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케의 생애를 통해서 본 실증주의의 탄생과 균열 2

들어가며

랑케의 실증주의는 근대 역사학의 발전을 이끈 하나의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 사실 중심의 태도 덕분에 역사학은 철학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됐다. 객관성과 사료 비판의 원칙 역시 학문적 기준으로 자리 잡았다. 그 결과, 역사학은 마침내 자체의 언어와 규칙을 갖춘 독립된 학문 영역이 됐다.

하지만 이러한 성공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준 것은 아니었다. 사실만을 말하는 학문이 되기 위해 역사는 무엇을 침묵해야 했을까? 객관성을 지킨다는 명목 아래, 점차 제기되기 어려워진 질문들은 무엇이었을까?

이번 글에서는 실증주의가 제도화된 이후, 랑케라는 개인이 겪어야 했던 긴장과 자기 억제를 따라가 보려 한다. 그리고 ‘의미’를 말하지 않는 관행이 어떻게 자리 잡았는지 살펴볼 것이다. 실증주의는 단순한 방법론을 넘어, 결국 역사가 다룰 수 있는 것의 경계를 설정하는 규율로 작동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실증주의의 성공은 어디까지였으며, 그 성공은 우리에게 어떤 과제를 남겼을까?

 

  1. 신앙을 억제하는 학문적 훈련: 객관성이라는 자기 통제의 윤리

랑케의 실증주의가 학계에 뿌리내리면서 객관성은 어느덧 학문적 규범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이 원칙은 랑케 개인에게 조금도 편안하지 않았다. 객관성은 그에게 자연스럽게 배인 태도가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을 다스려야만 지켜낼 수 있는 일종의 학문적 고행이었다. 특히 그의 종교적 배경을 생각하면, 이 객관성은 신앙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감내해야 했던 내적 긴장에서 비롯된 것이지, 신앙과 완전히 동떨어진 중립이 아니었다.

랑케는 평생 루터교 신앙을 놓지 않았다. 그는 신의 섭리를 부정하지 않았고, 역사가 단순히 우연의 집합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문제는 이런 믿음을 ‘역사 저술’의 언어로 드러낼 수 있느냐는 데 있었다. 그는 신의 뜻을 역사 서술 속에 직접 개입시키는 순간, 역사가가 마치 신의 자리에 서게 된다고 경계했다. 이 점이야말로 그가 가장 두려워한 일이었다.

이러한 내적 긴장은 그의 대표 작품 중 하나인 《교황사》 집필 과정에서 특히 선명하게 드러난다. 개신교도였던 그가 가톨릭 교황청의 역사를 다룬다는 것 자체가 그에겐 커다란 도전이었다. 랑케는 종교적 논쟁이나 평가 대신, 남들보다 더 집요하게 문서와 기록에 집중했다. 바티칸의 비밀 문서와 외교 기록을 꼼꼼히 읽어내며, 자신의 신앙이 글 속에 섞이지 않도록 끊임없이 스스로를 점검했다.

여기서 객관성은 단순한 가치 중립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자기 검열처럼 작동한다. 랑케는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보다는, 무엇을 말하지 않아야 할지를 부단히 고민했다. 그의 문장은 곳곳에서 절제가 묻어났고, 단정적인 평가는 좀처럼 들어가지 않았다. 인과 관계를 설정할 때도 언제나 조심스러웠다. 이런 절제와 신중함은 학문적 미덕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큰 대가도 요구했다.

그 대가는 역사 글쓰기에서 사건의 의미가 점점 흐려진다는 점이었다. 그는 사실들을 꼼꼼히 복원했지만, 정작 그 사건들이 왜 중요한지, 그 속에서 인간이 무엇을 읽을 수 있는지는 말로 남기지 않았다. 역사가 직접 의미를 부여하는 대신, 읽는 이가 스스로 해석해야 했다. 역사가는 물러나고, 무수한 사실들만이 그 자리를 메웠다. 랑케에게 이런 태도는 결코 실패가 아니었다. 오히려 쉽사리 “의미”를 말하는 것이야말로 학문적 윤리를 저버리는 일이라 여겼다.

