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의 1차 서방 원정
13세기 초, 칭기즈칸은 분열되어 상쟁하던 몽골 고원의 여러 유목민 부족들을 하나로 통합하였다. 이러한 부족집단들은 ‘울루스’라는 이름으로 불렸는데 나이만, 케레이트 등 그 가운데 일부는 투르크계였다. 칭기스칸은 1206년 여러 부족들의 대표자들이 모인 회의인 쿠릴타이를 열고 몽골 고원의 모든 유목민 집단이 자신의 지배 아래 하나로 통합되었음을 선포하였다. ‘칭기즈칸’이라는 칭호도 거기서 주어졌는데 몽골어로 ‘위대한 왕’이라는 뜻이다. 그는 그 뒤로 거의 매년 하나씩 주변 부족들과 나라들을 정복해나갔다. 키르키즈, 위구르, 탕구트(서하), 카를룩 등을 굴복시켰고, 북중국에 있던 금나라와 중앙아시아의 카라 키타이, 호라즘 왕국이 그 뒤를 이었다. 칭기즈칸은 호라즘 왕국을 정복한 후 파키스탄과 트란스옥사니아를 거쳐 몽골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의 부장인 제베와 수부타이는 칭기즈칸의 허락을 받고 서쪽으로 계속 진군하였다. 이들의 진군은 사전에 수립된 계획에 따라 수행된 정복전쟁이 아니라 미지의 땅에 대한 일종의 정찰작전이었다. 제베와 수부타이의 몽골군은 이란과 이라크를 거쳐 북쪽의 카프카즈로 향했다. 카프카즈 산지에는 이슬람 국가인 아제르바이잔과 기독교 국가인 그루지야가 있었는데, 아제르바이잔은 공납을 받고 그냥 통과하였지만 그루지야는 몽골군에 합류한 무슬림 투르크족과 쿠르드족 병사들이 “기독교도들에 대한 성전”을 구실로 마구 약탈하였다. 그 후 몽골군은 카프카즈 산중 좁은 골짜기에 갇혀서 큰 위기에 봉착하였으나 적들 가운데 일부를 차지하고 있던 투르크계의 킵차크인들 — 러시아에서는 ‘폴로베츠’라 불렸다 — 에게 같은 투르크족임을 내세워 탈출할 수 있었다.
몽골 군대는 카프카즈 산맥 북쪽으로 넘어가자 이전에 자신들의 탈출에 협조해준 킵차크의 본대를 만나게 되었다. 넓은 초원에서 몽골 군대는 역량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다. 몽골군은 두 갈래로 나뉘어, 한쪽은 볼가강과 돈강 유역에서 킵차크 본진을 공격하고 다른 한쪽은 바닷길로 크림반도로 들어갔다. 크림반도에서는 제노바인들이 운영하던 부유한 무역항 수닥을 약탈하였다. 몽골군의 공격을 견디지 못한 킵차크족은 어쩔 수 없이 서쪽의 키예프로 달아났다. 키예프의 루스인들은 예전에 들어보지 못했던 무서운 적이 진군해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과 맞서 싸우기로 하였다. 이들이 병사들을 결집시키고 있을 때 몽골 사절단이 도착하였다. 사절단은 루스인들이 몽골의 적이 아니며 몽골은 단지 자신들의 노예인 킵차크를 징벌하려고 한다고 말하면서 루스인들로 하여금 킵차크족을 공격하고 그들의 재물을 약탈하라고 부추겼다. 그러나 루스인들은 이것이 속임수라고 보고 10명의 몽골 사절들을 모두 죽여버렸다.
그리하여 루스족 국가인 루시와 몽골의 충돌이 일어났다. 전투는 1223년 5월 31일 오늘날의 우크라이나 동부 칼카 강변에서 벌어졌다. 이 전투는 루시의 완전한 패배로 끝났다. 킵차크족도 루시 편에 서서 함께 싸웠지만, 전투 도중 먼저 달아나는 바람에 루시 진영은 쉽게 무너져 버렸다. 몽골군은 도망가는 루스족을 추격하였지만 오랫동안 루시 땅에 머물지 않았다. 볼가강을 거슬러 올라가 중류 지역에 있던 볼가 불가르국을 공격하여 많은 전리품을 취하고 전에 호라즘을 돕던 캉글리족도 정벌하였다.
