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마나 마하리쉬의 《후 앰 아이》

라마나 마하리쉬의 《후 앰 아이》 (스리 라마나쉬라맘, 2008)

 

《후 앰 아이》는 1902년, 한 구도자가 라마나 마하리쉬(1879–1950)에게 던진 질문과 그에 대한 응답을 기록한 16쪽 분량의 작은 책으로, 자아 탐구의 핵심 가르침을 담고 있다.

이 책은 정말 얇다. 그래서 처음 손에 쥐는 순간, 잠시 당혹감을 느끼게 된다. 이처럼 짧은 분량으로 과연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자연스럽게 따라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은 얼마나 많은 내용을 담고 있는가가 아니라, 어떤 방향을 가리키는가에 주목하며 읽어야 할 책이다. 이 책은 독자를 특정한 목적지로 이끌지도 않고, 단계적으로 따라가야 할 수행의 지도를 제시하지도 않는다. 무언가를 점차 성취해 나간다는 서사 또한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지금까지 우리가 의지해 왔던 모든 지도들을 하나씩 거두어들인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사라진 자리, 그 폐허의 한가운데에는 단 하나의 질문만이 남는다. “나는 누구인가?”

 

대답을 요구하지 않는 질문

이 질문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인류의 사유 역사에서 언제나 한가운데 있었다. 하지만 이 책에서 이 질문은 기존처럼 철학적 사유의 출발점이 아니라, 거꾸로 철학 자체를 무력화하는 장치로 등장한다. 왜냐하면 여기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답을 전혀 기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질문은 그동안 우리가 ‘나’라고 불러왔던 온갖 대답들을 하나씩 걷어내는 부정의 여정이 된다.

이 텍스트가 태어난 배경부터 상징적이다. 《훔 앰 아이》(이하 “나는 누구인가”)는 어느 저자의 계획적인 의지로 집필된 책이 아니다. 20세기 초, 아루나찰라 산 동굴에 머물던 한 젊은 수행자에게 던져진 질문과, 그에 대한 간결한 응답들이 차곡차곡 기록된 결과다. 그 수행자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고, 무언가를 가르치려는 의지도 드러내지 않았다. 받은 질문에는 손짓이나 글로 짧게 대답했고, 그 내용이 나중에 제자에 의해 정리됐다. 이 점은 무척 중요하다. 이 책은 애초에 무언가를 ‘설명하기 위해’ 태어난 텍스트가 아니다. 오히려 말이 최대한 절제된 자리에서, 더 이상 언어가 필요 없는 지점을 가리키기 위해 남겨진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행복은 성취가 아니라 회복이다

책의 첫머리는 기대와 달리 아주 소박하게 시작한다. 모든 존재는 늘 행복을 바란다는 단순한 관찰에서 이야기가 풀려나간다. 이 말은 종교적인 선언도 아니고, 도덕적인 명령도 아니다. 오히려 인간에 대해 가장 기본적으로 할 수 있는 사실 그대로의 진술에 가깝다. 사람은 아픔을 피하고 행복을 원한다.

그런데 여기서 이 책은 멈추지 않는다. 한 발짝 더 들어가 다시 묻는다. 왜 우리는 그렇게 행복을 원할까? 그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바로 행복이 우리 본성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애써 행복해지려는 존재가 아니라, 원래 행복했지만 무언가로 인해 그 행복을 잃어버린 듯 느끼는 존재인 셈이다.

이 지점에서 시선이 확 바뀐다. 행복은 더 이상 성취해야 할 무언가가 아니라, 본래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회복의 문제가 된다. 그렇다면 이제 문제의 원인을 밖에서 찾을 필요가 없다. 조건이나 환경, 관계, 심지어 어떤 수행의 성공 여부도 본질이 아니다. 결국 가장 핵심적인 질문은 ‘나’라고 불리는 이 존재가 도대체 무엇인가, 바로 그것이다.

 

아루나찰라 산 — 라마나 마하리쉬가 자신의 삶과 가르침의 중심으로 삼았던 성산으로, 말과 교리를 넘어 침묵과 현존을 통해 ‘자아(Self)’를 깨닫게 하는 영적 귀의의 상징이다. 아루나찰라는 산스크리트어로, 아루나(밝음·광명)와 아찰라(부동)로 이루어져 있으며, 스스로 빛나는 흔들림 없는 실재를 뜻한다.

