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업창골(帝業創谷)의 신성지리관(Sacred Geography)
1) 성·경·신 사명의 몰입과 그 예비적 실천
중앙 세도 권력에 편승할 수 있는 부와 ‘영예’를 거부하고 고난의 길을 자처한 김형렬에게 그 대가는 컸다. 그는 어느 한 곳에 거처하기조차 어려웠다. 구릿골에서 생장한 그는 환평(環坪)으로 옮겨 살다가 금구 내주평(金溝 內注坪)으로 이사하였다. 그때만 해도 남부럽지 않을 정도의 부자였다. 그런데 갑오년 동학혁명에 참가하여 청주 전투에서 죽을 목숨을 증산 상제의 은혜로 구원받아 귀향한 뒤로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패장은 말이 없는 법, 아니 패잔병에게는 가혹한 시련의 계절이 닥쳐왔다. 증산 상제의 도움으로 목숨을 부지했다고 해도 그 시련은 전쟁에서 패한 동학도로서 그가 짊어지고 가야 할 운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귀향한 후로 그는 동학과 연줄을 끊고 가업에만 종사하였다. ‘연줄을 끊은’ 것이 아니라 패잔병으로서 몸을 숨기도 살아야 했을 것이다. 가운이 기울어 가난하게 되었으므로 한곳에 머물러 살아갈 처지도 아니었다. 그는 잠시 모악산 금산사 아래 용화동(龍華洞)으로 이사하여 살았다. 그가 용화동에서 살았을 때의 행적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본고는 이 기간을 주목한다. 그의 전 생애에서 ‘용화동’이라는 상징성이 매우 큰 까닭이다. 뒤에서 검토하였으나 그가 용화동 시절에 증산 상제를 만난 이후 오롯이 마음을 바쳤다는 장면도 더욱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날이 갈수록 삶은 곤궁해졌다. 김형렬은 빈곤을 이기지 못하여 내주평을 내왕하면서 농사나 지을까, 하고 생존의 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1897년에 그는 내주평 마을 정남기(鄭湳綺) 집에 가서 아이들의 글 읽는 소리를 듣고 자시도 모르게 걸음을 옮겼다. 정남기의 집 한쪽에 차려놓은 서당이었다. 안을 기웃거려 보니까, 그곳에는 초립을 쓴 젊은 훈장이 학동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있었다. 김형렬은 마치 자석에 이끌리는 쇠붙이처럼 훈장 앞으로 다가갔다. 전쟁터에서 목숨을 구해준 은인, 증산 상제였다. 학동들은 훈장을 ‘강서방’이라 하였다. 형렬이 그 연유를 직접 물어보았다. 증산 상제는 ‘정씨 집의 취객(娶客)이라.’ 대답하였다. 1884(갑신)년 태인 불출암(佛出庵, 현재 화엄사)에서 처음 만난 이후 김형렬이 예상했던 대로 과연 증산 상제는 예사로운 인물이 아니었다. 학동들에게 글을 가르쳐 주고 마을 사람들의 사주도 봐주며 과연 ‘취객’의 삶을 살고 있었으나 동네에서는 ‘신인(神人)’으로 불리었다.
김형렬은 집에 돌아온 뒤에서 증산 상제를 잊을 수 없었다. 그는 이후에도 증상 상제를 마음에 챙겨두고 있었으나 마음과 달리 내주평에 갈 수 없었다. 때마침 증산 상제도 천하 유력을 떠나 서로 만나지 못하였다. 김형렬은 여전히 불운과 절망의 계절을 보내고 있었다. 이 무렵 가운이 더욱 기울어 하운동 제비창골에 있는 선산 재실인 영사재(永思齋)로 이사하였다.
