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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시간이 흐른다고 말한다. 과거에서 현재, 그리고 현재에서 미래로 시간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면서 그 속에서 우리의 삶과 여러 사건이 펼쳐진다고 믿는다. 이렇게까지 익숙한 믿음은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시계는 계속해서 움직이고, 우리의 일정들은 시간표 위에 놓인다. 늦거나 빠른 것도 다 시간 문제라고 여긴다. 하지만 이런 모든 경험이 정말로 시간이 흐르기 때문에 가능한 걸까, 아니면 우리가 애초에 시간을 그런 식으로 생각해왔기 때문에 그렇게 느낄 뿐일까?
이 질문은 단순한 철학적 호기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요즘 사람이라면 누구나 시간이 더 빨리 흘러간다고 느낄 것이다. 하루는 금방 지나가고, 한 해도 눈 깜짝할 새 끝나버린다. 반대로, 어떤 순간은 유난히 길게 느껴지기도 하고, 깊은 여운으로 남기도 한다. 모두 같은 물리적 시간 안에서 사는 것 같은데, 왜 이런 차이가 생길까? 우리는 그 이유를 감정, 집중력, 환경 탓으로 돌리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시간 자체에 대한 좀 더 근본적인 질문이 숨어 있다.

이번 회차에서 던지고 싶은 핵심 질문은 이렇다. 시간은 과연 세상의 배경으로서 언제나 먼저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면 사건이 생기는 그 방식에 따라 나중에 구성되는 것일까? 만약 시간이 흐르는 실체가 아니라면, 우리가 매일 느끼는 빠름, 느림, 공허함, 충만함 같은 시간의 감각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이 질문은 시간을 측정하는 법이 아니라, 시간이 어떻게 가능해지는지 그 조건을 묻고 있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익숙하게 여겨온, 실체적 객체 중심의 세계관을 잠시 옆에 두려 한다. 세계를 고정된 존재들의 집합이 아니라, 매 순간 새롭게 이루어지거나 무산되는 사건의 연쇄로 바라본다면 어떨까? 이런 시각에서 볼 때, 현재라는 것은 이미 주어진 한 점이 아니라, 감각과 의미, 관계가 얼마나 풍부하게 엮이느냐에 따라 두꺼워지거나 얇아질 수 있다. 그리고 이 차이가 바로 우리가 시간을 체감하는 방식과 깊이에도 크게 영향을 미친다.
이 문제의식은 특별히 어떤 전통이나 이론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서양 철학에서도 사건이나 과정의 관점에서 시간의 비실체성을 거듭 되짚어왔고, 과학 또한 아주 미세하거나 극단적으로 거대한 영역에서는 시간의 절대성을 더 이상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본 연재 《시간 경험의 구조》 1회차에서는 이러한 논의들을 따라가며, 시간을 흐름이나 배경이 아닌 어떤 결과로서의 구조로 새롭게 생각해볼 출발점을 잡아보고자 한다.
이 출발점은 곧장 결론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질문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는 일에 가깝다. “시간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대신, “어떤 조건에서 사건이 밀도를 얻고, 그 결과 시간 경험이 만들어지는가?”를 묻고자 한다. 이 문제의식은 이후 회차에서 자연과학, 뇌신경과학, 그리고 문명과 삶의 구조로까지 확장될 것이다. 그러나 모든 탐색은, ‘시간은 흐른다’는 너무도 익숙한 믿음을 잠시 멈춰 세워보는 자리에서부터 시작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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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절대시간이라는 가정
우리는 시간이 물처럼 흘러간다는 믿음에 쉽게 익숙해져 있지만, 사실 이 생각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가정에 불과하다. 지금껏 시간은 마치 공간처럼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배경이라고 여겨졌고, 그 위에서 모든 일과 삶이 펼쳐진다고 믿어왔다. 근대 과학은 이 가정을 더욱 정교하게 만들었고, 일상적인 인식 속에서는 거의 무조건적인 상식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이 익숙한 상식도 실제로는 의외로 허약하다. 과연 시간은 실제로 흐르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그냥 그렇게 가정하고 있었을 뿐일까?
