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세기 초에 급속히 부상하여 유라시아 초원을 제패한 몽골은 한국사와도 관련이 깊다. 칭기즈칸이 살았던 시기에 몽골과의 공식적인 접촉이 시작되어 고려는 한 세기 동안 몽골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국사책들을 보면 고려가 몽골에 항복한 1259년(고종 46)부터 공민왕이 몽골이 직접 지배한 영역인 쌍성총관부를 수복한 1356년까지 97년간을 ‘몽골간섭기’라고 한다. 몽골 즉 원나라가 고려의 통치에 간섭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왕이 등극할 때마다 고려가 원나라 황제의 승인을 받아야 하였으며 원나라가 마음에 들지 않는 고려 왕을 폐위시키거나 유배시키는 일도 여러 번 일어났다는 점 등에서 볼 때 고려는 몽골의 제후국이었다. 고려는 황제국이 쓰는 용어를 사용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고려는 몽골제국이 정복된 나라에 요구한 여러 요구들 — 이를 일반적으로 여섯 가지 요구라고 하여 ‘육사六事’라 한다 –을 받아들여야 하였다. 고려는 원나라의 ‘간접적인’ 지배를 받았던 것이다. 물론 고려의 통치체제는 유지되었지만 원나라의 간접적인 지배방식도 지배의 한 형태인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몽골과의 첫 접촉과 항복
몽골과 고려의 첫 접촉은 공동의 적을 대상으로 한 연합작전이었다. 1214년 금나라가 칭기즈칸 군대의 공격으로 존망의 위기에 처하자 금나라의 지배하에 있던 거란족의 한 집단이 요나라의 부흥을 내세우며 몽골군과 싸우다 고려 땅으로 들어왔다. 고려의 북쪽 지역을 유린하던 이 거란족을 진압하기 위해 고려 군대가 출동하자 이들은 평양에서 멀지 않은 강동성으로 들어갔다. 이들을 추격해온 몽골군과 고려군의 연합작전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한 달 정도의 공격으로 강동성을 함락한 양국은 형제맹약을 체결하였다. 1219년의 일이었다. 형제관계를 맺었다고는 하지만 몽골은 그후로 고려를 매우 난폭하게 대했다. 고려는 몽골 사신이 오면 수달피나 비단 등을 선물로 주었는데 한번은 몽골 사신이 고려가 보내온 명주가 질이 나쁘다고 불평하며 고려 임금 앞에서 땅에다 내팽개친 일도 있었다. 몽골은 강자가 약자를 마구 대하듯이 고려를 대한 것이다.
몽골과의 첫 접촉 당시 고려를 상대한 것은 만주 지역을 지배하던 칭기즈칸의 막내동생 웃치긴이다. 당시 웃치긴이 보낸 사절은 저구유(저고여, 著古與)라는 인물이었는데 저고여는 몇 년 뒤인 1225년 다시 고려로 와서 공물을 받아서 돌아갔는데 압록강의 국경 근처에서 정체불명의 괴한들에게 공격을 받고 피살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웃치긴은 고려의 소행으로 단정하여 당장 고려를 공격하려고 하였으나 당시 몽골군은 서하 원정을 앞두고 있어 고려 침공은 수년 동안 미루어졌다.
칭기즈칸이 죽고 난 후 대칸의 자리에 오른 태종 오고타이는 1231년 살리타이로 하여금 30만의 군대를 이끌고 고려를 침략하게 하였다. 몽골군은 순식간에 압록강을 넘어 파죽지세로 남진하여 개경을 포위하였다. 고려는 항복하였다. 당시 임금 고종은 허수아비나 다름없었고 실권은 무신인 최우에게 있었다. 최우는 앞으로 있을 몽골의 침략에 대비하여 강화도로 천도를 결정하였다. 무신정권은 몽골에 대한 항전을 택한 것이다. 그러자 몽골은 곧 군대를 파견하여 2차 침략을 하였는데 침략군 사령관인 살리타가 전사하자 퇴각하였다.