증산 상제 문하에 입도하기 전, 김형렬은 증산 상제를 몇 차례에 걸쳐 만난 인연이 있었다. 첫 번째는 1884년 태인 불출암에서였고, 두 번째는 1886(병술)년에 증산 상제가 마을 유지 은양덕(殷陽德)과 함께 구릿골에서 금을 캐면서 환평에 있는 그의 집에서 유숙할 때였다. 세 번째는 1894(갑오)년 동학혁명 때 청주 전투에서였다. 네 번째는 용화동 시절, 그러니까 증산 상제가 내주평에서 훈장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리고 다섯 번째는 1902년(임인)년 4월 4일에 쌀을 사러 원평장(院坪場)에 나갔을 때였다.
그날은 원평 장날이었다. 김형렬은 양식이 떨어져 가까스로 돈 한 냥을 마련하여 시장에 갔다. 그 원평장에서 그는 꿈에도 그리던 증산 상제를 상봉하였다. 증산 상제는 충청도에 볼일이 있어서 가는 길이었다. 형렬이 반가운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쌀을 팔아서 가족들을 살릴 마음은 간데없고 문득 생각하기를 ‘이 돈을 노자로 드린다면 식솔들이 굶을 것이요, 만일 드리지 아니하면 서로 친한 사이에 의리가 아니라.’ 하고 돈 한 냥을 증산 상제에게 노자 하시라고 드렸다. 증산 상제는 웃으며 “나는 노자가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배고파하는 가족에게 어서 쌀을 팔아 돌아가게.” 하였다. 형렬은 물러서지 않았다. 왠지 물러서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는 더욱 간곡히 돈을 올리며 “만일 선생님께서 이 돈을 받지 않으시면 저는 이대로 집이고 뭐고 죽어서라도 선생님 뒤를 따르겠습니다.” 하고 굳게 맹세하였다.
김형렬이 쌀 팔 돈을 증산 상제에게 노자로 드리고 장도 보지 못한 채 빈 지게를 걸머지고 집에 돌아왔다. 아내가 마중을 나와 쌀의 여부를 물었다. 김형렬은 안타까운 마음에 돈을 분실하여 쌀을 사지 못했다고 둘러댔다. 아내는 굶주릴 자식들을 걱정하며 탄식했다. 이에 김형렬이 청도원(淸道院)으로 가던 중 우연히 한 이웃을 만나 사정을 털어놓자, 그 이웃은 가을에 갚는 조건으로 선뜻 장리쌀 다섯 말을 내어주었다. 김형렬은 이 뜻밖의 ‘횡재’를 증산 상제의 보이지 않는 덕화이자 초월적 은혜로 여기며 크게 기뻐하였고, 집으로 돌아가 아내와 함께 안도하였다. 그러나 김형렬은 물질적 해결에 안주하지 않고, 증산 상제가 어디에 묵고 있을지 염려하며 오직 다시 만나기를 갈망하는 순수한 지향을 잃지 않았다.
증산 상제와 김형렬의 다섯 번째 만남에서 보여준 이 극적인 서사는 단순한 기적이나 물질적 보상의 차원을 넘어, 인간의 사사로운 소아적 기복과 세속적 생존에 대한 집착을 온전히 포기할 때 발생하는 신성한 감응과 초월적 복록의 원리를 보여준다. 김형렬이 당장 굶주릴 가족과 빚으로 조달한 마지막 재화마저 증산 상제를 위해 내던진 결단은, 합리적 인과율이나 이기적 타산을 거부하는 전적 위탁이자 영적 비움이다. 종교 철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이 실존적 한계 상황 속에서 물질적 욕망과 이성적 불안을 완벽하게 포기할 때 비로소 우주의 주재자와의 진정한 주객 합일적 소통이 가능해지며, 이는 예기치 못한 우주적 감응과 복록의 도래라는 ‘신인감응(神人感應)’의 사건으로 증명된다. 아울러 다섯 말의 쌀을 얻은 후에도 세속적 기복에 머무르지 않고 오직 증산 상제를 일심으로 사모한 그의 모습은 기복적 종교성을 탈피하여 오직 성·경·신의 사명에만 몰입하는 구도적 정수이자 주체적 도덕률의 실천이라 할 수 있다.
