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림 한국과 타타르
러시아를 지배한 몽골의 금장한국(킵차크 한국)은 15세기에 들어서 그 지배층의 내분으로 분열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 결과 오늘날의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과 크림반도를 차지한 크림 한국, 볼가강 중류의 카잔 한국, 볼가강 하류의 아스트라한 한국, 시베리아 지역의 시비르 한국 등 여러 나라가 생겨났다. 영토가 크게 줄어든 사라이의 금장한국 본가는 1502년 크림 한국에 의해 합병되어 버렸다. 이 나라들은 모두 칭기즈칸의 후손들이 세운 나라들이다. 모스크바 대공국은 이들 사이의 반목을 이용하여 세력을 키워갔다. 그리하여 모스크바 대공 이반 3세는 1480년 더 이상 몽골에 조공을 바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는데 칭기즈칸 후손들은 이를 막을 수 없었다. 일반적으로 역사가들은 이 해를 몽골의 러시아 지배가 종식된 시점으로 본다.
몽골의 지배를 러시아인들은 ‘타타르의 멍에’라고 부른다. 원래 타타르는 칭기즈칸 시기 몽골 초원에서 살던 투르크계 족속이었다. 7세기 고대 투르크 비문에는 ‘13성 타타르’(오투즈 타타르)가 나오고 한문사료에는 ‘구성달단九姓韃靼’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서 여러 부족집단들의 연맹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4세기 초 몽골족의 역사를 쓴 라시드 앗딘에 의하면 당시 널리 알려져 있는 부대와 군주를 가진 타타르 부족만 6개였다고 한다. 타타르족은 칭기즈칸의 증조부였던 알탄 칸의 시대부터 몽골족의 철천지 원수였다. 칭기즈칸도 이들과 전쟁을 했던 것은 물론이고 이들에 대한 적개심이 어찌나 강했던지 아녀자 심지어는 임신한 여자들까지도 모두 죽이라는 칙령을 내릴 정도였다. 이러한 살벌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타타르족은 살아남았다. 그 이유는 타타르족과 통혼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칭기즈칸조차도 두 명의 타타르족 여자를 부인으로 삼았다. 라시드 앗딘에 의하면 타타르인은 초원의 유목민 중에서 가장 부유한 족속이었다.
그런데 러시아인들은 몽골족과 그 지배하에 있던 투르크족을 통칭하여 타타르라 불렀다. 아마 러시아인들이 처음 맞닥트린 몽골의 바투 원정군 가운데서 타타르족의 부대를 먼저 접하면서, 그 이후 몽골어를 하건 투르크어를 하건 모두 타타르로 부르게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타타르의 멍에’는 1240년 키예프의 함락으로부터 따지면 240년 정도 지속되었다. 고려가 몽골의 지배를 받은 것이 약 백년 정도인데 타타르의 멍에는 그보다 상당히 오래 간 셈이다. 모스크바 공국의 이반 4세(재위 1533-1584)는 러시아사에서 처음으로 모스크바 대공이 아니라 ‘전러시아의 차르’라는 칭호를 사용한 인물인데 그는 16세기 중반 카잔 한국과 아스트라한 한국을 잇달아 정복하였다. 그의 사후 얼마 지나지 않아 시베리아에 위치한 시비르 한국도 멸망하였다.(1598) 크림 한국은 훨씬 더 오래 살아남아 예카테리나 여제시대인 1783년까지 존속하였는데 이는 크림 한국이 일찌감치 흑해 일대로 세력을 확장해온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보호하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크림 한국
크림 한국이 금장한국에서 떨어져나간 직후, 오스만 투르크는 비잔틴제국을 멸망시키고 동부 지중해 세계의 강자로 떠올랐다. (1453) 오스만 제국은 흑해로 진출하여 1475년 크림반도의 남부 연안에 있던 이탈리아 제노바의 식민지들을 점령하였다. 그리하여 크림 반도의 남부 해안지대는 오스만 투르크의 영토가 되었다. 오스만 투르크가 크림 한국에 세력을 뻗칠 수 있게 된 계기는 크림 한국 내의 권력 다툼이었다. 크림 한국을 세운 하지 기레이가 1466년 세상을 떠나자, 두 아들이 칸의 자리를 놓고 싸웠는데 당시 칸이던 동생 멩글리는 오스만 투르크, 형 누르데블렛은 금장한국의 지원을 각각 받고 있었다. 형이 금장한국의 지원으로 칸의 자리에 오르자 동생은 오스만 투르크로 도주하였는데 오스만 투르크가 그를 다시 칸의 자리에 앉혔다. (1478)
이후 크림 한국은 오스만 투르크의 제후국이 되었다. 크림 칸은 칭기즈칸의 후예인 기레이 가문의 인물 중에서 크림 한국의 귀족들이 선출하지만 최종적으로는 오스만 술탄의 승인을 받아야 하였다. 크림 칸이 오스만 술탄의 제후가 되었지만 그렇다고 크림 한국이 독립된 주권을 상실한 것은 아니다. 두 나라의 관계는 명나라와 조선의 관계와 비슷하였다. 크림 칸은 모스크바 공국 및 폴란드 등과 독자적인 외교관계를 맺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인장이 새겨진 주화도 발행하였다.