이후 몽골은 여러 차례 더 고려를 공격하였다. 강화도에 웅거한 고려 무신정권은 강화를 제의하고 질자를 몽골로 파견하는 등 항복할 것처럼 했지만 강화도를 나와 고려 왕이 몽골에 가서 정식으로 항복한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1257년부터는 몽골군이 함선을 동원하여 강화도를 공격하기 시작하였으나 강화도는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
1258년 최씨 정권이 붕괴되고 고려 내에서도 항복하고 몽골과의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강화론이 힘을 얻게 되었다. 몽골도 고려 왕이 직접 몽골 조정으로 와서 황제를 만나 항복식을 치르는 대신 왕태자가 오는 것도 용납하겠다고 양보의 태도를 보였다. 그러자 고려는 고종의 아들인 왕태자 왕전王倎을 몽골로 파견하였다. 1259년 4월 왕전은 당시 남송 원정을 위해 이동 중이던 몽골의 몽케 대칸(헌종)을 만나러 중국으로 향했다. 그는 서역으로 가는 길목에 있던 육반산六盤山 근처에 이르렀을 때 몽케 대칸이 서거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강남에서 남송 원정 선봉대를 지휘하고 있던 몽케의 동생 쿠빌라이도 군대를 돌려 북상하고 있었다. 머뭇거리면 대칸의 자리가 막내 동생 아릭부케에게 넘어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대칸 계승을 놓고 쿠빌라이와 아릭부케 두 형제 사이에 내전이 일어날 수도 있는 시점이었다. 고려의 왕태자 왕전은 두 사람 가운데 어느 쪽을 찾아가야 하는지 당혹스러웠을 터인데 우연인지 북상하던 쿠빌라이를 개봉 근처에서 만났다. 그런데 자신의 부왕 고종 임금이 승하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져 왕전은 1260년 3월 쿠빌라이의 대칸 추대를 위한 쿠릴타이에도 참석하지 않고 곧 귀국하였다.
쿠빌라이는 대칸의 자격으로서 태자를 고려 왕으로 책봉하였다. 그는 아릭부케와의 내전에 대비하여 고려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일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쿠빌라이는 고려의 왕태자가 먼 길을 와서 자신에게 귀부하러 왔다고 하면서 고려에게 유화책을 제시하였다.
쿠빌라이는 귀국한 고려의 새로운 임금 즉 원종元宗이 신속의 조건으로 요구한 조건들 즉 고려에 주둔하고 있는 몽골 군대와 징세관(다루가치)를 철수시키라는 요구 등을 모두 들어주었다. 그러나 곧 쿠빌라이는 속국인 고려에 대한 요구를 문서로 보내왔다. 1) 질자를 보낼 것(납질納質), 2) 호구조사를 하고 그 결과를 보낼 것(적민籍民), 3) 역참을 설치할 것(치역置驛) , 4) 필요한 경우 몽골에 군사 지원을 할 것(조군助軍), 5) 식량을 보낼 것(수량輸糧) 등을 요구하였다. 뒤이어 전에 불러들였던 다루가치도 다시 받아들이라는 요구도 추가하였다. 이러한 여섯 가지 요구들은 몽골제국이 피정복 주민들에게 일반적으로 한 요구들인데 육사六事라 하였다. 고려는 이러한 육사를 모두 받아들여야 하였다.
부마국이 된 고려
원종은 무신들을 완전히 지배하지 못해 1269년 일시적으로 폐위되는 신세를 겪었다. 원나라에 숙위(케식)로 가 있던 태자 심은 고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 소식을 들었다. 그는 오던 길을 되돌아가 쿠빌라이에게 군대와 통혼을 요청하였다. 쿠빌라이에게서 군대를 받은 왕심은 개경으로 가서 부왕인 원종의 복위를 명하는 쿠빌라이의 친서를 내밀었다. 그리하여 원종은 간단히 복위되어 강화도에서 나가 개경으로 환도할 것을 명하였다. 무신정권의 우두머리인 임유무가 피살되고 개경환도는 실현되었다. 물론 무신정권도 무너졌다. 1270년의 일이다.