2) 제비창골에서 제업창골로의 명칭 전환
김형렬이 원평장에서 증산 상제와 헤어진 지 9일 뒤였다. 도전에는 이날 김형렬이 증산 상제를 만난 일화를 더욱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 후 4월 13일에 형렬이 제비창골 집에 있는데 산 너머 금산사 쪽에서 “형렬아, 형렬아!” 하고 부르는 소리가 또렷이 들리거늘 형렬이 ‘어디서 들리는가?’ 하고 소리 나는 곳을 따라 서전재(西殿峙)를 넘어가 보니 상제님께서 금산사 돌무지개문(虹霓門) 위에 앉아서 부르고 계시더라. (도전 3:10:1-3)
1902년 4월 13일, 김형렬은 제비창골 집에서 누군가 난데없는 자기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소리를 따라서 전재를 넘어갔다. 모악산 금산사 초입 돌무지개문 위였다. 그곳에는 증산 상제가 앉아 있었다. 김형렬은 꿈에도 그리던 증산 상제를 보고 반가움을 감추기 어려웠다. 이후의 과정에 대해 도전은 세 갈래의 서사로 제시하고 있다. 김형렬의 사상을 논의하기 위해서는 이 장면부터 상세한 분석이 필요하다.
형렬이 크게 반가워하며 상제님을 모시고 용화동으로 돌아 집 앞에 이르러 “선생님, 안으로 들어가십시다.” 하니 말씀하시기를 “자네 집에 산기(産氣)가 있네 그려.” 하시거늘 형렬이 놀라 여쭈기를 “어떻게 아셨습니까?” 하니 말씀하시기를 “삼신(三神)이 말을 몰고 자네 집으로 들어가므로 알았노라.” 하시니라. 또 말씀하시기를 “여기가 제비창골(帝妃創谷)이라지?” 하시매 형렬이 “예, 그렇습니다.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하고 대답하니 말씀하시기를 “응, 촉나라 길이 험하다 하여도 한신(韓信)이가 알더라고, 천하사(天下事)를 하러 다니는 사람이 제비창골을 모르겠나. 감나무 아래로 가세.” 하시어 그 아래에 마주 앉으시느라. (도전 3:10:4-8)
증산 상제와 김형렬의 ‘만남’에서 이 장면은 1884년 태인 불출암‘사건’(본고에서 불출암 사건은 논의하지 않는다)과 함께 그 상징적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표면적으로 이 부분은 두 가지 서사 내용으로 보인다. 하나는 증산 상제가 김형렬의 집에 간 것은 삼신이 이동한 것에 다름 아니다. 일종의 ‘접신(接神)’과정일 수 있지만, 증산 상제의 대도에서 그것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접신과정이 아니라 인사화된 – 인간으로 온 삼신인 증산 상제가 ‘인간’ 김형렬의 집으로 들어간 초월적 현장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삼신’은 도전 첫 장에서 “홀연히 열린 우주의 대광명 가운데 삼신이 계시니, 삼신(三神)은 곧 일신(一神)요 우주의 조화성신(造化聖神)이니라. 삼신께서 천지만물을 낳으시니라. 이 삼신과 하나 되어 천상의 호천금궐(昊天金闕)에서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느님을 동방의 땅에 살아온 조선의 백성들은 아득한 예로부터 삼신상제(三神上帝), 삼신하느님, 상제님이라 불러왔나니 상제는 온 우주의 주재자요 통치자 하느님이니라.”(도전 1:1:2-5) 라고 밝힌 것과 같이 우주의 주재자 · 통치자이고, 이 삼신은 증산 상제를 가리킨다.
