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케의 생애를 통해서 본 실증주의의 탄생과 균열 1

머리말

근대 역사학은 언제부터 ‘사실’을 믿게 되었을까? 또 우리는 어쩌다 사실을 신뢰하는 것을 학문적 미덕으로 여기게 됐을까? 이 물음은 단순히 연구 방법의 문제를 넘어, 근대의 지성이 세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설명하는 길을 택했는지에 닿아 있다. 사실을 중요하게 여기는 자세는 당연한 결과가 아니라, 특정 시대의 긴장과 불안 속에서 내린 치열한 결단이었다.

19세기 독일에서는 그 긴장이 철학의 막강한 영향 아래에서 생겨났다. 특히 헤겔의 철학은 역사를 세계정신의 자기 전개로 보며, 개별 사건과 인간의 삶, 국가의 흥망까지도 하나의 거대한 의미 체계로 포섭했다. 헤겔의 역사철학은 세계를 설명하는 힘이 탁월했고, 근대 독일 지성에 강한 통합의 전망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그 완결성과 포괄성 덕분에, 역사가 지닌 우연함이나 개별성, 기록의 불완전함은 점점 뒷전으로 밀려났다. 역사는 말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해석되었고, 사실은 그저 의미를 증명하는 데 동원되는 역할로만 머물렀다.

이런 사유가 지배했던 시대, 독일 지성 사회 내부에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 불안이 쌓여갔다. 모든 것을 철학이 설명해버리는 세상에서 역사학은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정신의 거대한 체계 앞에서, 실제 남아 있는 기록과 문서, 인간의 행동은 과연 어떤 자리에 놓일 수 있을까? 의미가 앞서는 역사 해석은 과연 역사 그 자체에 정말 충실하다고 할 수 있을까?

이 물음 앞에 서 있었던 인물이 바로 레오폴드 폰 랑케였다. 그는 또 하나의 철학적 체계를 세워보려 하지 않았다. 세상의 목적이나 방향을 말하기보다는, 남겨진 기록과 문서, 있는 그대로의 사료 앞에 마주 서는 길을 선택했다. 그의 결정은 단순히 철학에 맞서는 태도를 넘어서, 지나치게 커져버린 철학적 세계 속에서 요청된 분석적이고 과학적인 접근이었다. 해석보다 먼저 사실을 확인하는 태도, 증명을 해석보다 앞세우는 자세는 연구 방법의 문제가 아니라, 학문이 지켜야 하는 윤리에 가까웠다.

레오폴트 폰 랑케(1795-1886)  1875년 초상

 

랑케가 주장한 “과거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는” 역사학은 완벽한 객관성을 약속하는 선언이 아니었다. 오히려, 인간은 결코 신이나 절대정신의 자리에 설 수 없다는 깨달음에서 시작된 절제의 자세였다. 신학의 확신과 철학의 총체성이 흔들릴 때, 랑케가 마지막으로 붙들었던 것은 믿을 수 있다고 여겨진 유일한 표면, 바로 사료와 기록이었다. 사실은 진리 그 자체가 아니라, 진리에 다가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최소한의 윤리적 조건으로 자리 잡았다.

이 글은 랑케를 단순한 실증주의의 창시자로 부르지 않는다. 대신 그의 생애와 궤적을 따라가며, 한 인간이 왜 결국 사실을 믿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는지 묻고자 한다. 랑케 실증주의의 탄생은 어떤 새로운 학문적 진보의 서사가 아니라, 근대의 지성이 자기 자신에게 부과한 절제의 역사였다. 그리고 그 절제는 처음부터 어쩔 수 없는 균열을 안고 있었다.

사실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포기하는 일일까?

그리고 우리는 지금도 그 포기를 계속 견디고 있는 걸까?

바로 이 질문에서, 랑케 실증주의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1. 신을 잃지 않기 위해 사실을 선택하다: 랑케의 출발점

랑케는 처음부터 역사학자가 아니었다. 그의 출발점은 역사도, 방법론도 아닌, 바로 신학적 세계였다. 18세기 말, 독일 작센 지방의 루터교 목사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내내 성서와 찬송, 신의 섭리 같은 언어로 세상을 배웠다. 이런 배경은 단순한 가정환경을 넘어, 랑케 사고의 뿌리 깊은 토대가 되었다.

