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푸코 《담론과 권력》

미셸 푸코의 《담론과 권력》 (판테온 북스, 1980)

POWER/KNOWLEDGE Selected Interviews and Other Writings 1972-1977

 

들어가는 말

우리는 정말 많은 말을 주고받으며 살아간다. 강연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칼럼이 쏟아지며, 유튜브와 SNS에는 매일같이 수많은 주장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렇게 말이 많아질수록, 정작 사회는 잘 움직이지 않는 듯하다. 논쟁은 끝없이 반복되고, 각자의 입장은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서로를 설득하기보다는 쓸데없이 힘만 빼는 경우가 더 많다.

이런 현상이 단순히 “전달력이 부족해서” 생긴 건 아니다. 더 근본적인 질문이 필요하다. 과연 우리는 같은 차원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걸까? 프랑스의 사상가 미셸 푸코는 이 문제를 색다른 방법으로 바라봤다. 그는 “무엇이 옳은가?”를 묻기 전에 “왜 어떤 말이 옳다고 여겨지게 되었는가?”를 먼저 따졌다. 그 답을, 푸코는 ‘담론’이라는 개념에서 찾아냈다.

푸코에게 담론은 단순한 의견이나 주장, 말의 내용을 뜻하지 않는다. 담론이란 우리가 생각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작동하는, 보이지 않는 질서다. 누가 무슨 이야기를 할 때 신뢰를 얻고, 반대로 누군가의 말이 쉽게 배제되는지. 어떤 질문이 학문적 질문으로 받아들여지고, 또 어떤 질문이 처음부터 금지되는지—이런 경계를 정하는 힘, 그게 바로 담론이다.

우리는 논쟁이 벌어질 때 흔히 “저 사람 논리가 틀렸다”거나 “증거가 부족하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푸코의 시각에서 보면, 대부분의 논쟁은 논리의 문제가 아니다. 이미 정해진 담론의 울타리 안에서는 아무리 새로운 이야기를 내놓아도 제자리걸음일 수밖에 없다.

이 글은 미셸 푸코의 『담론과 권력』을 소개하는 북리뷰이지만, 단순히 책 내용을 전달하는 데 그치고 싶진 않다. 이 책이 던지는 질문을 통해, 우리가 지금 어떤 방식으로 말하고 있는지, 왜 많은 말들이 실제로 힘을 갖지 못하는지 함께 고민해보고자 한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역사, 정치, 학문, 이념의 영역에서 담론이 더욱 강하게 작동해 왔다. 어떤 말은 오랜 시간 ‘정통’의 위치를 차지하고, 또 어떤 말은 손쉽게 ‘문제적 주장’으로 낙인찍히곤 했다. 그 과정이 마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처럼 느껴졌지만, 푸코는 바로 그 ‘당연함’에 의문을 던진다.

『담론과 권력』은 독자에게 명확한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질문의 방향 자체를 바꾼다. 그 변화만으로도 우리는 전에 없던 방식으로 말하고, 듣고, 생각하게 된다.

미셸 푸코 (1926-1984) — 지식은 중립적인 진리가 아니라, 말해질 수 있는 것을 규정하는 권력의 형식임을 드러낸 프랑스 사상가

 

  1. 왜 지금, ‘담론’인가 — 말이 힘을 갖는 방식은 어떻게 달라졌는가

말은 원래 힘과 깊게 얽혀 있다. 하지만 그 힘이 꼭 말의 진실함이나 열정에서만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말은 사회적으로 실제 힘을 발휘하는 반면, 아무리 거듭해도 주변만 맴도는 말도 있다. 두 가지를 갈라놓는 것이 바로 담론이다. 담론은 단순히 말의 내용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말이 어떤 의미를 갖게 만드는 조건이자,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지만 말을 거쳐야 하는 보이지 않는 질서다.

