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서 실증주의는 어떻게 무너졌는가 1 ― 나치 체제와 객관성의 침묵

 

들어가기 — 객관성은 왜 시험대에 올랐는가

 

독일 역사학은 오랫동안 스스로를 가장 엄밀한 학문이라고 자부해 왔습니다. 사료에 근거하고, 감정을 배제하며, 정치적 입장을 삼가고, “당신들은 1933년에 무엇을 했는가.”라는 질문이 도달하기 훨씬 전부터, 이 학문은 자신의 과제를 과거의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복원하는 것이라고 규정해 왔습니다. 그 태도는 실증주의라는 이름으로 제도화되었습니다.

문제는 이 전통이 형성된 나라가 20세기 인류사 최악의 범죄를 저지른 체제를 경험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 체제 속에서 대학은 완전히 붕괴하지 않았습니다. 역사학 역시 완전히 침묵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상당수 학자들은 자리를 지켰고, 연구를 계속했으며, 때로는 정책에 협력했습니다.

그 사실 앞에서 불편한 질문이 시작됩니다. 객관성은 왜 저항하지 못했는가. 가치중립은 왜 권력 앞에서 무력했는가. 방법의 엄밀성은 왜 윤리적 판단을 대신할 수 없었는가.

실증주의는 본래 정치로부터 거리를 두기 위한 장치였습니다. 그러나 거리를 둔다는 태도는 위기 상황에서 책임을 유보하는 방식으로 작동할 수 있습니다. “나는 단지 자료를 다룰 뿐이다.” 이 문장은 학문적 겸손처럼 들리지만, 동시에 역사적 현실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는 문장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 글은 독일 역사학을 단죄하려는 작업이 아닙니다. 오히려 질문하려는 작업입니다. 어떤 구조에서 학문은 권력과 결합하는가. 객관성은 언제 방패가 되고, 언제 면죄부가 되는가. 성숙한 역사학은 무엇을 갖추어야 하는가.

독일은 이 질문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패전 이후, 특히 1960년대 이후, 독일 역사학은 스스로를 해부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 자기해부의 과정이 이 글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그 논의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실증주의는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왜 그것은 그렇게 강력했는가. 그리고 왜 그만큼 취약했는가. 이제 그 기원으로 돌아가겠습니다.

 

  1. 랑케의 유산과 제도화된 객관성

19세기 독일 역사학의 출발점에는 레오폴드 폰 랑케가 있습니다. 그는 역사의 과제를 과거가 실제로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규정했습니다. 이 문장은 단순한 학문적 선언이 아니라, 역사학을 도덕 철학이나 정치 이론으로부터 분리하려는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레오폴트 폰 랑케(1795–1886) — 근대 역사학을 확립한 독일의 실증주의 역사학자 좌측 사진 출처: 시러큐스대학교 미술관 소장, 「레오폴트 폰 랑케 초상」(1875년 경)

랑케 이전에도 역사는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역사를 철저한 사료 비판과 문헌 분석 위에 세우려 했습니다. 추측과 교훈 대신, 문서와 기록을 우선했습니다. 이 방법은 크게 세 가지 원칙으로 정리됩니다.

역사가의 상상력이 아니라 1차 사료가 판단의 기준이 됩니다. 문헌의 진위, 작성 시기, 작성자의 의도, 전승 과정까지 분석합니다. 그리고 역사가의 도덕적 평가보다, 사실의 재구성이 우선입니다.

이 세 원칙은 독일 대학 체제와 결합하면서 제도적 힘을 얻게 됩니다. 베를린 대학을 중심으로 세미나 제도가 정착되었고, 국가 문서보관소가 연구의 기반을 제공했습니다. 역사학은 국가의 후원 속에서 전문 학문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이 하나 있습니다. 독일 역사학은 국가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성장한 것이 아니라, 국가 체제 내부에서 제도화되었습니다. 프로이센 국가 모델은 행정과 학문을 분리하지 않았습니다. 국가의 근대화 과정 속에서 학문은 공적 권위의 일부가 되었고, 그 결과 역사학은 강력한 전문성을 확보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특정한 시각을 구조적으로 강화하게 됩니다. 국가 중심의 서술, 엘리트 정치사 중심 구조, 교수 네트워크 중심의 권위 체계가 그것입니다. 이는 단순한 학문적 선택이 아니라 제도적 조건이었습니다.