 

부정의 해부학: 나는 무엇이 아닌가

이 지점에서 《나는 누구인가》는 분위기가 한층 차가워진다. 이 책은 독자의 감정을 다독이거나 위로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해부대 위에 올려놓은 것처럼, 인간 존재를 이루는 요소들을 하나씩 조심스레 떼어내기 시작한다.

 

나는 육체가 아니다.

나는 감각 기관도 아니다.

나는 행위 기관도 아니다.

나는 흔히 생명 에너지라 불리는 것조차 아니다.

나는 심지어 생각하는 마음도 아니다.

 

이렇게 나열된 부정의 목록은 단순한 형이상학적 분류가 아니다. 우리가 평소 ‘나’라고 여겨온 거의 모든 층위를 하나씩 벗겨내는 작업이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나’는 몸이거나, 감정이거나, 기억이거나, 성격이거나, 의식 상태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런 동일시를 하나씩 끊어낸다. 심지어 무지, 즉 알지 못함마저도 ‘나’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쯤 되면 독자는 이미 방향 감각을 잃을 수밖에 없다. 무지조차 내가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 남는 걸까?

 

제거될 수 없는 알아차림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놀랄 만큼 단순하다. 모든 것을 부정하고 나서도 끝까지 남는 것이 바로 알아차림이다. 그게 바로 ‘나’다. 이 알아차림은 어떤 대상을 가리키지 않는다. 생각보다 앞서 존재하고, 생각을 알아차리며, 몸의 감각이나 심지어 무지조차도 인식한다. 그래서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라질 수 있는 모든 것은 결국 관찰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자기’란 바로 이런 곳에 있다. 뭔가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대상이 드러나는 자리, 그 자체다.

이 알아차림의 본질을 설명하려고 이 책은 오래된 언어들을 빌린다. 존재, 의식, 환희 같은 말들이다. 하지만 이런 표현들은 어디까지나 누군가 정의하자는 게 아니다. 저자는 독자가 이 단어에 머물러 추상적인 개념을 쌓으려 하길 바라지 않는다. 오히려 더 이상 설명할 길이 없을 때 마지막으로 건네는 손짓에 가깝다. 이쯤 되면, 이미 철학으로 할 일은 다 끝난 셈이다.

 

세계는 보는 자와 함께 발생한다

이제 진짜 고민은 ‘세계’ 자체다. 우리는 여전히 이 세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고, 세계는 너무나도 분명하게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이 책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한층 급진적인 주장을 펼친다. 세계가 실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다만 ‘보이는 동안에만’ 세계가 존재한다고 본다. 즉 세계는 보는 이와 분리된 독립적인 실체가 아니라, 인식이 작동하는 구조 안에서 함께 드러나는 현상이라는 이야기다. 보는 이가 사라지면, 보이던 세계도 같이 사라진다.

이 점을 설명하면서 책은 고전적인 비유를 꺼낸다. 바로 어둠 속에서 밧줄을 뱀으로 착각하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뱀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지만, 느끼는 공포만큼은 진짜다. 그런데 우리가 그 밧줄을 제대로 인식하는 순간, ‘뱀’이라는 오해는 설명이나 분석이 필요 없이, 그냥 사라져버린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왜 뱀처럼 착각했을까’가 아니라, 실제로 존재한 것이 무엇이었는가다. 이 비유가 이 책의 세계관을 정확히 보여준다. 세계란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 오해에서 비롯된 결과라는 것이다.

 

인도 베단타 전통의 마야(Maya) 비유 ― 밧줄을 뱀으로 보는 인식의 착각

 

여기서 중심에 등장하는 개념이 바로 마음이다. 책에서 말하는 마음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마음이란 여러 생각이 흘러가는 과정, 그리고 그 생각들 중 가장 근원적인 것이 바로 ‘나’라는 생각이다. 이 ‘나-생각’이 떠오르는 순간, 세계도 함께 펼쳐진다. 그렇기에 세계를 없애려고 아무리 애써도, 그 시도는 번번이 실패할 수밖에 없다. 세계를 떠받치는 건 세계 자신이 아니라, 바로 ‘나’라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극도로 단순한 수행: 생각을 근원으로

수행의 방향은 점점 더 단순해진다. 다른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일부러 지우거나 억누르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자문한다. “이 생각은 누구에게 일어나는가?” 답은 항상 똑같다. “나에게.” 그러면 다시 묻는다. “그 ‘나’란 무엇인가?” 이 질문은 생각을 더 키우지 않는다. 오히려 생각을 그 근원으로 돌려보내는 역할을 한다. 이런 반복을 통해 마음은 점차 외부의 대상으로부터 힘을 빼앗기고, 오히려 자신의 근원으로 수렴한다.

