다. 시오니즘은 유대인을 하나의 독립된 민족으로 보고, 그들에게 독립 국가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역사적‧종교적‧문화적 연관성이 깊은 팔레스타인이 그 최적의 장소라 보았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까지, 특히 유럽 내 반유대주의 확산과 홀로코스트 발생 이후 대규모 유대인 이주가 이뤄졌고, 이는 이스라엘 건국을 위한 인구적‧사회적 기반을 형성했다.

 2.2. 식민주의와 열강의 역할

 서구 제국주의 열강, 특히 영국은 이스라엘 건국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17년 발표된 ‘밸푸어 선언’은 팔레스타인 내 유대인 국가 설립을 영국 정부가 지지한다는 내용으로, 시오니즘 목표 실현의 전환점이 되었다. 이선언이 발표될 당시, 팔레스타인은 여전히 오스만 제국의 지배하에 있었고,인구의 대다수는 아랍계 무슬림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과 오스만 제국의 붕괴 이후, 팔레스타인은 영국의 위임통치령이 되었고, 영국은 유대인 이민 확대와 영향력 강화를 실질적으로 뒷받침했다. 1947년, 유엔은 팔레스타인을 아랍 국가와 유대 국가로 분할하는 계획을 승인했지만, 아랍 국가들과 팔레스타인인들은 이를 반대했다. 마침내 1948년 5월 14일, 유대계 이민자 지도자였던 다비드 벤구리온은 이스라엘의 독립을 선언했다. 이에 대응하여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 이라크, 레바논 등의 아랍 연합군이 팔레스타인 지역을 공격했으나 패배했고, 이 전쟁은 ‘제1차 중동전쟁’ 또는 ‘제1차 아랍-이스라엘전쟁’으로 불리며 수십만 명의 팔레스타인 난민을 발생시켰고, 이후로도 분쟁은 계속되고 있다.

 2.3. 이슬람 및 아랍 국가들의 반응

 이스라엘의 건국 선언은 아랍 및 이슬람 국가들의 강력하고 일관된 반발을 불러왔다. 많은 국가들은 이스라엘의 건국을 ‘신식민주의’ 또는 ‘이슬람 영토의 점령’으로 인식했다. 초기부터 이집트의 무슬림 형제단, 팔레스타인의 무장 단체들, 아랍 지도자들은 이스라엘의 파괴를 주장했다. 이후 수십 년 동안 이스라엘은 아랍 국가들과 반복적으로 전쟁을 벌였고(1948, 1956, 1967, 1973), 이러한 전쟁은 이스라엘과 이슬람 세계 간의 갈등을 더욱 심화시켰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집트와 요르단은 이후 평화 협상에 나서 이스라엘과 평화 조약을 체결했으며, 하지만 대다수 이슬람 국가들은 수십 년 동안 이스라엘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2.4. 팔라비 왕조(1‧2대)의 이란 입장

 레자 샤 팔라비 시기 이란의 외교정책은 주로 국내 문제와 서방 및 러시아 간 세력 균형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기에, 팔레스타인 문제와 이스라엘 건국은 이란 외교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다. 하지만 무함마드 레자 팔라비 시기에는 외교정책이 서방, 특히 영국과 미국의 노선을 따르게 되었고, 1950년 이란은 터키에 이어 두 번째로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한 이슬람 국가가 되었다. 이란은 텔아비브에 공식 대사관을 두진 않았지만, 대표부를 통해 외교 관계를 유지했다. 특히 석유 수출을 포함한 에너지 분야 경제 협력과 1960년대 사바크(이란 정보기관)와 모사드(이스라엘 정보기관) 간의 정보 협력은 양국 간 전략적 밀착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였다. 이 시기 이란은 아랍-이스라엘 갈등과 팔레스타인 문제에서 일정 거리를 두었으며, 서방과의 외교적 협조를 통해 중동 내 영향력을 강화하려 했다. 이러한 노선은 서방의 환영을 받았지만, 아랍 세계와 이슬람 세계 여론에서는 비판을 받았다.