1222년부터 1223년까지 이어진 원정은 그 경로를 볼 때 카스피해를 한 바퀴 돈 셈인데, 일부 부대는 크림반도와 드네프르 강까지 진출했기 때문에 실제로는 훨씬 더 먼 거리까지 원정을 감행했던 것이다. 이 원정에 칭기즈칸의 장자인 주치는 참여하지 않았다. 주치는 이전의 호라즘 원정 때 두 동생과 갈등을 겪고, 이탈하여 자신의 진영으로 돌아가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1222-1223년의 제1차 러시아 원정은 제베와 수부타이 두 사람이 지휘하였다.

바투의 영지
칭기즈칸은 자신이 세운 제국을 아들들에게 분할해 주었는데 본부인인 보르테에게서 태어난 아들들만이 상속의 대상이 되었다. 본부인 출생 아들들은 네 명으로서 첫째는 주치, 둘째는 차가타이, 셋째는 오고타이, 넷째는 톨루이였다. 막내아들 톨루이는 몽골 지역, 차가타이는 예전의 카라 키타이 지역, 셋째 오고타이는 이르티쉬 강 유역과 중가리아 지역 즉 시베리아 남부로부터 오늘날의 중국 신장 위구르 지역 북부에 걸친 영역을 차지하였다. 장남 주치는 새로 점령한 트란스옥사니아를 받았다. 오늘날의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이 위치한 곳이다. 아랄해로 흘러 들어가는 시르다리야강과 러시아 초원을 거쳐 남쪽으로 카스피해로 유입되는 우랄강, 아무다리야강이 흐르는 비옥한 땅이었다.
장남 주치는 이 영지에 만족해서인지 호라즘 원정 이후에는 좋아하는 사냥만 즐기면서 자신의 영지에 틀어박혀 부친이 부를 때에도 잘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칭기즈칸은 장남이 딴마음을 품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여 차가타이와 오고타이를 파견하였다. 두 사람은 주치의 본영으로 가던 중에 형의 사망 소식을 접하였다.
주치가 죽은 지 몇 개월 지나지 않아 칭기즈칸도 낙마 사고의 후유증으로 별세하였다. (1227년 8월 25일) 장남과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주치는 네 명의 부인을 두었다. 몽골 제국에 속하는 일한국에서 재상을 지낸 역사가 라시드 앗딘의 기록에 의하면 주치의 아들들은 후궁에서 난 아들까지 포함하여 40명에 달했다고 한다. 장남인 오르다와 차남인 바투가 아버지의 영지를 분할상속하였는데 오르다는 동쪽, 바투는 서쪽을 차지하였다.
바투의 영지는 루시 땅 즉 러시아와 근접해 있었다. 1235년 쿠릴타이에서는 그러한 지리적 위치를 고려하여 바투에게 유럽원정의 과업을 맡긴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바투에게는 병력이 많지 않았다. 칭기즈칸이 네 아들에게 유산을 배분할 때 병력도 배분하였는데 막내 톨루이에게는 10만 이상의 몽골군을 주었지만 주치에게는 불과 4천 명을 주었다고 한다. 이 병력으로는 원정이 어려워 그는 비몽골족을 대거 받아들였다. 그 가운데 타타르족을 비롯하여 투르크인이 많았는데 이 때문에 훗날 바투의 영지인 바투 울루스가 ‘타타르의 나라’로 불리게 되었다.
1235년 쿠릴타이에서는 바투가 유럽원정군 총사령관을 맡되 그 혼자의 힘으로는 어렵기 때문에 모든 ‘울루스’(제국을 구성하는 몽골족의 나라)가 참여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1236년부터 1242년까지 수행된 유럽원정은 흔히 ‘바투의 원정’이라고 불리기는 하지만 실은 칭기즈칸의 손자들이 대거 참여한 몽골제국 전체의 원정이었다.