이 책이 다른 수행법들을 보조적인 것으로만 여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호흡을 조절하거나, 주문을 반복하고, 형상을 관상하거나 금욕과 독서에 몰두하는 일은 마음을 잠시 조용하게 만들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런 방법들로는 마음 자체를 제거하지는 못한다. 마음이 남아 있는 한, 바깥의 세계와 자아라는 개념은 언제든 다시 나타난다. 《나는 누구인가》가 지향하는 것은 마음을 깨끗이 다듬는 것이 아니라, 마음 그 자체의 소멸이다. 바로 이 점에서 이 책은 위로나 안심을 주는 안내서가 아니라, 존재에 대한 결단을 요구하는 책이 된다.

여기까지가 이 책이 펼치는 기본적인 구조다. 하지만 진짜 질문은 이제부터 시작된다. 만약 이런 수행이 완전히 이루어진다면, 인간은 과연 어떤 삶을 살게 될까. 행위란 무엇으로 이해해야 할까. 신이나 스승, 해탈, 침묵 같은 개념들은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그리고 이 가르침은 불교의 돈오, 베단타 전통, 현대의 영성 담론과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을까.

 

침묵: 이원성이 해체된 자리

《나는 누구인가》를 읽다 보면 어느 순간 독자는 묘한 불안을 느끼게 된다. 이 책은 분명 수행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수행자가 붙잡을 만한 긍정적인 대상을 제시하지 않는다. 수행의 목표가 무엇인지, 어떤 상태에 이르게 되는지, 무엇을 체험하게 되는지 같은 질문을 던지면, 이 책은 늘 정면으로 답하지 않고 살짝 비껴간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애초에 그런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바로 이 대목에서 핵심적으로 등장하는 개념이 ‘침묵’이다. 여기서 침묵은 단순히 말을 하지 않는 상태를 뜻하지 않는다. 수행이 끝난 뒤 찾아오는 잠깐의 휴식이나, 감각이 모두 차단된 명상 상태도 아니다. 《나는 누구인가》에서 침묵은 철저히 구조적인 의미를 가진다. 즉, ‘나’와 ‘세계’, ‘보는 자’와 ‘보이는 것’, ‘행위자’와 ‘행위’처럼 원래 분리되어 있던 이원적인 구성이 완전히 풀리고 사라진 상태를 가리킨다.

이 책은 분명하게 말한다. 참된 자기는 ‘나’라는 생각조차 일어나지 않는 자리라는 것이다. 이쯤에서 많은 독자들은 쉽게 오해하게 된다. 그러면 의식이 완전히 사라진다는 건가? 아니면 무의식에 빠지는 걸까? 혹시 혼수상태와 비슷한 것일까? 하지만 이 책은 그런 방향을 전혀 이야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여기서 말하는 침묵은 무의식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깊은 자각의 순간이다. 단지 그 자각 안에는 ‘자각하는 나’라는 중심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뿐이다.

이 부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나는 누구인가》는 자칫 허무주의나 무행동주의로 오해받기 쉽다. 하지만 이 책에서 말하는 침묵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행위자가 없는 행위’가 펼쳐질 수 있는 자리다. 바로 이 점에서 이 책은 우리에게 매우 정교한 존재에 대한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행위자가 없는 행위

책의 후반부에서 ‘행위’에 대한 이야기가 다시 나오면, 독자는 또다시 혼란을 느끼게 된다. 모든 것이 신의 작용이라면 인간의 노력은 과연 아무 의미도 없는 걸까? 모든 게 이미 정해져 있다면, 수행이라는 건 왜 필요한지 의문이 생긴다. 이런 질문에 대해 이 책은 직접적인 대답을 내놓지 않는다. 대신 하나의 비유를 들려준다.

태양은 어떤 의도도 없이 떠오르지만, 그 존재만으로 연꽃이 피고 물이 증발하며 생명이 움직인다. 태양이 무언가를 ‘하려는’ 건 아니다. 그저 존재할 뿐인데, 그 존재가 모든 변화를 가능하게 한다.