하지만 이 절제의 태도는 그의 제자들과 후대 역사학자들에게는 또 다른 모습으로 이어졌다. 랑케에게 객관성은 아픈 자기 절제였지만, 제도로 자리 잡은 학계에서는 점차 단순한 기술적 능력으로 바뀌었다. 신앙을 억제하려는 자기 훈련은, 시간이 흐르면서 질문조차 삼가게 만드는 관습으로 굳어졌다. 의미를 말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의미에 대해 묻지 않는 것이 안전한 자세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 장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랑케 실증주의의 중요한 이면이다. 그의 태도는 인간의 오만함을 경계하고자 한 윤리였지만, 동시에 역사학을 침묵의 길로 이끌 위험도 지니고 있었다. 랑케는 이 긴장을 끝까지 떠안고 살아갔으나, 그의 방법이 학문적 표준이 될수록 이 내적 갈등은 점차 보이지 않게 되었다.

다음 장에서는 이런 억제의 윤리가 역사서술 방식 자체를 어떻게 바꾸었는지, 또 목적론이나 진보 서사까지 거부하는 태도가 역사학에 어떤 새로운 문제를 남겼는지 살펴보려 한다.

 

  1. 목적 없는 역사, 의미의 후퇴: 진보를 거부한 대가

랑케의 실증주의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역사에서 목적을 철저히 배제하려는 태도였다. 그는 역사가 특정한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말하는 순간, 결국 다시 철학의 영역으로 돌아가게 된다고 생각했다. ‘진보’, ‘필연’, ‘완성’과 같은 말들은 역사 속 사건들을 설명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상 각각의 사건들을 일종의 틀 안에 억지로 끼워 맞추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특히 그가 쓴 《독일 종교개혁 시대의 역사》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랑케는 종교개혁을 근대 탄생의 기점이나 자유의 확대 같은 식으로 해석하지 않았다. 루터를 세계사적 영웅으로 부각시키는 대신, 당시의 정치적 이해관계, 제후들의 선택, 외교의 현실이라는 복잡한 맥락 속에 사건을 배치했다. 랑케에게서 개혁은 어떤 필연의 결과가 아니라, 여러 조건이 우연히 맞물려 이루어진 결과로 그려진다.

랑케의 《독일 종교개혁 시대의 역사》 앞면 표지

 

이 같은 선택은 분명하다. 그는 인간의 구원이나 사회 진보를 역사를 통해 증명하려 들지 않았다. 역사는 교훈을 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일어난 일을 최대한 정확하게 드러내기 위해 존재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는 역사학을 철학적 목적론에서 해방시켜 주었지만, 동시에 새로운 어려움을 안겼다.

목적이 사라진 역사에서, 의미는 어디에 놓일까? 사건들이 더 이상 하나의 방향으로 향하지 않는다면, 역사는 우리에게 무엇을 전하려는 것일까? 랑케는 이 질문에 뚜렷한 답을 내놓지 않았다. 오히려 그 물음을 역사학의 바깥으로 떠넘겼다. 의미를 묻는 일은 철학이나 신학이 할 일이고, 역사학은 그 질문에 필요한 사실의 토대만 충실하게 제공하면 된다는 입장이었다.

이런 분리는 학문적으로 솔직했지만, 동시에 위험도 내포하고 있었다. 사실을 세밀하게 복원하려는 작업이 정밀해질수록, 역사 서술은 점점 설명 없는 사실 나열에 가까워졌다. 사건끼리는 이어지지만, 왜 그렇게 연결되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역사의 정보는 풍부해졌지만, 독자는 더 많은 해석을 스스로 떠안아야 했다.

랑케 자신은 이렇게 조심스럽게 침묵하는 태도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역사학이 말하지 못하는 것을 솔직히 인정하는 태도를 학문의 성숙으로 여겼다. 하지만 이 방식은 시간이 흐르면서 다른 형태로 이어진다. 목적을 밝히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목적 자체를 묻지 않으려 하는 분위기가 자리 잡는다. 의미를 찾으려는 시도는 위험한 질문이 되고, 안전한 역사학은 점점 사실의 정확성만을 지키는 방향으로 머무르게 된다.