 

 3. 1979년 이슬람 혁명 이전의 이란과 이스라엘의 관계

 

이란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무함마드 레자 샤 팔라비 시대에 중동 내 비공식 전략적 관계의 대표 사례로 여겨진다. 이슬람 세계의 정치적‧종교적 압박에도 불구하고, 팔라비 2세 정부는 이스라엘과 광범위한 안보, 경제, 기술 협력을 수립하였다. 이 협력은 서방, 특히 미국의 정책을 같이 했으며, 소련의 영향력과 아랍 민족주의 운동에 대항하기 위한 목적도 포함되어 있었다.

 3.1. 안보 협력: 사바크와 모사드

 팔라비 시대 이란과 이스라엘 간 협력에서 가장 중요한 영역 중 하나는 정보‧보안 부문이었다. 이란의 정보기관인 사바크(SAVAK)는 미국 CIA의 직접적인 도움으로 창설되었고, 이스라엘 모사드(Mossad)의 경험을 통해 정치적 반대자 감시, 교육, 통제 분야에서 역량을 키웠다. 모사드는 중동 내 가장 효율적인 정보기관으로 평가받으며, 반첩보, 심문, 도청, 반정부 인사 추적등에서의 노하우를 사바크에 전수했다. 사바크와 모사드의 관계는 매우 밀접하고 체계적이며 전략적이었다. 이러한 협력은 단지 정보 분야에만 국한되지 않고,팔레스타인과 아랍계 좌파 운동을 감시하고 억제하는 데에도 반영되었다. 이란은 모사드의 정보를 통해 자국의 서부 및 남부 국경에서 활동하는 반정부세력을 감시했고, 이스라엘은 이란을 통해 아랍 세계에 침투할 수 있었다.

 3.2. 외교 및 경제 관계

 팔라비 시대 이란은 이스라엘에 공식 대사관을 두지는 않았지만, 양국은 이익대표부 및 경제·문화 사무소를 통해 외교 관계를 유지했다. 이란은 1950년이스라엘을 공식 인정한 두 번째 이슬람 국가, 이 결정은 아랍 국가들의 강한 반발을 초래했다. 경제적으로는 에너지 분야가 양국 협력의 핵심이었다.이란은 중동 최대 석유 수출국 중 하나로서, 이스라엘로 원유를 수출했으며 이스라엘의 에너지 안보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반면, 이란은 이스라엘로부터 농업 기술, 점적 관개 시스템, 통신 기반 시설 등의 기술을 도입했다. 또한 무역 및 산업 협력도 이루어졌으며, 이스라엘 기업들이 이란의 건설 및 설비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일부 이스라엘 전문가들은 이란의 교육 및 기술 기관에서 활동했다.

 3.3. 이스라엘 기술 개발에 대한 간접 지원

 1960~70년대 이란은 저가 원유 공급 및 에너지 프로젝트 투자를 통해 이스라엘의 경제‧산업 성장에 간접적으로 중요한 기여를 했다. 이란이 이스라엘에 수출한 석유 수익 중 일부는 이스라엘의 군사 및 기술 인프라 개발, 특히 에너지, 항공우주  기술 분야에 사용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비록 공식 문서는 제한적이지만, 간접적인 증거들을 통해 이스라엘이 이란과의 경제 관계를 기술 역량 향상에 활용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일부 서방 소식통에 따르면, 비공식 연구 협력— 예를 들어 정보, 핵 기술(초기 수준)관련 접촉도 양국 사이에서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비록 공식 합의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팔라비 왕조와 시오니스트 정권 간 상호 신뢰가 민감한 정보 공유의 기반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4. 이슬람 혁명 이후의 이란-이스라엘 관계

 

 1979년 이란 이슬람 혁명 이후, 이란 외교 정책에서 가장 근본적이고 초기의 변화 중 하나는 이스라엘에 대한 단호한 적대적 입장 표명과 양국 간 정치‧경제‧안보 관계의 전면 단절이었다. 혁명 이전 이란은 중동 지역에서 이스라엘과 비공식적이지만 활발한 관계를 유지해온 몇 안 되는 이슬람 국가 중 하나였으나, 혁명 이후 이스라엘과의 적대는 이슬람 공화국 체제의 이데올로기적 담론의 핵심 축으로 자리 잡았다. 이 변화는 양국 관계뿐 아니라, 중동의 세력 균형과 안보 구도 전반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4.1. 공식 관계 단절과 이데올로기적 입장

혁명 직후, 테헤란 주재 이스라엘 대표부가 폐쇄되었고, 해당 건물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대표부에 넘겨졌다. 이 상징적인 조치는 이슬람 세계 및국제사회에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즉, 이란은 이스라엘을 정당한 국가로 인정하지 않으며, 팔레스타인 해방을 외교 정책의 핵심 원칙으로 삼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것이다. 