쿠빌라이의 도움으로 왕위를 되찾은 원종은 원나라로 가서 감사를 표하고 통혼을 추진하였다. 태자 심諶을 원나라 황실에 장가보내려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심은 이미 1남 2녀를 둔 유부남이었다. 원종은 확답을 얻지 못한 채 귀국한 후 다시 사신을 보내 혼인을 요청하였다. 청혼 4년만인 1274년 드디어 혼인이 허락되어 태자 심은 쿠빌라이의 딸 쿠틀룩켈미쉬 공주(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와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 다음 달에 부왕인 원종이 사망하자 쿠빌라이의 책봉을 받고 왕위에 올랐다. 충자 돌림의 첫 번째 왕인 충렬왕(재위 1275-1308)이다. 충렬왕의 통혼 이후 많은 고려 왕들이 몽골 공주와 혼인하였는데 고려는 충렬왕 이후 원나라의 부마국이 된 것이다. 몽골 공주와 혼인한 충렬왕의 지위는 높아졌다. 신하들이 황제의 사위가 된 왕을 업신여길 수 없게 된 것이다.
원나라 황제는 고려의 국왕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지 폐위시키고 새로운 사람을 왕위에 올렸다. 충렬왕이 제국대장공주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인 충선왕이 그러한 쓰라린 경험을 한 사람이다. 그는 쿠빌라이의 외손자로서 두 살에 세자로 책봉되고 다섯 살에 원나라로 보내져 그곳에서 자랐다. 쿠빌라이도 막내딸이 낳은 이 외손자를 대단히 귀여워하였다. 충선왕은 1298년 부왕 충렬왕이 정치에 흥미를 잃고 양위하자 23세의 나이로 왕이 되었다. 그 역시 부친과 마찬가지로 몽골 공주인 계국대장공주薊國大長公主와 결혼하였다. 물론 정략결혼이었다.
충선왕은 계국대장공주와 혼인하기 이전에 여러 명의 고려 여인들을 부인으로 거느렸다. 그 가운데 조인규의 딸인 조비를 총애하였는데 이 때문에 계국대장공주와 충선왕의 부부관계는 나빠졌다. 계국대장공주는 원나라 황실 — 그녀의 삼촌이 원나라 성종이다 — 에 서한을 보내 불만을 토로하였다. 고려사에는 원나라 사신이 황제의 명으로 왕의 인장을 빼앗아 태상왕(충렬왕)에게 주어 충렬왕이 다시 왕위에 복위하였다고 간단하게 기록하고 있다. 왕위에서 쫓겨난 충선왕은 원나라로 가서 10년간 숙위宿衛를 하였다. 숙위는 황실에서 황실을 지키는 근위병 역할과 더불어 황제의 심부름을 하는 젊은이들을 말한다. 몽골어로는 ‘케식’이라 하는데 왕실 자제나 유력한 귀족의 자식들이 맡는 영예로운 직책이었다. 고려의 젊은이가 케식으로 몽골의황실에 가면 숙식과 교육을 함께 하는 몽골의 왕자들과 자연히 친해진다. 충선왕 역시 이러한 케식으로 10년이나 원나라에 있으면서 몽골의 왕자들과 친해졌다. 자신이 친한 사람 — 원나라 3대 황제가 된 카이산 즉 무종武宗 — 을 황제로 옹립하는 일에 적극 가담하는 등 황실의 권력투쟁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충선왕은 부왕 충렬왕이 죽자 1308년 원나라에서 돌아와 다시 고려 왕위에 복귀하였다.
원나라에 책봉을 의지하였던 고려 국왕의 지위가 얼마나 취약했던 지를 드러내주는 사건이 하나 있다. 충혜왕 정禎은 충선왕의 손자로서 충자로 시작하는 네 번째 왕이다. 그는 신하들의 딸과 부인들에게도 손을 대고 심지어 자기 부친의 후비까지 손댈 정도였다. 충혜왕의 방탕한 행각에 대해 여러 사람들이 원나라에 상소하기도 하고 당시 재상이었던 조적처럼 충혜왕을 제거하고 다른 인물을 왕으로 앉히려 한 사람들도 하였다. 그러나 조적은 충혜왕과의 대결에서 패하고 말았다.