오스만 제국의 입장에서 크림 한국은 그 다수 주민이 투르크계인 타타르인이었을 뿐 아니라 같은 이슬람 신앙을 신봉한다는 점에서 믿을 만한 동맹이었다. 오스만 제국이 발칸을 지배하는 서방의 합스부르크 제국이나 동쪽의 사파비 왕조 페르시아와 싸울 때 크림 한국의 기병대는 큰 도움이 되었다. 물론 오스만 제국이 크림 한국의 병력을 공짜로 이용한 것은 아니었다. 병력을 파견 받은 대가로 오스만 제국은 크림 칸에게 상당한 돈을 지불했고, 이는 크림 칸의 주요 수입원이 되었다.
크림 한국의 노예무역
15세기 중반 건국 직후 크림 한국은 모스크바 공국의 큰 골칫거리가 되었다. 전쟁이나 노예사냥을 통해 획득한 러시아인 포로들을 크림반도의 카파로 끌고 가 노예상인들에게 팔았기 때문이다. 노예무역은 단번에 크림 한국의 중요한 수입원이 되었다. 모스크바 공국이 크림 한국을 군사적으로 압도하게 되는 17세기 말까지, 러시아는 타타르인들의 노예사냥에 줄곧 시달렸다. 대규모의 약탈 원정이 있을 때면 수만 명의 사람들이 잡혀갔다. 포로로 붙들려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에 몸값을 지불하고 이들을 되찾아 오는 일은 모스크바 공국의 큰 국가적 사업이 되었다.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황제 (재위 1654-1676) 때 편찬된 ‘울로제니’ 법전은 오랫동안 러시아 제정의 헌법 역할을 하였는데 이 법전에는 포로로 잡혀간 러시아 신민의 몸값을 지불하고 데려오기 위한 조항들이 있었다. 타타르인들로부터 러시아인 포로를 되사올 기금 마련을 위한 세금이 규정되어 있을 뿐 아니라 신분에 따른 포로의 몸값이 세세하게 정해져 있었다. 이러한 조항들은 러시아가 금장한국의 지배를 벗어난 지 이미 한 세기 반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 후예인 크림 한국의 약탈에 시달리고 있었음을 드러내준다.