랑케의 실증주의는 본래 겸손한 방법론이었습니다. 역사가의 주관을 억제하고, 사실을 우선하겠다는 태도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 방법은 하나의 규범으로 굳어졌습니다. “객관성”은 비판받을 수 없는 가치처럼 자리 잡았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긴장이 생깁니다. 객관성은 학문을 엄밀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정치적 판단을 유보하는 습관을 강화했습니다. 이 문제는 평상시에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체제가 급변하고,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하며, 극단적 이데올로기가 등장할 때 이 구조는 시험대에 오르게 됩니다.

실증주의는 강력했습니다. 그만큼 취약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방법에 대한 확신이었지, 권력에 대한 비판 이론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질문은 다음 단계로 넘어갑니다. 제도화된 객관성은 정치적 격변 속에서 어떻게 작동했는가. 그 답은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서 찾아야 합니다.

 

  1. 바이마르 공화국과 방어적 중립

바이마르 공화국(1919~1933)은 태생부터 불안정했습니다. 패전의 충격, 베르사유 조약, 혁명과 쿠데타 시도, 초인플레이션, 극단적 정당의 성장. 공화국은 법적으로는 민주주의였지만, 사회적으로는 합의가 취약했습니다.

1920년 3월, 그 취약함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극우 세력이 베를린을 점령하며 정부 전복을 시도한 것입니다. 카프 쿠데타Kapp Putsch. 이 사건은 단 며칠 만에 실패로 끝났지만, 공화국이 얼마나 허약한 토대 위에 서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결정적 장면이었습니다. 합법 정부는 도시를 떠났고, 사태를 막은 것은 군대가 아니라 노동자들의 총파업이었습니다.

1920년 3월 베를린. 우익 준군사조직 프라이코어프가 정치인 볼프강 카프와 결탁해 바이마르 공화국 전복을 시도하며 무장 진입했다. 이것이 이른바 카프 폭동이다.

그렇다면 그때 대학은 무엇을 했는가. 역사학자들은 거리로 나가지 않았습니다. 공개 선언을 발표하지도 않았고, 민주공화국을 방어하는 지식인 성명을 조직하지도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오히려 더욱 강한 가치중립을 선언했습니다. 정치적 입장을 표명하기보다 학문적 엄밀성을 강조했고, 공화국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지도, 노골적으로 반대하지도 않았습니다.

이 태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 프리드리히 마이네케(Friedrich Meinecke)입니다. 마이네케는 제국 시기부터 활동한 저명한 역사학자였고, 자유주의적 문화 전통에 공감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민주주의를 공개적으로 적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공화국을 적극적으로 방어하는 정치적 지식인의 역할을 수행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역사학의 임무를 정치적 투쟁이 아니라 정신사적 탐구에 두었습니다. 국가와 권력의 문제를 다루었지만, 현실 정치의 갈등에 직접 개입하지는 않았습니다.

프리드리히 마이네케(1862-1954) ─ 독일 역사주의를 대표하는 역사학자로서, 국가이성과 민족주의의 긴장을 사유하며 근대 독일 역사철학의 방향을 제시한 사상가.

1923년, 독일은 또 한 번의 위기를 겪습니다. 화폐 가치는 붕괴했고, 사람들은 지폐를 수레에 실어 빵을 사야 했습니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초인플레이션은 사회적 불안을 극단으로 몰아갔고, 그 불안은 극단주의 세력을 키웠습니다. 그러나 이 격변 속에서도 역사학은 여전히 “객관성”을 강조했습니다.

이는 반공화국적 태도라기보다는, 학문은 정치로부터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확신에 가까웠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거리 두기가 문제였습니다. 공화국이 극단적 민족주의와 반민주적 세력의 공격을 받을 때, 역사학은 민주주의의 지적 토대를 적극적으로 구축하지 않았습니다. 동시에 국가주의적 역사 해석이 급진화되는 것을 강하게 제어하지도 않았습니다.