조적의 난은 곧 원나라에 알려졌다. 원나라에서는 재판관인 단사관斷事官을 파견하여 사태를 조사하였다. 충혜왕은 원나라로 잡혀가 투옥되었다. 그런데 충혜왕에게 적대적이었던 원나라의 실권자 바얀이 실각하자 충혜왕은 고려로 돌아올 수 있었다. 고려로 돌아간 충혜왕은 이번에도 정신을 못 차렸는지 황음무도의 행각을 계속하다 기철을 비롯한 일부 사람들의 강력한 비판에 직면하였다. 기철은 원나라 황제 혜종의 매부 즉 기황후의 오빠였던 그는 친원파의 우두머리격인 인물이었는데 충혜왕을 비판하면서 아예 고려를 원나라의 한 지방(省)으로 만들어달라는 청원을 하였다. 이것이 소위 ‘입성론入省論’이다. 원나라는 입성론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충혜왕은 그대로 두지 않았다. 파견된 원나라 사신들은 충혜왕을 붙잡아 구타하고 원으로 압송하였다. 그는 즉각 티베트로 유배형에 처해졌는데 유배지로 가는 도중 30세의 나이로 급사하였다. 그의 사망 소식을 들은 고려 백성들 중에는 만세를 부르는 자들도 있었다고 고려사절요에 전한다.
정동행성征東行省
쿠빌라이 황제는 1260년 고려를 지배에 넣은 후 남송에 대한 공격을 계속하였다. 남송을 고립시키기 위한 전략의 일환으로 쿠빌라이는 남송과 교역이 빈번한 일본 원정을 계획하고 고려에 병선 건조와 병력파견을 요청하였다. 고려는 일본 원정에 가담하는 것을 꺼렸지만 원나라의 압박에 못 이겨 900척의 선박을 건조하였다. 고려는 1만 5,000명의 병력을 지원하였는데 1274년의 제1차 일본 원정은 태풍을 만나 실패하였다. 남송이 44년간의 전쟁 끝에 애산 전투를 마지막으로 멸망한 2년 후인 1281년 제2차 일본 원정에는 1차 원정 때보다 배로 많은 고려군이 동원되었으나 이번에도 일본원정은 태풍으로 실패로 돌아갔다.
정동행성은 이 시기에 일본 원정을 위해 설치된 기구였다.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의 준말이다. 동쪽을 정벌하는 행중서성이라는 뜻인데 행중서성은 원나라가 설치한 지방 행정기구였다. 모두 11개로 그 가운데 요동 지역에 설치된 요양행성과 더불어 정동행성은 고려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정동행성은 원래는 제2차 일본 원정 직전 요동행성의 요양에 설치되었다가 1281년 몽골군이 고려로 들어오면서 같이 왔다. 일본 원정이 실패로 돌아가자 일본 원정이라는 군사적 역할은 없어지고 고려에 대한 감시 및 간섭을 위한 기관이 되었다. 원은 충렬왕을 정동행성의 책임자인 정동행성 승상으로 임명하였다. 이후 고려 왕은 정동행성 책임자 역할을 겸하게 되었다.
그러나 충혜왕과 그 두 어린 아들 즉 충목왕(재위 1344-1349)과 충정왕(재위 1349-1352)이 왕으로 있던 시기에 고려 왕권은 크게 약화되었다. 고려를 원나라에 속한 하나의 행성으로 만들고 고려의 왕권을 폐지하려는 시도가 벌어진 것이다. 소위 ‘입성책동’이다. 여러 차례에 걸쳐 벌어진 이 책동을 원나라는 결국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정동행성 승상으로서의 고려 국왕은 정동행성에 대한 실질적 지배권을 상실하였다. 입성론자의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인 기황후의 오라비 기철은 ‘섭행정동성사攝行征東省事’가 되어 정동행성을 실질적으로 지배하였다. 이후 정동행성은 고려의 반왕 세력 집합소가 되어버렸다.