젊은 랑케가 대학에서 접한 것도 역시 신학과 고전문헌학이었다. 그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텍스트, 그리고 성서 주석 전통을 치밀하게 공부하며, 글을 통해 진리에 다가가는 훈련을 쌓았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점점 풀리지 않는 불안을 느끼기 시작했다. 같은 텍스트에서 서로 달라지는 해석, 권위 있는 주석들조차 엇갈리는 결론, 진리는 원래 하나일 텐데 왜 이렇게 해석마다 흔들릴까. 이 물음은 랑케에게 단순한 학문적 의문을 넘어, 신학적 진실성 자체를 흔드는 근심이었다.

이 불안은 점차 더 뚜렷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전통과 권위를 붙들고 텍스트를 해석하는 방식, 철학적 틀에 억지로 역사를 끼워 맞추는 태도는, 진리를 밝혀주기보다 오히려 가려버리는 건 아닐까. 랑케가 의심한 것은 해석의 수준이 아니라 출발점이었다. 먼저 믿어야 할 것은 해석일까, 아니면 사실일까.

이 갈림길에서 그는 ‘사실’을 선택한다. 그렇다고 신을 부정하려는 선택은 아니었다. 오히려 신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않기 위해, 인간이 판단할 수 없는 영역을 남겨 두기 위해, 그는 사실이라는 최소한의 바탕을 지키고자 했다. 랑케에게 사실은 차가운 과학의 언어가 아니라, 인간이 넘지 말아야 할 한계를 설정하는 윤리적 경계였다.

이런 선택은 그가 교사로 일했던 초창기 모습에서도 분명하다. 랑케는 한동안 중등학교에서 고전어를 가르쳤다. 학문적 명성도, 제도적 권위도 없이 학생들 앞에 선 교사였던 시절이다. 그는 강단 위 철학자라기보다는, 교실에서 학생들과 함께 텍스트를 붙잡고 씨름하는 사람이었다. 이 경험 덕분에 랑케는 추상적인 체계보다 문서와 기록의 구체성을 우선하게 되었다. 설명하기보다는 확인하고, 해석하기보다는 대조하는 습관이 이때부터 몸에 배었다.

랑케가 결국 역사학의 길을 택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역사야말로 그가 신학과 철학에서 남겨 온 질문을 가장 정직하게 마주할 수 있는 분야였다. 이미 일어난 사건, 남겨진 기록이 존재하고, 이것은 인간의 뜻만으로 바꿀 수 없는 저항력을 품고 있었다. 바로 이 저항, 다시 말해 사실이 사유를 통제하는 힘이, 랑케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했다.

이렇게 보면, 랑케의 실증주의가 시작된 것은 ‘과학화’라기보다는 자기 절제였다. 그는 신의 뜻을 대신 말하려 들기보다, 인간이 실제로 확인할 수 있는 것에만 집중하겠다는 태도를 택했다. 해석의 자유를 포기하는 대신, 최소한의 신뢰 조건을 지키려 한 것이다. 그가 사실을 중시한 것은 신을 잃어버려서가 아니라, 오히려 신을 가볍게 말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이 장에서 드러나는 랑케의 모습은 딱딱한 실증주의자와는 거리가 있다. 그는 불안을 안고 출발한 사유자였고, 확신보다는 책임을 선택한 학자였다. 다음 장에서는, 이러한 윤리적 선택이 어떻게 ‘사료 비판’이라는 구체적 방법론으로 발전하게 되었는지 살펴볼 것이다.

 

  1. 텍스트의 배신과 사료의 구원: 해석의 한계 앞에서 선택된 방법

랑케가 ‘사실’이라는 입장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데는, 텍스트에 대한 깊은 신뢰와 그 신뢰가 깨지는 경험이 함께 있었다. 그는 고전문헌학과 신학을 공부하며 텍스트를 세밀하게 읽는 훈련을 받았고, 그만큼 누구보다 텍스트의 권위를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그런데 바로 그런 정밀함이, 정작 텍스트 해석의 구조적 불안정함을 깨닫게 해주었다.