가치중립은 고결한 태도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위기의 시대에는 방관과 구별되기 어려웠습니다. 바이마르 시기의 역사학은 체제를 직접 무너뜨리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체제를 지키지도 않았습니다.

여기에서 하나의 구조적 특징이 드러납니다. 실증주의는 갈등 상황에서 명확한 입장을 요구받을 때 스스로를 방어적 위치에 놓았습니다. 정치적 판단을 유보하는 습관은 비판의 언어를 약화시켰습니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1933년이 도래합니다.

이제 질문은 더욱 날카로워집니다. 정치적 중립을 지키려던 학문은 체제가 급변했을 때 어떤 선택을 하게 되었는가. 다음 장에서는 그 전환의 순간을 살펴보겠습니다.

 

  1. 1933년 이후, 대학의 재편

1933년 1월, 아돌프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합니다. 이 사건은 단순한 정권 교체가 아니었습니다. 국가 전체의 구조를 재편하는 체제 전환이었습니다. 대학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곧바로 글라이히샬퉁(Gleichschaltung), 즉 체제 동조 정책이 시행됩니다. 공직에서 “정치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인물”을 제거하는 법률이 통과되었고, 유대인 교수와 반체제 인사들이 강단에서 축출되었습니다.

1933년 5월 10일 베를린 베벨광장에서 시작된 분서焚書 장면. 이 행사는 곧 전국으로 확산되어 약 70여 개 도시에서 유사한 공개 소각이 이어졌으며, 수많은 문학ㆍ철학ㆍ정치 서적이 불태워졌다. 금서 작가로 지정된 이들은 출판과 강연, 연구 활동이 사실상 봉쇄되었고, 많은 지식인과 유대인이 탄압과 망명의 길로 내몰렸다.

1933년 봄, 독일 대학에서 상징적인 사건이 벌어집니다. 그해 5월 10일, 베를린을 비롯한 여러 도시에서 대규모 분서焚書가 이루어졌습니다. 학생과 교수들이 광장에 모여 “비독일적 정신”의 책을 불태웠습니다. 이 사건은 단순한 선동 행사가 아니었습니다. 대학이 체제에 공개적으로 동조하는 의식이었습니다. 많은 교수들이 직접 불을 붙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이를 저지하지도 않았습니다.

이 시기를 이해하는 데 발터 프랑크라는 인물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젊은 역사학자였던 그는 나치 체제에 적극 협력하며 곧 제국사연구소를 이끌게 됩니다. 유대인과 반체제 인사를 비판하는 역사 연구를 조직적으로 추진한 것도 그였습니다. 그는 기존의 실증주의 방법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방대한 문헌과 자료를 동원하여 “독일 민족의 역사적 사명”을 학문적으로 정당화하려 했습니다. 방법은 여전히 엄밀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질문의 방향이 달라졌습니다. 자료는 민족주의를 강화하는 쪽으로 배열되었고, 연구는 체제의 세계관을 정교화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좌) 발터 프랑크(1905-1945) ─ 나치 정권하에서 ‘신독일사 제국연구소’를 이끌며 동방 연구를 통해 폴란드ㆍ체코 등 동유럽 국가들의 역사를 국가사회주의 이념에 맞게 왜곡한 역사학자. (우) 게르하르트 리터(1888-1967) ─ 독일 보수주의 전통을 대표하는 역사학자로서 국가와 권력의 관계를 성찰했으며, 나치 체제에 비판적 입장을 보였으나 제도권 내부에서 조직적 저항을 전개하지는 않은 사상가. 사진 출처: FürthWiki(좌), kabinettskriege(우)

반대로, 게르하르트 리터는 보수적 민족주의자였지만 나치의 급진적 인종주의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려 했습니다. 공개적 체제 선동에 나서지 않았고, 전쟁 후에는 히틀러 체제를 비판하는 입장을 취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리터 역시 1933년 체제 전환 순간에 대학 내부에서 조직적 저항을 이끌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개인적 거리 두기를 선택했지만, 제도 전체를 바꾸려 하지는 않았습니다.

이 두 인물은 극단적으로 달랐습니다. 한 사람은 적극 협력했고, 다른 한 사람은 보수적 거리 두기를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둘 다 실증주의적 훈련을 받은 역사학자였습니다.