이 장에서는 랑케 실증주의가 역사학에 가져온 본질적인 전환을 보여주고 있다. 거대 담론에서 벗어나기 위해 택한 무목적성은 분명 역사학을 자유롭게 했지만, 동시에 점점 더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역사는 더 이상 세계에 대한 큰 설명을 제공하지 않고, 세상에 남은 흔적을 정리하는 일에 머물게 된다.

다음 장에서는 이런 태도가 학문 제도 안에서 어떻게 굳어졌는지, 그리고 랑케 이후의 역사학이 그의 방식을 이어받으면서도 어떻게 질문을 잃어버리게 됐는지 살펴볼 예정이다.

 

  1. 방법은 남고 질문은 사라지다: 랑케 이후의 실증주의

랑케의 실증주의는 그의 생애가 끝나기도 전에 이미 하나의 표준이 되었다. 사료 비판, 문서 중심 연구, 절제된 서술과 같은 원칙들은 역사학의 기본 규칙으로 자리 잡았고, 학문적으로 성공하려면 반드시 따라야 할 조건이 되었다. 하지만 표준화가 진행되는 동안, 랑케가 끝까지 품었던 불안과 긴장은 점점 흐릿해졌다. 결국 남은 것은 ‘방법’이었고, 사라진 것은 ‘질문’이었다.

랑케가 대학 강단에서 뿌리내린 세미나 중심 교육은 역사학이 전문 학문으로 자리 잡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학생들은 사료를 읽는 법을 배우고, 문서의 진위를 가려내는 기술을 익혔다. 이 과정은 철저하면서도 재현 가능했고, 그래서 역사학은 이제 더 이상 개인의 통찰에만 의존하지 않는 학문으로 보였다.

그러나 이 제도적 성공은 또 다른 문제를 낳았다. 방법은 쉽게 가르칠 수 있었지만, 정작 ‘왜’ 그 방법이 필요한지에 대한 이야기는 점점 사라져 갔다. 랑케에게 실증주의란 인간의 한계를 자각한 끝에 한 윤리적 선택이었다. 그런데 후대에 이르면, 실증주의는 전문가 집단의 기술적 노하우로 바뀌었다. 얼마나 많은 사료를 다루는지, 얼마나 정확하게 검증하는지가 곧 학문의 수준을 가늠하는 잣대가 되었고, 거기서 ‘더 큰 질문’을 꺼내는 일은 위험하거나 불필요하게 여겨졌다.

이렇게 역사학은 점점 더 자신을 ‘안전하게’ 만들었다. 철학적 의미를 말하지 않음으로써 논쟁을 피했고, 목표를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이념의 비판에서도 자유로워졌다. 하지만 그만큼 자기 정당화의 언어는 점차 잃어버렸다. ‘왜 이 연구가 필요한가’, ‘왜 이 사건이 중요한가’와 같은 근원적인 물음에는 점점 분명한 답을 내놓지 못하게 된 것이다.

랑케 이후의 실증주의는 여기서 갈라진다. 한쪽은 방법을 점점 더 정교하게 다듬으며 사실의 축적이 곧 학문의 진보라고 믿었다. 다른 쪽은 실증주의의 한계를 자각하고, 다시 의미와 구조를 복원하려는 시도를 이어 갔다. 하지만 두 갈래 모두 랑케가 처음 가졌던 불안과 문제의식을 온전히 계승하지는 못했다는 점에서는 비슷했다.

랑케에게 실증주의란 질문을 포기하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질문이 너무 커지는 것을 경계했다. 인간이 쉽게 답할 수 없는 질문은 함부로 꺼내지 않고, 답할 수 있는 것에 집중했던 것이다. 그러나 제도화된 역사학에서는 이 절제가 점차 ‘침묵의 관행’으로 굳어졌다. 말을 삼가는 것이 아니라, 아예 묻지 않는 태도가 미덕이 되어버린 셈이다.