다른 하나는 우주 주재 · 통치자인 증산 상제가 김형렬의 집에 온 것은 천하사를 하기 위함이라는 암시이다. 증산 상제는 김형렬이 살고 있는 곳의 지명에서 그 음성적 의미를 가져와 자신이 김형렬을 불러낸, 김형렬의 집에 발길을 한 것은 곧 천하사를 하기 위한 것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중국 한 고조 유방의 신하 한신을 인용한 것은 표면적으로는 한나라를 세운 ‘천하사’를 보여 주지만, 증산 상제의 천하사가 그것일 리는 만무하다. 증산 상제는 다른 자리에서 “이곳은 제비창골이 아니요 제업창골(帝業創谷)이니라.” (『도전』 3:13:9)라고 했다. 따라서 김형렬의 주거지인 전주 우림면 하운동의 ‘제비창골’은 단순한 물리적 행정구역이 아닌, 천지공사의 시종처(始終處)로서 신성지리(sacred geography)적 위상을 지닌다. 증산 상제는 이 공간의 영적 정체성을 다음과 같이 재정의하였다. ‘제업창골(帝業創谷)’이란 문자 그대로 ‘상제의 통치 사업(帝業)을 창건(創)하는 계곡(谷)’이라는 뜻이다. 세속의 지명이 지닌 우연성을 배제하고, 우주의 주재자가 지상에 강세하여 신천지를 개벽하는 원형적 공간으로 영역화(territorialization)한 것이다.
3) 미륵불의 부름과 후천 용화세계 건설의 일꾼
앞의 도전성구의 서사를 일별하면 지금까지 논의한 두 가지 의미를 분석할 수 있지만, 여기에는 좀 더 꼼꼼한 읽기가 필요하다. 우리는 ‘형렬이 크게 반가워하며 상제님을 모시고 용화동으로 돌아 집 앞에’ 이르렀다’는 문장에 주목한다. 이 문장 중에서도 특히 ‘용화동으로 돌아’라는 문장에 주목한다. 전체 문장을 보면 이 구는 없어도 문장 자체는 충분히 성립된다. 따라서 ‘용화동으로 돌아’ 갔다는 문장에는 다른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을 우리는 지적한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김형렬이 증산 상제를 모시고 용화동을 왔다는 이 문장 이전의 서사를 상기하자. 증산 상제가 김형렬을 ‘호출’한 장소는 금산사 초입의 돌무지개문 위였다. ‘문’은 두 경계를 연결하는 통로이다. 그곳에 위치한 돌무지개는 무극대도적 상서로움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금산사는 신라 진표율사가 미륵전을 중창한 이후 한국 미륵 신앙의 본산에 다름 아니다. 또한, 금산사 미륵전은 도솔천의 주재자 증산 상제가 인간으로 탄강하기 전, 30년 동안 머물렀던 성소이다(「도전 2:15:7). 증산 상제가 금산사 미륵전에 머물렀다가 인간으로 온 이유는 분명하다. 증산 상제는 도솔천 천주이다. 증산 상제는 수 차례에 걸쳐 ‘내가 미륵불이다”라고 자신의 신원을 밝혀 주었다. 여기서 ‘미륵불’은 물론 불교에서 의미하는 미륵불과는 상당 부분 거리가 있으나 더 이상의 논의는 생략한다.
그렇다면 이날 증산 상제가 금산사 초입 돌무지개문 위에 앉아서 김형렬을 불러냈다는 것은 무엇인가! 증산 상제의 그 제자들의 첫 만남의 장소는 이후의 ‘행위’에 있어서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훗날 보천교 교주가 될 차경석은 용암리(龍岩里) 물방앗간에 머무르고 있던 증산 상제가 인근 주막에서 만났다. 안내성은 정읍 새재라는 고갯길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만났다. 그런데 김형렬은 금산사 초입에서 증산 상제가 직접 불러서 만났다. 일종의 호출이다. 물론 김형렬은 이때 처음 증산 상제를 만난 것은 아니었다. 처음 만난 것은 태인 불출암이었다. 본고에서 상세히 논의하지 않았으나 불출암은 그 절이름에서 보이듯 ‘미륵’불이 땅에서 솟아 나왔다는 설화가 전해지는 성소이다(노종상, 「강증산, 그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증산도사상 창간호 참조할 것). 따라서 증산 상제가 김형렬을 따라 돌무지개문을 벗어나 김형렬을 따라 그의 집으로 간 것은 미륵불이 ‘금산사’라는 성소를 벗어나 인간 세상으로의 ‘출세’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김형렬은 미륵불을 인간 세상으로 모시고 온 ‘매개자’이다.