문제는 개인의 성향만이 아니었습니다. 학문 문화 자체가 정치적 급변 상황에서 저항을 조직하는 구조를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가치 판단을 유보하는 습관은, 위기 상황에서 집단적 윤리 행동으로 전환되지 않았습니다.

1933년의 대학은 강제로 침묵당한 공간이기만 했던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도 크게 저항하지 않았던 공간이기도 했습니다. 이 장면은 다음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침묵은 개인의 비겁함이었는가. 아니면 실증주의가 만들어낸 구조적 한계였는가.

 

  1. 침묵 · 순응 · 협력

1933년 이후 독일 대학은 빠르게 재편되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학자가 동일한 방식으로 행동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대학은 체제에 동조하는 공간처럼 보였지만, 내부의 선택은 다양했습니다.

아돌프 히틀러(1889-1945) ─ 독일 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을 이끌며 제3제국을 수립한 정치 지도자로, 전체주의 체제를 구축하고 제2차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를 초래한 인물.

어떤 이들은 체제의 이념을 학문적으로 정당화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연구소를 설립하고, 정책 자문에 참여하며, 민족주의적 역사 해석을 확장했습니다. 체제는 이들에게 자원과 권위를 제공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노골적인 선동에는 나서지 않았지만, 연구 주제를 조정하고 공개 비판을 삼갔습니다. 유대인 동료가 축출되는 상황에서도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대학 운영이 계속되는 한, 자신의 자리와 연구를 지키는 것이 우선이었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나치 이념에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공개적 저항으로 나아가지 않은 이들도 있었습니다. 일부는 전쟁 후 비판적 입장을 취했지만, 1933년의 전환 순간에는 조직적 반대를 이끌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왜 대규모 집단적 저항은 거의 나타나지 않았는가.

실증주의적 학문 문화는 정치적 행동을 학자의 역할로 보지 않았습니다. 학문은 판단을 유보하고 사실을 연구하는 영역이라는 믿음이 강했습니다. 더불어 대학은 국가 제도 내부에 있었고, 재정과 인사, 승진 구조가 국가 권력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체제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은 개인적 생존과 직결되었습니다. 또한 많은 학자들이 나치 이념의 일부, 특히 민족주의적 요소에는 일정 부분 공감하고 있었습니다. 극단적 인종주의에는 거리를 두더라도, 베르사유 조약에 대한 불만이나 국가 재건의 열망에는 동의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침묵은 개인의 도덕적 결함이라기보다 구조적 산물이 됩니다. 그러나 구조가 책임을 면제해 주지는 않습니다. “나는 단지 학자일 뿐이다.” 이 말은 전문성의 표현일 수 있습니다. 동시에 책임의 축소일 수도 있습니다.

1933년 이후의 독일 역사학은 완전히 강압에 의해만 움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안에는 적응과 자기보존의 논리가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질문은 더 무거워집니다. 학문은 어디까지 체제에 연루되었는가. 전쟁이라는 극단적 상황 속에서 역사학은 어떤 역할을 했는가.

 

  1. 전쟁과 학문의 연루

1939년 전쟁이 시작되면서 학문은 새로운 국면에 들어갑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은 단순한 군사 충돌이 아니라 지식의 총동원이었습니다.

역사학은 전선에 직접 나서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점령 정책과 공간 재편의 논리적 토대를 제공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동방연구, 이른바 오스트포어슝Ostforschung입니다. 이 연구는 동유럽 지역의 역사와 인구 구조를 분석하며, 독일의 역사적 권리를 정당화하는 논리를 생산했습니다. 지도와 통계, 역사 문헌은 중립적 자료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점령 정책과 인구 재배치 계획의 지식 기반으로 활용되었습니다.

여기서 다시 발터 프랑크가 등장합니다. 그는 신독일 역사 국가연구소를 통해 체제 친화적 연구를 조직적으로 추진했습니다. 연구는 “민족의 역사적 사명”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집중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실증주의적 방법은 폐기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욱 체계적으로 동원되었습니다. 방대한 자료 수집, 문헌 분석, 통계 정리. 형식적으로는 학문적 엄밀성이 유지되었습니다. 그러나 질문의 방향은 명백히 정치적이었습니다. 동유럽은 누구의 공간인가. 어떤 집단이 역사적 정당성을 갖는가. 이 질문은 단순한 학술 토론이 아니라, 점령과 추방, 재편 정책과 직결되었습니다.