이 비유는 이 책이 생각하는 신과 자아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참된 자기, 또는 궁극적인 실재는 행위의 주체가 아니라, 모든 작용이 일어나는 조건이다. 중심이라기보다 바탕에 가깝다. 그래서 이 책에서 말하는 해탈은 ‘무엇을 하게 되는 상태’라기보다 ‘더 이상 억지로 무엇을 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로 설명된다. 하지만 이것이 게으름이나 방임을 뜻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불필요한 개입조차 사라진, 자연스러운 상태에 가깝다.

물 위의 연잎 — 행위 속에 있으되 행위자 의식에 묶이지 않아, 닿되 물들지 않는 아까르마의 경계를 상징한다.

 

수행과 비집착: 즉각성의 길

이 지점에서 《나는 누구인가》는 우리가 흔히 기대하는 수행과 윤리에 대한 관점을 완전히 뒤흔든다. 보통 사람들은 수행을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그런 노력이 오히려 ‘나’라는 의식을 더 단단하게 만들 위험이 있다고 말한다. 심지어 선한 행동마저도 ‘내가 선하다’는 자기 동일시를 강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텍스트는 전통적인 도덕적 가르침과는 달리, 꽤 과감하고 급진적인 이야기를 한다. 겸손해질수록 좋고, 남을 미워하지 말아야 하며, 결국 모든 것의 결과가 내게 돌아온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내용은 단순한 도덕적 교훈이 아니다. 오히려 자아에 대한 집착이 약해질 때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현상을 담담하게 서술한 것에 가깝다.

특히 인상 깊은 부분은 ‘비집착’에 대한 설명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비집착이란, 어떤 대상을 소유하지 않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생각이 떠오른 순간, 그 생각을 완전히 사라지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생각이 흐르도록 그냥 두는 것이 아니라, 그 생각을 자기 근원으로 돌려보내는 것이다. 여기서 수행은 더 이상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와는 무관하다. 하루에 얼마만큼 명상을 하거나, 몇 년을 수행했다고 해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즉각적으로 그 근원을 따져 묻는 정직함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누구인가》는 점진적으로 수행을 완성해 나간다는 전통적인 관점과는 완전히 방향이 다르다. 이 책에는 단계라는 것이 없다. 오직 즉각성만이 있을 뿐이다. 생각이 올라오는 바로 그 순간, 이미 자유로움이 가능하다고 본다. 하지만 이 자유는 한 번 얻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반복을 요구한다. 그만큼 오랜 습관과 익숙한 자기 동일시는 쉽게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 이 책 역시 현실을 솔직하게 인정한다. 오랜 시간 축적된 인상, 즉 무의식적인 습관은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수행을 언제까지 해야 하냐는 질문에, 이 책은 단호하게 답한다. 생각의 흔적이 남아 있는 한, 그 물음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해탈과 스승: 묶인 적이 없었다는 인식

이번에는 해탈이란 무엇인지 살펴보자. 이 책에서 말하는 해탈은 어떤 새로운 상태로 옮겨 가는 일이 아니다. ‘묶여 있던 것이 풀린 상태’도 아니다. 오히려 처음부터 묶여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이 바로 해탈이다. 그래서 해탈은 무언가를 얻는 과정이 아니라, 오해가 끝나는 순간에 일어난다. 이 점에서 이 책은 해탈을 미래의 목표로 여기지 않는다. 해탈은 언제나 ‘지금 이 순간’에서만 가능하다. 단지, 그 순간을 가리고 있던 동일시가 어느 정도로 강하게 작동하고 있었느냐가 핵심일 뿐이다.

이 지점에서 스승과 신의 역할이 어떻게 드러나는지 이야기하게 된다. 이 책은 스승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스승이 나 대신 해탈로 이끌어 주는 존재로 그리지는 않는다. 스승이나 신은 단지 길을 가리킬 뿐, 대신 걸어줄 수는 없다. 얼핏 보면 자율성을 강조하는 것처럼 느껴질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왜냐하면 여기서 ‘걷는 나’라는 생각 자체가 해체되기 때문이다. 스승의 역할은 “너는 이게 아니다”라는 사실을 계속 일깨워 주는 데에 있다.