요즘은 누구의 권위 있는 말보다도 사회 구조가 훨씬 더 강하게 작동하는 시대다. 똑같은 주장이더라도, 어떤 담론에 기대고 있느냐에 따라 ‘상식’처럼 받아들여질 수도 있고, 반대로 ‘문제가 있는 발언’으로 몰릴 수도 있다. 이때 누군가의 의견이 배제되는 방식도 예전처럼 노골적인 검열이 아니다. 합리성이나 전문성, 혹은 학문성이라는 이름 아래 이뤄진다. 담론은 억압하거나 금지시키는 것보다는, 어떤 말을 정상으로 분류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만드는 과정으로 힘을 발휘한다.

미셸 푸코는 권력을 누군가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와 과정 속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봤다. 권력은 언제나 지식과 만나서 작동하며, 바로 이 결합이 벌어지는 무대가 담론이다. 담론이 자리를 잡으면, 할 수 있는 질문의 폭이 정해지고, 어떤 이슈는 자연스럽게 논의거리가 되지만 어떤 문제는 아예 묻는 것조차 불가능해진다. 이 모든 과정은 너무나도 익숙하고 자연스럽게 일어나서, 정작 우리는 그 구조를 잘 자각하지 못한다.

그래서 지금 중요한 것은 “무엇을 말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구조 속에서 말하고 있나”다. 담론의 구조를 인식하지 못한 채 쏟아내는 말은 결국 기존 질서를 반복하는 재료에 그칠 뿐이다. 『담론과 권력』이 오늘 다시 읽혀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책은 새로운 의견을 내세우기보다는, 우리가 말하기 전에 이미 작동하고 있는 조건들을 드러내 보여준다. 그리고 말의 수준이 아니라 질문의 수준을 바꾸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1. 미셸 푸코, 그는 어떤 시대를 살았는가 — 한 사상가는 어떻게 ‘담론’이라는 질문에 도달했는가

미셸 푸코는 1926년 프랑스 중부 푸아티에에서 태어났다. 그는 외과 의사 집안에서 비교적 안정된 중산층 환경 속에 자랐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제도와 규범에 대해 강한 어색함과 이질감을 느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집 안 분위기도 의학과 학문, 정상과 비정상이 철저히 구분되는 곳이었는데, 이런 경험은 훗날 푸코가 인간을 분류하고 규정하는 사회적 장치들에 주목하게 만든 밑바탕이 된다.

프랑스 푸아티에에 위치한 미셸 푸코의 출생지

파리의 고등사범학교에서 엘리트 교육을 받은 푸코는 철학과 심리학을 넘나들며 공부했다. 그러나 전통적인 철학자의 길에는 쉽게 안착하지 못했다. 그는 ‘인간 본질’이나 ‘보편적 이성’처럼 이미 익숙한 질문보다는, 왜 특정한 인간상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지를 더 집요하게 물었다. 이 시기 푸코에게 중요한 것은 사유의 논리적 완결성보다, 현실에서 작동하는 힘의 구조였다.

1950년대 후반, 푸코는 프랑스를 떠나 스웨덴의 웁살라와 폴란드, 독일 등지에서 연구와 교육 활동을 이어간다. 이때의 해외 체류가 푸코에게 결정적인 전환점이 됐다. 프랑스에서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여지던 학문적 관습과 제도들을, 다른 나라에서는 전혀 다르게 작동한다는 점을 몸소 느꼈기 때문이다. 진리와 정상성이 결코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는 인식도 이 시기에 더욱 뚜렷해졌다.

이후 푸코는 프랑스로 돌아와 본격적으로 연구를 시작한다. 그는 정신병원, 감옥, 병원, 학교 같은 제도들을 분석하는 데 몰두했다. 푸코의 관심사는 늘 같았다. 누가 권력을 쥐고 있느냐보다, 어떤 지식과 언어가 그 권력을 뒷받침하는지를 파고들었다. 그는 권력이 단순히 억압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인간을 설명하고 분류하며 ‘정상’으로 만들기도 한다는 점을 이 과정에서 통찰한다.