제2차 서방원정
주치의 차남 바투가 물려받은 영토는 엄밀하게 경계가 확정되어 있지 않았다. 단지 “볼가강 너머 몽골군의 말발굽이 닿는 데까지”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서쪽 경계는 매우 막연해서, 정복을 통해 확실한 지배영역으로 만들어야 했다. 바투의 사촌들이 대거 참여한 이 서방 원정은 원정군이 1236년 봄 서시베리아를 출발하면서 막을 올렸다.
15만 명에 달하는 원정군이 처음 맞닥뜨린 상대는 불가리아였다. 오늘날처럼 다뉴브 강변에 있던 불가리아가 아니라 러시아 땅 볼가강 상류에 있던 불가리아였다. 명장 수부타이가 지휘하던 몽골군 우익은 이 불가리아를 공격하여 쉽게 정복하였다. 볼가 불가리아는 투르크어를 하는 유목민들이 주민의 대다수를 이루던 유목국가였다. 물론 이슬람 지역으로부터 러시아 북부로 가는 교역로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도시도 있었다. 수도인 ‘볼가’는 오늘날의 카잔에서 멀지 않은, 볼가강과 카마강의 합류 지역에 있었다고 하는데 몽골군에 의해 파괴되었다.
불가리아를 정벌한 다음 몽골군은 러시아로 들어갔다. 당시 키예프 루시인들은 여전히 각 공국 간의 내분에 빠져 있었다. 14년 전의 제1차 원정 때 몽골군에 패했던 쓰라린 기억에도 불구하고 공국들은 서로 싸우느라 몽골에 맞서 연합군을 결성하지 못했다. 몽골군은 파죽지세로 진격하였고, 모스크바 남동쪽 200km 거리에 있는 랴잔 공국, 랴잔 공국과 모스크바 사이에 있는 콜롬나 공국, 그리고 북쪽의 블라디미르 공국이 차례로 함락되었다. 당시 블라디미르 공국의 공이 대공의 지위를 갖고 있었는데 블라디미르 공국은 대공이 다스리던 수즈달과 함께 모두 함락되고 대공의 가족을 포함한 많은 주민들이 학살되었다. 1238년 2월의 일이었다.
몽골 원정군 총지휘관 바투는 일부 부대만을 이끌고 다시 발트해 연안에 위치한 상업도시 노브고로드를 향해 북진하였다. 그러나 춥던 날씨가 갑자기 따뜻해지면서 눈이 녹아 노브고로드 주변이 늪지대로 변해버렸다. 바투는 진군을 멈추고 남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돈강까지 진출한 몽골군은 돈강 부근의 스텝 지역에서 휴식을 취하며 1239년을 보냈다. 그동안의 전투에서 상실된 병력은 킵차크족에게서 징집한 인원으로 벌충하였다.
당시 몽골군 좌익은 칭기즈칸의 4남 톨루이의 장남인 몽케가 이끌었는데 몽케는 후일 4대 대칸이 되는 사람이다. 그의 부대는 남쪽의 볼가강 하류로 향했다. 카스피해 북쪽의 초원지대는 킵차크족의 영역이었는데 이 킵차크족은 쉽게 항복하지 않았다. 그들은 우두머리가 도망 다니다 잡혀 죽을 때까지 싸웠다. 일부 주민들은 산 넘고 물 건너 헝가리 평원까지 도주하였다. 4만 명에 달하는 무리가 헝가리로 갔다. 헝가리는 흑해 북안에서 예전에 자신들의 조상을 쫓아냈던 킵차크인들에게 기꺼이 피난처를 제공하였다. 그 이전에도 헝가리는 스텝 지역에서 이주해오는 소규모 유목민 집단들을 다수 받아들였는데 이때도 그러한 전례를 따른 것이었다. 헝가리 왕 벨라 4세의 입장에서도 자발적으로 헝가리 땅으로 들어와 자신을 주군으로 섬기겠다는 킵차크인들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들은 충실한 병사가 될 수 있을 것이고, 게다가 헝가리인들처럼 기독교로 개종하겠다는 약속도 하였다. 벨라 왕은 그 약속에 감동하였던지 그들을 맞기 위해 몸소 국경까지 행차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몽골군으로 하여금 헝가리를 공격할 명분을 제공하였다.