한 연구에 의하면, 1500년부터 1700년까지 근 2백만 명에 달하는 노예가 크림 한국을 통해 팔려나갔다고 하니 매년 1만 명 정도가 잡혀간 셈이다. 이러한 흑해 지역의 노예무역은 사실 1204년 4차 십자군 원정 이후 크림 반도에 자리잡았던 이탈리아 상인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제노아인들은 아조프해로 들어가는 길목에 위치한 카파를, 베네치아인들은 돈강 하구의 타나를 각각 거점으로 삼아 무역활동을 벌였는데 노예가 차츰 그들의 주요 상품 중 하나가 되었다. 당시 이탈리아를 비롯한 지중해 여러 지역에는 흑해에서 들여온 노예가 넘쳐났다. 이탈리아에서는 심지어 서민들조차 한두 명의 노예를 거느릴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탈리아인들의 흑해 노예무역은 15세기 중엽 오스만 제국이 비잔틴 제국을 정복하면서 그 양상이 급변하였다. 제노바와 베네치아 상인 모두 흑해지역에서 쫓겨났기 때문이다. 이제 더 이상 이탈리아 상선은 다르다넬스 해협과 보스포로스 해협을 지나 흑해로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러자 이탈리아 상인들 대신 무슬림 상인들이 노예상으로 등장하였다. 그들이 카파에서 구입한 노예는 오스만 제국 곳곳으로 대거 팔려나갔다. 콘스탄티노플로 들어온 노예들은 대부분 기독교 백인노예들이었다. 이슬람 율법상 무슬림은 같은 무슬림을 노예로 삼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스만인들은 기독교 노예를 다양한 방식으로 이용하였다. 신체가 건장한 남자인 경우는 갤리선의 노를 젓는 노수櫓手로 사용하였다. 17세기의 한 크로아티아 수도사가 오스만 제국에서 목도한 바에 따르면 당시 오스만 제국의 갤리선에는 대부분 러시아인 노예가 있었다고 한다. 노예가 기술이 있는 경우는 장인으로 만들었다. 여성들의 경우 성적인 노리개로 삼는 일도 많았다. 이슬람은 여러 여자를 거느리는 것을 허용하였기 때문에 이런 일에 양심의 가책도 별로 없었다. 미모가 뛰어난 여자들은 높은 값에 팔려 오스만 술탄의 후궁으로 보내지기도 했다. 크림 칸들처럼 오스만 술탄들에게도 유럽 여성들은 인기가 많았다. 후궁으로 삼은 백인여성에게서 태어난 아들이 술탄의 자리에 오르는 일도 간혹 벌어졌다. 그 대표적인 예가 유럽과 중동, 북아프리카를 정복한 대정복 군주인 술레이만 1세의 아들 셀림 2세(재위 1566-1574)이다.
러시아의 크림 한국 합병
1556년 모스크바 공국이 아스트라한 한국을 정복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오스만 제국과 모스크바 공국 즉 러시아 제국은 볼가 강 하구에서 맞닥뜨리게 되었다. 이로 인해 중앙아시아 투르키스탄의 무슬림들이 중동의 성지로 향하는 순례길이 막혀 버렸다. 1568년 오스만 제국은 옛 아스트라한 한국 지역을 공격하였다. 오스만은 다뉴브강 하류로부터 볼가강 유역까지 이어지는 넓은 초원 지역을 차지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아스트라한 공격은 실패로 끝났다. 대포가 부족했기 때문이라 한다.
이 전쟁 이후 약 100년 동안은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 사이에 평화가 유지되었다. 그러다가 17세기 말 오스만 제국이 유럽의 기독교 세력과의 전쟁에 돌입하자 러시아도 기독교 국가들의 연합인 신성동맹 측에 가담하여 오스만 제국과 싸웠다. 신성동맹 측이 1686년에 헝가리의 부다(Buda)와 베오그라드를 연속해서 탈환하자 러시아도 그 틈을 타서 크림 한국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그러나 1687년 러시아는 크림반도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초원지대에서 군대를 돌려야만 하였다. 초원은 불타 있었고 식수를 구할 수 없어 환자들이 속출하였기 때문이다. 전투에서 패한 것이 아니라 병참의 실패였다. 2년 뒤 다시 도전한 러시아는 크림 반도로 들어가는 길목의 페레코프 요새까지 진출하여 크림 한국의 타타르 군대와 여러 차례 접전을 하였으나 이번에도 병참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식수부족과 질병에 시달린 러시아군은 다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 제국이 오스만 제국이 차지하고 있던 흑해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크림반도로의 진출이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선박과 대포를 만들 기술자가 부족하였다. 그래서 표트르 대제(재위 1682-1725)는 유럽 여러 나라들로부터 관련분야의 인재들을 데려와 전함과 대포를 만들도록 하였다. 1695년과 1696년 두 차례의 대규모 공격을 감행한 끝에 마침내 돈 강 입구에 위치한 아조프 요새를 함락하였다. 이는 그가 거둔 첫 번째 군사적 위업이었다. 그는 돈 강 입구에 가까운 타간로그에 조선소를 세우고 전함을 계류시킬 수 있는 항구를 만들었다. 그러나 아조프의 점령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함대는 아조프 해를 벗어나 흑해로 진출할 수 없었다. 좁은 케르치 해협을 오스만 제국이 여전히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흑해로 러시아 함대가 진출할 수 있게 된 것은 예카테리나 2세(재위 1762-1796) 때였다. 1768-1774년의 러터전쟁은 예전보다 훨씬 전선의 규모가 큰 전쟁이었다. 전선은 다뉴브강 연안으로부터 크림 반도, 캅카스 지역, 심지어 에게해까지 확산되었다. 이 전쟁으로 오스만 제국의 쇠퇴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중요한 동맹이자 속국이었던 크림 한국이 오스만의 지배로부터 떨어져 나가고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의 호수나 다름없던 흑해로 진출하는 데 성공하였기 때문이다.