1960~70년대에 들어서면서 푸코는 미국을 자주 오가며 강연과 연구를 이어갔다. 특히 미국 사회에서 경험한 학문 제도와 정치적 담론은, 권력이 더 세련되고 분산된 방식으로도 작동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이것은 푸코가 권력을 단일한 중심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 얽혀 있는 관계망으로 이해하게 만드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담론과 권력』은 이런 푸코의 삶과 사유가 맞닿아 도달한 질문들을 담고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완성된 이론을 내세우기보다, 왜 자신이 ‘주장’이 아닌 ‘조건’에 주목하게 되었는지 반복해서 이야기한다. 푸코의 생애를 따라가다 보면, 그에게 ‘담론’이란 단순한 추상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사회, 제도의 경험 속에서 쌓여 온 실제적 문제임을 알게 된다. 그래서 그의 질문은 어느 한 시대에 머물지 않고,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우리에게 유효하게 다가온다.

 

  1. 『담론과 권력』은 어떤 책인가 — 이론서가 아니라, 사유가 작동하는 현장

『담론과 권력』은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철학책의 틀을 따르지 않는다. 이 책에서는 체계적으로 개념을 정의하거나, 단계적으로 이론을 전개하지 않는다. 대신 인터뷰, 대담, 강연, 짧은 발언들이 자연스럽게 뒤따른다. 처음 접하는 독자라면 다소 산만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바로 이런 형식이 이 책의 성격을 가장 잘 드러낸다. 이 책은 완성된 이론의 집합이 아니라, 푸코의 사유가 실제로 작동하는 현장을 고스란히 기록한 결과물이다.

푸코는 이 책에서 자신의 이론을 정리하거나 방어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질문을 던지고, 기존의 오해를 바로잡으며, 때때로 자신의 입장을 새롭게 조정하기도 한다. 그래서 『담론과 권력』을 읽다 보면 어떤 교리를 배우기보다는, 하나의 새로운 사고방식을 마주하게 된다. 결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문제를 제기하고 설정하는 그 과정 자체가 핵심이다.

책의 중심에는 ‘권력/지식’이라는 문제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 푸코는 지식을 결코 중립적이거나 순수한 진리 탐구로 보지 않는다. 지식은 항상 제도, 실천, 언어와 맞물려 있으며, 이런 결합을 통해 권력은 작동하기 시작한다. 반대로, 권력도 단순히 폭력이나 강제로만 세워지는 것이 아니다. 설명하고, 분류하고, 정상화하는 지식의 형태로 사회 전반에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담론과 권력』은 바로 이 지점 — 권력이 어떻게 말과 지식의 형태를 빌려 작동하는지 — 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이 책이 특정 대상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정신의학, 형벌 제도, 정치적 담론, 학문 제도 등 다양한 사례가 등장하지만, 세세한 사례 설명이 목적이 아니다. 푸코는 각 사례를 통해 반복해서 같은 질문을 던진다. 어떤 말이 진리로 자리 잡았는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떤 다른 가능성은 사라졌는가?

그래서 이 책은 독자에게 어느 정도 불편함을 남긴다.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알려주기보다는, 지금껏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것들을 스스로 의심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담론과 권력』은 독자를 설득하려는 책이라기보다, 깨어나게 만드는 책에 더 가깝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예전처럼 쉽게 말하거나 단정하기가 어려워진다.

이런 점에서 『담론과 권력』은 평범한 이론서가 아니다. 담론을 설명하는 동시에, 독자가 담론의 바깥을 경험하도록 한 발짝 물러서게 하는 실천적 텍스트에 가깝다. 푸코가 책 전반에 걸쳐 끊임없이 보여주는 것은 한 가지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주장하느냐’가 아니라, 그 주장이 가능하도록 만든 토대를 읽어내는 일이라는 점이다.