몽골군의 좌우익은 다시 하나로 합쳐서 드네프르 강변에 위치한 루시의 수도 키예프 — 현재 우크라이나에서는 ‘키이우’라고 부른다 — 를 공격하였다. 키예프는 항복하라는 요구를 거부하고 심지어는 사절까지 죽여버렸다. 몽골군의 복수는 피할 수 없어서 1240년 12월 키예프는 함락되고 주민들은 몰살되었다. 일부 키예프 지도자들이 폴란드와 헝가리로 도주하였는데 이것이 또 몽골군의 폴란드와 헝가리 침략 구실이 되었다.
키예프에서 몽골군의 일부는 계속 서진하여 폴란드의 서부에 위치한 실레지아 지방까지 진격하였다. 리그니차 전투(1241년 4월 9일)에서 실레지아 공작 하인리히의 군대는 몽골군에 참패하였으며 공작도 붙잡혀 살해되었다. 이 때 전사한 폴란드 군사들의 잘린 귀가 아홉 부대나 되었다고 한다. 남쪽 모라비아 지방도 공격을 받아 많은 곳이 폐허로 변했다.
헝가리에 대한 공격은 훨씬 더 큰 병력으로 이루어졌다. 세 방면으로 나뉘어 몽골군은 수도를 향해 진격하였는데 결전은 부다페스트가 아닌 동북쪽의 ‘무히’라는 마을 부근에서 이루어졌다. 리그니차 전투 후 불과 이틀만인 1241년 4월 11일에 벌어진 이 전투에서 벨라 왕의 군대는 바투와 수부타이가 지휘하는 몽골군에 참패하였다. 이 전투에서 태반의 병력을 잃은 벨라 왕은 서쪽 오스트리아로 도망갔다. 그런데 당시 바벤베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공 프리드리히 2세는 헝가리 왕의 곤경을 이용하여 오스트리아 영토를 확장하려는 속셈이 있었다. 그가 영토와 돈을 요구하자 벨라 왕은 더 이상 오스트리아에 있을 수 없었다. 그는 헝가리 남쪽의 크로아티아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로마 교황에게 십자군을 일으킬 것을 호소하고 또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에게는 독일의 제후군을 조직하여 헝가리를 도와달라고 호소하는 서한을 발송하였다. 물론 이러한 외교적 노력은 결실을 보지 못했다. 교황청은 기껏해야 이교도인 몽골군에 대항할 십자군을 조직하라고 군주들에게 호소할 수 있을 뿐이었는데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가 8월에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십자군도 무산되고 말았다. 당시 이탈리아에서 교황당과 싸우고 있었던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독일 왕으로 있는 아들 콘라드에게 독일 제후군을 조직하여 도와주라고 했지만 소규모 독일군도 ‘타타르 군대’가 다뉴브강에서 진격을 멈추었다는 소식에 해산하고 말았다. 12월에 몽골군은 얼어붙은 다뉴브강을 건넜다.
그런데 카단(차가타이의 아들) 휘하의 몽골군 파견대가 벨라를 잡으러 오고 있다는 정보가 벨라에게 전해졌다. 벨라는 자그레브에서 달마티아 해안 지방으로 도주하였다. 쫓고 쫓기는 작전이 개시되었는데 몽골군은 종내 벨라 왕을 사로잡지 못했다. 몽골 부대는 왕은 붙잡지 못하고, 경치 좋은 이 크로아티아의 해안을 따라 오늘날의 알바니아 국경까지 내려갔다. 몽골군은 초원이 없고 산지가 많아 초원의 전사들에게 불리한 지형인 달마티아 지방까지 온 셈인데 이곳이 몽골군이 진격한 최남단이었다. 벨라를 찾지 못한 카단 부대는 알바니아에서 발칸 반도 내륙으로 들어가 불가리아로 향했다.