근대 과학은 시간을 측정 가능한 물리량으로 다뤄왔다. 특히 뉴턴이 그린 세계에서는, 시간이 우주 어디에서나 똑같이 흘러가는 절대적 기준점으로 여겨졌고, 모든 사건은 그 위에 줄지어 늘어선다고 생각했다. 이후에 등장한 상대성 이론은 이런 시간의 절대성을 깨뜨렸지만, 여전히 시간은 물리적 변수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었다. 속도나 중력에 따라 시간이 길어지거나 짧아질 수는 있지만, 그 자체가 한번도 근본적으로 의심받지는 않았다. 언제나 시간은 ‘존재하는 것’으로 전제됐던 셈이다.
그런데 이 전제가 무너지기 시작하는 곳이 있다. 바로 우리가 실제로 체험하는 순간들이다. 똑같은 물리적 한 시간이 주어져도 어떤 순간은 유난히 길게 느껴지고, 또 어떤 순간은 언제 흘러갔는지 모를 만큼 순식간에 지나가 버린다. 이 차이는 단순히 외부 환경 때문이 아니라, 그때 벌어지는 사건의 방식에 달려 있다. 즉, 한순간에 의식과 의미가 얼마나 촘촘하게 모이느냐에 따라 시간이 달라진다. 이런 맥락에서 시간은 더이상 고정된 배경이 아니라, 어떤 사건이 어떻게 이뤄지느냐에 따라 새롭게 만들어진 결과가 된다. 뭔가 의미 있는 일이 일어날 때 시간이 생기고, 반대로 공허함만 남을 때 시간은 존재감을 잃는다.
이렇게 생각의 전환이 일어나면, 우리는 기존의 ‘고정된 실체’ 중심 세계관을 더이상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게 된다. 만약 우리가 세계를 고정된 존재들의 집합으로 바라본다면 시간은 그 변화의 틀에 해당한다. 하지만 반대로, 존재가 아니라 ‘사건’이 세상의 근본이라는 시각에서 보면, 시간은 미리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건이 생겨나며 함께 짜여지는 관계적 구조가 된다.

이런 관점을 가장 또렷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과정철학이다. 화이트헤드는 세계를 지탱하는 핵심이 시간이 아니라 창조성에 있다고 보았다. 창조성은 세계가 새롭게 태어날 수 있게 하는 근본적인 힘이고, 실제 사건이란 이 창조성이 순간순간 응축되어 나타나는 과정이다. 그래서 사건은 이미 일정한 시간 속에 들어있는 게 아니라, 각자의 결합과정을 통해 하나의 방식으로 성립하고 나서야 시간적 배열 위에 놓인다. 이런 맥락에서 시간은 창조의 원인이 아니라, 창조적 사건들이 이어지며 남기는 질서에 가깝다.
결국 시간은 독립적으로 흐르는 실체가 아니라, 여러 사건들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고 배치되는지에 따라 우리에게 다르게 인식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같은 한 시간이지만 회의실에서 형식적으로 자리를 지킬 때와 누군가와 몰입해서 대화하거나 창작에 빠질 때의 체감은 완전히 다르다. 물리적으로 주어진 시간은 똑같더라도, 서로에게 의미 있게 엮인 사건들이 하나의 흐름을 이룰 때 시간은 짧고 밀도 있게 느껴진다. 반면, 사건들이 서로 떨어져 의미 없이 흩어지는 순간에는 시간은 길고 무겁게 흘러간다. 다시 말해, 시간이 흘러서가 아니라, 사건들이 얼마나 밀착해서 조직되어 있느냐에 따라 시간을 경험하는 방식이 달라지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과정철학에서 훨씬 더 정교하게 개념이 다듬어진다.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는 실재의 기본 단위를 물질이나 단단한 실체로 보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실재를 이루는 것은 바로 ‘실제적 사건(actual occasion)’이다. 사건이란 고정된 점이 아니라, 여러 감각과 관계가 한데 어우러지는 흐름이며, 그 가치의 핵심은 바로 강도強度의 증가에 있다. 강도가 약한 사건들은 서로 나뉘어 시간 위에 늘어선 줄처럼 이어지고, 우리는 이런 사건들을 시간의 흐름처럼 경험하기 쉽다. 반면, 강도가 높은 사건이 일어날 때는 현재가 한층 두터워지고, 시간 자체가 압축되거나 아예 사라지는 듯이 느껴진다. 여기서 시간은 단순히 사건을 풀어 설명하는 개념일 뿐, 사건을 지배하는 독립된 실체가 아니다.