미셸 푸코가 1978년 서베를린 공과대학교에서 강연하는 모습

 

  1. 담론은 말이 아니다 —디스코스와 토크의 결정적 차이

우리가 담론을 이해할 때 가장 먼저 버려야 할 오해가 있다. 담론은 말을 잘하는 능력도 아니고, 여러 의견을 모아놓은 것도 아니다. 일상적인 대화나 주장은 흔히 ‘토크Talk’라고 부를 수 있지만, 푸코가 말한 담론, 즉 프랑스어 원어로는 ‘디스쿠르Discours’, 영어로는 ‘디스코스Discourse’라고 불리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에 자리한다. 토크가 한 개인의 발화라면, 디스코스는 바로 그 발화가 의미를 갖고 작동하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구조다.

사람들은 흔히 “각자의 의견을 존중하자”고 말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모든 의견이 똑같이 다뤄지지 않는다. 어떤 말은 전문적 의견으로 받아들여지고, 어떤 말은 단순한 감정 표현으로 치부되곤 한다. 똑같은 질문도 어떤 건 학문적 문제 제기로 인정받고, 어떤 건 애초에 진지하게 논의할 가치도 없는 것으로 취급된다. 이런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게 바로 ‘담론’이다.

담론은 누가 말을 할 수 있는지를 정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누가 이야기할 때 신뢰받을 수 있는가를 구분한다. 같은 말을 해도, 말하는 사람의 위치나 소속, 말투와 표현 방식에 따라 그 말의 무게와 의미가 전혀 달라진다. 이처럼 담론은 개인의 의지나 뜻과 별개로 따로 작동한다. 아무리 날카로운 비판을 품고 있어도, 담론의 규칙에서 벗어난 순간 그 말은 쉽게 무시당하거나 ‘비정상’이라는 꼬리표가 붙는다.

중요한 건 담론이 노골적으로 누군가의 입을 막는 방식으로만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담론은 단순히 금지하는 대신, 말들을 구분하고, 드러내기보다는 묵살하며, 우리가 무엇을 문제 삼을 수 있는지 선을 그어버린다. 그래서 담론이 꼭 억압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아주 합리적이고 중립적인 기준인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푸코는 이런 지점이 오히려 더 위험하다고 봤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강제에는 반발하지만, ‘상식’이라는 이름 아래엔 손쉽게 동의해버린다는 것이다.

푸코가 담론을 권력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담론은 권력이 가장 은근하게, 그리고 가장 잘 스며드는 장치다. 법이나 물리적 억압이 없어도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문제인지 각자의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는다. 결국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 말의 한계를 지키고, 질문의 범위를 제한하게 된다.

그래서 담론을 분석한다는 건 말의 옳고 그름을 판별하는 작업이 아니다. 왜 이 말은 가능하고, 저 말은 아예 논의조차 되지 않는지 그 원리를 묻는 일이다. 어떤 주장이 사실인지 따지는 것보다, 어떤 주장만이 아예 ‘논의될 수 있는 주장’으로 남게 되는지 바라보는 일이다. 이 차이를 깨닫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토크의 수준에서만 토론할 수 없다. 담론을 본다는 건, 말의 내용 저편에서 은밀하게 작동하는 힘과 구조를 읽어내는 일이다.

1972년 파리 시위 현장 — 경찰에 의해 사망한 모하메드 디아브 사건 이후, 중앙의 미셸 푸코와 오른쪽의 장 주네가 함께한 장면.

 

  1. 담론과 권력 이전의 자리 —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의 존재론적 독해

미셸 푸코는 권력을 억압이나 소유처럼 한쪽이 일방적으로 행사하는 힘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 퍼져 담론을 만들어내는 구조로 새롭게 설명했다. 푸코에게 권력은 누군가 손에 쥐고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무엇을 정상이라고 여기고 무엇을 말할 수 있는지 정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질서다. 담론은 이 질서를 전달하는 언어이자, 동시에 그 질서를 형성하는 작동 방식이다.