 4.2. 이란 외교 전략의 전환

혁명 이후 이란의 외교 정책은 서방 중심 협력 노선에서 벗어나, “동도 서도아닌 독립적 노선”과 “세계 피압박 민중에 대한 지지”로 방향 전환했다. 이러한 틀 안에서 이란은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단절했을 뿐 아니라, 국제무대에서 이스라엘의 가장 강경한 반대자로 부상했다. 이란 외교 전략의 핵심 변화중 하나는, 팔레스타인 문제를 중심 의제로 삼은 것이었다. 팔라비 정권이 이스라엘 중립적인 입장을 유지했던 것과 달리, 혁명 이후 이란은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팔레스타인 및 레바논의 무장 단체들을 지원함으로써 지역 내 영향력 강화를 도모하였다. 이러한 대이스라엘 외교 전략은 점차 국가 중심의 외교에서 비국가 행위자 중심의 간접 전략으로 전환되었다.

 4.3. ‘저항축’ 형성과 반시오니즘 정책

이슬람 공화국의 반이스라엘 외교 전략의 가장 중요한 성과 중 하나는 소위 저항축(axis of resistance)의 형성이다. 이 레바논 헤즈볼라, 팔레스타인 하마스, 이슬 지하드, 예멘의 안사룰라, 이라크·시리아의 시아파 민병대 등으로 구성되며, 이스라엘의 군사적 행동에 대한 억지력을 행사하고 직접적인 대응 능력도 갖춘 조직적 구조로 발전해왔다. 이란은 이들 단체에 대해 재정적, 군사적, 이데올로기적 지원을 제공하는 중심국가로 간주된다. 특히 1990년대 이후, 헤즈볼라는 이스라엘 북부 국경에서 이란의 핵심 전략적 파트너로 자리 잡았으며, 하마스에 대한 지원은 시아파-수니파 간 종파적 차이를 넘어서 이스라엘과의 대결을 최우선 과제로 삼는 이란의 입장을 보여준다. 이란의 반시오니즘 정책은 군사 및 안보 수준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이슬람 국가들의 이스라엘과의 국교 정상화 시도에 대해 강하게 반대하였으며 동시에 이란의 언론과 문화 기관들도 반이스라엘 담론을 확산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요컨대, 이란의 대이스라엘 정책은 이데올로기적 적대, 대리 행위자 지원, 지역 반이스라엘 전선 구축이라는 세 가지 축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지난 40년간 이 전략은 양국 간 지속적인 긴장과 다양한 분야에서의 충돌을 야기해 왔다.

 

 5. 이란-이스라엘 적대의 이데올로기적 기반

 

이란과 이스라엘 간의 갈등은 단순한 정치적‧군사적 분쟁이 아니라, 깊은 이데올로기적·담론적·정체성적 충돌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슬람 혁명 이후, 시오니즘에 대한 적대와 이스라엘의 정당성 부정은 이란의 외교 정책은 물론 정치·문화 정체성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다. 반면, 이스라엘은 이란을 자국의 최대 실존적 위협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란과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공식 담론을 분석해보면, 서로를 언급할 때 사용하는 언어는 대부분 위협적인 표현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란의 공식 담론에서 이스라엘은 단지 “예루살렘 점령 정권으로 불릴 뿐만 아니라, 정치적·역사적 정당성 자체도 부정된다. 이스라엘 정부지도자들도 이란을 이스라엘 파괴를 추구하는 국가테러리즘의 후원자핵무기 개발을 시도하는 존재로 수차례 비난해 왔다. 이스라엘 총리들의 연설에서는 이란을 세계적 위협테러리즘의 본거지로 묘사하는 표현이 자주 사용된다. 주목할 점은 이러한 대립적 담론이 정치적 차원에만 머무르지 않고, 양국의 국민 정체성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란에서는 반이스라엘 정서가 혁명 원칙에 대한 충성의 한 표현으로 인식되며, 이스라엘에서는 이란에 대한 경계가 국가 안보 전략의 핵심으로 자리잡고 있다. 