이와 비슷한 통찰은 앙리 베르그송과 윌리엄 제임스에게도 찾아볼 수 있다. 베르그송은 시간을 공간처럼 잘게 쪼갤 수 있는 것으로 보는 관점을 비판하며, ‘질적인 지속’이라는 개념을 내놓았다. 윌리엄 제임스 역시 의식의 흐름 안에서 시간은 단순히 똑같은 길이로 이뤄진 연속이 아니라, 체험의 밀도에 따라 그 형태가 달라진다고 생각했다. 이들에게 시간은 측정의 대상이 아니라, 바로 살아가며 체험하는 방식이다.
과학에서도 이와 비슷한 질문이 되풀이된다. 특히 최근 인지과학과 신경과학에서는 시간을 외부에 실제로 존재하는 고정된 실체로 다루기보다는, 특정한 조건에서 구성되는 경험의 산물로 본다. 뇌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시간을 직접 인식하지 않는다. 감각, 기억, 예측이 일정한 방식으로 결합해 ‘지금’이라는 순간이 만들어지고, 그 결과로 시간에 대한 경험이 생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시간은 늘 존재하는 흐름이 아니라 여러 요소가 하나로 합쳐질 때 마침내 나타나고, 이 통합이 깨지면 그 의미마저 사라진다. 최근의 과학은 이 지점에서 시간을 절대적인 배경이 아닌, 조건에 따라 만들어지는 구성물로 새롭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다양한 논의들이 한결같이 가리키는 것은 분명하다. 시간은 그저 독립적으로 흐르는 실체가 아니다. 사건이 어떠한 방식으로 일어나는지, 또 그런 사건들이 어떻게 맞물리는지 보여주는 하나의 틀이다. 사건이 비어 있다면 시간도 금세 사라지고, 사건의 밀도가 높아지면 똑같은 순간도 이전과 전혀 다르게, 더욱 깊게 체험된다. 시간은 길이로 재는 대상이 아니라, 바로 밀도와 구성의 문제인 셈이다.
그래서 질문은 이렇게 바뀐다. ‘시간이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어떤 조건에서 사건이 밀도를 갖게 되는가?’이다. 이 질문은 곧 의식이 얼마나 강렬하게 집중되는지, 주의가 어디로 쏠리는지, 그리고 실재가 자신을 드러내는 여러 방식에 대한 탐구로 이어진다. 다음 장에서는 이 부분을 본격적으로 다루며, 시간의 질적인 구조와 의식의 밀도 사이에 어떤 연결이 있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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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의 밀도와 질적 시간: 베르그송과 제임스
시간을 바라보는 방식에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있다. 시간을 외부 세계의 객관적인 좌표로 볼 것인지, 아니면 의식이 살아가는 체험의 한 양상으로 받아들일 것인지가 달라지는 지점이다. 제1장에서 시간이란 사건이 성립하는 방식을 둘러싼 문제를 다뤘다면, 이번 장에서는 사건이 어떤 질적 구조를 가질 때 비로소 시간으로 체험되는지를 짚어보고자 한다. 이 질문을 던지다 보면 자연스레 시간에 대한 양적 이해에서 질적 이해로, 관점이 전환될 수밖에 없다.