하지만 푸코의 분석에는 전제가 하나 깔려 있다. 그는 이미 인간 사회가 제도, 지식, 규범을 갖추고 담론과 권력이 나뉘어 있는 세계, 즉 분화 이후의 현실을 대상 삼아 논의를 펼친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이런 의문이 생긴다. 담론과 권력이 아직 갈라지지 않았고, 말, 법칙, 의미, 실재가 한 덩어리로 엉켜 있던 시기는 과연 없었을까?

이 질문에 맞닿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문장이 바로 신약성서 〈요한복음〉 1장 1절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하시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

여기서 ‘말씀’으로 번역된 로고스Logos는 흔히 쓰이는 언어나 담론과는 다르다. 로고스는 세계를 설명하려는 어떤 말이기보다, 애초에 세계 자체가 성립하고 질서를 이루는 근본 구조다. 의미, 법칙, 질서, 작동이 아직 구분되지 않은 한 덩어리의 원리인 셈이다.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는 표현은, 말이 누군가가 의도를 담아 사용하는 도구가 아니라, 존재의 질서 자체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구조임을 암시한다. 이런 층위에서는 담론과 권력이 따로 구분되지 않는다. 의미를 만드는 과정과 그 의미에 따라 세계가 조직되는 체계가 하나로 포개져 있기 때문이다. 로고스란 곧 말이면서 법칙이고, 해설이면서 동시에 작동이다. 이때 권력은 누군가를 억누르거나 지배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며, 세계 전체를 관통하는 질서의 필연성으로 드러난다.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라는 말은, 권력의 개념을 한층 더 근본적으로 뒤집는다. 세계를 움직이는 힘은 외부에서 내려오는 억압적 명령이 아니라, 내부에서 저절로 작동하는 의미의 구조라는 뜻이다. 세상은 힘이나 강제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각 사물과 현실을 배열하는 의미의 질서에 따라 스스로 이어진다.

여기서 푸코의 ‘담론–권력’ 이론과 ‘로고스’라는 사유가 나란히 만난다. 푸코가 탐구한 것은 담론과 권력이 분리된 사회, 즉 어떤 말이 진리로 인정되는지 그리고 어떤 말이 배제되는지가 역사와 제도 속에서 어떻게 작동했는지였다. 반면, 로고스의 관점은 옛 신화 시대를 그린 기록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우리 모두에게 열려 있는, 더 깊은 존재의 차원을 가리킨다. 그곳에서는 말이 도구가 아니라 세계 그 자체를 세우는 원리이고, 의미는 해석되는 게 아니라 실재를 짜는 구조다.

이런 구조에서는 ‘믿음’조차 필요하지 않다. 이미 그 자체로 질서가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믿음은 로고스와 실재, 담론과 권력이 분리된 이후에만 임시로 나타나는 말이다. 그래서 역설이 생긴다. 무언가를 믿어야 비로소 일이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세계 안에 존재할 때에는 ‘믿음’이란 말 자체가 자리를 잃는다.

〈요한복음〉 1장 1절은 바로 이 점을 단 한 문장으로 관통한다. 세계를 움직이는 가장 깊은 권력은 억압이 아니라 의미이고, 가장 본질적인 담론 역시 해설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원형을 아주 오래전부터 ‘로고스’라는 이름으로 불러왔다.

 

  1. 서사와 담론은 다르다 — 감동은 남고, 구조는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흔히 설득과 영향력의 비밀을 이야기, 즉 서사Narrative에서 찾는다. 감동적인 이야기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고 믿고, 메시지가 또렷하면 변화도 쉽게 찾아온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푸코의 시각에서 보면, 서사는 사람의 감정을 움직일 수 있을지언정 사회를 움직이는 데는 분명 한계가 있다. 서사는 공기처럼 퍼진 담론 위에서만 제대로 힘을 발휘한다. 담론이 허락하지 않는 이야기는 아무리 감동적이어도 주변부에 머물 뿐이다.

