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신(誠敬信)의 화신, 김형렬의 생애와 사상적 지평 1

 

이 글은 19세기 말 20세기 초 격변기 속에서 증산 상제의 수석 성도이자 미륵불교의 창립자인 태운(太雲) 김형렬(金亨烈, 1862~1932)의 생애를 추적하고, 그가 정립한 사상적 지평을 종교 철학적 관점에서 규명하는 데 목적이 있다. 김형렬은 증산 상제의 수종자(隨從者)로서 천지공사(天地公事)를 미륵 하생과 용화삼회(龍華三會)의 도수로 체계화한 무극대도의 사상가이자 실천가였다. 그는 증산 상제 도문의 ‘식주인(食主人)’으로서 고단한 사명을 성·경·신(誠敬信)의 구체적 실천으로 승화시켰으며, 증산 상제 어천(御天) 이후 금산사 미륵전의 ‘솥(鼎)과 시루(甑)’ 구조를 매개로 ‘증산 즉 미륵론’을 교리적으로 완성했다.

김형렬은 1902년 임인년 증산 상제와의 해후 이래 어천할 때까지 9년간 물적·심적 시봉을 다하며 천지공사의 물질적·인적 기반인 ‘체(體)’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본고는 김형렬의 생애와 함께 사상을 다섯 가지 핵심 영역으로 구조화하여 분석한다. 첫째, ‘무체무용(無體無用)’의 원리에 기초한 체용론적 식주인 사상이며, 둘째, 전주 하운동 제비창골을 우주의 시종처(始終處)이자 제업창골(帝業創谷)로 규정하는 신성 지리관이다. 셋째, 신안(神眼) 개안과 천상 옥경대 참관을 통해 확립된 신인합일(神人合一)의 인식론적 신성 인식이며, 넷째, ‘천지생인 용인(天地生人用人)’에 기초한 인존(人尊) 중심의 주체적 공사 참예론이다. 마지막으로 증산 상제 어천 이후 그가 전개한 ‘미륵불교’ 창립과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임시정부 군자금 조달)의 실천적 성격을 규명한다.

김형렬은 미륵불교 창립을 통해 증산 상제의 미륵불 사상을 실천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는 기미년 3·1운동기에 미륵 신앙을 기반으로 한 항일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에 헌신함으로써 종교적 신념의 역사적·사회적 실천 모델을 제시했다. 본고는 증산 상제의 수석 성도 김형렬이 후천 가을 개벽의 우주적 도수를 현실에서 담보한 능동적 주체였음을 밝히고자 한다. 나아가 김형렬이 남긴 구술과 무극대도적 유산이 초기 증산도문의 정통성 확립과 미륵 하생신앙의 현대화에 기여한 구조적 인과관계를 밝히고자 한다.

  1. ‘개벽’적 위기와 구원의 매개자

인류 역사는 거대한 위기에 직면할 때마다 새로운 구원 담론을 요청해 왔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한반도는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적 침탈과 조선 왕조의 봉건적 지배 체제의 해체, 그리고 일제의 무단 침략이라는 전대미문의 복합적이고 종말론적인 위기 상황에 처해 있었다. 당대의 지배 이데올로기였던 성리학적 질서는 더 이상 가속화되는 사회적 파탄과 민초들의 존재론적 안위를 보장하지 못했으며, 민중들은 기근과 전염병, 외세의 잔혹한 약탈 속에서 최소한의 인간적 삶을 영위하는 것조차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진멸(盡滅) 지경, 즉 총체적 파국에 이르렀다.

이러한 극단적 암흑의 시대에 한반도의 기층 민중은 단순한 제도적 개혁이나 정치적 변화를 넘어, 우주적 거대 질서의 전면적 전복과 도래할 새 하늘과 새 땅을 의미하는 ‘후천개벽(後天開闢)’과 미래의 부처 미륵불 신앙에 주목했다. 고통받는 도탄 속에서 자신들을 단 한 명도 빠짐없이 구제하러 직접 내려오는 미래의 부처인 ‘미륵불’의 하생 비전을 절대적 희망으로 수용하며 새로운 무극대도 운동을 태동시켰다. 그 사회적, 사상적 격변의 한복판에서 선천(先天)의 원한을 풀고 해원, 상생의 신천지를 기획한 절대 신격이 바로 증산 (甑山) 강일순(姜一淳, 1871~1909)이며, 그의 가르침과 천지 도수를 가장 밀접한 거리에서 수호하고 사상적으로 구조화한 인물이 태운(太雲) 김형렬(金亨烈, 1862~1932)이었다.

종교학적인 비교 연구 관점에서 분석할 때, 한 종교의 초창기 카리스마적 창시자가 선포한 원초적인 계시와 성스러운 역동성을 가혹한 역사적 현실 속에서 훼손 없이 보전하고, 이를 구체적인 교의(doctrine)와 의례, 그리고 지속 가능한 제도적 체계로 안착시키는 ‘매개자(Mediator)’의 역사적 소명은 창시자의 도래 자체만큼이나 교단의 존속을 가르는 사활적 요인이다. 붓다의 열반 이후 정법 결집을 주도하며 부처의 법망을 원형대로 암송해 낸 아난다(Ananda)가 있었고, 지중해 세계의 원시적 예수 신앙 운동을 조직적인 신학 체계를 지닌 세계 종교로 도약시킨 사도 바울(Paul)이 존재했다면, 증산 상제의 무극대도가 지닌 신념 체계의 정립 과정에는 단연 김형렬이 있었다.