이 러터전쟁에 크림 한국은 오스만 제국의 동맹국으로 참전하여 많은 병력을 다뉴브 전선에 파견하였다. 크림 한국의 병력 태반이 다뉴브 전선으로 파견되어 있었기 때문에 1771년 크림 반도는 러시아 군대에게 쉽게 함락되었다. 크림 한국의 새로운 칸 셀림 기레이는 러시아에 항복하였다. 러시아는 오스만의 제후국이었던 크림 한국에 독립을 약속하였다.
1768년에 시작된 러터 전쟁이 1774년에 끝나면서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 사이에 ‘쿠축 카이나르자’(Kuchuk Kaynarja) 조약이 체결되었다. 쿠축 카이나르자는 터키어로 ‘작은 온천’을 뜻하는데, 지금은 불가리아의 국경 마을로서 그냥 카이나르자라고 불린다. 이름은 생소하지만, 이 조약은 오스만 제국뿐 아니라 동유럽 일대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조약은 “크리미아와 쿠반 등의 모든 타타르 부족들은 어떠한 외세로부터도 독립을 누리는 민족임을 양 제국은 인정한다”고 선언하였다. 크림 한국은 실질적으로는 러시아의 영향권 밑으로 들어가기는 하였지만 이 조항에 따라 형식적으로는 이제 종주국인 오스만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자주독립국이 되었다. 조약에서는 승전국인 러시아가 돌려주는 영토와 새로 러시아의 지배로 들어간 지역들을 상세히 명시하였다. 러시아는 베사라비아, 몰다비아, 왈라키아 등 다뉴브 공국들을 점령하였지만 모두 돌려주었다. 이 다뉴브 공국들은 드네스트르강에서 다뉴브강에 이르는 영토로 오늘날의 루마니아와 우크라이나 서부에 해당한다. 당시 이 나라들은 크림 한국과 마찬가지로 오스만의 속국이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흑해로 나가는 관문 역할을 하는 요충지들은 돌려주지 않았다. 돈강 하구의 아조프 요새는 표트르 대제 때 점령하였다가 다시 투르크인들에게 빼앗겼었는데 이번 러터전쟁에서 탈환하여 다시 러시아의 영토가 되었다. 또 아조프해에서 흑해로 나가는 좁은 해협을 지키는 케르치와 예니칼레 두 요새도 러시아의 영토가 되었다. 이로써 러시아는 오랜 숙원이었던 흑해 진출을 이룰 수 있었다.