똑같은 문장도 시대나 학자에 따라 전혀 다르게 읽혔다. 권위 있는 주석들조차 서로 모순되는 결론에 이르렀고, 해석은 결국 해석자 자신을 드러낼 뿐이었다. 문제는 단순한 오류가 아니라, 자의성에 있었다. 텍스트는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하면서도, 그 해석을 제어할 책임 있는 기준은 충분히 제시하지 못했다. 랑케에게 이는 단순한 학술적 어려움이 아니라, 진실에 다가가려는 태도 자체를 흔드는 경험이 됐다.

이 지점에서 그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돌린다.

“텍스트는 왜 이렇게 쉽게 배신하는가?”가 아니라,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근거 삼아 텍스트를 읽고 있는가?”라는 물음이었다.

여기서 랑케는 명확한 결론에 이른다. 텍스트를 해석하기 전에, 그것이 언제, 누구에 의해, 어떤 맥락에서 만들어졌는지 먼저 따져봐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의미 해석을 앞세우기보다 생산 조건과 전달 과정을 꼼꼼히 따지는 방식이 필요했다.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 근거의 문제였던 셈이다.

이때 등장한 것이 바로 사료 비판이었다. 사료 비판은 단순히 많은 자료를 모으는 일이 아니었다. 문서의 진위, 작성 시기, 작성자의 입장과 이해관계, 전달 과정에서의 변형 가능성까지 하나하나 점검하는 절차였다. 랑케에게 사료 비판은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기술이 아니라, 의미가 함부로 부풀지 않도록 붙잡아 두는 장치였다. 해석의 자유를 넓히기보다는 해석의 출발선을 엄격하게 설정하는 방법이었다.

이 선택은 그가 몸담았던 당시 독일 학문 분위기와도 맞닿아 있었다. 철학은 이미 거대한 틀로 세계를 설명하고 있었고, 역사 역시 철학 아래의 한 영역으로 다뤄질 때가 많았다. 역사적 사실은 철학적 개념을 증명하는 데 쓰였고, 문서는 사유의 재료에 그쳤다. 랑케는 이 판을 뒤엎었다. 그는 문서를 앞에 두고, 그 앞에서는 사유를 잠시 멈추기로 했다.

중요한 것은, 랑케의 이런 태도가 ‘객관성에 대한 낙관’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인간이 완전히 객관적일 수 있다고 보지 않았다. 오히려 인간의 생각은 언제든 과잉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료는 진리를 보장하는 수단이 아니라, 사유를 제어하는 저항물이어야 한다고 여겼다. 사료는 말을 하게 하기보다는, 함부로 말하지 못하도록 막는 역할을 했다.

이 과정을 거치며 랑케의 생각도 점점 또렷해진다. 역사학은 더 이상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학문이 아니라, 의미가 어디까지 허용되는지 점검하는 학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료 비판은 진리를 곧바로 얻는 길이 아니라, 오류와 독단을 피하기 위한 우회로였다. 랑케의 실증주의를 ‘공격적인 과학주의’가 아니라 ‘방어적인 윤리’, 그 자체로 이해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2장에서 드러나는 랑케의 이런 선택은 아직 제도적 형태를 갖추진 못했다. 어디까지나 하나의 태도이자 훈련, 그리고 그가 느꼈던 불안에서 비롯된 방법적 결심이었다. 다음 장에서는 이런 태도가 어떻게 공식 선언으로 정리되었는지, 그리고 “있는 그대로”라는 유명한 문장이 어떤 긴장을 품고 있었던 것인지 살펴볼 것이다.

 

  1. “있는 그대로”라는 선언: 한 문장이 불러온 약속과 긴장

랑케라는 이름이 사학사史學史에서 하나의 전환점으로 기억되는 이유는, 그가 남긴 수많은 연구 결과보다는 한 문장에 있다. “역사는 과거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어야 한다.” 자신의 첫 주요 저작인 《라틴 및 게르만 민족의 역사》 서문에서 남긴 이 문장은 이후 역사학에서 표어처럼 되풀이됐고, 실증주의의 선언으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이 말은 단순한 방법론을 넘어, 랑케가 오랫동안 안고 있던 지적 불안과 윤리적 선택이 집약된 것이었다.

 

랑케의 첫 저작 『라틴 및 게르만 민족의 역사(1494–1514)』 앞면 표지.

