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신(誠敬信)의 화신, 김형렬의 생애와 사상적 지평 3

  1. 신안(神眼) 개안과 신인합일(神人合一)의 인식론

1) 지각 체계의 혁신과 신안(神眼)의 개안

김형렬의 사상적 성숙에서 중요한 분기점은 증산 상제에 의해 집행된 인위적 수도와 그에 따른 신안(神眼)의 개안이다. 증산 상제는 그에게 공사에 수종들 수 있도록 심령(心靈)을 열어주기 위해 1902년 4월 15일부터 집중적인 수련을 시켰다(『도전』 3:12:11). 종교 현상학의 관점에서 육안의 일상적 범주를 넘어서는 초자연적 감각의 획득은 단순한 신비체험을 넘어선 지각의 혁명적 전환을 수반한다. 유가적 선비로서 엄격한 합리주의와 경험론적 세계관을 견지해 온 김형렬에게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 즉 신도(神道)로의 도약은 인식론적 해체 내지 전복과 같았다. 상제는 그의 한문 훈장으로서의 세속적 지성을 무력화하고 우주적 다차원성을 직접 체감하게 함으로써, 보편적인 가시 세계 이면에서 실존하는 거대 질서를 자각하도록 이끌었다.

이후 제업창골로 천하신명을 소집하는 공사에서 증산 상제는 김형렬에게 “눈을 감고 보라”고 명하였다. 김형렬은 육안의 지각을 닫고 영적 눈을 떠 구름과 안개 속에 가득한 신장(神將)들과 기기괴괴한 신병(神兵)의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관람하였다(『도전』 3:14:8~9). 이러한 감각의 인위적 폐쇄와 영적 안목의 동시적 개방은 신비주의적 일탈이 아닌, 우주적 입법자인 상제 곁에서 대도의 집행 과정을 정밀히 관조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지적·신비적 정초였다. 그는 이 사건을 계기로 단순한 물질적 시공간에 구속되지 않는 존재, 즉 천지공사라는 거대한 초자연적 재편 공정에 구체적인 증인으로 동참하게 되었다. 이는 가시적 물질세계 이면에 실존하는 초자연적 신도 세계를 관념적 주장이 아닌 실증적이고 체득적인 차원에서 완벽하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2) 천상 옥경대(玉京臺) 참관과 신적 확신

김형렬의 영적 인식은 천상 옥경대 참관을 통해 흔들리지 않는 종교적 확신으로 고착된다. 증산 상제가 건넨 안경을 쓰고 따라간 천상 옥경대 3층 누각에서, 김형렬은 상제가 백관과 선관선녀들에게 옹위되어 좌정하고 당나라의 위징(魏徵)을 꾸짖는 장면을 목격하였다. 여기서 상제가 건넨 안경은 단순한 시력 보조 도구가 아니라, 지상 인간의 한정된 감각적 대역폭(bandwidth)을 우주 원형의 성스러운 시공간으로 변환해 주는 인식론적 매개자(epistemological mediator)이다. 이 초자연적인 렌즈를 통해 김형렬은 마주하고 있는 육체적 스승 강증산이 곧 천상의 최고 보좌를 주재하는 절대 신격인 증산 상제임을 명백히 인지하게 되었다.

“우리 선생님이 바로 한울님(인존천주)이시라.” (『도전』 2:39:8)

이러한 역사적 신체험은 단순한 윤리적 감화나 논리적 동의, 또는 신조에 대한 고백적 동의를 영구히 초월한 사건이었다. 그것은 천상의 입법자가 직접 지상에 강세하여 고통받는 민중들과 동일한 조건 속에서 천지공사를 행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극적인 실존적 조우였다. 즉, 초월적 신도와 인간이 처한 지상적 인도가 완전히 하나로 수렴되는 신인합일(神人合一)의 사상적 체득이었던 것이다. 이 전면적인 지각의 확장을 통하여 김형렬은 주관적인 신앙의 흔들림을 원천적으로 극복할 수 있었으며, 평생에 걸쳐 상제의 초자연적인 행적을 사료로써 보존하고 전수하는 가장 신뢰도 높은 정통성의 수호자이자 기록자로 우뚝 설 수 있게 되었다.