근대적 시간 개념은 시간을 누구나 동일하게 나눌 수 있는 균질한 양으로 간주해 왔다. 초, 분, 시는 서로 완전히 대체 가능하고, 어느 한 시간은 다른 시간과 늘 똑같은 길이를 가진다고 본다. 하지만 이런 전제는 실제 경험에서는 들어맞지 않는다. 똑같은 물리적 시간 동안에도 어떤 순간은 유난히 길게 느껴지고, 또 어떤 순간은 거의 흔적도 없이 사라질 때가 있다. 이 차이는 단순히 외부 조건 때문이 아니라, 그 순간 의식이 얼마나 응축되어 있었는가와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이 문제를 가장 뚜렷하게 부각시킨 사상가가 바로 앙리 베르그송이다. 그는 시간을 공간처럼 자를 수 있는 양으로 바꾸려는 사고방식을 강하게 비판하고, ‘지속(durée)’이라는 개념을 제안했다. 베르그송이 말하는 지속이란 균질적으로 잘라낼 수 있는 시간이 아니라, 의식의 상태들이 서로 스며들고 이어지는 질적인 연속을 뜻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변화와 경험이 얼마나 밀도 있게 응축되어 있느냐다. 지속 속에서는 앞선 순간이 그다음 순간에 녹아들고, 의식의 긴장감과 이완에 따라 시간의 체감이 달라진다.

베르그송에게 시간은 결코 비어 있는 틀이 아니다. 시간은 의식의 변화된 상태들이 빚어내는, 살아 움직이는 흐름이다. 이 흐름의 성격은 우리가 얼마나 집중하거나 분산되어 있느냐에 따라 크게 바뀐다. 의식이 느슨해질수록 지속은 길게 늘어지고, 밀도 있게 응축될수록 오히려 더 짧고 진하게 압축된다. 이때 시간은 단순하게 동일한 길이들이 이어진 것이 아니라, 질적으로 다른 순간들이 어우러진 구조가 된다.

이러한 이해는 윌리엄 제임스에게서 심리학의 언어로 또 한 번 드러난다. 제임스는 의식을 고정된 점들의 집합이 아니라 ‘의식의 흐름’으로 설명했다. 이 흐름 안에서 시간은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게 아니라, 의식이 경험을 어떻게 연결하고 강조하느냐에 따라 새롭게 형성된다. 집중이 강할 때 한순간은 더욱 두터워지고, 반대로 주의가 흐트러지면 순간들이 서로 이어지지 않은 채 스쳐 지나간다.
제임스가 보기에 시간 체험은 기억, 기대, 감각, 의미 같은 요소들이 한순간에 어떻게 엮이느냐에 달려 있다. 강렬한 경험을 할 때에는 수많은 요소가 동시에 결속되어, 시간은 짧으면서도 깊이 느껴진다. 반대로 의미 없는 반복 속에서는 사건들이 서로 얽히지 못해 시간은 길게 이어지지만, 어느새 텅 빈 듯 사라진다. 이러한 차이는 물리적 시간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의식 속 ‘밀도’가 빚어낸다.
이처럼 베르그송과 제임스가 공통으로 보여준 것은 시간의 질적인 구조다. 시간은 항상 같은 폭의 줄이 아니라, 의식이 사건을 조직하는 방식에 따라 색채와 양상이 달라지는 일종의 경험적 스펙트럼이다. 때로 시간은 짧고 강렬하게, 때로는 길고 느슨하게 체험된다. 이 모든 건 ‘지금 이 순간’에 주어진 의식의 밀도에 따라 달라진다. 결국 시간은 그저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 의식과 사건이 맺는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결과다.