 

이 선언이 등장한 시기는 그의 첫 주요 저작이 출간될 무렵이었다. 교사로 일하던 시절을 지나 학문적 세계로 본격적으로 들어선 랑케는 이제 자신의 연구 입장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야 했다. 그는 거창한 철학적 체계를 만들기보다는, 역사를 어떤 태도로 대할지 단호하고 간결하게 밝혔다. 이 선언은 세계를 설명하겠다는 약속이라기보다, 어디까지 말할 수 있는지, 스스로 그 한계를 긋는 다짐에 가까웠다.

그런데 “있는 그대로”라는 표현은 곧 오해를 불러왔다. 후대의 많은 독자들은, 마치 역사가가 아무런 해석 없이 과거 사실만을 복제할 수 있다는 주장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랑케에게 이 문장은 그런 의미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인간은 해석을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 말은 능력 이상의 것을 약속한 게 아니라, 스스로에게 부과한 의무 같은 것이었다. 즉, 역사가로서 자기 상상력이나 철학적 욕구를 억제해야 한다는 윤리적 요청이었던 셈이다.

이 선언이 가진 또 하나의 중요한 맥락은 당시 독일 지성 사이에서 철학이 차지하던 위상에 있다. 그 시대 역사학은 여전히 철학의 보충설명이나 예시 취급을 받곤 했다. 개별 사건들은 곧잘 보편적 개념의 사례로 묶였다. 랑케의 선언은 이에 대한 조용하지만 뚜렷한 거부였다. 역사는 철학을 뒷받침하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그 자체로 말할 권리를 가진 영역이라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이 문장은 처음부터 긴장을 안고 있었다. “있는 그대로” 보여주자면, 우선 무엇이 ‘있는 것’인지를 먼저 선택해야 했다. 어떤 기록을 사료로 삼을지, 어느 문서에 신뢰를 둘지, 어떤 자료는 배제할지 — 이런 결정 하나하나가 이미 선택의 문제였다. 랑케는 이 사실을 회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선택의 과정 자체를 드러내고, 최대한 엄격한 기준을 세우려 했다. 이렇게 사료 비판은 단순히 기술이 아니라, 선언이 성립하려면 꼭 필요했던 조건이 됐다.

이 선언 이후 랑케의 작업은 점점 뚜렷한 방향성을 띤다. 그는 역사를 한 편의 거대한 이야기로 통합하려 하지 않았고, 사건들 사이에 불가피한 인과관계를 섣불리 설정하지도 않았다. 대신 각 사건이 처해 있던 고유한 맥락을 복원하는 데 힘썼다. 이 때문에 역사가 잘게 나뉠 때도 있었지만, 각 사건이 철학적 목적론에 휩쓸리지 않도록 막는 효과도 있었다.

주목할 점은, 이 선언이 역사학에 자유를 가져다주면서 동시에 새로운 부담을 안겼다는 사실이다. 더 이상 철학 체계에 기대지 못하게 된 역사학은, 이제 스스로 근거를 세워야 했다. 사실을 말하겠다는 약속은 곧 사실에 대한 책임도 스스로 져야 함을 의미했다. “있는 그대로”라는 짧은 문장은, 역사학을 해방시키면서도 동시에 외롭게 만든 선언이었다.

이 장에서 드러나는 랑케는 확신에 찬 혁명가라기보다, 스스로를 늘 제한하던 학자다. 그의 선언은 거대한 체계를 뒤흔드는 외침이 아니라, 자신이 말할 수 있는 범위를 조심스럽게 좁히는 자기 통제였다. 다음 장에서는, 이 자기 통제가 국가 문서와 어떻게 결합되어 ‘객관성’이라는 학문적 기준으로 제도화되는지 살펴볼 것이다.

 

  1. 국가 문서와 객관성의 탄생: 학문적 윤리가 제도로 굳어지다

랑케의 사유가 개인적 결단이나 방법적 태도의 차원에만 머물렀다면, 그것은 하나의 학문적 시도로 끝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실증주의는 곧 제도와 결합하면서 근대 역사학의 기준으로 자리 잡게 된다. 이 변화의 중심에는 국가 문서와, 그것을 통해 형성된 ‘객관성’이라는 새로운 학문의 규범이 있었다.