특히 마음에 남는 비유가 있다. 기차에 올라탄 사람이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이고 계속 끙끙대면 얼마나 어리석겠는가. 이미 기차가 모든 짐을 실어 나르고 있는데 굳이 내가 들고 있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 비유는 수행자에게 불편한 진실을 던진다. 우리는 이미 충분히 바탕 위에 놓인 존재임에도, 애써 무언가를 스스로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나는 누구인가》는 이 노력 자체를 완전히 내려놓으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 노력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그 근원을 정확하게 바라보라고 권한다.

 

해탈의 상징 백조(한사 Haṁsa) — 분별의 지혜와 비집착의 자유를 상징하며, 이 경지에 오른 이를 파라마한사라 부른다.

 

질문이 사라진 침묵

이 모든 논의가 향하는 끝에는 결국 침묵이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다시 강조하자면, 여기서 말하는 침묵은 단순히 말을 하지 않는 상태와는 다르다. 이 침묵은 질문이 사라진 자리다. 질문이 사라진 건 답을 얻어서가 아니라, 질문 자체를 가능하게 했던 전제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내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사라지면, 더 이상 탐구 자체가 필요 없어지는 셈이다.

그런데 이쯤에서 독자는 다시금 궁금해진다. 그렇다면 우리의 일상은 어떻게 되는 걸까? 관계나 사회, 역사, 고통과 같은 문제들은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 가르침은 그냥 개인 안에서 끝나는 해탈이 전부인가, 아니면 우리가 세상과 맺는 관계에도 변화를 가져오는가.

 

완결을 제공하지 않는 텍스트

《나는 누구인가》를 끝까지 읽고 나면 독자는 묘한 공백 앞에 서게 된다. 이 책은 해탈과 자유를 이야기하지만, 독자가 기대할 만한 명확한 성취나 결론 같은 건 남기지 않는다. “이제 알겠다”는 확신도 없고, “여기에 도달했다”는 식의 뚜렷한 목적지도 없다. 오히려 남는 건, 한 가지 질문이 오히려 더 깊고 무거워졌다는 감정뿐이다. 이 점에서 이 책은 꽤 불친절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바로 그 불친절함이 이 텍스트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이 책은 완결이나 결론을 내주지 않는다. 오히려 독자를, 더는 기대거나 의지할 만한 개념이나 설명이 없는 낯선 자리로 들어서게 만든다. 이런 지점에서 《나는 누구인가》는 단순한 수행서가 아니라, 사유나 수행에서 마지막까지 남겨진 안전장치들마저 걷어내는 텍스트로 드러난다.

이쯤에서 이 책의 사상적 위치를 조금 더 넓은 맥락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나는 누구인가》는 불교의 돈오 사상, 베단타의 비이원론, 또 현대의 영성 담론과도 깊게 맞닿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이 책이 어떤 전통 속에도 완전히 흡수되거나 녹아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불교·베단타·현대 영성과의 교차

먼저 불교의 돈오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살펴보자. 이 책에서 말하는 자기 탐구는 분명 점진적인 수행 방식이 아니다. 생각이 떠오르는 그 순간, ‘이 생각이 누구에게 일어났는가’를 묻는 순간 이미 전환이 일어날 수 있다고 한다. 깨달음은 언젠가 얻는 미래의 결과가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인식의 변화다. 이런 점에서 《나는 누구인가》는 철저히 돈오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하지만 동시에 이 책은 불교의 무아無我 사상과는 어딘가 어긋난다. 불교에서는 ‘나’라는 실체가 없다는 깨달음이 핵심이다. 반면 《나는 누구인가》는 단순히 ‘나는 없다’라고만 말하지 않는다. 잘못된 동일시는 분명 부정하지만, 모든 동일시가 지워지고 난 뒤에도 남는 어떤 근원적인 알아차림이 있다고 강조한다. 이 알아차림은 불교의 공空 개념으로 단순히 환원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해체 이후에도 남아 있는 잔여를 집요하게 붙든다.

이처럼 《나는 누구인가》는 불교적 해체 과정을 통과하면서도, 그 자리에 머물지 않는다. 공의 통찰을 넘어, 여전히 남아 있는 ‘바라보는 자리’, ‘알아차림의 근원’을 끝까지 추적한다. 그래서 이 텍스트는 불교의 언어만으로 온전히 설명되지 않는다.