서사는 시작과 끝이 뚜렷하다. 원인과 결과가 이어지고, 누가 주인공이고 무슨 의미가 있는지까지 보여준다. 반면에 담론은 이야기보다 더 앞서 움직인다. 어떤 이야기가 ‘그럴듯하다’고 받아들여질지, 또 어떤 서사가 아예 귀 기울일 가치조차 없는 얘기로 취급될지, 이걸 결정한다. 그래서 담론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야기에 빠져들지만, 정작 그 이야기가 지나온 구조에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는다.

문제는 우리가 토론을 하거나, 강연을 듣거나, 글을 쓸 때 서사에만 너무 기대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새로운 이야기를 덧붙이고, 더 강렬한 감정에 호소하려 애쓰지만, 정작 그 서사가 의지하는 담론은 그대로 남아 있다. 이럴 때 서사는 비판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이전 질서를 다시 반복하는 도구가 돼버린다. 담론이라는 틀이 미리 짜놓은 질문 안에서만 움직이기 때문이다.

푸코가 경계한 것도 바로 이런 지점이다. 그는 억압적인 힘 자체보다, 해방을 말한다고 하면서도 똑같은 구조를 되풀이하는 언어를 더 위험하게 봤다. 선언적인 말은 순간적으로는 쉽사리 동의를 이끌어낼 수 있겠지만, 담론 자체를 바꿔내지 못하면 그 효과는 오래가지 못한다. 오히려 선언이 담론을 가리는 장막이 되어, 우리가 구조를 성찰할 기회를 빼앗아가기도 한다.

그러니 담론을 분석한다는 건 서사를 부정한다는 게 아니라, 그 서사가 어떤 조건에서 나올 수 있었는지를 두고 묻는 일이다. 한 이야기가 설득력을 얻는 바로 그 순간, 우리는 그 감동에 앞서 이 이야기를 가능하게 한 구조부터 읽어봐야 한다. 단순히 서사를 따라가는 데서 멈추지 않고, 담론까지 꿰뚫어볼 때 비로소 말의 진짜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알게 된다.

『담론과 권력』이 요구하는 태도는 분명하다. 더 감동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전에, 그 이야기들이 지나가는 보이지 않는 질서를 알아차리라는 것이다. 감동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구조를 볼 수 있을 때, 비로소 변화가 시작된다.

서사와 담론의 구조적 차이 (개념도)

 

  1. 담론을 장악한 자가 시대를 지배한다 — 조선 후기 정통 담론의 형성과 권력화

이 장에서 다루는 조선 후기의 성리학적 정통 논쟁 사례는 『담론과 권력』에 직접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푸코의 이론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담론과 권력이 실제 역사 속에서 어떻게 작동했는지를 보여주는 예시로 제시하는 것이다. 푸코의 개념을 그대로 적용하기보다는, 그의 문제의식을 빌려 한국사의 특정 장면을 새롭게 읽어보려는 시도임을 먼저 밝힌다.

조선 후기의 성리학적 정통 논쟁은 흔히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정치적 싸움으로만 설명된다. 물론 관직, 인사, 정국 운영을 둘러싼 갈등이 분명 존재했다. 하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진짜 핵심은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중요한 것은 누가 벼슬을 얻었는가가 아니라, 누가 ‘정통’이라고 인정받았는가였다. 정치적 승패는 결국 그 결과 중 하나일 뿐이었다.

이 시기의 다툼은 칼이나 군사를 앞세운 힘의 충돌이 아니었다. 오히려 언어와 해석, 기준을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싸움이었다. 무엇이 올바른 학문인지, 어떤 해석이 마땅한지, 누가 도통을 이을 만한 사람인지를 두고 날카로운 경쟁이 벌어졌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결정적인 위치를 차지한 인물이 바로 김장생과, 그 흐름을 이은 송시열이었다.