랑케가 활동하던 당시 독일은 근대 국가 체제가 빠른 속도로 마련되던 시기였다. 관료제와 기록 행정, 그리고 공문서 보관 체계가 정비되면서 국가는 점점 더 자신을 문서로 남기는 존재가 되었다. 외교 문서, 조약, 행정 기록, 왕실 문서 등은 단순한 행정 자료 이상의 의미를 갖게 되었고, 점점 과거를 재구성할 수 있는 가장 신뢰할 만한 근거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랑케는 이 국가 문서의 잠재력을 누구보다 날카롭게 읽어냈다. 국가 기록은 개인의 기억이나 전설과 달리 작성 시점과 목적이 분명했고, 서로 대조할 수도 있었다. 랑케는 이러한 문서를 통해 역사학이 철학적 추론이나 문학적 상상력에 기대지 않고도 나름의 근거를 세울 수 있다고 보았다. 이제 국가 문서는 단순한 참고 자료가 아니라 객관성을 뒷받침하는 핵심 토대로 떠올랐다.

하지만 이런 변화가 모두 자발적인 선택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랑케가 대학에서 강의하고, 세미나를 열어 제자를 길러내며, 학문적 영향력을 넓혀갈 수 있었던 바탕에는 프로이센 국가의 지원과 제도적 환경이 자리잡고 있었다. 실증주의는 학문적 윤리일 뿐 아니라, 국가가 요구하던 질서와도 잘 맞았다. 사실을 바탕으로 한 역사, 문서로 확인된 과거는 국가의 합리성과 연속성을 뒷받침하는 데 유리했기 때문이다.

훔볼트 베를린 대학교 (당시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학교). 랑케는 이곳에서 강의와 세미나를 통해 실증주의 역사학을 제도화하였다.

 

이렇게 ‘객관성’은 더 이상 개인의 태도에 그치지 않게 된다. 학문 공동체 전체가 공유해야 할 기준, 그리고 반드시 따라야 할 규율로 자리 잡는다. 역사가에게 요구되는 덕목도 창의성이나 통찰력에서 벗어나, 문서를 정확히 다루는 능력과 절제된 언어로 바뀌었다. 무엇을 말할 수 있느냐보다, 무엇은 말해서는 안 되는가가 더 중요해진 셈이다.

랑케도 이 과정을 완전히 통제하지는 못했다. 그에게 객관성이란 인간의 한계를 자각한 결과였지만, 제도 속에서 객관성은 점차 가치 중립의 신화로 굳어졌다. 사료에 근거한다는 점이 곧 정당성의 증표가 되었고, 문서로 남지 않은 경험은 점점 역사적 목소리를 잃어갔다. 객관성은 역사학을 지켜주었지만, 동시에 그 범위 역시 좁혀 놓았다.

그럼에도 이 과정은 랑케 실증주의에서 결정적이었다. 처음에는 개인의 윤리였던 태도가 결국 학문의 제도로 자리 잡으며, 역사학은 비로소 독립된 학문으로 인정받는다. 철학의 영향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방법과 규칙을 갖춘 하나의 영역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물론 이 독립에는 대가도 따랐다. 역사학은 점차 국가 문서가 허용하는 세계에 머물러야 했고, 다른 형태의 기억과 경험은 점점 바깥으로 밀려났다.

이 지점에서 분명해지는 것은, 랑케의 실증주의가 단순히 사실을 중시하는 학문적 태도에 그치지 않고 근대 국가와 결합하며 객관성을 제도적으로 굳혀버린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었다는 점이다. 개인의 윤리적 결단에서 시작된 사실 중심의 태도는 국가 문서와 학문 제도를 통해 곧 표준으로 자리 잡았고, 역사학은 철학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립된 학문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는 분명 하나의 성공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 성공의 순간부터 새로운 문제가 조용히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객관성은 언제부터 미덕으로 여겨지게 되었을까? 사실을 말한다는 기준이 언제부터 말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을 정당화하는 장치로 작동하기 시작했을까? 그리고 개인의 불안에서 비롯된 자기 절제가 제도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변형되는지 궁금해진다.

다음 장에서는 이렇게 제도화된 객관성이 랑케 개인에게 어떤 긴장과 자기 억제를 요구했는지, 특히 그의 종교적 배경과 충돌하면서 어떤 내적 훈련으로 이어졌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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