몽골군은 헝가리 공격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서진하지 않았다. 물론 일부 전초부대가 독일까지 진출했지만, 본격적인 원정이라고는 할 수 없다. 다만 몽골군이 서유럽을 공격하지 않아 서유럽은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점은 확실하다. 몽골군이 서유럽 공격을 단념하고 헝가리에서 철수한 이유는 1242년 봄에 전해진 대칸 오고타이의 사망 소식 때문이었다. 오고타이 칸은 1241년 12월에 사망했는데 그 소식이 헝가리 주둔군에 이듬해 봄에야 전해졌던 것이다. 몽골족은 대칸의 계승원칙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았다. 칭기즈칸 집안의 사람들이 모여 쿠릴타이를 열고 대칸을 선출해야 하는데, 당시 상황으로 볼 때 오고타이의 장자 구육이 대칸으로 옹립될 가능성이 높았다. 오고타이 집안과 사이가 나쁜 바투의 입장에서는 원정 때문에 유럽에 머물면 정치적으로 위험하다고 판단하였을 것이다.
유럽을 상대로 원정을 계속할 이유를 찾지 못한 바투는 자신의 군대를 볼가강 하류 지역으로 이동시켰다. 볼가강 유역을 중심으로 광활하게 펼쳐진 남러시아 일대의 킵차크 초원뿐 아니라 러시아도 그의 지배하에 들어왔기 때문에 그는 이 광대한 지역을 공고히 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볼가강 하류에 수도 사라이를 건설하였다.
아드리아해의 한 섬으로 도주했던 헝가리의 벨라 왕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몽골군이 퇴각한 후 헝가리로 돌아와 열심히 요새들을 건설하였다고 한다. 평지에서는 몽골군과 싸워 이길 가망이 없지만 튼튼한 성벽을 가진 요새가 있으면 항복하지 않고 저항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곳곳에 요새를 세우기 위해서는 지방 제후들의 협조가 필요했는데, 지방 제후들만이 요새건설에 필요한 인력을 동원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벨라 왕은 제후들에게 토지를 양여하고 많은 특권을 부여하였다. 유목민의 후손인 헝가리인들은 도시생활을 반기지 않았으므로 인력이 부족해지자, 왕은 외국인들을 불러들였다. 폴란드인, 슬라브인, 루스인, 루마니아인, 심지어는 헝가리인들에 의해 몽골의 첩자로 오해받아 쫓겨났던 킵차크족까지 널리 불러들였다. 일부 학자들은 헝가리의 인종적 다양성이 이렇듯 몽골 침략의 한 결과였다고 지적한다. 군사적으로 몽골의 침략을 격퇴하지 못해 도망 다니던 수모를 겪었던 벨라 4세는 몽골의 2차 침입에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나라 곳곳에 요새를 건설하여 헝가리 ‘제2의 건국자’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벨라 왕이 이렇게 몽골의 재침에 철저히 대비하였지만 몽골군은 헝가리로 다시 오지 않았다.
킵차크 한국
몽골 제국을 구성한 여러 울루스들 가운데 가장 서쪽에 위치하여 유럽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었던 것이 킵차크 한국이다. 킵차크 한국은 앞서 살펴 본 칭기즈칸의 장남 주치의 영토 즉 ‘주치 울루스’로부터 나왔다. 1227년 주치가 죽자 칭기즈칸은 주치의 장남 오르다에게는 볼가강에서부터 발하슈 호수까지의 영역을, 차남 바투에게는 볼가강 서쪽의 영토를 영지로 주었다. 막내 샤이반은 오르다 영지의 북쪽에 있던 땅을 주었다. 바투의 영지는 서쪽 경계가 확정되어 있지 않아 바투가 정복하는 곳은 모두 그 영지에 편입되었다. 바투 울루스의 중심 지역에는 투르크 계통의 킵차크인들이 살고 있었다. 초원지대의 다른 유목민처럼 킵차크도 여러 부족들의 연합체였다. 킵차크에게 정복당한 페체네그 및 오구즈, 키멕, 카를룩 등 다양한 투르크계 유목민 집단들이 킵차크 연맹에 속해 있었다.
