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조리 — 복을 담던 물건에서, 복을 생각하게 하는 말까지
“안녕하다”, “고맙다”, “신나다”.
이 말들은 한국어 속에 오래 머물며 우리의 삶과 감정을 비춰 주는 말들이었다. 이번에는 그다음으로, 누구나 좋아하고 누구나 바라는 말, ‘복’(福)이 들어간 물건 ‘복조리’를 이야기해 보려 한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아마 한국 사회에서 이만큼 자주, 이만큼 자연스럽게 오가는 문장도 드물 것이다. 새해가 되면 문자메시지, 메신저 이모티콘, 카드 문구, 광고 문장 어디에서나 ‘복’은 빠지지 않는다. 그런데 문득 이런 질문이 떠오른다. 우리는 이렇게 ‘복’을 자주 말하면서도, 정작 복조리라는 물건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혹은 더 나아가, 조리가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세대가 이미 다수가 된 지금, 복조리는 우리에게 여전히 의미 있는 물건일까? 아니면 상징만 남은 오래된 유물일까? 이번 글에서는 이 질문을 따라가며, 복조리를 둘러싼 물건·언어·생활·의식의 변화를 함께 살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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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리란 무엇인가
‘조리’는 한때 한국의 부엌에서 흔히 볼 수 있던 기구였다. 대나무보다 훨씬 가늘고 낮게 자라는 조릿대를 쪼개 엮어 만든 체 모양의 도구로, 쌀을 씻고 이는 데 쓰였다. 조리에 사용되는 조릿대는 흔히 산죽이라 불리는데, 잎의 모양은 대나무와 닮았으나 키는 1미터 남짓, 굵기도 몇 밀리미터에 불과한 아주 소박한 식물이다.
한국에는 신이대, 제주조릿대, 섬조릿대, 갓대 등 다양한 조릿대가 자라 왔고, 이 가늘고 질긴 식물은 조리를 만드는 데 알맞은 재료였다. 쌀을 씻어 조리로 일어내면 돌이나 겨 같은 불순물이 걸러지고, 손에는 쌀알의 무게와 감촉이 남는다. 밥을 짓는다는 일은 이렇게 손의 노동과 감각을 동반한 과정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이러한 풍경은 거의 사라졌다. 쌀은 이미 세척되어 포장된 채로 유통되고, 밥은 전기밥솥의 버튼 하나로 완성된다. 조리는 더이상 필수적인 주방 도구가 아니며, 많은 세대에게는 이름조차 낯선 물건이 되었다. 이처럼 조리는 생활의 변화와 함께 기능을 잃은 물건이 되었지만, 바로 그 조리가 ‘복’이라는 말과 결합하면서 전혀 다른 문화적 의미를 얻게 된다.
그런데, ‘조리’라는 말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조리’는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한자 ‘笊籬’로 표기되는 말이다. 이러한 사전의 분류에 따라 ‘복조리’ 역시 ‘福笊籬’라는 한자어로 정리된다. 다만 이는 문헌에 정착된 표기를 따른 결과이지, 반드시 말의 기원이 한자어였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조리는 쌀을 씻고 일어 불순물을 거르는 부엌의 일상 도구로, 문자 기록 이전부터 생활 속에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큰 말이다. 어원적으로 보았을 때 조리는 쌀을 흔들어 일어내고, 알곡과 불순물을 가려내는 동작과 깊이 연결된 말이다. ‘조르르’ 떨어지는 움직임이나, 무엇인가를 거르고 남기는 행위의 감각이 이 말에 스며 있다. 그래서 국어학과 민속학 분야에서는 ‘조리’를 한자로 설명하나 생활 경험에서 먼저 형성된 말로 이해하기도 한다. 즉, 조리는 한자어로 기록된 생활어, 혹은 생활어가 한자어가 된 사례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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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조리는 무엇인가 — 만들어지고, 걸리고, 불리던 물건
복조리는 조리 가운데서도 특별한 존재감을 지닌다. 조리가 일상의 기구였다면, 복조리는 정월의 물건이었다. 새해를 맞아 새로 마련해 집 안에 걸어두는 조리를 복조리라 불렀는데, 이는 쌀을 일어 알곡을 담듯이 한 해의 복을 담아 둔다는 염원에서 비롯된 풍속이다. 복조리는 쓰임보다는 의미가 앞서는 물건이었고, 그래서 조리 가운데서도 특별한 자리를 차지했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는 한국적인 사고방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복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마치 쌀알처럼 담을 수 있고, 모을 수 있으며, 흘려보내지 않도록 관리해야 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복조리는 장식이 아니라, 새해를 맞이하며 삶의 질서를 새로 세우는 물건이 된 것이다.