이 장에서 얻은 관점은 다음 장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디딤돌이 된다. 시간이 만약 의식의 밀도에 따라 질적으로 구성된다면, 그 압도적 밀도는 과연 어떻게 한순간에 응축될 수 있을까? 또 사건은 무엇을 전제로 성립되며, 그 강렬함은 어떻게 해서 시간의 압축이나 영원의 경험으로 연결되는 걸까? 다음 장에서는 이러한 질문들을 후설과 화이트헤드의 사유를 토대로, 좀 더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깊이 있게 다뤄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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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강도와 영원의 단면: 후설과 화이트헤드
시간을 ‘질적인 체험’으로 이해하는 관점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만약 시간이 의식의 밀도에 따라 다르게 느껴진다면, 그 밀도는 어디서 비롯되는지 궁금해진다. 즉, 시간의 질적 차이는 단순한 심리적 인상 이상의 것이며, 사건이 일어나는 방식 자체와 밀접하게 연결된 문제다. 이 지점에서 시간은 더 이상 체험의 부산물이 아니라, 사건의 존재론적 구조와 직접 맞닿아 있다.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사람이 바로 현상학의 창시자 에드문트 후설이다. 그는 시간을 외부 세계의 흐름이 아닌, 의식 안에서 구성되는 구조로 바라봤다. 후설의 내적 시간의식 이론에 따르면, 현재란 고립된 점이 아니라 이미 지난 것을 붙드는 ‘지속’과 곧 다가올 것을 향한 ‘예기’가 겹쳐진, 두께가 있는 장이다. 이 현재의 두께는 결코 고정되어 있지 않고, 의식의 긴장도나 집중도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후설에게 핵심은 시간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시간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구성되는가 하는 점이다. 의식이 분산될수록 현재의 두께는 얇아져 순간들이 서로 단절되는 듯 느껴진다. 반면 의식이 하나로 모일 때는 현재가 두터워지며, 과거와 미래가 한 장 안에서 응축되어 흐른다. 이때 시간이라는 게 늘거나 주는 것이 아니라, 사건이 이루어지는 밀도가 바뀐다. 의식의 긴장 구조에 따라 시간은 압축되거나 이완되는 것이다.

이런 내적 시간 분석은 과정철학에서 훨씬 더 급진적으로 전개된다. 화이트헤드는 세계를 변하지 않는 실체들의 집합이 아니라, 실제적 사건들의 과정으로 봤다. 여기서 실제적 사건이란 어떤 것이 오래 지속되는 게 아니라, 한순간에 생겨나고 바로 사라지는 ‘발생’ 그 자체다. 사건은 생겨나는 순간 스스로를 구성하고, 곧바로 과거로 편입되며, 사실성만 남긴다.
조금 더 쉽게 풀어 말하자면, 사건은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날 때만 생기는 게 아니다. 지금 숨을 들이쉬거나, 눈앞의 글자를 읽으며 뜻을 이해하고, 길을 걷다 바람의 온도를 느끼는 순간도 모두 사건이다. 여기서 사건이란 단순한 ‘결과’가 아니라 감각, 의식, 다양한 관계가 한데 모여 하나의 순간을 이루는 것이다. 똑같이 산책을 하더라도, 생각에 잠겨 걷는 순간과, 발의 감각과 주변 소리, 몸의 리듬을 또렷이 느끼며 걷는 순간은 완전히 다르다. 전자의 경우 사건은 희미하게 스쳐 지나가고, 후자는 밀도 있게 성립한다. 이런 차이는 ‘무엇을 했는가’가 아니라, 그 순간 얼마나 깊이 몰입했는가에서 갈린다.