몽골은 정동행성 설치 이전에 고려의 동북면 지역을 직접 통치하는 기관을 세웠다. ‘쌍성총관부’가 그것이다. 여몽전쟁말기인 1258년 조휘와 탁청이 몽골군에 항복하면서 몽골이 오늘날의 함경남도 일대를 몽골의 영토로 편입하여 직접 통치하였다. 초대 총관으로는 조휘가 임명되었으며 탁청은 천호장에 임명되었다. 쌍성총관부의 수도는 화주和州에 두었는데 오늘날의 원산시 북쪽 지역이다. 몽골은 조휘의 후손들을 대대로 쌍성총관으로 임명하고 탁청의 후손들에게는 천호장을 맡겼다.
쌍성총관부와 비슷한 것이 동녕부東寧府인데 쌍성총관부처럼 서북면병마사의밑의 하급관원이던 최탄 등이 반란을 일으키고 서경과 주변의 54개 성들을 원나라에 바치고 항복함으로써 생겨났다. 최탄은 동녕총관으로 임명되었는데 이 지역을 요양행성에 소속시켰다. 1290년에는 고려의 요구로 이 지역은 다시 고려로 넘어왔지만 동녕총관부 자체는 요동지역으로 옮겨 고려를 감시하는 역할을 하게 만들었다.
원나라의 쇠퇴와 고려의 독립
원나라의 마지막 황제는 토곤테무르(재위 1333-1370)이다. 명나라에서는 순제順帝라 하였지만 원나라 정식 시호로는 혜종惠宗이다. 어린 아홉 살의 나이에 어른들의 권력다툼 즉 대칸계승권을 놓고 일어난 분쟁으로 인해 고려의 대청도로 귀양을 왔다가 다시 광서로 이배되었던 인물이다. 운좋게도 13세의 나이로 대칸 즉 원나라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고려 여인을 첩으로 삼았다가 후일 황후로 만들었다. 기황후이다. 당시에는 홍수로 대규모 치수사업이 불가피하였다. 운하를 정비하고 둑을 쌓는 일에 농민들이 대거 동원되었다. 또 재정이 어려워지자 그는 염세를 대거 인상했는데 이로 인하야 민중들 사이에서 불만이 높아지고 소금밀수가 성행하였다. 1348년 소금 장수들의 반란을 계기로 원나라는 다양한 민중반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해적두목 방국진의 해상반란으로부터 양주 지역의 소금장수 장사성의 반란 그리고 백련교도들의 반란이 줄줄이 일어났는데 지배층 내에 내분이 일어났던 원나라는 이를 진압할 수 없었다. 1368년 혜종은 반란군이 가까이 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대도를 버리고 북쪽 내몽골 지역의 상도로 도망쳤다. 그러나 그곳도 주원장의 군대에 함락되고 원나라는 멸망하였다.