문제는 김형렬이 곧바로 자기 집으로 안내한 것이 아니라 ‘용화동을 돌아’서 갔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돌무지개문을 통해 금산사라는 성소를 벗어난 증산 상제가 인간세계에 첫발을 디딘 것은 용화동이다. ‘용화동’은 미륵하생경에서 인간세계에 하생한 미륵불이 삼회 설법으로 온 중생을 제도하는 용화세계를 상징한다는 것이 우리의 분석이다. 바꾸어 말하면 인간으로 강세한 증산 상제가 향후 천지공사를 통해 인류를 구원하게 될 선경세계를 상징한다. 증산 상제와 그의 수석성도 김형렬이 추구하는 용화세계 건설이야말로 곧 증산 상제가 하고자 하는 ‘제업(帝業)’임은 말할 것도 없다. 결국 증산 상제가 김형렬을 부른 것은 미륵불로서 용화세계 건설을 위한 ‘일꾼’을 호출한 것이었다. 직접적인 언설로 드러내지 않았으나 그것은, 증산 상제가 김형렬에게 내린 최고, 최대의 사명이요, ‘도수’라는 것이 본고의 분석이다.
결론적으로 증산 상제와 김형렬 사이에는 첫 만남에서부터 ‘미륵불’신앙이라는 특별한 함의가 바탕하고 있다. 이것은 증산 상제 어천 후 김형렬이 ‘미륵불교’를 창립하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김형렬의 집안은 가난하여 보리밥으로 상제를 공양하는 처지였으나, 추석 명절에는 밥솥을 떼어 팔아서라도 공양을 지속하고자 한 지극한 성·경·신의 소유자였다(『도전』 2:46:1). 증산 상제는 이를 보고 “솥이 들썩이는 것을 보니 미륵불이 출세함이로다”라며 김형렬의 지극한 희생정신을 후천 미륵불 출세의 도수와 연결 지었다. 이 일화는 ‘성경신’의 극치를 보여준다. 자기를 완전히 비워 절대자에게 바치는 이 무조건적인 헌신은 유교적 선비의 외피를 벗고 참된 구도자로 거듭난 자만이 할 수 있는 결단이었다.
이러한 물적·심적 결속은 단순한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넘어선다. 증산 상제는 “우리 공부는 물 한 그릇이라도 연고 없이 남의 힘을 빌리지 못한다”라고 경계하며, “반반지은(半飯之恩)도 필보(必报)하라”고 가르쳤다(『도전』 2:28:3). 김형렬과 그의 가족이 제공한 한 그릇의 보리밥과 헌신은 우주 주재자의 공사를 가능케 한 은혜로 축적되었으며, 이는 그 성공 여부와 상관없이 훗날 김형렬이 후천 무극대도 미륵 신앙의 종조(宗祖)적 권위를 획득하는 도덕적 기반이 되었다.

- 식주인(食主人) 정명과 우주론적 ‘체용론(體用論)’
1902년 임인년 4월 4일, 원평장에서의 기적적인 재회 그리고 4월 13일 미륵불 증산 상제의 ‘부름’에 응답하여 김형렬은 증산 상제를 자신의 하운동 집으로 모신 이후 8년 수종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종교학에서 절대자를 모시는 행위는 단순한 봉사가 아니라, 자아를 비우고 성스러운 영역에 동참하는 신성화(Sanctification) 과정이다. 증산 상제는 김형렬을 천지공사의 ‘식주인(食主人)’으로 임명했다. 식주인이란 상제의 의식주와 공사 비용을 책임지는 자를 의미한다.