화이트헤드는 이런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사건의 가치를 ‘강도’로, 즉 사건이 얼마나 강렬하게 성립하는지로 보았다. 사건은 단순히 무언가가 일어났다는 사실만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라, 한순간에 얼마나 많은 관계와 감각, 의미가 뒤섞여 통합되는가에 달려 있다. 방금 예시처럼, 의식이 분산된 상태에서 스쳐 지나가는 순간들은 느슨하게 얽혀 있어 우리가 일반적으로 느끼는 ‘시간의 흐름’을 만든다. 반면 의식이 지금 이 자리에 깊이 참여하고, 감각과 의미, 관계가 한순간에 응축될 때 그 사건은 강렬하게 성립하며, 현재는 더이상 얇은 찰나가 아니라 두터운 장으로 경험된다. 이처럼 시간은 길어지거나 짧아지는 게 아니라, 사건의 밀도에 따라 전혀 다른 질감과 무게로 다가온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강렬함’은 단순한 감각적 흥분이나 자극의 증폭과는 다르다. 화이트헤드가 말하는 강도는 쾌락이나 도취의 정도를 뜻하지 않는다. 물론 약물이나 극단적인 흥분도 강렬한 체험을 불러올 수 있다. 하지만 이때는 서로 다른 관계와 느낌들이 하나로 어우러지기보다는, 오히려 흩어지고 해체되는 일이 많다. 강도가 높다는 것은 자아가 무한히 팽창하거나 특별히 고양된 상태를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한순간에 세계의 다양한 요소들 가운데 무엇을 받아들일 것인지를 분명히 선택하고, 그 선택의 결과를 회피하지 않은 채 온전히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에 가깝다.
다르게 말하면, 강도란 자아가 커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 ‘나는 누구로 살아갈 것인가’를 스스로 선택하는 방식과 깊게 연결돼 있다. 이런 점에서 이 논의는 하이데거의 생각과도 닿는다. 마르틴 하이데거 역시 중요한 것은 강렬한 체험 자체가 아니라, 매 순간 그 상황을 스스로 받아들이고 책임지며 자신의 가능성을 결단하는 태도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건이 언제나 과거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지금 여기에서만 성립한다는 사실이다. 사건이란 이미 일어난 일의 단순한 집합이 아니라, 현재라는 순간 안에서 다시 만들어지거나 놓쳐질 수 있는 무엇이다. 그런데 의식이 이미 지나간 말, 행동, 또는 과거 사건이 남긴 흔적에만 머물게 되면, 지금 여기에서 새롭게 만들어지는 사건들은 자연스레 비어버린다. 우리는 현재를 제대로 살아내기보다는, 과거의 흔적을 끊임없이 재확인하는 데 시간을 쓰게 된다. 그 결과, 각각의 사건은 서로 느슨하게만 연결되고, 시간 역시 충만한 사건의 연속이 아니라, 텅 빈 순간들이 이어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여기서 진짜 문제는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는 점이 아니다. 오히려, 매 순간 충분한 밀도를 지녔을지도 모를 사건들이 깊이를 채우지 못하고 지나가 버린다는 데 있다.

일상 속 이런 경험들은 화이트헤드가 이야기한 시간의 극한적 형식을 이해하는 데 단서를 준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영원의 단면’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화이트헤드가 말하는 영원은 시간 밖 어딘가에 존재하는 초월적인 영역이 아니라, 사건의 강도가 극대화될 때 현재 속에서 단면처럼 포착되는 현상이다. 사건의 밀도가 높아질수록, 현재는 더 이상 잘게 나뉜 찰나로만 느껴지지 않고, 관계와 의미가 응축된 하나의 완성된 전체로 다가온다. 이때 일어나는 변화는 시간이 멈추는 것이 아니라, 사건이 충분히 충만해져 시간이라는 매개가 더이상 분절을 만들어내지 못하게 되는 데서 비롯된다.

후설과 화이트헤드를 함께 살펴보면, 시간에 대한 공통된 구조가 하나 드러난다. 시간은 외부에서 주어진 틀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사건이 어떻게 성립하는지에 따라 그 형태가 달라진다. 사건이 얇고 희미하게만 일어날 때 우리는 시간을 느슨하고 길게 느끼지만, 반대로 사건이 충분히 밀도 있게 펼쳐질 때 같은 순간조차 짧고 강렬하게, 어쩌면 영원처럼 경험하기도 한다. 시간의 길이를 결정짓는 건 사건의 개수가 아니라, 바로 그 밀도에 있다.