7장에서는 이러한 전환의 과정을 살펴보았다. 랑케의 실증주의는 분명 성공했다. 하지만 그 성공 덕분에 오히려 랑케가 고민했던 문제의식은 잊혀져 버렸다. 방법만 겨우 남았고, 그 방법이 왜 중요한지에 대한 맥락은 흐려졌다. 다음 장에서는, 인생의 말년에 이른 랑케가 다시 전체사에 눈을 돌리면서, 자신이 만든 실증주의의 경계와 한계를 어떻게 마주하게 되는지 들여다볼 예정이다.

 

  1. 전체사를 향한 말년의 귀환: 실증주의가 마주한 자기 한계

랑케의 말년은 자주 주목받지 못하지만, 그의 사유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 시기를 꼭 살펴봐야 한다. 평생 사실과 사료, 절제와 억제를 중시하며 역사학의 경계를 세워 온 그는, 노년에 들어 다시 한 번 역사의 ‘전체’로 시선을 돌리게 된다. 이것은 실증주의를 버리는 전환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이 만든 방법론의 한계를 끝내 외면하지 않은 태도에 가깝다.

랑케는 말년에 세계사 집필을 시도한다. 결국 완성하지는 못했지만, 애초에 그런 시도를 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는 여전히 철학적인 체계를 세우려 하지 않았고, 역사에 뚜렷한 목적이나 종착점을 부여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더는 개별 사건과 국가만을 따로따로 서술하는 방식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분명히 자각하고 있었다. 사실만을 모은다고 해서 그 자체가 곧 의미가 되지는 않는다는 한계—이것을 가장 먼저 뼈아프게 느낀 사람은 바로 그 자신이었다.

바티칸 비밀문서고 전경. 말년에 이르러서도 랑케는 베를린을 중심으로 생활하며, 빈과 로마 등 유럽 각지의 기록 보관소를 방문해 세계사 구상을 확장해 나갔다. 사진 출처: Rex Features/AP Photo

 

이 시기의 랑케가 이전보다 덜 신중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더욱 신중해졌지만, 그 신중함은 침묵이 아니라 “질문”이라는 방향으로 기울었다. 세계사는 그에게 또 하나의 거대한 담론이 아니라, 여러 역사들이 서로 어떻게 엮이고 부딪히며 이어지는지를 탐구하려는 시도였다. 그는 여전히 “있는 그대로”를 추구했지만, 이제 그 ‘있는 그대로’가 어느 한 국가나 문서의 범위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이 지점에서 랑케의 사유는 흥미로운 긴장감을 드러낸다. 한편 그는 여전히 객관성과 사료 비판의 태도를 지키려고 애썼고,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학이 완전히 의미를 피할 수는 없다는 것을 묵묵히 인정하고 있었다. 세계사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는, 실증주의가 결코 철학을 대신할 수 없다는 깨달음과, 그렇다고 다시 철학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는 자각이 함께 스며 있다.

이러한 말년의 시도는 곧바로 다음 세대에 이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랑케 이후의 실증주의는 점점 더 방법론을 세분화하고 전문화했으며, 전체를 이야기하려는 시도는 위험하거나 비과학적으로 여겨지곤 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20세기 이후 등장한 구조사, 세계사, 문명사, 기억 연구 등은 모두 다시 이 미완의 문제의식으로 돌아오게 된다. 의미 없는 사실의 나열을 넘어서, 언젠가는 전체를 다시 사유하려는 충동이 이미 랑케 자신 안에서 싹트고 있었던 셈이다.

8장은 이처럼 보여준다. 랑케의 실증주의는 본래 완결된 체계가 아니었다. 그것은 한 사람이 철학의 과잉과 신학의 확신 사이에서 만든 임시적 균형이었고, 말년에 이르러 그 균형이 다시 흔들렸다. 랑케는 자신이 세운 방법의 한계를 숨기려 하지 않았고, 그 한계를 무리하게 넘어서려 하지도 않았다. 대신 그는 질문을 남겼다.

역사는 어디까지 사실로 설명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사실들은 언제, 어떻게 다시 하나의 세계로 이어질 수 있을까?