어떤 지역에서는 복조리와 함께 갈퀴를 사기도 했다. 조리가 ‘일어 담는’ 도구라면, 갈퀴는 ‘긁어모으는’ 도구였다. 이 두 도구를 나란히 두는 행위는 복을 우연히 얻는 것이 아니라, 부지런히 모아야 할 대상으로 인식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런데, 복조리는 개인이 즉석에서 만들어 쓰는 물건이 아니라, 공동체의 손을 거쳐 만들어진 물건이기도 했다. 전남 화순의 이른바 ‘복조리마을’은 이러한 전통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백아산 줄기 아래 자리한 이 마을은 주변에 조릿대가 풍부하게 자라, 예부터 농한기마다 마을 사람들이 공동작업장에 모여 복조리를 만들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복조리는 마을의 생계 수단이자, 새해를 맞이하는 전국 각지 사람들의 복을 매개하는 물건으로 유통되었다.
이 점에서 복조리는 단순한 길상물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자연에서 자란 조릿대, 농한기의 노동, 공동 제작과 장터의 유통을 거쳐 완성된 생활과 노동의 결정체였다. 복조리를 걸어둔다는 행위는 곧, 복이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손과 시간이 개입된 결과임을 알고 있다는 표시이기도 했다.
따라서, 복조리는 생활 도구이면서 동시에 상징이었다. 중요한 점은 이 두 기능이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쌀을 다루는 손의 감각, 밥을 짓는 수고, 가족의 끼니를 책임지는 노동이 있었기에 ‘복을 담는다’는 상징도 설득력을 가질 수 있었다. 다시 말해, 복조리의 의미는 생활에서 솟아난 의미였다.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손으로 만지고 몸으로 아는 경험이 상징의 토대가 되었다. 그래서 복조리는 단순히 “복을 상징한다”는 설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것은 복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한 한국인의 인식을 담은 물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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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생활과 복조리 — 사라진 기구, 남은 말
조리는 농경문화가 낳은 주방 도구였다. 벼를 거두고, 도정을 거쳐 쌀알을 얻고, 그 쌀을 씻어 밥을 짓는 과정이 생활의 중심에 놓였던 시대에는 ‘쌀을 다루는 손’이 곧 살림의 기본 기술이었다. 조리는 그 기술의 중간에 자리하며, 쌀알을 고르고 걸러내는 일을 도맡았다. 조리가 필요했던 까닭은 단순하다. 쌀이 집으로 들어오기까지의 과정이 지금처럼 정돈되어 있지 않았고, 집안에서 밥상으로 이어지는 마지막 단계에서 여전히 사람이 쌀을 ‘살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의 생활은 이 전제를 천천히, 그리고 결정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먼저 바뀐 것은 ‘먹는 것’만이 아니라 ‘쌀이 집으로 들어오는 방식’이었다. 도정 기술과 정미 시스템이 고도화되면서 쌀의 균질성이 높아졌고, 유통 과정에서는 이물 선별·품질 관리·포장 기술이 점점 표준화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쌀은 ‘가정이 최종적으로 손질해야 하는 재료’가 아니라 ‘바로 조리 가능한 상품’으로 성격이 바뀌었다. 최근에는 세척 또는 부분 세척을 전제로 한 제품, 진공 포장이나 소포장, 보관 편의성이 강화된 형태까지 등장하면서, 쌀을 씻고 일어내는 과정 자체가 더 짧아지거나 생략되기도 한다. 조리가 담당하던 기능은 이렇게 생산–가공–유통 단계에서 점차 흡수되었다.
주방 내부에서도 변화가 이어졌다. 과거의 부엌에는 밥을 중심으로 한 도구들이 주요 자리를 차지했다. 체, 키, 조리, 소쿠리 같은 ‘거르고, 고르고, 말리는’ 도구들은 쌀과 곡물을 다루는 생활 리듬과 맞물려 있었다. 현대의 주방은 다른 방향으로 채워졌다. 곡물의 선별보다 식재료의 분쇄·혼합·거품·반죽이 중요한 조리 환경이 되었고, 블렌더, 믹서기, 거품기, 오븐 도구처럼 제과·제빵과 가공 조리에 유리한 기구들이 주방의 주연이 되었다. 밥을 짓는 일 자체는 더 쉬워졌다. 전기밥솥은 물의 양과 시간, 온도를 자동으로 관리하며, ‘쌀을 씻고 불리고 고르고’의 감각을 ‘버튼을 누르는 행위’로 바꾸어 놓았다. 삶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주방에서 오래 머무는 시간은 줄었고, 그만큼 손의 노동을 요구하는 도구들은 설 자리를 잃었다.