이렇게 보면 시간은 흘러가는 대상이 아니라, 매번 새롭게 구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구성의 중심에는 ‘강도’가 놓여 있다. 의식이 사건과 얼마나 깊게 맞닿아 있는지, 그리고 사건이 얼마나 많은 관계를 품고 있는지에 따라, 시간은 아주 다르게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시간은 그저 배경이 아니라 사건의 결과이며, 사건은 시간 위에 놓이는 것이 아니라 곧 시간을 만들어내는 셈이다.
시간은 단순히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실재의 밀도가 느슨해지면, 우리가 ‘시간’이라 부르는 개념이 더 또렷해진다. 고대 인도 전통에서도 세계는 하나의 충만한 중심에서 펼쳐진 것으로 사유되었고, 일자에서 다자로 전개될수록 진동은 느려지고 분별은 증가하며, 그 과정에서 시간이라 불리는 질서가 드러난다. 이 관점에서 시간은 실재의 근원이 아니라, 실재가 분화되고 응축이 풀릴 때 나타나는 현상적인 구조에 가깝다.
그래서 수행이란 시간을 벗어나서 어디론가 도망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흩어지고 옅어진 밀도를 다시 근원의 결로 모으는 작용에 더 가깝다. 일상의 가장 작은 순간들 속에서 감각과 의식이 하나로 어우러질 때, 시간은 더이상 연속적으로 흐르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이때 현재는 끊기지 않은 충만한 상태로 드러난다. 이런 순간 ‘영원’은 시간의 반대편에 먼 곳에 있는 개념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서 드러나는 실재의 방식이 된다.

이 지점에서 질문도 한 발짝 더 나아간다. 만약 하나의 사건이 얼마나 높은 밀도로 완성되느냐에 따라 경험하는 시간의 성질이 바뀐다면, 이런 차이는 단순한 해석의 문제가 아니다. 의식이 어떤 조건에서, 어떻게 통합되고 유지되는지에 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이 질문은 단순히 철학적 사유만으로 미뤄둘 수 없다. 의식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반드시 살펴봐야 한다. 시간과 사건을 논의하면서도, 결국 그 구조가 어디에서, 어떤 방식으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음 글 예고 ─ 시간은 어떻게 의식 속에서 만들어지는가
이번 회차에서는 시간을 하나의 객관적 실체나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전제하는 시각에서 벗어나, 시간 경험이 사건이 어떻게 일어나는지에 따라 달라진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존재는 더이상 고정된 객체가 아니라, 매 순간 성립하거나 때로는 성립에 실패하는 ‘사건’에 가깝다. 현재 역시 이미 주어진 것이 아니라 매 순간 형성되는 과정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시간은 세계의 근원이 아니라, 세계가 특정한 방식으로 조직될 때 나타나는 결과에 가깝다.
사건이 충분히 성립되지 못하면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고, 공허하게 느껴진다. 반대로 감각, 의미, 관계가 한순간에 밀도 있게 모일 때,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이 한층 더 두껍게 느껴지고, 시간의 경계마저 흐릿해진다. 이렇게 볼 때, 영원이라는 것도 시간 바깥에 따로 존재하는 무언가가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응축된 사건의 질로서 경험된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이런 ‘사건의 성립’과 ‘현재의 두터움’은 과연 우리 생각 속에서만 가능한 이야기일까, 아니면 실제 자연이나 인간의 삶에서도 드러나는 구조일까? 만약 시간 경험이 단순한 해석에 그치지 않는다면, 어떤 구체적 조건에서 구현되어야 할 것이다. 다음 회차에서는 이 질문을 과학과 뇌신경과학의 관점에서 살펴보려 한다. 시간은 어떤 상황에서 의미를 갖게 되고, 또 언제 그 의미가 붕괴하는지, 현재는 어떤 조건 아래에서 형성되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탐구해 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