이들은 성리학, 그중에서도 예학을 단순한 학문 영역에 가두지 않았다. 예는 곧 사회의 질서였고, 그 질서는 모든 사람을 아우르는 기준이었다. ‘무엇이 올바른 예인가’를 둘러싼 해석이 도덕과 정치, 심지어 인간됨의 기준이 되어버렸다. 결국 이 학파의 언어가 점점 ‘정통’으로 자리를 잡았고, 그 기준은 제도와 관습 속 깊이 스며들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이 담론이 억압이나 폭력으로 강제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학문, 도덕, 정통이라는 이름 아래 아주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그 담론 안에 머물면 군자로 인정받고, 한 발짝만 벗어나도 곧바로 사문난적이란 낙인이 찍혔다. 여기서 사문난적은 단순한 이단이 아니라, 아예 발언 권리를 빼앗긴 사람을 의미했다. 반론은 애초에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해명조차 소용없었다. 담론의 바깥에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배제의 이유가 된 셈이다.

이 과정에서 권력은 노골적 탄압보다 훨씬 미묘하고 효율적으로 작동했다. 언어가 기준을 만들면, 그 기준이 사람을 가르고, 그러한 경계 짓기는 사회 전체에 은근히 스며들었다. 사람들은 처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정통에서 밀려난다’는 낙인이 두려워 스스로 말과 행동을 검열했다. 이것이 바로 푸코가 지적한 권력의 가장 정교한 형태다. 폭력보다 더 무서운 것은 언어였고, 제도보다 오래 남은 것은 담론이었다.

결국 조선 후기의 이 정통 논쟁은 한 가지 분명한 진실을 보여준다. 어느 시대든 세상을 쥐는 힘은 단지 무력만이 아니다.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문제인가’를 정의할 수 있는 언어의 힘을 가진 자가 시대를 이끄는 것이다. 당대의 정치적 귀결은 정치사 속 한 장면으로 남았지만, 그들이 만든 담론의 영향은 훨씬 더 오래 지속됐다. 『담론과 권력』의 시선으로 이 장면을 다시 살펴보면, 역사 속 권력이 어디에서 어떻게 작동했는지 한층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1. 『담론과 권력』이 독자에게 주는 통찰 — 왜 이 책은 지금 읽어야 하는가

『담론과 권력』이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큰 통찰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우리는 의견이 서로 충돌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구조들이 부딪히는 틀 안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논쟁은 새로운 주장들이 맞서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이미 자리 잡은 담론의 틀 안에서 비슷한 말들이 반복될 뿐이다. 그래서 말은 점점 많아지지만, 실질적인 변화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푸코는 독자에게 무엇을 믿으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무엇을 더 의심해야 하는지, 그 방향을 가리킨다. 어떤 질문은 자연스럽게 던져지는데, 또 어떤 질문은 유난히 불편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어떤 설명은 곧바로 설득력을 얻는 반면, 어떤 설명은 애초에 논의할 가치도 없어 보이는 일이 왜 생기는 걸까? 이 차이를 만드는 힘이 바로 담론이다. 담론이 먼저 우리의 사고 경계를 규정해둔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미 생각하기 전부터 어느 선을 넘지 못하도록 길들여진 셈이다.

이 시선을 받아들이고 나면, 세상은 예전과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논쟁이 격렬하다 해서 반드시 중요한 문제라는 뜻은 아니고, 침묵이 언제나 동의라는 신호도 아니다. 오히려 담론의 힘이 클수록 질문은 적어지고, 표현은 점차 뻔해진다. 서로 다른 말을 하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 비슷한 방식으로 사고가 고착된다. 푸코는 이렇게 굳어진 상황, 그러면서도 위험이 숨어 있는 현실을 특히 경계했다.