이 변화는 단지 편리함의 문제가 아니다. 조리가 사라진다는 것은, 쌀을 다루던 감각의 퇴장을 뜻한다. 손끝으로 쌀알을 살피고, 물속에서 이물질을 건져 내고, 조리로 일어 알곡만 남기는 과정은 단순한 ‘준비’가 아니라 생활의 태도였다.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남길지 판단하고, 가족의 한 끼를 위해 시간을 들이는 과정은 일상의 윤리로 축적되었다. 조리가 부엌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은 그 윤리가 더는 동일한 형태로 재생산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함에도 ‘복’이라는 말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강해졌다. 새해 인사에서 ‘복’은 거의 필수어가 되었고, 이모티콘에는 ‘福’ 자를 들고 웃는 캐릭터들이 넘쳐난다. “복 터지는 세일”, “복 담아 드립니다”, “복템”, “복이 들어오는 가격” 같은 문구도 낯설지 않다. ‘복’은 이제 설명이 없어도 모두가 즉각 반응하는 강력한 언어 기호가 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바로 여기에서 발생한다. 복을 담던 물건(복조리)은 사라졌는데, 복을 말하는 언어는 훨씬 더 자주, 더 크게 울린다는 역설이다.
이 역설은 ‘복조리가 의미를 잃었다’는 결론으로 곧장 이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현대 사회는 복을 다루는 방식이 바뀐 것으로 볼 수 있다. 과거의 복은 손으로 ‘담는’ 것이었다. 조리로 알곡을 남기듯 복을 일어 담는 상상은, 생활 노동과 분리되지 않았다. 오늘의 복은 말과 이미지로 ‘호명되는’ 경향이 강하다. 복은 주방에서 체화되는 경험이기보다, 메시지와 디자인, 이벤트와 소비의 언어 속에서 호출된다. 복을 담는 그릇은 약해졌으나, 복을 부르는 언어는 증폭된 셈이다.
이렇게 보면 ‘사라진 기구, 남은 말’은 단순한 향수의 문장이 아니다. 그것은 생활문화의 구조 변화가 상징의 구조까지 바꿔 놓았다는 관찰이다. 조리의 퇴장은 쌀 중심 생활 리듬의 퇴장이고, 복조리의 약화는 ‘복을 생활 속에서 다루는 방식’의 변화다. 그렇지만, 복이라는 말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여전히 복을 필요로 하고, 복을 기대하며, 복을 삶의 목표로 삼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결국, 질문은 이렇게 남는다. 오늘날 우리는 무엇으로 복을 담고 있는가. 그리고 그 복은, 어떤 생활의 습관과 노동 위에서 비로소 현실이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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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을 부르는 물건들 — 복조리 이후의 세계
앞에서 나는 질문 하나를 남겼다. 오늘날 우리는 무엇으로 복을 담고 있는가. 그리고 그 복은 어떤 생활의 습관과 노동 위에서 비로소 현실이 되는가. 복조리가 부엌에서 사라진 뒤에도 이 질문이 유효하다는 사실은, 복이 단지 전통의 잔재가 아니라 여전히 현재형의 욕망이자 의식이라는 점을 말해 준다. 다만 복을 담는 그릇과 복을 부르는 방식이 달라졌을 뿐이다.
복조리가 사라진 자리를 완전히 대신한 단 하나의 물건이 있는 것은 아니다. 대신 현대 사회는 복을 상징하고 호출하는 장치를 분산형으로 만들어 왔다. 새해가 되면 복주머니 이미지가 인쇄된 포장지와 봉투, 금색 ‘福’ 글자 스티커와 장식, 복을 의미하는 캐릭터 이모티콘이 순식간에 유통된다. ‘복’은 물건 자체로 존재하기보다, 디자인과 문구 속에서 빠르게 변환되는 기호의 형태로 살아남는다. 복이 ‘조리로 담는’ 경험에서 떨어져 나온 대신, 복은 어느 때보다 손쉽게 복제·전달·소비되는 언어와 이미지가 되었다.
이 흐름은 단순히 “소비가 상징을 대체했다.”라는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현대의 복은 더 복잡한 층위를 가진다. 한쪽에는 여전히 “복 받으세요”처럼 수동적 수혜의 언어가 있다. 그러나 다른 한쪽에는 “복 많이 지으세요”라는 능동의 언어가 있다. ‘복을 받는다’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선물의 어조라면, ‘복을 짓는다’는 내가 복의 생산자이자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선언에 가깝다. 필자가 새해 인사에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뿐 아니라 “복 많이 지으세요”를 함께 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복을 단지 운으로만 환원하지 않고, 삶의 태도와 행위로 만들어가는 것으로 다시 호출하려는 시도다.