영어권에서는 바투의 킵차크 한국이 ‘금장한국(金帳汗國, Golden Horde)으로 알려져 있는데 중세 몽골족의 역사에 정통한 러시아 역사가 게오르기 베르낫스키에 의하면 킵차크 한국의 원래 이름은 ‘백白한국’(아크 오르다)이었다고 한다. 몽골인들에게 백색은 서쪽을 상징하였기 때문에 여러 울루스들 가운데 가장 서쪽에 위치한 킵차크 한국을 백한국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베르낫스키에 의하면, 동양의 저자들은 킵차크 한국을 ‘금장한국’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금장한국’은 15세기에 크림 한국과 카잔 한국이 킵차크 한국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이후 카잔 한국을 가리키는 명칭이었다고 한다.
킵차크 한국의 칸인 바투는 킵차크 유목민들은 직접 지배하였지만 루스족 즉 러시아에 대해서는 간접지배 방식을 취했다. 루시 즉 러시아의 공들이 조공과 세금을 거둬들이는 역할을 맡고 칸은 그들의 지위와 권력을 인정해주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통치방식에서는 러시아 공들의 협조가 반드시 필요했다. 러시아 공들 가운데에서 블라디미르 공국의 대공 야로슬라블이 1242년 처음으로 바투 진영으로 와서 충성을 맹세하고 그 지위를 승인받았다. 야로슬라블은 구육이 새로운 대칸으로 즉위할 때 몽골의 수도 카라코룸까지 가서 대칸 즉위식 행사에 참여하였다. 그는 불행히도 돌아오지 못하고 몽골에서 병사하였다. 그의 두 아들, 알렉산드르 네프스키와 안드레이도 바투에게 충성을 맹세하기 위해 사라이로 갔는데, 바투는 그들에게 몽골제국의 수도 카라코룸으로 가서 대칸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증명하라고 명했다. 구육 칸은 카라코룸까지 온 알렉산드르를 키예프 대공으로, 동생 안드레이는 블라디미르 대공으로 임명하였다. 이처럼 러시아 공들의 지위는 철저히 몽골 지배자에게 의존하고 있었다.
몽골의 지배를 인정하지 않는 자에게는 가차 없는보복이 따랐다. 블라디미르 대공 안드레이가 바투의 아들 사르탁에 대한 충성선서를 거부하자 사르탁은 즉각 블라디미르로 징벌군을 파견하였다. 안드레이는 참패하여 노브고로드를 거쳐 스웨덴으로 도주하였다. 몽골군은 그의 영지 수즈달을 무자비하게 약탈하였다. 사르탁은 블라디미르에 대한 안드레이의 통치권을 형인 알렉산드르 네프스키에게 넘겨주었다. 몇 년 뒤 알렉산드르가 새로운 칸인 울락치에게 동생을 용서해주도록 간청하여 안드레이는 다시 수즈달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후 알렉산드르와 안드레이 형제가 러시아에서의 병력징집과 세금징수에 적극적으로 나섰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알렉산드르 네프스키는 몽골에 협력하는 것만이 러시아인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보았다. 당시 서북쪽에서는 독일의 튜튼기사단과 스웨덴이 러시아를 향해 세력을 확대해오고 있었다. 몽골에 반기를 들면 결국 서쪽은 독일 기사단과 스웨덴 세력에 넘어가고 동쪽은 몽골에게로 넘어가게 될 것으로 알렉산드르는 판단했다. 서부 러시아의 갈리치아 대공 다니엘은 그와 다른 입장을 취했다. 다니엘도 처음에는 사라이로 가서 바투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충성을 맹세하였으나 마음속으로는 몽골의 지배를 벗어날 계획을 세우고 교황과 폴란드, 헝가리 등의 지원을 받기 위한 외교적 노력을 하였다. 그는 또 자신과 협정을 맺고 있던 리투아니아 대공의 지원도 기대하였다. 이러한 지원을 염두에 두고 그는 1256년 몽골에 반기를 들었다. 볼리냐에 주둔하던 몽골군을 공격하여 몰아냈지만 몽골군은 곧 볼리냐와 갈리치아를 다시 장악했고, 항복을 거부하는 몇몇 지역들을 초토화시켰다. 다니엘은 폴란드와 헝가리로 도망쳤지만, 믿었던 리투아니아인들이 오히려 볼리냐를 급습하고 자기 아들 로만 왕자를 죽이자 절망에 빠져 고향으로 돌아와 몽골의 지배에 굴복하였다.