 

  1. 인존(人尊) 중심의 주체적 참예와 상생(相生)·해원(解寃)의 실천

1) 천지용인지시(天地用人之時)와 주체적 인간상

김형렬의 사상 저변에는 증산 상제가 선언한 ‘인존시대(人尊時代)’에 대한 투철한 시대적 사명의식과 근대적이고도 우주적인 인간 주체론이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형어천지(形於天地)하여 생인(生人)하나니 ⋯ 천지생인(天地生人)하여 용인(用人)하나니, 불참어천지용인지시(不參於天地用人之時)면 하가왈인생호(何可曰人生乎)아.” (『도전』 2:23:2~3)

증산 상제가 김형렬에게 전한 말씀이다. 번역하면 “하늘과 땅을 형상하여 사람이 생겨났나니 천지가 사람을 낳아 사람을 쓰나니 ⋯ 천지에서 사람을 쓰는 이 때에 참예하지 못하면 어찌 그것을 인생이라 할 수 있겠느냐!”라는 말씀이다. 선천의 억압적인 역사 속에서 인간은 하늘(천존)과 땅(지존)의 엄격한 결정론적 지배 질서에 종속되어, 세속의 고난과 운명을 수동적으로 감내해야 하는 가냘픈 종속물에 불과했다. 그러나 선천의 고통과 상극의 상처를 매듭짓고 새로운 우주를 창조하는 가을 개벽의 문턱에 이르러, 천지가 마지막 후천 가을의 결실을 거두기 위해 사람을 쓰는 ‘천지용인지시(天地用人之時)’ 즉 ‘천지에서 사람을 쓰는 이때’에는 인간의 존재론적 주체성이 비약적으로 극대화된다. 이제 인간은 피조물의 한계를 벗어나 우주의 재편과 조화 건설을 돕는 주체적 공동 창조자(co-creator)로 복권된다.

김형렬은 이러한 인존주의적 선언을 자신의 실존 속에서 직접 체현하였다. 그는 증산 상제가 도수로 기획하는 후천개벽의 역사에 직접 동참하여, 물적 토대를 공양하고 신안으로 영적 전개 과정을 수증(受證)하였다. 이러한 적극적 수종 행위는 “불참어천지용인지시면 하가왈인생호”라는 신성한 질타에 대한 구체적이며 역사적인 대답이었다. 그는 천지의 도구로 피동적으로 움직이는 자가 아니라, 스스로의 자유의지와 성경신을 통하여 우주적 입법의 전개 과정에 동참한 후천적 인존상의 전형을 선구적으로 제시한 것이다.

2) 해원상생(解寃相生)의 윤리와 배사율(背師律)의 경계

김형렬의 사상을 탐구하려고 할 때, 그가 수석 성도로서 성경신을 바쳐 추종하는 증상 상제의 그것과 구별이 어느 정도 가능한지, 그 범주의 확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구별이 쉽지 않다는 한계가 있다는 점도 지적되어야 한다. 본고는 그 한계를 인정하면서 논의를 진행하고자 한다. 특히 원시반본을 기본으로 하는 ‘해원(解寃)’과 ‘상생(相生)’ 사상이 여기에 해당한다. 증산 상제는 상극의 선천 운로 속에서 역사적으로 누적된 원한으로 가득 찬 천하를 치유하기 위해 ‘해원’과 ‘상생’, ‘보은’을 최고의 도덕적 행위 규범이자 가을 개벽의 우주적 윤리로 삼았다. 김형렬은 단주(丹朱) 해원을 역사적 상징의 첫머리로 삼아 우주와 문명 간에 맺힌 모든 고를 근원적으로 풀어내는 증산 상제의 거시적인 해원사상을 전적으로 수용하였다. 나아가 일상에서는 타인에게 척(隻)을 짓지 않으며, 타인의 마음에 맺힌 원한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정심 수도(正心修道)’를 윤리적 생활 표준으로 강조했다. 척은 가을의 통합적 생명 순환을 가로막는 치명적인 존재론적 장애물이기 때문에, 상생을 위해서는 반드시 주체적인 참회와 도덕적 정화가 동반되어야 했다.