이 능동의 감각은 현대의 신조어와도 연결된다. 오늘날 사람들은 ‘복’과 비슷한 결로 “대박”이라는 단어를 자주 쓴다. “대박 나세요”, “대박 터졌다”, “대박 기원” 같은 표현에서 ‘대박’은 더이상 도박판의 은어가 아니다. 그것은 성공, 행운, 물질적 풍요, 관계의 호전, 삶의 전환까지 폭넓게 포괄하는 현대식 길상어로 기능한다. ‘복’이 오래된 축복의 말이라면, ‘대박’은 속도감 있는 축복이다. “복”이 비교적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행복을 떠올리게 한다면, “대박”은 순간적인 상승과 터짐, 즉 인생의 판이 바뀌는 극적 전환을 암시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복’을 빌면서도 동시에 ‘대박’을 꿈꾸고, 두 말을 필요에 따라 오가며 현대의 욕망을 조율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단어의 변화가 아니라, 단어가 드러내는 복의 의미 변화다. 전통 사회에서 복은 먹고 사는 기반이자 집안의 평안, 장수, 자손 번성 같은 삶의 지속성과 연결된 경우가 많았다. 반면 현대에서 복은 ‘행복’과 겹치면서도, 종종 ‘성과’와 ‘성공’의 언어로 번역된다. 취업, 승진, 매출, 조회수, 팔로워 같은 지표가 생활을 설명하는 단위가 되었고, 복은 이런 지표가 올라갈 때 “복이 왔다”는 식으로 말해진다. 그래서 오늘날 복은 정서적 만족뿐 아니라 물질적 안정과 사회적 인정의 층위까지 포괄한다. 복의 외연이 확장된 만큼, 복을 부르는 언어도 더 다양하고 즉각성을 띈다.
이때 “복을 부르는 물건들” 또한 달라진 방식으로 작동한다. 예전의 복조리가 ‘집 안에 걸어두고 한 해 동안 바라보는 상징’이었다면, 오늘날의 복 상징은 굴러다니는 상징이다. 메시지로 오가고, 포장지에 인쇄되고, 상품명에 붙고, 이벤트 배너에 박힌다. 복은 더이상 한 공간에 정착한 물건이 아니라, 네트워크를 따라 이동하는 기호다. 말하자면 복은 ‘집의 물건’에서 ‘사회적 유통물’로 성격이 바뀌었다. 복조리의 상징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복을 매개하는 경로가 부엌의 내부에서 시장과 플랫폼의 외부로 이동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현대의 복이 오로지 소비와 기대의 언어로만 환원되는 것은 아니다. 앞서 말한 “복 많이 지으세요”는, 현대의 복 담기가 완전히 수동화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복을 짓는다는 말은 결국 삶의 습관을 묻는다. 복은 우연히 ‘터지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반복되는 루틴 속에서 ‘쌓이는’ 것이기도 하다. 건강을 챙기는 습관, 관계를 지키는 태도, 시간을 성실히 쓰는 노력, 남의 성장을 돕는 마음 같은 것들이 결국 복을 만든다는 믿음이 이 표현 속에 있다. 복을 부르는 물건이 분산되고 이미지화된 시대일수록, 오히려 우리는 복의 근거를 다시 생활 속으로 끌어오고 싶어 한다. 그래서 ‘복’과 ‘대박’ 사이에는 미묘한 긴장이 존재한다. 대박이 외부에서 오는 전환을 상징한다면, 복을 짓는다는 말은 내부에서 쌓아 올리는 삶을 상징한다. 현대인의 언어는 이 두 방향을 동시에 쥐고 흔들며, 불안과 희망을 조절한다.
이렇게 전통의 복과 현대의 대박을 나란히 놓고 보면, 두 표현은 시대에 따라 달라진 언어일 뿐, 완전히 다른 욕망을 가리키는 말은 아니라는 점도 드러난다. 옛사람들이 복을 기원하며 조리에 마음을 얹었던 이유 역시, 복이 곧 삶을 유지하게 하는 힘, 다시 말해 녹(祿)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주식이자 생명이었던 쌀을 이는 조리에 복을 붙인 것은, 복이 단순한 행운이 아니라 먹고 살 수 있는 기반, 생활을 지속하게 하는 조건과 맞닿아 있다는 인식의 표현이었다.
