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기록한 《용비어천가》의 주해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을 몇 개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1) 제6권 41장의 시구는 고구려 원정에서 실패한 당 태종과 북원 동녕부 정벌에 성공한 태조 이성계를 대비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장의 주해는 이성계의 원정은 다루지 않고 당 태종의 고구려 원정만 서술한다. 공민왕에 의해 동북면병마사로 임명되어 동녕부를 정벌한 이성계의 이야기는 39장 주해에서 다루었다고 거기를 보라고 한다. 41장의 주해는 수십 쪽에 달할 정도로 엄청 상세하다.
서술은 “고구려 동부대인東部大人 천개소문(연개소문)이 그 왕 무武(영류왕)를 죽였다”는 영주도독 장검張儉의 보고로 시작된다. 《삼국사기》에는 영류왕의 이름이 건무建武로, 연개소문은 서부대인西部大人으로 약간 달리 기록되어 있다. 642년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죽인 것이 당나라의 고구려 침략 구실이 되었다. 태종의 여러 신하들이 고구려와의 전쟁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태종의 처남이었던 장손무기와 간의대부 저수량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태종은 고구려 원정을 결정하고 만다. 신라의 사신이 와서 고구려와 백제가 괴롭히니 도와달라고 사정한 것도 태종의 결심을 부추겼을 테지만 태종이 내세운 명분은 어디까지나 왕을 죽이고 원래는 중국의 옛 영토인 요동을 차지하고 있는 고구려를 처벌하는 것이었다.
주해는 이어서 요동의 고구려 성들에 대한 당군의 공격을 기술한다. 요동도부대총관遼東道副大摠管 이도종李道宗의 부대는 신성新城을 포위하고 영주도독 장검의 부대는 건안성으로 진격하고, 이세적의 부대는 개모성을 공격하였다. (건안성이 이 공격으로 함락된 것은 아니다) 장량의 해군은 동래에서 바다를 건너 요동반도 남단에 위치한 비사성卑沙城을 습격하였다. 그리고 태종이 요동의 늪지대를 건너 요동성에 와서 공격을 지휘하였다. 12일간의 공격 끝에 요동성은 함락되었다. 태종의 부대는 이제 인근의 백암성으로 진격하였다. 백암성 성주 손대음이 항복하였다. 연개소문이 가시성 사람 칠백여 명을 보내 백암성 근처의 개모성을 지키게 하였는데 개모성도 함락되었다. 태종의 다음 목표는 안시성이었는데 고구려의 북부욕살 고연수와 남부욕살 고혜진이 고구려와 말갈 군사 15만을 이끌고 와서 안시성을 구원하였다. 그러나 당나라 군대의 포위로 인해 고연수와 고혜진은 그 무리 3만6천8백명을 이끌고 항복하였다. 태종은 욕살 이하 3천5백 명을 가려내어 융병戎兵에 편입시켜 내지로 옮기게 하고, 나머지는 모두 석방하여 평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말갈 병사들 3천3백 명은 모두 땅에 묻어 죽였다. 태종은 자신의 공적을 자랑하며 지나간 산 이름을 고쳐 주필산駐蹕山이라 하였다. ‘주필駐蹕’은 임금이 행차하여 머물렀다는 뜻이다. 태종은 주필산 전투에서 항복한 고연수를 홍려경으로, 고혜진은 사농경으로 삼았다.