갈리치아공 다니엘의 저항은 러시아 지배계급의 반란에 속한다. 그 외에 러시아 민중의 저항도 있었는데 원인은 무거운 세금이었다. 1262년 동부 러시아의 수즈달 지역에서 일어난 반란이 그러했다. 세금징수를 맡았던 몽골인과 러시아인이 분노한 민중에 의해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민중의 반란이 일어나자 블라디미르 대공 알렉산드르 네프스키는 입장이 매우 난처해졌다. 그는 반란이 성공할 가능성이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반란자들을 용서하도록 칸에게 청원하기 위해 사라이로 갔다. 당시 킵차크 칸은 바투의 동생 베르케(재위 1257-1266)였다. 그는 1255년 바투가 죽고 그 뒤를 이은 바투의 두 아들인 사르탁과 울락치 사후에 칸이 된 인물이다. 반란을 일으킨 자신의 동족들을 용서해달라는 알렉산드르 네프스키의 간청은 성과가 있었다. 그는 수개월 간 베르케의 본영에 머물면서 베르케로부터 수즈달에 징벌군을 파견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었다.
알렉산드르 네프스키는 귀환하는 길에 병으로 사망했는데 후일 러시아인들을 그를 성인의 반열에 올렸다. 그는 몽골의 지배라는 현실을 받아들인 타협주의자였던다. 몽골 지배자들의 앞잡이였다는 비판도 있지만, 자신의 개인적 이익이 아니라 러시아인들의 생존을 위해 현실적 선택을 했던 인물로 평가받았다.
킵차크의 베르케 칸은 최초로 이슬람으로 개종한 칸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유럽 원정에서 돌아오던 길에 부하라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그때 부하라에 온 무슬림 카라반 상인으로부터 그들의 신앙에 대해 듣고 개종하게 되었다고 한다.
몽골의 러시아 지배
러시아인들은 1240년부터 1480년경까지 몽골의 지배를 받았다. 이는 고려가 1231년부터 1360년경까지 130년간 몽골의 지배를 받은 것보다 백년 이상 긴 기간이다. 러시아인들은 이러한 몽골의 지배를 ‘타타르의 멍에’라고 부른다. 타타르는 원래는 몽골 초원지대에 살던 투르크계의 부족이었다. 7세기의 고대 투르크 비문에는 ‘13성 타타르’(오투즈 타타르)라는 표현이 등장하고, 한문사료에는 ‘구성달단(九姓韃靼)’이 기록되어 있으므로, 여러 부족들로 이루어진 족속으로 보인다. 14세기 초에 몽골족의 역사를 남긴 라시드 앗딘의 《부족지》에 의하면 당시 널리 알려져 있는 부대와 군주가 있는 타타르 종족이 6개나 되었다고 한다.
몽골사에 대한 방대한 저서를 남긴 영국의 헨리 하워드 경은 몽골 제국이 등장하기 한참 전부터 이미 타타르족은 유럽인들에게 그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러시아인들이 몽골족과 그 지배하에 있던 투르크족을 통칭하여 타타르족이라 부르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러시아인들은 바투 원정군 가운데서 타타르족의 부대를 먼저 접하고 몽골족을 모두 타타르라 부르게 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몽골은 러시아 땅을 정복한 후 바로 인구조사를 실시하였다. 인구조사는 병사를 징집하고 세금을 거두기 위해서는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행정 조치였다. 칸은 러시아 공들에게 ‘야를릭’이라는 임명장을 수여하였는데 러시아 공들이 칸의 신임을 잃으면 언제라도 야를릭을 회수할 수 있었다. 자신들의 지위를 몽골 칸에게 의존하게 된 공들은 인구조사에 적극 협조하였다. 앞에서도 언급한 알렉산드르 네프스키는 당시 러시아의 대표 역할을 맡고 있었는데, 노보고로드 시민들이 인구조사를 거부하고 소요를 일으키자 그들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몽골 관헌에 의한 인구조사가 차질 없이 이루어지도록 조치하였다.