김형렬은 자신에게 생명의 구원을 선사한 증산 상제를 단순한 기적을 행하는 인간 스승이나 세속적인 도인(道人)으로 한계 짓지 않았다. 대신 고대 이래 민중들이 고난 속에서 응시해 온 도솔천의 주재자이자 고통받는 지상 세계를 영구히 정화할 미래의 구원불인 ‘미륵불’의 진실한 화신으로 선구적으로 선언했다. 그는 평생을 걸쳐 성(誠)·경(敬)·신(信)이라는 내적 신념과 외적 윤리의 합일을 철저히 실천함으로써, 우주의 입법자이자 집행자로서 천지공사를 단행하는 상제 곁에서 9년간의 거룩한 사역을 가장 신뢰할 만한 방식으로 수종했다.

본 논문은 김형렬의 종교적 일대기를 입체적으로 복원하는 동시에, 그가 전북 김제의 금산사 미륵전이 품은 독특한 건축적·구조적 상징성을 해석학적으로 통찰하여 어떻게 ‘증산 즉 미륵론’이라는 고도의 신학적 정당성을 확보해 냈는지 분석하고, 그의 성경신을 다 바친 신앙이 항일 독립운동이라는 역사적·사회적 투쟁으로 어떻게 발현되고 수렴될 수 있었는지 종교학 및 종교 철학적 관점에서 면밀하게 해명하고자 한다.

  1. 선비 가문의 가풍과 시대의 어둠: 동학의 패배와 절망

태운 김형렬의 본관은 안동 김씨이다. 족보명 원회(元會), 호는 태운(太雲), 형렬(亨烈)은 자이다. 그는 1862(임술)년 5월 5일, 1년 중에서 양기가 가장 왕성한 날이라 하는 단오절에, 전주부 우림면 동곡(銅谷) 마을(구릿골. 현재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 동곡 마을)에서 아버지 석필(錫弼)과 어머니 한산 이씨(韓山李氏) 사이에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형제자매는 모두 열두 명이었으나 어려서 질병으로 사망하고 막내 여동생 성녀(姓女. 내주평댁)만 살아서 김형렬과 남매의 인연을 유지하였다.

김형렬의 신앙적, 사상적 뿌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나고 자란 안동 김씨 가문의 가풍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아야 한다. 안동 김씨 가문이 풍양 조씨 가문과 함께 후기 조선의 세도 정치를 구가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졌다. 조선의 세도 정치는 왕의 외척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던 19세기 순조·헌종·철종 시기(약 60년간)의 정치 형태이다. 정조 사후 어린 왕들이 즉위하면서,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두 가문이 번갈아 가며 정권을 장악하고 국정을 농단했다. 여기서 세도 정치의 폐단을 논의할 여유는 없다. 다만, 관점을 달리하여 본다면, 안동 김씨 가문은 실질적인 최고 권력 가문으로 군림할 정도로 조선의 이데올로기였던 성리학에 충실한 가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중앙정치의 세도 권력과는 거리가 있지만, 김형렬 역시 이 과정에서는 예외일 수 없었다. 그는 대대로 유학적 소양을 극도로 숭상하던 호남 사림의 명가에서 성장했다. 증조부 김기종이 관찰사에 비견되는 종2품 가선대부의 고위 품계에 올랐던 만큼, 김형렬은 가문의 엄격한 선비적 법도를 체화했고 한학의 세례를 받아 유학의 경전에 깊은 조예를 지니게 되었다.

김형렬은 청장년기에 성균관 소속의 사숙에서 유생들을 가르치는 훈장을 지낼 정도로 철저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유교적 사유 체계를 갖춘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김형렬은 예사로운 지식인은 아니었다. 그는, 증산 상제가 “너는 도선(徒善)이라. 오히려 복(福) 마련하기 어렵도다.” (󰡔도전󰡕 9“106:3) 하고 평한 것처럼 착하고 곧은 품성과 구도자다운 덕성을 소유한 인물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김형렬이 속한 안동 김씨 가문이 주도한 세도 정치의 폐단과 그 결과는 온갖 부정부패와 매관매직의 횡행으로 드러났다. 권력이 소수 가문에 집중되면서 뇌물이 성행하고 관직을 사고파는 매관매직이 만연했다. 당연한 결과이지만 삼정(三政)은 문란했고 백성은 도탄에 빠졌다. 탐관오리들의 횡포가 극에 달해 세금 제도가 크게 문란해졌으므로 백성들의 삶을 파탄 내고 홍경래의 난, 임술농민항쟁 등 농민 봉기의 원인이 되었다. 왕실의 권위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국가의 근간이 무너지면서 조선 사회의 몰락을 가속화했다.