그러나 뒤에 이어지는 서술에 따르면 백암성을 함락한 후 태종은 안시성은 험하고 병사들은 정예병이며 그 성주는 재주와 용맹이 있는 자라 함락이 쉽지 않으니 먼저 남쪽의 건안성을 공격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안시성을 건너뛰고 건안성을 공격하다가는 보급로가 끊길 수 있다는 이세적의 지적에 따라 태종은 먼저 안시성 공격을 하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당군의 오랫동안 공격에도 불구하고 안시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안시성이 함락되지 않자 후방의 오골성을 먼저 공격하여 취하면 바로 평양으로 진격할 수 있다고 고연수와 고혜진이 제안하였다. 여러 사람들도 오골성 공격을 지지하였으나 신중한 장손무기는 반대하였다. 건안성과 신성의 무리가 10만이나 되는데 이들이 오골성으로 진격하는 당군을 뒤쫓아올 가능성이 있으니 먼저 안시성과 건안성을 취한 후 평양으로 진격하는 도상에 위치한 오골성 공격에 나서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태종은 장손무기의 건의에 따라 안시성 공격을 계속하였다. 성의 동남쪽에 토산을 쌓아 안시성을 압박하는 전략을 취했는데 고구려는 성벽을 더 높이 쌓아 대응하였다. 그러나 당나라의 토산이 더 높아져 성안을 굽어볼 수 있게 되었지만 갑자기 토산이 무너져 성이 일부 무너졌다. 그 사이로 고구려군이 나와 토산을 점령하였다. 이로써 당군의 안시성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태종은 토산이 무너질 때 자리를 비웠던 장수 부복애를 참수하였다. 그리고 이제 날씨도 추워지고 식량도 다해가므로 군대를 돌린다고 선언하였다. 이로써 645년 태종의 고구려 원정은 실패로 끝이 났다.
태종은 보병과 기병 40만 명을 이끌고 요동의 늪지대를 다시 건너 퇴각해야 하였는데 태종 스스로 풀을 묶어 도로를 메우는 일에 동참하였다. 《용비어천가》 41장의 주해는 당 태종의 원정에 대한 결산서를 제시한다. “현도, 횡산橫山, 개모, 마미磨米, 요동, 백암, 비사, 맥곡陌谷, 은산銀山, 후황後況 등 열 개의 성을 빼앗았고 요주, 개주, 암주 주민 7만 명을 중국으로 옮겼지만 신성, 건안, 주필의 세 큰 싸움에서 고구려 군사와 함께 당나라 군사가 매우 많이 죽었다.” 태종은 위징이 살아 있었더라면 자신을 이렇게 되도록 놔두지 않았을 것이라며 자신의 원정을 후회하였다.

41장의 주해는 《삼국사기》 보장왕조에 나오는 기록과 별 차이가 없다. 그러나 집현전 학사들은 김부식과는 달리 당태종의 고구려 원정에 대해 비판적인 평가를 덧붙이고 있다. 먼저 북송 때의 역사가 범조우(范祖禹, 1041-1098)의 평가가 나온다. “태종은 북쪽으로는 힐리頡利(동돌궐의 가한)를 사로잡고, 서쪽으로는 고창高昌(서역에 위치한 왕국)을 멸망시켰다. 군사의 위력은 더할 것이 없어 사방의 오랑캐가 두려워 떨었다. 그러나 무력을 좋아하여 그치지를 못하고 친히 고구려를 공격하니, 천하의 백성이 작은 오랑캐 때문에 곤핍해졌고, 공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오니 의기가 꺾였다. 친히 수나라 양제가 먼 곳을 경략하려다가 나라를 망친 것을 보았으면서도 그것을 그대로 따라했다. 나는 태종의 고구려 정벌은 수나라 양제와 다를 것이 없다고 본다. 다만 나라가 어지러워져 망하는 데까지 이르지 않았을 뿐이다.” 주해는 또 태종이 고구려에 대해 교만하였다는 남송 시대의 학자 호인胡寅(1098-1156)의 평가도 덧붙였다. 이런 비판적인 평가를 덧붙인 것을 보면 집현전 학사들의 역사의식은 김부식과 좀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2) 《용비어천가》 제4권 24장은 조광윤의 군사적 업적과 이성계의 부친 이자춘(시호는 환조桓祖)의 쌍성총관부 수복을 다루고 있다. 조광윤은 후일 송나라를 건국한 인물로서 소위 ‘오대십국시대五代十國’ 時代(907-979)의 최종승자라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송나라 건국 이전 그는 오대의 마지막 왕조인 후주後周의 장군이었다. (오대五代는 중원을 지배한 정통왕조를 말하고, 십국十國은 지방정권을 말한다) 24장의 주해는 조광윤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십국의 하나인 북한北漢의 왕 유숭의 후주 침공으로 시작한다. 오대십국사에 정통하지 않으면 주해에 나오는 사건과 인물이 복잡하여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감을 잡기 힘들 정도이다. 좌우간 조광윤은 후주의 세종 시영柴榮 — 오대십국 시대의 군주 중에서 유일하게 통치능력이 뛰어난 군주로 평가받는 사람이다 — 이 아끼는 장수로서 시영과 함께 남쪽의 후당 정벌에 나서 양주揚州 육합六合 전투에서 대승하였다.