베단타 전통과의 연관성은 더 직접적이면서, 동시에 이중적인 면이 있다. 이 책은 존재·의식·환희, 자기와 신의 동일성, 세계의 비실재성처럼 고전 베단타에서 중요한 핵심 개념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베단타의 방대한 형이상학적 체계 그 자체에는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범아일여’라는 선언조차, 여기서는 교리적인 결론이 아니라 질문이 모두 끝났을 때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단순한 사실에 불과하다.

그래서 《나는 누구인가》는 베단타를 요약해놓은 책이 아니다. 오히려 핵심만 남기고, 모든 설명과 논증을 걷어낸 텍스트에 더 가깝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기존 전통 내에서도 다소 위험하게 느껴질 수 있다. 이 책은 독자가 교리나 체계 속에 머물 수 있는 틈을 허락하지 않는다. 독자를 지식인으로 머물게 두지 않고, 경험의 한가운데로 끌어들인다.

이제 현대 영성 담론과의 관계도 살펴보자. 오늘날의 영성 담론은 ‘체험’을 중심에 두는 경우가 많다. 각성 체험, 일체감, 빛의 경험, 확장된 의식 상태 같은 것들이 영성의 성취 지표로 소비된다. 하지만 《나는 누구인가》는 이런 체험에 대해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체험은 일어날 수도 있지만,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체험 자체가 아니라, 그 체험을 겪는 ‘나는 누구인가’ 하는 물음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오늘날의 영성 소비 문화에 상당히 불편한 텍스트 중 하나다. 이 책은 어떤 특별한 상태도 약속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이 경험하는 모든 상태를 의심하라고 권한다. 평온, 환희, 공허, 확장, 통찰—이 모든 것도 ‘나’ 자체는 아니다. 이런 급진적인 태도 때문에 《나는 누구인가》는 때로 차갑고 건조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이 건조함은 냉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끝까지 사로잡힌 채 쉽게 타협하지 않는 솔직함에서 나온 것이다.

 

일상과의 만남: 윤리는 명령이 아니라 결과

그렇다면 이런 가르침은 우리의 일상과 어떻게 이어질까? 바로 이 질문 덕분에 이 책은 단순한 수행 지침서를 넘어서, 삶의 방식에 대해 근본적으로 묻는 책이 된다. 저자는 세상을 떠나라고 하지 않는다. 대신 세상과 관계 맺는 태도가 달라진다고 설명한다.

우리는 여전히 말하고, 일하고, 선택하고,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하지만 이런 행동들의 중심엔 ‘내가 하고 있다’는 생각이 점점 약해진다.

이런 상태는 흔히 오해를 받기 쉽다. 무책임하거나 운명론적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누구인가》는 분명히 말한다. 겸손해야 하고, 미움은 내려놔야 하며, 남에게 한 일은 결국 다시 자신에게 돌아온다고 말이다. 그렇다고 이런 내용이 단순한 도덕 규범은 아니다. 자기 동일시가 옅어질수록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삶의 모습에 관한 이야기다. 윤리는 명령이 아니라, 결국 그렇게 살아갈 때 자연스레 드러나는 결과라는 뜻이다.

 

멈추는 지점을 제시하지 않는 위험

이제 이 책에서 가장 과감한 부분을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나는 누구인가》가 갖는 위험성은, 이 질문이 어디서 멈춰야 할지를 제시하지 않는 데 있다. 대부분의 수행 체계는 일정한 안정 지점을 마련해 둔다. ‘이 정도면 괜찮다’는 식의 암묵적인 동의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책에는 그런 합의조차 찾아볼 수 없다. 생각의 자취가 남아 있는 한, 질문은 멈추지 않는다. 결국 그 질문은 질문하는 주체, 즉 자신을 해체하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

그래서 이 책은 위로보다는 결단을 요구한다. 이 질문을 끝까지 붙들 것인지, 아니면 어느 순간 스스로 놓아줄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이 텍스트는 그 결정을 대신 내려주지 않는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히 이야기한다. 이 질문이 사라지는 곳에서는, 더 이상 찾을 것이 남아 있지 않다는 점이다.

《나는 누구인가》는 답을 주는 책이 아니다. 질문을 남기는 책이고,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질문만이 끝끝내 남는 책이다. 그리고 그 질문은 자연스럽게 독자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책을 덮고 나서도 그 물음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이제서야 제대로 시작된다는 느낌마저 든다.

나는 누구인가.

 

 

EnglishFrenchGermanItalianJapaneseKoreanPortugueseRussianSpanishJavane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