상제님께서 임인(壬寅 : 道紀 32, 1902)년 4월 13일에 전주 우림면 하운동(全州 雨林面 夏雲洞) 제비창골 김형렬의 집에 이르시니라. 이때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심회를 푸시고 형렬에게 일러 말씀하시기를 “이제 말세의 개벽 세상을 당하여 앞으로 무극대운(無極大運)이 열리나니 모든 일에 조심하여 남에게 척(隻)을 짓지 말고 죄를 멀리하여 순결한 마음으로 정심 수도하여 천지공정(天地公庭)에 참여하라.
나는 조화로써 천지운로를 개조(改造)하여 불로장생의 선경(仙境)을 열고 고해에 빠진 중생을 널리 건지려 하노라.” 하시고 또 말씀하시기를 “나는 본래 서양 대법국(大法國) 천개탑(天蓋塔)에 내려와 천하를 두루 살피고 동양 조선국 금산사 미륵전에 임하여 30년 동안 머물다가 고부 객망리 강씨 문중에 내려왔나니, 이제 주인을 심방함이니라.” 하시고 “시속에 ‘아무 때 먹어도 김가가 먹을 밥’이라는 말이 있나니 대저 무체(無體)면 무용(無用)이라. 서(西)는 금(金)인 고로 김(金)씨에게 주인을 정하였노라.” 하시니라.
이로부터 형렬의 집에다 식주인(食主人)을 정하고 머무르시면서 도문(道門)을 열어 천지공사를 행하실 때 형렬에게 신안(神眼)을 열어 주시어 신명(神明)이 모이고 흩어지는 것과 어명(御命)을 받드는 모습을 참관케 하시니라. 형렬이 모시면서 보니 밤이면 상제님께서 기거하시는 방에서 ‘웅웅웅’ 하고 벌이 나는 듯한 소리가 나더라. (도전 2:15)
당시 김형렬의 집안은 몹시 빈곤했다는 것은 누차 지적하였다. 그러나 그는 식주인으로서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성경신을 다 했다. 김형렬은 자신뿐 아니라 가족 전체를 신앙의 용광로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는 여동생에게는 49일 동안 매일 떡을 쪄서 천지공사의 정성을 들이게 독려했다. 여동생이 힘겨움에 불평하여 떡이 익지 않는 시련이 닥칠 때도, 김형렬은 완고하게 정성을 다하도록 꾸짖었다. 이는 단순한 성경신이 아니다. 우주의 질서를 바로잡는 천지공사에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최고의 도리인 ‘성(誠, 참됨), 경(敬, 공경), 신(信, 믿음)’을 온몸으로 실현해 낸 역사적 사건이었다. 증산 상제는 이러한 김형렬을 향해 “나를 따르는 자들이 돈과 권력을 바라고 좇으나, 너만은 오직 마음에서 우러나와 나를 쫓는다.”라고 찬탄했다. 김형렬의 성경신은 물질적 교환을 바라는 기복 신앙이 아닌, 우주적 대의에 동참하는 고결한 참여의 신학이었다.
증산 상제는 민족 고유의 원형으로서 삼신신앙을 보여 주지만, 또한 원시반본 정신에 따른 근대적 무극대도의 변화된 모습도 제시하였다. 그 증산 상제의 사상 체계에서 성도(聖徒)들의 위상은 단순한 피교육자나 추종자의 영역에 머무르지 않는다. 증산 상제가 집행한 후천개벽 천지공사는 신명과 인간이 합덕하여 조화 선경을 건설하는 ‘인신합덕’의 원리를 근간으로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천지공사의 도수가 현실 역사 속에서 발현되는 과정에는 이를 수종 들고 담보하는 인간 주체의 역할이 필수적이다.