또 다른 차원에서 인구 통계와 민족 분류 작업은 행정 정책에 연결되었습니다. 숫자는 중립처럼 보였지만, 분류는 권력과 결합되었습니다.

나치의 로젠베르크 특수 약탈 부대(ERR) 대원들이 점령지에서 약탈한 책들을 정리하고 있다. 나치는 전쟁 기간 동안 약 500만 권에 이르는 유대인 관련 서적과 공동체 장서, 그리고 ‘정권의 적’으로 규정한 볼셰비키ㆍ프리메이슨 등 관련 기관의 장서도 조직적으로 수탈하였다. 사진 출처: Yad Vashem

이 지점에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마주합니다. 학문은 직접적으로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폭력을 가능하게 하는 지식 체계를 제공할 수 있었습니다. 학자는 어디까지 책임을 져야 하는가. 자신의 연구가 정책에 활용될 때, 그것은 단순한 오용인가, 아니면 구조적 연루인가.

전쟁이 끝났을 때 독일은 폐허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폐허가 된 것은 도시만이 아니었습니다. 학문도 도덕적 질문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1943년 1월 9일자 나치 기관지 『디 베베궁』 1면 캡처. 가운데 붉은색 대형 제목 「총통의 추종자들이여!」는 전쟁 수행에 대한 무조건적 충성과 단결을 촉구하며, 좌측 칼럼 「새해」는 전쟁의 불확실성과 고난을 민족적 시련이자 단련의 계기로 해석해 결의를 독려한다. 우측 칼럼 「우리를 두려움 없게 만드는 것」은 새해를 맞아 독일 사회의 사명과 정신적 각오를 강조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출처: Heidelberg historic literature – digitized

 

  1. 1945년 — 단절인가 연속인가

1945년 5월, 전쟁은 끝났습니다. 독일은 폐허가 되었고, 나치 체제는 붕괴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완전한 단절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대학 내부를 들여다보면 상황은 훨씬 복잡했습니다. 연합군은 탈나치화 정책을 실시했습니다. 교수들은 과거 이력에 대한 심사를 받아야 했고, 일부는 직위에서 해임되었습니다. 그러나 대대적이고 전면적인 숙청이 이루어졌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냉전이 시작되면서 전문 인력의 공백은 곧 현실적 문제가 되었습니다. 행정과 교육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경험 있는 학자들이 필요했습니다. 그 결과 상당수 교수들이 일정 기간의 심사와 정지 처분 이후 복귀하게 됩니다.

제도는 붕괴했지만, 학문 문화는 즉각적으로 바뀌지 않았습니다. 실증주의 방법론은 그대로 유지되었습니다. 사료 비판, 문헌 중심 연구, 국가 중심 정치사 서술 구조 역시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전후 초기 독일 역사학은 “조용한 연속성” 속에서 재출발했습니다.

이 시기에 다시 마이네케가 등장합니다. 그는 1946년 《독일의 파국》을 출간하며 나치 체제를 독일 역사 속의 비극으로 해석했습니다. 히틀러 체제를 독일의 전통적 권위주의와 결부시키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일종의 일탈로 설명하려 했습니다. 이 저작은 자기반성의 시도로 평가받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구조적 책임을 충분히 묻지 않았다는 비판도 받습니다.

이 시기의 역사학은 나치 체제를 연구 대상으로 삼기 시작했지만, 학문 자체의 구조적 문제를 전면적으로 해체하지는 않았습니다. 1945년은 정치 체제의 붕괴였지만, 학문 체제의 즉각적 전환은 아니었습니다. 진정한 문제 제기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특히 1960년대에 이르러 젊은 세대는 전후 기성 학자들에게 공개적으로 묻기 시작합니다.

“당신들은 1933년에 무엇을 했는가.”