이러한 인식은 《도전》 9편 1장에 나오는 “인간의 복은 녹줄에 있고 오래 삶은 명줄에 있다”는 구절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상제님은 수명만 길고 복록이 없는 삶보다, 삶을 지탱하는 녹이 끊어진 상태를 더 근본적인 문제로 짚는다. 이는 복을 단순히 오래 사는 문제나 추상적 행복이 아니라, 삶이 존엄하게 유지될 수 있는 조건, 곧 생활과 노동이 이어지는 힘으로 이해한 관점이라 할 수 있다.
이 맥락에서 보면, 오늘날 사람들이 말하는 ‘대박’ 역시 전통의 복과 완전히 단절된 개념은 아니다. 표현은 달라졌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생계를 안정시키고 삶의 판을 지탱해 줄 녹에 대한 갈망이 들어 있다. 복조리에서 대박으로 이어지는 언어의 변화는, 복이 주방에서 쌀을 이는 손의 감각으로 체화되지는 않지만, 여전히 삶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결국, 복조리 이후의 세계에서 복은 두 얼굴을 갖는다. 하나는 메시지와 광고 속에서 번쩍이는 길상어로서의 복, 다른 하나는 내가 길러야 하는 생활의 결과로서의 복이다. 우리가 새해에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말할 때, 그 말은 여전히 따뜻한 축복이지만, 동시에 “복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라는 질문을 남긴다. 복조리의 시대가 끝났다고 해서 복의 시대가 끝난 것은 아니다. 다만 복은 이제, 물건보다 언어로 더 자주 떠돌고, 언어는 다시 우리에게 생활을 요구한다. 복이 굴러들어오기를 기다리는 마음과, 복을 스스로 짓겠다는 마음이 함께 존재하는 곳. 그곳이 오늘날 ‘복’이 놓인 자리다.
― 받는 복과 짓는 복 사이에서
조리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복조리를 거쳐, 물건과 언어가 함께 이동하는 문화의 변화를 보여준다. 쌀을 씻고 일어 알곡을 남기던 조리는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남길지 판단하는 생활의 태도를 길러 왔고, 그 손의 경험 위에서 복은 저절로 굴러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가려 담고 모아야 할 것으로 기원했다. 그러나 도정과 유통의 표준화, 전기밥솥과 가공식의 보편화로 조리는 주방에서 물러났고, 그 자리는 다른 생활 리듬을 대표하는 기구들로 채워졌다. 그와 함께 쌀을 다루던 감각과 노동의 기억은 희미해졌지만, ‘복’이라는 말은 오히려 더 크게 남아 새해 인사와 이모티콘, 마케팅 언어 속에서 끊임없이 호출되었고, ‘대박’ 같은 현대식 길상어는 복의 의미를 더 빠르고 즉각적인 욕망의 언어로 번역해 왔다. 이 흐름은 복조리가 단순한 민속품이 아니라, 어떤 물건이 기능을 잃을 때 그 의미가 사라지는 대신 언어와 기호의 다른 경로로 이동하며 문화 속에서 살아남는 과정을 보여주는 표지임을 드러낸다.
나는 이러한 변화가 곧 ‘복이 가벼워졌다’는 뜻으로 오해되지 않았으면 한다. 오히려 오늘날 우리가 새해에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말할 때, 그 말은 여전히 따뜻한 축복인 동시에 질문이 된다. 복은 단지 받아야 할 선물인가, 아니면 지어야 할 삶의 결과인가. 그래서 나는 종종 인사를 바꿔 말해 본다. “복 많이 받으세요.” 그리고 “복 많이 지으세요.” 주어지는 복도 귀하게 여기며 잘 받고, 동시에 나의 습관과 노동, 관계와 선택 속에서 스스로 만들어 갈 복도 많이 짓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란다.
조리는 사라졌지만, 복은 남았다. 복조리는 사라진 물건이 아니라, 우리가 복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지 계속 묻는 물건이다. 이 글을 읽는 모든 이가 새해에—혹은 계절과 무관하게 어느 날이든—굴러들어오는 복을 가볍게 걷어차지 않고, 내 손으로 지어 올릴 수 있는 복도 차곡차곡 쌓아 가는 시간 속에 있기를 바란다.
<참고문헌 및 사이트>
국립국어원, 인터넷 표준국어대사전, “조리” 항목
이기문(1998), 《국어 어원사 연구》, 태학사.
서정범(2000), 《우리말 어원사전》, 한길사.
김영조(2023), 《한국인이 알아야 할 한국문화 이야기》, 얼레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