김형렬은 증산 상제가 1901년 대원사 칠성각에서 성도한 후, 1902년 임인년 4월에 최초로 접견하여 무극대도의 문을 열고 1909년 어천할 때까지 8년간 가장 가까이서 보필한 수석 성도이다. 특히 증산 상제가 김형렬을 천지공사의 ‘식주인’으로 정명(定名)하고 그의 집을 공사의 본거지로 삼았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증산 상제는 임인년 4월 13일 전주 하운동 제비창골 김형렬의 가택에 당도하여 다음과 같이 식주인의 도수를 붙였다. “무체(無體)면 무용(無用)이라. 서(西)는 금(金)인 고로 김(金)씨에게 주인을 정하였노라.” 라고 한 선언은 증산 상제의 천지공사 사상에서 물리적 세계와 초자연적 도술 세계가 어떠한 방식으로 교섭하고 결합하는지를 밝혀내는 형이상학적 전제이자 실천론적 기틀이다. ‘무체무용(無體無用)’의 대전제는 형이상학적인 우주적 법리나 신성한 조화 권능(用)이 아무리 완벽하게 설계되어 있을지라도, 그것이 구체적으로 착근하고 작동할 지상에서의 물리적 본체나 물질적 기반(體)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그 조화 권능은 현실 역사 속에 온전히 발현되지 못하고 무화(無化)될 수밖에 없음을 천명한다.
동양 전통 철학의 핵심 범주인 체용론(體用論)에서 ‘체(體)’는 현상의 본질적 바탕이자 물리적 실체를 의미하며, ‘용(用)’은 그 본체에 외적으로 발현되는 작용이자 조화를 뜻한다. 삼계를 개조하는 천지조화의 권능(用)이 현실 역사에 구현되기 위해서는 그것을 수용하고 지탱할 수 있는 물질적·인적 거점인 본체(體)가 존재해야 한다. 김형렬은 바로 천지공사라는 거대한 우주사적 기획을 현실에 정착시키는 ‘우주적 본체(cosmic substance)’로 정위된 것이다. 여기서 ‘체’가 지니는 의미는 단지 관념적 바탕에 그치지 않고, 상제의 인격적 강세와 천지공사의 기획을 온몸으로 지탱할 구체적 매개체, 즉 김형렬의 가택, 가산, 식솔들의 자발적인 노동과 공양이라는 현실적 물성(物性)을 내포한다. 증산 상제가 이러한 지상의 ‘체’로서 서방(西方) 금(金) 기운을 선천적으로 부여받은 김씨(金氏)인 김형렬을 지목한 것은 우주론적 연원과 완벽하게 부합한다.
우주 변화의 원리상 서방(西方)은 오행의 금(金)에 배속되며, 이는 계절적으로 봄과 여름의 분열과 성장을 종식하고 알곡을 맺는 가을(秋)의 수렴 질서, 즉 후천개벽의 시간대를 뜻한다. 따라서 서방 금 기운을 상징하는 김(金)씨 인물에게 천지공사의 주체적 거점인 ‘식주인’의 도수를 붙인 것은, 가을 개벽이라는 천리(天理)적 변화에 정밀하게 조응하기 위한 우주론적 필연성의 구현이다. 결과적으로 김형렬은 단순한 수종자가 아니라 천하 창생을 추수하는 가을의 금 기운을 현실에서 직접 담아내는 신성한 그릇이자, 무체무용의 형이상학을 지상의 역사 속에서 입증해 낸 종교적 실체로 평가할 수 있다.
증산 상제는 제업창골 감나무 밑에 음식을 차리고 감나무를 잡고 ‘만수(萬修)’를 부르며 <성주풀이>를 하였다. 노랫말에 주목한다. “태평전(太平殿) 대들보가 되어 ⋯ 대활연(大豁然)으로 이 땅으로 설설이 내립소사. 시(始)도 여기서 일어나고 종(終)도 여기서 마치리라.” (『도전』 3:13:5-6) 이 공사는 제업창골이 후천 조화선경의 중심 기둥(태평전 대들보)이 될 것임을 상징한다. 시작(始)와 마침(終)이 모두 김형렬의 주거지에서 이루어진다는 선언은, 김형렬의 공간이 선천의 모든 문명을 수렴하여 후천의 새 문명으로 출산하는 우주적 자궁(womb)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