쿠축 카이나르자 조약은 훗날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될 조항을 포함하였다. 러시아 황제가 오스만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에 그리스 정교회를 세울 수 있으며 그 교회를 관리할 권한은 콘스탄티노플 주재 러시아 대사에게 주어진다는 규정이었다. 이 교회에 속한 기독교도들을 보호할 권리도 러시아측에 있는 것으로 합의되었는데 이 조항은 향후 계속해서 문제가 되었다. 러시아 황제가 이를 근거로 오스만 제국 영토 내에 있는 모든 기독교도에 대한 보호권을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오스만 술탄 역시 크림 한국의 무슬림들에 대한 정치적 지배권은 상실하였지만 그들에 대한 종교적 권한은 인정받았다. 오스만 술탄은 이제 크림 타타르인들에게는 가톨릭 교도들의 교황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쿠축 카이나르자 조약 이후 크림 한국은 사실상 러시아의 보호국이 되었고, 친러 성향의 샤힌 기레이가 칸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쿠릴타이 회의에서 칸을 선출하는 제도를 폐지하고 칸이 자신의 후계자를 지명할 수 있는 세습군주제를 도입하려 하였다. 또 부족장들의 세습영지를 없애고, 관직에 대한 대가로 주는 직전職田으로 대체하려 하였다. 더 나아가 서양식 군대를 만들 생각도 있었다. 요컨대 샤힌 칸은 근대 서구식 전제군주국가로 개혁하고 싶었던 것이다.
샤힌의 개혁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조세제도를 도입하는 등 귀족계급의 협조가 필수적이었다. 그런데 그는 백성의 반발을 초래한 결정적인 실책을 범했다. 바로 기독교도들과 유태인 등 이교도들을 무슬림과 법적으로 평등하게 대우하려고 한 것이다. 법적 평등은 근대국가라면 당연한 것이지만 당시 크림 한국의 타타르인들은 그것을 받아들일 태세가 아직 되어 있지 않았다. 그들에게 샤힌 칸의 새로운 정책은 이제까지 당연시되어 온 회교법과 회교도들의 우위를 부정하는 것으로 보였다. 게다가 러시아가 크림 반도의 예전 오스만 영토에 식민지를 세우기 시작하자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새로이 정착한 사람들은 그리스인이나 슬라브인들로서 기독교도들이었다.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타타르인들은 극력 반발하였다.
1777년 마침내 타타르인들의 반란이 시작되었다. 크림 반도의 남부 산악지대에서는 예전에 쫓겨난 칸의 주도하에 게릴라 활동이 전개되었으며 흑해 동안의 쿠반 지역에서는 ‘베이 만수르’라는 이름의 카리스마 넘치는 인물이 타타르 민중의 지지하에 반러시아 투쟁을 이끌었다. 샤힌 칸의 군대 내에서도 이탈자들이 속출했고, 수도인 박티사라이의 궁궐까지도 공격을 받았다. 샤힌 기레이 칸은 반란을 진압할 수 없었다. 결국 1783년 러시아군이 투입되어서야 반란은 진압되었다. 반러시아 반란은 합병을 노려온 러시아에게는 좋은 구실이 되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곧 크림 한국에 대한 합병을 선언하였다.
1783년 여름에 공포된 합병선언문에서 여제는 오스만 정부가 끊임없이 크림 사태에 개입하여 혼란을 부추겼으며, 이에 호응한 타타르인들이 독립의 소중함을 모르고 경거망동하여 적법한 통치자에게 반기를 들었다며 꾸짖었다. 그리고 러시아가 앞으로 입을 더 많은 인명과 금전상의 손실을 막기 위해서는 합병이 불가피하다고 선언하였다. 샤힌 칸은 퇴위하고 크림 한국에 대한 그의 통치권은 러시아 황제에게로 이전된다고 선언하였다. 선언서를 들고 크림반도로 온 예카테리나 여제의 총신 포템킨은 7월 29일 주요 도시의 성직자들과 귀족들(미르자)을 소집하여 러시아 황제에게 충성선서를 강요하였다. 물론 저항하는 자들이 없지 않았다. 포템킨은 저항하는 자들에 대해 무자비한 탄압을 가해 남녀노소를 포함하여 3만 명 이상의 타타르인들이 처형되었다. 1783년의 합병선언으로 크림 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유럽 땅에 남아 있던 칭기즈칸 후손들의 마지막 국가였다.