또한 김형렬의 사상적 지평에는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를 넘어선 ‘사강육륜(四綱六倫)’의 신문명적 도륜(道倫)이 신성하게 수용되어 있었다. 특히 선천의 가장 비참한 병폐인 배은망덕한 풍조를 철저하게 경계하며, “스승을 해하거나 그 은혜를 망각하는 자는 가장 엄혹한 우주법에 따라 배사율(背師律)의 엄중한 심판을 받으리라”는 사상적 경고를 수렴했다. 나아가 “반 숟가락 밥의 은혜도 반드시 갚으라(半飯之恩 必報)”는 고도의 윤리적 상호성(reciprocity) 법칙을 생활 속에서 일관되게 실천하여 내면화하였다(『도전』 2:27:7, 2:28:3). 이 지극한 도덕률은 단순한 도덕적 잔소리가 아닌 후천 선경의 우주적 조화를 지탱하기 위해 정초된 새로운 인간상의 준엄한 자율적 법칙이었다.

 

  1. 증산 상제 어천 후 미륵신앙운동과 역사적 실천

1) 금산사 해석학과 ‘증산 즉 미륵론’의 체계화

1909년 증산 상제가 어천한 이후, 대다수 성도들이 방황하거나 각기 분파를 이룰 때 김형렬은 증산 상제의 가르침을 정통적으로 계승하여 1922년 전북 금산사를 본부로 하는 ‘미륵불교’를 창립하였다. 우리는 김형렬이 증산 상제와 첫 만남이 이루어질 때부터 줄곧 미륵불 사상과 관련이 있음을 지적하였다. 다시 말하면 김형렬은 증산 상제의 많은 갈래의 사상 중에 특히 미륵불 사상의 세계를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증산 상제는 김형렬에게 “너는 좌불(坐佛)이 되어 처소를 잘 지키라. 나는 유불(遊佛)이 되리라.”(󰡔도전󰡕 2:111:3)라고 하였다. 증산도에서는 이를 ‘좌불 도수’로 지칭한다. 증산 상제는 평소 “나를 보고 싶거든 금산사 삼층전 미륵불을 보소.” (󰡔도전󰡕 3:219:7) 하였고, 어천하던 해에는 “내가 금산사로 들어가리니 나를 보고 싶거든 금산 미륵불을 보라. 금산사 미륵불은 육장(六丈)이나 나는 육장 반으로 오리라.” (10:33:6-7) 라고 하였다. 따라서 김형렬의 미륵불교 창립은 증산 상제의 사상과 유지, 천지공사의 도수를 전해 받았음을 의미한다.

김형렬이 미륵불교를 창립한 일차적인 의미는 미래 구원의 부처 미륵불과 증산 상제의 등치를 지적할 수 있다. 김형렬은 자신이 직접 영적으로 참관한 천상 옥경대 삼층각의 초월적 구조와 모악산 금산사 미륵전 삼층금상이 지닌 형태적·기하학적 일치성을 해석학적으로 규명하여, 증산 상제가 곧 지상 동방 땅에 강세한 ‘당래 미륵불’임을 대외적으로 선포하였다. 이는 기성 성리학적 유교의 관념성과 도교의 은둔적 한계를 대승불교의 대중적이고 보편적인 미륵 구세원력과 융합하여 극복한 독창적 사상 체계였다. 이로써 일제의 혹독한 침탈 속에서 정신적·물질적 탈출구를 갈망하던 민중들에게 가장 가시적이고 구체적인 용화세계의 청사진을 제시하였고, 증산사상이 단순한 도교적 방술이나 국지적 비결을 넘어 세계사적 구세론으로 도약할 수 있도록 그 교리적·신앙적 외연을 획기적으로 넓혀 주었다.

김형렬 사상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증산 즉 미륵론’을 교리적으로 정립한 데 있다는 것이 본고의 분석 결론이다. 증산 상제는 강세하기 전 전북 김제 모악산 금산사 미륵전의 육장금상에 30년간 머물렀었다고 선포했다. 김형렬은 이 선언의 이면을 꿰뚫어 보고, 금산사 미륵전이 지닌 독특한 물리적 구조를 우주론적 신학으로 해석해 냈다.신라 중대의 고승 진표율사가 창건한 금산사 미륵전 아래에는 거대한 철제 솥(鼎)이 놓여 있고, 그 위에 미륵불상이 서 있다. 김형렬은 이를 ‘솥(鼎)과 시루(甑)’의 조화로 이해했다. 증산 상제의 호인 증산(甑山)은 ‘시루’를 의미한다. 시루는 떡을 찌는 도구이지만,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것도 익힐 수 없다. 시루 아래에 물을 담은 솥(鼎)이 있고 불의 기운이 아래에서 솥을 데워 열기를 올려보내야만 시루 안의 쌀이 비로소 떡이 되어 굶주린 이들을 먹일 수 있게 된다.