공민왕(재위 1352-1374)은 이렇게 원나라의 쇠퇴기에 왕이 되었다. 앞에서 언급한 황음무도한 왕 충혜왕의 동복동생이었지만 형과는 자질이 다른 사람이었다. 그 역시 몽골 공주와 결혼하였지만 원나라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정책을 펼쳤다. 그가 즉위한 후 얼마되지 않아 원나라는 강남에서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지원군을 고려에 요청하였다. 고려 왕조가 피폐해 있었지만 거절할 수 없어 최영을 비롯한 장군들에게 2천 명의 병력을 주어 원정에 나서도록 하였다. ‘고려종정군高麗從征軍’이라는 이름의 이 부대는 1354년 7월부터 2년 정도 원나라 땅에서 고우성 전투를 비롯하여 20여 회에 걸친 전투를 하였다. 반란군을 진압하는 데 실패하였지만 고려원정군은 원나라의 취약함을 목도하였다. 공민왕은 원정부대의 보고를 토대로 반원정책을 시행하였다. 먼저 기철 등의 친원세력을 숙청한 후 원나라의 간섭기구인 정동행성을 폐지하였다. 그리고 쌍성총관부가 관할하던 땅을 되찾기 위해 군대를 동원,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였다. 당시 이성계의 부친 이자춘과 아들 이성계가 고려에 내응하여 쌍성총관부 공격은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공민왕은 더 나아가 압록강 너머 원나라의 8참을 공격하도록 하여 그 가운데 3참을 정복하였다. 이것이 최초의 요동정벌이었다. 공민왕은 또 원나라 관제를 폐지하고 원나라의 연호 사용도 중단하였다. 혜종의 연호로 오랫동안 사용되어온 ‘지정至正’(1341-1367)은 이제 사용되지 않고 ‘북원北元’으로 표기하였다. 북원은 고려가 원나라를 부르는 새로운 명칭으로 고려가 일방적으로 만든 연호인 셈이다. 북원의 황제 혜종은 명나라에 쫓겨 상도를 거쳐 응창으로 피신했다가 그곳에서 병사하고 말았다.(1370) 기황후 아들로서 황태자였던 아유시리다라 칸(昭宗)은 몽골로 들어가서 원나라의 중흥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요동지역의 요동행성을 다스리던 평장平章 유익이 명나라에 항복하였다. 북원의 군벌 나하추가 원나라의 잔존세력을 모아 만주의 지배자가 되어 신흥 명나라에 빼앗겼던 요동을 회복하려고 고려에 합동작전을 요청하였다. 고려가 병력파견을 꺼리자 나하추는 여러 차례에 걸쳐 고려에 사신을 파견하여 고려를 설득하려 하였다. 그러나 명은 여진족을 공격하여 여진과 나하추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더 나아가 1387년 20만의 군대를 파견하여 나하추를 굴복시켰다. 그리하여 몽골로 후퇴하였던 북원이 고려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군사적 기반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웃치긴 왕가의 마지막 인물 요왕遼王 아자스리도 나하추가 항복하자 자신의 속신들고 함께 명나라에 투항하였다. 그는 항복의 대가로 명나라로부터 태녕위지휘사의 직책을 받고 흥안령 동쪽에 있는 가문의 영지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몽골제국의 호족이었던 이성계 일가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 일가는 쌍성총관부 회복 전에는 고려가 아니라 원나라에 속한 사람이었다. 이성계의 고조부되는 이안사(李安社: ?-1274)는 세종임금의 육대 조상들인 육조六祖 가운데 첫 번째 인물로서 목조穆祖로 추존되었다. 그는 원래는 전주 사람이지만 산성별감과 한 기녀를 놓고 다투는 바람에 삼척(당시에는 강릉도 삼척현)으로 이주를 하였다. 《태조실록》에 의하면 170여 호나 그를 따라갔다 하니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 상당한 재산과 영향력이 있는 호족이었다. 전에 전주에서 싸웠던 산성별감이 또 그쪽으로 발령이 나서 오니 목조는 이번에는 동북면의 의주宜州로 이주하였다. 오늘날의 함경시 원산 지역이다. 후일 이곳은 쌍성총관부의 지배로 들어가는 곳인데 목조가 이주한 시기에는 아직 고려의 영토였다. 그는 의주를 지키는 의주병마사로 임명되어 곧 원나라의 공격을 막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싸움은 하지 않고 몽골의 회유공작이 먹혀 목조는 몽골에 투항하여 몽골 백성이 되었다.(1254) 그는 곧 두만강변으로 이주하였는데 몽케 칸으로부터 오동천호斡東千戶에 임명되었다. 오동은 함경북도 경흥 맞은편 두만강 너머 지역으로 오늘날 조선족들이 많이 사는 옌지 지역으로 추정된다. 그는 천호와 함께 다루가치 직책도 받았는데 고려에 접한 만주 일대를 통치하는 옷치긴 울루스의 고위 관원이 된 것이다.