이자춘은 앞서 말한 것처럼 원나라의 쌍성 천호千戶로서 원나라가 약화될 조짐을 보이자 고려의 편에 서서 쌍성총관부 수복을 도왔다. 그 공덕으로 이자춘은 동북면병마사의 직책에 임명되었다. 24장 주해에서는 쌍성총관부의 총관 조소생과 천호 탁도경이 밤에 도주한 후 고려가 차지한 지역이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다. “화주和州, 등주登州, 정주定州, 장주長州, 예주預州, 고주高州, 문주文州, 의주宜州와 선덕宣德, 원흥元興, 영인寧仁, 요덕耀德, 정변靜邊 등의 진과 여러 성을 수복하였다. 함주咸州 이북의 합란哈蘭, 홍긍洪肯, 삼산參散의 땅은 고종 때 원나라에 빼앗긴 이래로 90년이 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다시 찾았다.”
그리고 할주에서 위에 든 지역들의 위치를 설명하고 있다. “화주는 지금의 영흥이고, 등주는 지금의 안변이다. 정부의 옛 이름은 파지巴只이다… 장주는 정평 관내의 장곡長谷이다. 예주는 고려 정종이 생천에 성을 쌓아 원흥진이라 하였다. 예종은 예주에 성을 쌓고 방어사를 두었는데 후에 정주에 속하게 되었다… 고주는 옛날에는 덕녕진이라 했다… 문주는 옛날에는 매성妹城이라 하였다… 의주는 지금의 덕원德源이다. 여덟 주는 모두 함길도에 속한다. 선덕과 원흥의 두 진은 지금의 예원預原 땅이고, 영인, 요덕, 정변의 세 진은 지금의 영흥 땅이다.”
《용비어천가》가 편찬된 것은 1440년대이니 이자춘의 쌍성총관부 원정(1356) 이후 90년 정도 뒤의 일이다. 아주 옛날 일이 아니니 집현전 학사들이 그 지명을 잘못 기록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힘들다. 고려 영역연구를 하는 분들이 한번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가 아닌가 싶다.
3) 말을 타고 공을 치는 경기인 격구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제6권 44장의 주해에 나오는 바 당나라 선종宣宗이 격구를 좋아하고 또 능숙했으며 이태조도 사람들이 놀랄 정도로 격구에 능하다고 하였다. 이 주해에서는 당나라의 놀이를 ‘격국擊鞠’이라고 하고 고려의 것을 ‘격구擊毬’로 달리 표현하였는데 같은 놀이를 말한다. 고려에서는 단오절에 천막(용봉장전龍鳳帳殿이라 하였다)을 세우고 왕과 부녀자들이 보는 앞에서 격구 경기를 거창하게 개최하였다. 44장 주해에서는 격구하는 법이 나오고 이태조도 그러한 격구 경기에 나가 현란한 솜씨를 보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고 한다. 이태조는 활도 명사수여서 그것을 자랑하는 기록들이 《용비어천가》 여러 곳에 나오는데 격구에도 선수였던 셈이다. 제9권 78장의 할주에는 격구 채와 공을 어떻게 만드는 것인지도 상세히 나와 있는데 채는 대나무와 물소 가죽으로 만들고 공은 계란만한 크기로 나무로 만들기도 하고 혹은 마노瑪瑙로 만들기도 하였다. 격구는 귀족들에게 아주 인기 있는 진정 귀족 스포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