몽골 당국은 주민의 수를 집계하여 해당 지역의 징집 가능자 수를 확정하였다. 징집 단위로 십호, 백호, 천호, 만호 등이 있었는데 십호는 열 명의 병사를 제공해야 하는 단위이고 천호는 천 명의 병사를 제공해야 하는 단위였다. 몽골 제국은 러시아 남성 인구의 10%를 병사로 요구하였다. 여성을 포함하면 전체 인구의 5%를 병사로 요구한 셈인데 그렇다면 1만 명의 병력을 제공해야 하는 만호는 주민수가 20만 명 정도였을 것이다.
베르낫스키에 의하면 만호는 서부 러시아에 16개, 동부 러시아에 27개가 있었다고 한다. 블라디미르 대공국의 경우 무려 15개의 만호가 설치되어 있었을 만큼 큰 공국이었다. 물론 만호가 설치되지 않은 곳도 있었는데 교회영지는 말할 것도 없고 노보고로드와 프스코프 같은 특권도시 및 툴라와 같은 칭기즈칸 가의 직할영지 등이 그러하였다.
몽골의 지휘관들은 천호장과 만호장에 임명되었다. 베르낫스키에 의하면 이들 지휘관들 즉 ‘바스칵’ 밑에는 징세감독관인 다루가치가 배속되었다. 다루가치는 인구조사를 실시하고 병사를 징집하며 또 역참(얌)을 설치하고 세금을 거둬 중앙으로 보냈다. 바스칵은 지방의 요지에 몽골 및 투르크족 병사들로 이루어진 부대를 유지하였다. 러시아 공들은 바스칵의 군대만으로는 소요나 반란을 진압하기 어려울 경우, 자신들 휘하의 부대를 동원하여 바스칵을 지원해야 하였다.
몽골은 러시아 주민들에게 다양한 세금을 부과하였다. 가장 주된 세금은 십일세로, 농산물과 가축의 10%를 거두는 세금이었다. 그 외에도 토지에 부과되는 ‘쟁기세’, 역참을 유지하기 위한 ‘역참세’, 군역 대신 부과하는 ‘군인세’ 등이 있었다. 또 왕족의 노예 신분에 해당하는 사람들에게는 노예노동을 면제하는 대신 부과하는 ‘면역세’도 있었다. 러시아인들은 칸들과 그 사절들이 여행을 할 때 그들에게 음식과 말의 사료, 운송용 말과 마차도 제공해야 하였다. 도시의 주민들에게는 또 ‘탐가’라는 현물세도 부과하였는데 탐가는 납세필증에 찍는 도장을 지칭하는 말에서 온 것이다. 도시 수공업자들에게는 영업세도 부과되었으며 도시민에 대한 인두세도 징수되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고 한다.
13세기 말과 14세기 초 사이에 러시아에서는 몽골 지배 체제에 중대한 변화가 발생하였다. 바스칵들은 소환되고 러시아 공들이 세금 징수와 공물 납부의 책임을 맡게 된 것이다. 하급 세리들은 공들이 직접 임명하였다. 러시아를 대표하게 된 모스크바 대공은 사라이에 있는 최고 다루가치와 협상하여 칸에게 바쳐야 할 상납금을 정하였다. 그 액수를 상회하는 세금수입은 모스크바 대공의 금고로 들어갔다. 시간이 흐르면서 탐가와 역참세 등은 칸에게 가지 않고 대공의 차지가 되었다. 금장한국 내에서 칸 자리를 놓고 벌어진 몽골 지배층 내의 권력투쟁으로 인해 1360-70년대에는 정치적으로 큰 혼란이 초래되었는데 이 기간에 대공의 상납액은 크게 낮아졌다. 모스크바 공국이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결국 이러한 몽골 통치체제 내에서 모스크바 대공(명목상으로는 블라디미르 대공)이 차지하였던 징세대리인으로서의 역할이 크게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