천호 직책은 몽골제국에서는 별다른 잘못이 없는 한 대대손손 상속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 아들 익조 이행리, 도조 이춘, 환조 이자춘 모두 몽골 제국의 천호였다. 이행리의 경우 여몽연합군이 일본원정을 할 때 그 일원으로 고려에 와서 충렬왕을 만나기까지 하였다. 그때 자신의 부친 이안사가 몽골에 항복한 것에 대해 사과를 하였다. 충렬왕도 곤궁한 처지를 벗어나기 위한 행동으로 고려를 배반한 것을 아닌 것으로 양해하였다.
몽골제국과 이씨 가문의 관계를 연구한 윤은숙 교수에 의하면 이행리는 다른 천호들과의 불화로 오동을 떠나 1290년 쌍성총관부의 등주(登州 : 오늘날의 안변)로 이주했는데 이때 오동에 살던 많은 민호들이 뒤따라 남하애 함흥 평야 일대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이행리는 이들 고려군민을 관할하는 천호 및 다루가치가 되었다. 이성계의 조부 이춘과 부친 이자춘 역시 이 관직을 세습하였다. 이자춘은 형이 일찍 죽고 조카 이천계가 어린 터라 천호직을 자신이 승계하였다. 원래는 조카에게 천호직과 다루가치직을 이천계가 성인이 되면 돌려주기로 하였으나 약속을 어긴 것이다.

당시 공민왕은 반원정책의 일환으로 쌍성총관부 지역을 되찾으려 하였다. 쌍성총관부의 우두머리 즉 총관직은 앞에서 말한 대로 조휘의 후손들이 대대손손 차지하고 있었다. 이자춘 당시 총관은 조소생이었는데 그는 이자춘과 사이가 나빴다. 이자춘이 쌍성총관부에 살던 고려인들 사이에서 영향력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자춘은 1355년 개경으로 공민왕을 몰래 찾아가 고려에 투항할 뜻을 비쳤다. 이자춘의 내응을 약속받은 공민왕은 곧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그 지역을 회복하였다. 이자춘이 자신의 병력을 이끌고 고려의 공격에 가담했던 것은 물론이다. 이자춘은 그 공으로 종3품의 사복경司僕卿이라는 직책을 받고 개경으로 이사하였다. 몽골 이름 울루스부카 이자춘은 외국인의 신분에서 고려인이 된 것이다. 이자춘은 계속해서 높은 관직을 받았는데 그 가운데 삭방 도만호 겸 병마사는 쌍성총관부 지역을 총괄하는 무관직이었다. 그 아들 이성계는 당시 20대 초반이었는데 부친이 병마사 직책을 받자 그 충성을 담보하기 위한 질자로 개경에 보내졌다. 기인其人 혹은 질자라 하는 것은 감옥에서 생활하는 인질이 아니다. 높은 신분의 자제들인 이들은 왕궁에서 생활하였다. 젊은 이성계는 기인 시절 개성에서 공민왕과 친분을 쌓았다. 이자춘이 1361년 죽자 그 직위는 장남 이원계가 아니라 차남인 이성계가 차지하게 되는데 이는 공민왕과의 친밀한 관계 때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성계는 곧 무인으로서의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었다. 1364년 동북면병마사로 임명된 이성계는 옛 쌍성총관부 땅을 다시 차지하기 위해 침입한 몽골의 나하추 군대를 격파하여 명성을 떨쳤다. 그리고 그로부터 몇 년 후인 1370년에는 1만 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가 원나라의 남은 무리들이 웅거하고 있던 동녕부의 본거지 요동성을 함락시켰다. 이성계의 요동성 공략은 중국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졌을 정도이니 고려에서 그의 인기는 대단하였을 것이다. 10년 후에는 고려를 침입한 왜구를 상대로 남원의 운봉에서 대승을 거두어 (1380년 황산대첩) 국가적 영웅이 되었다. 원나라의 직할령인 쌍성총관부 출신 이성계가 고려의 영웅으로 부상하고 결국 조선을 세울 수 있었던 데에는 무장으로서의 이러한 공적이 뒷받침되었던 것은 물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