이 질문은 랑케 한 사람의 고민이 아니라, 근대 역사학 전체가 떠안은 숙제다. 이제 남은 일은, 그의 생애를 넘어 실증주의가 각 사회와 국가에서 어떻게 다른 운명을 맞이했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랑케의 시대는 끝났지만, 랑케 이후의 역사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맺음말

랑케의 생애를 따라 실증주의의 탄생과 균열을 살펴보면, 이는 단순한 방법론의 형성을 넘어 근대 지성이 스스로를 어떻게 규율해 왔는지 보여준다. 랑케는 세계를 설명하는 거대한 체계를 세운 사상가라기보다, 자신에게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의 경계를 엄격히 그었던 학자였다. 그의 실증주의는 확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철학과 신학이 보여준 지나친 해석의 유혹 앞에서 선택한 절제의 윤리였다.

그가 사실을 선택한 이유는 진리를 소유하려 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인간이 진리를 가질 수 없다는 자각에서 출발했다. 신의 뜻을 쉽게 입에 올리지 않기 위해, 역사에 대한 성급한 판단을 피하기 위해, 그는 사료와 기록이라는 좁은 길로 물러선 것이다. 실증주의는 그에게 냉정한 과학주의가 아니라, 인간 인식의 한계를 깊이 받아들인 태도였다.

하지만 이와 같은 윤리는 제도화되는 과정에서 의미가 변질됐다. 개인의 불안에서 시작된 자기 절제는 점차 학문 공동체의 규범이 되었고, 마침내 질문마저 억제하는 관행으로 굳어졌다. 의미를 함부로 이야기하지 않으려던 침묵이 어느 순간 의미 자체를 묻지 않는 안전한 태도로 바뀌었다. 랑케가 끝까지 안고 갔던 내적 긴장은, 시간이 흐르며 그의 이름 아래에서 서서히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랑케의 말년은 우리에게 중요한 실마리를 남긴다. 그는 마지막에 전체사로 시선을 돌렸고, 사실의 축적만으로는 역사를 이해하기엔 부족하다는 점을 외면하지 않았다. 이 시도는 비록 완성되지 못했지만, 바로 그 미완성 속에 근대 역사학이 마주한 핵심 문제가 농축돼 있다. 사실과 의미, 절제와 사유, 과학과 해석이라는 요소들은 결코 명확하게 분리될 수 없다는 깨달음이다.

이제 질문은 랑케 개인의 생애를 넘어선다. 랑케의 실증주의는 그 이후 어떻게 흘러갔을까. 특히 나치 체제를 겪은 독일에서는, 국가와 결합해 제도화되었던 실증주의가 어떤 식으로 붕괴하거나 변화했을까. ‘객관성’이라는 학문 윤리는 전체주의의 경험 앞에서 과연 유효할 수 있었을까.

더 나아가 랑케의 실증주의는 독일을 넘어서 여러 나라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프랑스에서는 이 이론이 비판과 극복의 대상으로 여겨져, 새로운 역사학 전통을 만들어냈다. 한편 일본에서는 근대 국가를 세우는 과정과 맞물려, 국가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쓰였다. 한국에선 식민지적 이식과 분열된 계승이라는 복잡한 문제를 안겼다. 스페인은 민주화가 이루어진 뒤에야 비로소 실증주의적 역사 연구가 과거에 대해 자유롭게 묻는 분위기와 만나기 시작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연구 방법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과거를 질문할 권리 자체가 막혀 있었다는 사실이다.

다음 글에서는 이 문제들에 좀 더 깊이 들어가려 한다.

나치 이후 독일에서 랑케의 실증주의는 어떻게 해체되었을까.

그리고 프랑스, 일본, 한국, 스페인에서는 실증주의가 어떤 운명을 맞았을까.

이 비교를 통해 진짜로 묻고 싶은 것은 단 하나다.

실증주의는 정말 보편적 학문 방법이었을까, 아니면 근대라는 시대가 내린 특정한 선택이었을까.

랑케의 시대는 끝났지만, ‘사실을 믿는다’는 그 약속이 남긴 질문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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