러시아령 크림 반도
전쟁이 끝난 후 러시아인들은 크림반도를 옛 그리스 지명을 따서 ‘타우리스’라고 불렀다. 크림이라는 타타르식 이름을 기억에서 지우고 싶었던 것이다. 새로 편입된 영토인 ‘신러시아’ 총독으로 임명된 포템킨은 여러 신도시들을 세웠다. 신도시 건설과 동시에 다른 지역으로부터 정착민들을 이주시키는 식민사업이 함께 진행되었다. 포템킨이 세운 도시들은 모두 러시아의 중요 도시로 발전하였다. 대부분 흑해로 진출하기 위한 군항이거나, 남부의 방어를 위한 군사도시였다. 그가 처음 건설에 착수한 도시는 헤르손이다. 헤르손은 드네프르강 하구 가까운 곳에 건설한 흑해 함대의 기지로 세웠다. 연이어 크림반도 서남단의 세바스토폴이 건설되었다. 세바스토폴은 헤르손을 이어 흑해 함대의 기지가 된다. 크림 한국의 옛 수도 근처에는 심페로폴이라는 도시가 세워졌고 그 외에 아조프 해의 출입을 감시하기 위한 예니칼레, 케르치 등에도 여러 요새도시들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포템킨이 건설한 도시가 모두 군사도시였던 것은 아니다. 예술에도 일가견이 있던 포템킨은 1784년에는 예카테리나 여제의 영광을 기린다는 의미로 ‘예카테리노슬라브’라는 도시를 세우기 시작하였다. 이 도시는 대학과 음악학교, 미술학교 등을 갖춘 일종의 문화도시였다. (현재는 ‘드니프로’라 불린다) 또 헤르손의 조선소를 이전한 부크 강 연안의 니콜라예프, 오스만의 예전 요새에 세운 오데사 등도 역시 포템킨이 구상한 도시들이다.
포템킨은 표트르 대제 이후 러시아 제국의 숙원이었던 흑해 진출을 달성하고 흑해함대를 조직하였다. 함대 건설에는 엄청난 자금이 투입되었다. 흑해 함대 건설은 러시아가 세계열강으로 발돋움하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었다. 포템킨은 흑해함대를 동원하여 보스포루스 해협으로 쳐들어가 오스만 투르크를 정복하고 기독교 제국을 부활시킨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른바 ‘그리스 프로젝트’이다. 이 계획을 위해 예카테리나 여제의 손자 콘스탄틴 왕자에게 그리스어와 그리스 문화를 공부시켜 부활한 그리스 제국의 왕으로 만들려고 하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리스의 이름을 빌려 러시아가 오스만 제국을 차지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는 실현되지 못했다. 러시아와 함께 계획을 세웠던 오스트리아황제 요셉 2세가 1790년 1월 병사하였고, 포템킨 역시 오스만 투르크와의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1791년 10월 몰다비아의 초원에서 병사함으로써 그리스 프로젝트는 그 주인공을 잃어버렸다. 설령 포템킨이 살아서 계획을 추진할 수 있었다 하더라도 영국과 프랑스 같은 유럽의 강대국들이 오스만 제국이 해체되고 그 자리를 러시아가 차지하는 것을 그냥 내버려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19세기 중반의 크림 전쟁(1853-1856)이 그것을 입증해주었다.
타타르인
러시아는 크림 한국을 병합한 후 타타르인들을 러시아 사회에 통합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무엇보다도 타타르 귀족(미르자)의 마음을 사기 위해 노력하였는데 원칙적으로 러시아 귀족(러시아어로 ‘드보리안스트보’)과 대등한 지위로 만들려고 하였다. 합병 이후 러시아의 관직에 종사하는 타타르인들이 나왔는데 이들은 비록 전통적인 미르자 가문 소속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러시아 귀족에 속하게 되며 러시아 귀족과 동등한 특권을 누리도록 하였다. 그들에게도 ‘포메스티에’라는 이름의 토지가 봉직의 대가로 지급되었다.