그래서 『담론과 권력』은 누군가에게 행동을 촉구하는 지침서라기보다는, 시선을 완전히 바꾸도록 유도하는 책이다. 이 책이 요구하는 건, 더 강하게 외치거나 논리를 치밀하게 다져라 같은 주문이 아니다. 오히려 한발 물러서서 그 주장이나 논쟁이 가능해지는 조건부터 들여다보라는 태도다. 이 자세는 쉽게 답을 내리진 않지만, 지겹도록 이어지는 소모적 논쟁을 잠시 멈추게 해준다.

결국 이 책이 독자에게 던지는 본질적 질문은 한 가지로 모인다. 지금 내가 분노하고 설득하려 애쓰는 이 이슈는 정말 의견의 문제가 맞을까, 아니면 더 깊이 파고들어야 할 담론의 문제일까? 이런 질문을 떠올리게 된 순간, 우리는 이전처럼 말할 수 없어진다. 바로 그 자리에서 『담론과 권력』은 단순한 이론서가 아니라, 현재를 꿰뚫어 볼 수 있는 강력한 도구가 된다.

 

나가는 말 — 『담론과 권력』이 우리에게 남기는 질문

미셸 푸코의 『담론과 권력』은 정답을 제시하는 책이 아니다. 이 책이 끝까지 붙잡고 놓지 않는 것은 하나의 태도, 즉 질문을 던지는 방식이다. 무엇이 옳은지 따지기보다, 무엇이 옳다고 여겨지게 됐는지를 묻는 시선이다. 얼핏 사소해 보여도, 이런 시선의 전환은 생각의 차원을 완전히 바꿔놓는다.

우리는 대체로 문제의 책임을 주장이나 인물, 혹은 이념 탓으로 돌린다. 그래서 더 강한 주장, 더 명확한 선언, 더 설득력 있는 이야기들을 원하게 된다. 하지만 푸코가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이런 방식이 오히려 기존의 질서를 얼마나 자주 되풀이하는지를 지적하는 불편한 진실이다. 담론이라는 구조를 보지 못한 채 쏟아지는 말은 마치 비판처럼 보일 수 있지만, 결국 이미 정해진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 책이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이유는, 우리가 여전히 담론이 지배하는 사회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학문, 역사, 정치, 문화 등 다양한 영역에서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문제인지를 나누는 기준들은 지금도 언어의 모양으로 스며들어 있다. 이 기준들은 너무 자연스러워서 의심조차 되지 않는다. 푸코가 겨냥한 지점이 바로 여기다. 가장 강력한 권력일수록 자신을 숨긴다.

『담론과 권력』을 읽는다는 건 그저 새로운 이론을 배우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 내가 딛고 서 있는 생각의 바닥을 다시 점검해보는 일이다. 내가 품는 질문들은 어디에서부터 가능해졌는지, 내가 배제하는 다른 가능성은 무엇이 있는지, 그리고 늘 당연하게 여겨온 이 기준은 언제,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는지 묻게 된다. 이런 물음들 앞에서 우리는 쉽게 답을 내릴 수 없다.

그래서 이 책은 읽기에 불편하다. 그러나 그 불편함이야말로 이 책의 가치다. 담론을 인식한다는 것은 더 이상 마음 편하게 확신만을 붙드는 태도에서 벗어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푸코는 더 잘 말하라는 요구를 하지 않는다. 오히려, 말하기 전에 이미 정해진 조건들을 먼저 보라고 요구한다. 이 요청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이전처럼 생각하거나 말할 수 없게 된다.

『담론과 권력』이 우리에게 남기는 것은 뚜렷한 결론이 아니라, 경계선이다. 그 선을 넘을지 말지는 독자에게 달렸다. 하지만 한 번이라도 그 선을 제대로 바라보고 나면, 세상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아마도 그것이 이 책이 가진, 가장 오래가는 힘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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