 

 6. 이란의 핵 프로그램과 이스라엘의 반응

 

이란의 핵 프로그램은 이란과 이스라엘 간 긴장의 핵심 축 중 하나이다. 이스라엘은 이란의 핵 개발을 실존적 위협으로 간주하며, 이란이 핵무기를 보유하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겠다고 수차례 공언해 왔다. 반면 이란은 핵 활동의 평화적 성격을 강조하며, 이스라엘의 위협을 국제 강대국들의 이중 잣대의 결과로 비판한다. 

이란의 핵 개발은 1970년대 서방 국가들과의 협력을 통해 시작되었으나, 이슬람 혁명과 이란-이라크 전쟁 이후 일시 중단되었다. 이후 2000년대 초반, 이란은 우라늄 농축, 원심분리기 제조, 나탄즈와 포르도아라크에서의 지하 핵시설 건설 등 본격적인 핵 개발에 다시 착수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보고에 따르면, 이란은 우라늄 농축 농도를 20%를 넘겨 최대 60%까지 도달했으며, 이는 무기급 농축(90%)에 근접한 수준이다. 또한 신형 원심분리기(IR-6 등)의 수량도 증가하여 농축 속도와 정밀도가 향상되었다. 이란은 일관되게 핵 에너지의 평화적 이용 전력 생산, 방사선 의약품 개발, 과학 연구 목적으로 한다고 주장하지만, 서방 국가들과 이스라엘은 잠재적인 군사적 전용 가능성에 대해 우려를 표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이란의 핵무기 보유를 넘을 수 없는 안보적 레드라인으로 규정한다. 베냐민 네타냐후를 비롯한 이스라엘 총리들은 유엔 등 국제무대에서 반복적으로 이란의 핵 개발에 대한 경고를 발신해 왔다. 이스라엘은 단순한 언론 경고에 그치지 않고 실제 행동에도 나섰다. 그 예로는 다음과 같다:

 ” 이란의 핵과학자 암살 (예: 마수드 알리무함마디, 마지드 샤리야리, 모센 파흐리자데)

” 나탄즈 핵시설에 대한 파괴 공작

” 사이버 작전을 통한 핵시설 통제 시스템 공격

 이란이 핵무기 보유 임계점에 도달할 경우, 이스라엘 1981년 이라크 오시라크 원자로 공습 작전과 유사한 선제타격을 감행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국제원자력기구는 이란 핵 문제에 있어 중립적이고 기술 중심의 감시 역할을 맡고 있다. 이 기구의 임무는 핵 시설 감시, 농축 농도 측정, 이란의 국제 의무 이행 여부 점검 등이다. 2015년 이란 핵합의(이른바 JCPOA) 체결 당시, 이란은 국제원자력기구 사찰단에 광범위한 접근 권한을 부여했었다. 그러나 2018년 미국의 일방적 탈퇴와 이란의 단계적 의무 축소 이후, 사찰 활동은 크게 제한되었다. 이스라엘은 IAEA의 중립성과 효율성에 대해 의구심을 제기하며, 이란이 민감한 핵 활동을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이란은 IAEA는 정치적 압력 없이 기술적 기준에 따라 활동해야 한다고 맞서고 있다.

2015년 체결된 이란 핵합의는 이란과 P5+1(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중국 + 독일) 간의 합의로, 이란은 다음을 약속했다:

 ” 우라늄 농축 수준 제한

” 원심분리기 수 감축

” IAEA의 정기 사찰 수용

 그 대가로 국제사회는 경제 제재를 단계적으로 해제했다. 이 합의는 한동안 지역 긴장 완화에 기여했으나, 2018년 미국 트럼프 정부가 일방적으로 탈퇴하면서 균열이 발생했다. 이후 미국은 대규모 경제 제재를 복원했고, 이란도 2019년부터 의무 이행을 단계적으로 철회하며 농축 수준과 핵활동을 다시 확대했다. 이스라엘은 애초부터 JCPOA에 반대했으며, 이 합의가 장기적으로 이란의 핵무기 개발을 방조할 것이라 비판했다. 미국의 탈퇴 이후, 이스라엘은 더욱 강경한 노선을 취하며 ‘최대 압박 정책’을 지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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