타타르인들을 러시아 사회에 동화시키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타타르인들은 쉽게 동화되지 않았다. 타타르인들은 러시아인들과는 달리 회교도였고, 회교종주국인 오스만 제국에 우호적일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많은 타타르인들이 크림 한국 합병 후 오스만 제국으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다. 타타르인들이 계속해서 크림 반도로부터 빠져나간 반면 러시아 당국은 외부인들을 크림 반도에 정착시켰다. 넓은 토지에 비해 인구가 적은 크림 반도에 새로운 주민들을 정착시키는 정책이었다. 새로운 정착민 가운데에는 러시아인뿐 아니라 그리스인, 아르메니아인, 독일인, 불가리아인 심지어는 스위스인들도 있었다. 이러한 식민정책을 통해 크림 반도는 시간이 갈수록 타타르 민족의 땅이라는 성격이 약화되어 갔다. 2018년 통계로는 크림반도의 주민 220만 명 가운데 러시아계가 2/3를 차지하고 타타르인은 10%에 불과하다. 이렇게 타타르인들이 소수민족으로 전락한 결정적 계기는 스탈린 시대 소련당국의 정책이었다.
1941년 나치 독일군은 동맹국인 루마니아군과 함께 크림반도를 점령하였다. 나치의 점령은 1944년 5월 소련군에 의해 격퇴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나치 치하에서 일부 타타르인들이 나치에 협력했지만 이는 소수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나치가 퇴각한 후 나치부역자로 고발된 타타르인들은 즉결 처분을 당했다. 소련군 병사들이 무고한 타타르인들을 약탈하고 부녀자를 강간하는 일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타타르인들은 나치에 협력한 배반자라는 생각이 러시아인들 사이에서 널리 퍼져 있었다. 또 90여 년 전에 벌어진 크림 전쟁기에 타타르인들이 러시아의 적국이던 영국과 프랑스에 동조하였다는 사실도 다시 떠올려졌다. 종교·문화적 차이도 타타르인들에 대한 증오심을 부채질하였다.
크림을 되찾고 2주간의 끔찍한 테러가 자행된 후 소련 당국은 타타르인들을 중앙아시아나 시베리아로 강제 이주시켰다. 1944년 5월 18일, 소련은 모든 타타르인들을 느닷없이 소집하여 가축수송용 열차에 태웠다. 그 가운데에는 공산당원이나 빨치산 출신도 있었지만, 남녀노소, 성분을 불문하고 크림 타타르인이라면 모두 강제추방의 대상이 되었다. 추방 인원의 숫자는 무려 23만 명으로, 이는 당시 크림 전체 인구의 1/5에 달했다. 쫓겨난 타타르인들은 주로 우즈베키스탄으로 보내졌고, 그들에게는 자유로운 이주가 허용되지 않았다.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크림 타타르인들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된 것은 소련이 붕괴하기 직전인 1989년 무렵이었다. 20만 명이 넘는 타타르인들이 크림으로 돌아왔지만, 이미 러시아인들이 그들의 땅을 차지하고 있어 땅을 되찾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소련 당국도 이들의 재산 환수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타타르인들은 19세기부터 민족운동을 통해 그 독자적인 정체성을 유지해왔다. 그 정체성의 근간에는 크림 반도가 조상들이 살아오고 일구어온 자신들의 조국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인들은 크림 반도는 원래 러시아 땅이었으며 예카테리나 여제에 의한 1783년의 합병은 점령이 아니라 타타르에게 잃어버렸던 땅을 되찾은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1954년 소련 지도자 후르시초프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합병된 300주년을 기념하여 선심 쓰듯 이 보석 같은 크림 반도를 우크라이나 공화국에 넘겨주었다. 당시 소련이라는 하나의 큰 테두리 안에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형제처럼 함께 산다는 전제하에서 이루어진 조처였다.
그런데 1991년 예기치 않게 소비에트 연방(소련)이 붕괴하였다. 2004년에는 우크라이나에서 소위 ‘오렌지혁명’이 일어나 반러시아, 친서방 세력이 정권을 잡았다. 이 친서방 정권은 유럽연합(EU)과 나토(NATO) 가입을 추진했다. 이에 반발한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은 2014년, 크림반도의 친러시아 지역민병대를 내세워 크림 반도를 무력으로 점령하고 주민투표를 통해 러시아에 합병하였다. 그리고 2022년, 푸틴은 친나치 세력을 청산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우크라이나를 전면 침공하였으며 지금까지 이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