안동 김씨 가문의 핏줄이었으나 김형렬은 부패한 권력이 아니라 그 권력을 몰아내는 저항의 편에 섰다. 따라서 그가 기성의 봉건 질서를 전면 부정하는 신종교, 무극대도의 가치관을 수용하고 그 수석 대행자가 된 것은 당대 유학적 이데올로기의 파탄 및 시대의 비극적 징후와 전혀 무관하지 않다. 이는 주자학적 세계관이 도탄에 빠진 민초들의 실존적 고통을 더 이상 구제하지 못하는 무력한 교리로 전락했음을 지식인 스스로 뼈저리게 목격한 결과였다.

김형렬의 가문에는 대대로 ‘정(鄭)집전’이라는 비범한 기인과의 영적 기연이 구비 전승으로 엄숙하게 전해 내려왔다. 가문에 머물던 이 이인은 기근과 난리 속에서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이웃을 구제하고 가문의 우환을 미리 예방해 주었으나, 세속적 영달의 상징인 사사로운 묫자리(명당)를 잡아주지는 않았다. 훗날 증산 상제는 이 집안의 갈등을 회고하며 “천리의 극진함은 털끝만큼의 인욕의 사사로움이 없다”라고 준엄하게 일깨워 주었다. 가문에 대대로 쌓아 올린 눈에 보이지 않는 공덕과 이웃을 향한 적선은 단순히 가문의 영달이나 명당이라는 세속적 사리로 소모되지 않고, 도리어 우주적 대구원을 집행하러 내려온 증산 상제와 만나는 거대한 복록으로 치환된 것이다. 이처럼 김형렬은 유년 시절부터 개인의 욕망을 철저히 통제하는 도덕적 인과율하고 정직하고 엄밀한 천리의 법칙을 체계적으로 학습하며, 훗날 겪게 될 거대한 무극대도의 헌신(성경신)의 내적 토대를 닦고 있었다.

김형렬의 온 생애를 뒤흔들고 전면적인 세계관의 전복을 가져온 결정적 계기는 1894년 갑오동학혁명이었다. 그가 언제 동학에 입도했는지 여부는 확인하기 어렵다. 다만 유학자이자 사려 분별이 명확한 지식인이었음에도 민중의 비참한 도탄을 결코 외면할 수 없었던 그는 ‘녹두장군’ 전봉준이 치켜든 척왜척양과 보국안민의 깃발 아래 온몸을 던져 투신했다. 그러나 농민군의 웅장한 자주개혁의 꿈은 공주 우금치와 청주 전투에서 외세의 근대식 신식 화기 앞에 무참하게 도륙당하며 비참하게 꺾였다. 전우들의 피가 대지를 적시고 시체가 산을 이룬 참혹한 아비규환의 전장 속에서, 김형렬 자신 또한 막다른 골목에 몰려 사선에 놓이게 되었다. 이때 정체불명의 청년이었던 증산 상제가 초자연적이고 불가사의한 도력으로 개입하여 그를 사지에서 구원해 주었다. 이 극적인 구원의 만남은 김형렬의 영혼에 평생 지워지지 않는 거룩한 종교적 낙인을 찍었다. 유교적 합리주의와 세속적 개혁 운동, 그리고 인간의 한계적 주체성에 입각한 무력 투쟁의 종말을 뼈저리게 절감한 김형렬은, 이제 세속적 역사의 차원을 초월한 근원적인 우주 구원의 길, 즉 참된 ‘신앙과 구도’의 영적 여정을 치열하게 개시하게 된다.

김형렬은 전장의 사지에서 자신을 건져내어 존재론적 전회를 경험하게 한 증산 상제의 성스러운 종적을 찾아 7년이라는 고고한 은둔의 세월을 감내했다. 이 시기 동안 그가 마주해야 했던 것은 가산의 극심한 탕진과 극빈, 그리고 광인(狂人)을 쫓는다는 유림과 주변 이웃들의 차가운 냉소와 조롱이었다. 과거 성균관 사숙의 훈장으로서 누리던 학문적 권위와 사회적 평판은 일시에 박탈당했으며, 지독한 물질적 결핍과 사회적 고립 속에서 그의 실존은 철저히 시험대 위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종교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이 혹독한 고독과 대기(待期)의 시간은 단순한 유예나 고통의 방치에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그의 영혼 깊숙이 고착되어 있던 완고한 주자학적 사유 체계와 세속적 영달에 대한 미련인 인욕(人欲)을 완전히 비워내는 일종의 영적 ‘자기 비움(kenosis)’의 과정이었다. 주객의 합일을 가로막는 기존의 학문적 아집과 관념적 도그마를 남김없이 박탈당하는 이 은둔의 시련기야말로, 훗날 증산 상제의 우주적 재편 기획인 천지공정(天地公庭)에 온몸으로 수종하고 그 거룩한 ‘법방’을 원형 그대로 담아낼 수석 성도로서의 영적 그릇을 구워낸 불가피하고도 정교한 연금술적 시금석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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