이 질문은 단지 개인의 과거를 묻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학문 문화 전체를 향한 질문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이야기는 전환점을 맞습니다. 실증주의는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객관성은 새롭게 정의되기 시작합니다.

이어지는 글에서는 전후 독일이 어떻게 자기반성과 전환의 과정을 거쳤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그 출발점은 7장 「실증주의는 무엇이 문제였는가」입니다.

더 읽을 거리

― 독일 역사학과 1933년의 선택을 더 깊이 이해하고 싶은 독자를 위해

이 글은 독일 역사학이 어떻게 방어적 중립 속에서 1933년을 맞이했고, 나치 체제 아래에서 어떤 선택을 했는지를 다루었습니다. 아래의 읽을거리는 이 시기를 더 깊이 이해하고 싶은 독자를 위한 길입니다. 학술적 난이도에 따라 가볍게 시작해도 좋고, 구조적으로 접근해도 좋습니다.

Ⅰ. 한국어로 읽을 수 있는 책 ― 시대와 구조를 이해하기 위한 출발점

  • 이안 커쇼, 《히틀러》 개인과 구조를 함께 설명하는 가장 균형 잡힌 전기입니다. 왜 독일 사회가 히틀러를 수용했는지를 설득력 있게 보여줍니다.
  • 리처드 에번스, 《제3제국의 도래》 바이마르 공화국의 취약성과 나치의 권력 장악 과정을 정밀하게 분석합니다. 1933년이 우연이 아니었음을 이해하게 합니다.
  • 데틀레프 포이케르트, 《바이마르 공화국의 위기》 공화국의 문화적 사회적 불안정성을 설명합니다. 극단주의가 성장한 토양을 보여줍니다.
  • 게오르크 이거스, 《독일 역사학의 위기》 독일 역사주의와 실증주의 전통이 정치적 격변 속에서 어떻게 한계를 드러냈는지를 분석합니다. 학문이 왜 방어적 중립에 머물렀는지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저작입니다.
  • 프리드리히 마이네케, 《독일의 파국》 전후에 집필된 자기반성적 저술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1933년의 침묵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남깁니다.
  • 막스 베버, 《직업으로서의 학문》 가치중립을 주장한 고전입니다. 그러나 위기의 시대에 이 원칙이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지, 읽고 나면 오히려 더 많은 물음이 남습니다.

Ⅱ. 원서 중심의 심화 연구 ― 나치 체제와 학문 협력, 동방 연구

  • Michael H. Kater, 《The Nazi Party and the German Universities》 나치 집권 이후 대학 구조가 어떻게 재편되었는지를 다룹니다. 교수 충성 서약과 학문 제도화 과정을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 Alan E. Steinweis, 《Studying the Jew: Scholarly Antisemitism in Nazi Germany》 나치 체제 아래에서 학문이 인종 이론과 반유대주의 정책에 어떻게 동원되었는지를 분석합니다.
  • Christopher Clark, 《Iron Kingdom: The Rise and Downfall of Prussia, 1600–1947》 프로이센 전통과 독일 국가주의의 장기 구조를 보여줍니다. 나치즘을 단절이 아닌 연속 속에서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 Michael Burleigh, 《Germany Turns Eastwards: A Study of Ostforschung in the Third Reich》 동방 연구를 가장 체계적으로 분석한 고전적 연구서입니다. 나치 시기 독일 학자들이 폴란드와 동유럽 연구를 통해 점령 정책을 어떻게 정당화했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 Ingo Haar · Michael Fahlbusch (eds.), 《German Scholars and Ethnic Cleansing, 1919–1945》 학자들이 민족 분류와 인구 정책에 어떻게 관여했는지를 다룹니다. 동방 연구가 단순한 학술 활동이 아니라 인구 재편과 추방 정책과 직접 연결되었음을 드러냅니다.

이 읽을거리들은 이 글의 결론을 대신하지 않습니다. 다만 실증주의가 단지 학문 방법의 문제가 아니라, 위기의 시대에 어떤 윤리적 태도를 요구받았는지 더 깊이 사유하도록 이끌어 줄 것입니다.

 

EnglishFrenchGermanItalianJapaneseKoreanPortugueseRussianSpanishJavane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