김형렬은 상제를 시루(甑)로, 그리고 장차 나타날 새로운 정체성을 솥(鼎)의 이치로 보았다. 즉, 시루와 솥의 결합은 세상의 원한을 풀고 모든 창생을 구원하여 후천 용화세계를 여는 우주적인 합일의 도리였다. 이 독특한 ‘솥과 시루의 해석학’은 금산사 미륵 신앙과 증산 상제의 대도를 완벽하게 일치시킨 교리적 쾌거였다. 미륵불은 고통받는 민중을 한 명도 빠짐없이 구원하겠다는 자비의 화신이다. 김형렬은 미륵불 아래의 솥을 고통과 굶주림에 빠진 천하 창생을 하나도 빠짐없이 담아내어 따뜻하게 구제할 대자대비의 구원 그릇으로 격상시켰다. 이를 통해 한국의 전통적 미륵하생신앙은 증산의 천지공사 사상 속에서 역동적인 현실 변혁의 에너지로 거듭나게 되었다.

2) 상실을 넘어선 창조 : 미륵불교의 창건과 정통성 수호

1909년 기유년, 증산 상제가 39세의 젊은 나이로 어천하자 도문은 미증유의 혼란에 빠졌다. 수많은 성도가 흩어졌고 각자 자기가 증산 상제의 정통 계승자라고 주장하며 종파를 만들기 시작했다. 김형렬 역시 엄청난 실의와 방황의 시기를 거쳤다. 증산 상제 어천 후 그는 유명(遺命)을 받들어 ‘선매숭자’ 도수를 완수하고 정읍 대흥리에 있는 고수부(高首婦, 고판례)의 교단에 왕래하였다. 증산 상제의 반려자이자 종통 계승자였던 고수부를 모시며 󰡔현무경󰡕을 전수받아 직접 필사하고 우주의 도수를 탐구하는 등 도문의 원형적 정통성을 수호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고수부의 이종사촌 동생인 차경석 등 교권을 장악하려는 세속적 움직임이 도문을 지배하자, 김형렬은 과감히 도문이 자리잡고 있는 정읍 대흥리를 떠났다. 그는 증산 상제의 본의가 권력다툼이나 위세 부리기에 있지 않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인간적인 수단을 버리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모악산 금강대(金剛臺)로 들어가 100일 동안 생사를 건 고독한 독공 수련에 돌입했다. 1915년 을묘년 가을, 마침내 김형렬은 천지신명과 통하는 신안을 얻고 영서(靈書)를 내려받았다. 이 영적 체험은 훗날 태극과 무극, 우주의 음양 조화를 깊이 있게 다룬 『금강대문답(金剛臺問答)』으로 정리된다. 또한 수련 결과 김형렬은 신안을 열고 호풍환우(呼風喚雨, 도술로 바람과 비를 불러일으킴)를 뜻대로 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미륵불교(사)에 관한 대부분의 기록은 미륵불교의 교의와 그 실천적 행위와는 관련이 없는, 교주 김형렬이 영부(靈符)에 의한 미신적 예언,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이적만을 포교의 수단으로 삼아 미륵불교가 중흥하였고, 또한 쇠퇴하는 원인이 되었다고 천편일률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정립의 󰡔증산교사󰡕, 홍범초의 「김태운(金太雲)의 미륵불교사」(󰡔범증산교사󰡕) 등이 대표적이다. 본고는 이에 대해 심도 있는 분석과 논의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영적 체험 이후 추종자들이 많아지게 되자, 김형렬은 1921(신유)년에 ‘불교진흥회(佛敎振興會)’라고 하는 교단을 세웠다. 이듬해 1922(임술)에는 교명을 ‘미륵불교’로 바꾼 후 본부를 금산사에 두었다. 이로써 증산 상제가 일찍이 김형렬에게 붙인 미륵불 관련 도수, 특히 “⋯금산사를 굳게 지켜라.”라고 한 공사 내용을 이행하였다. 김형렬은 역사적 사실인 ‘금산사 미륵전의 이치’를 도덕적, 사상적 기치로 내걸었다. 그는 증산 상제가 곧 미륵불이며, 미륵불교야말로 증산 상제의 참된 정법을 잇는 교단임을 분명히 했다. 그의 순수하고 타협 없는 태도에 감화된 많은 초기 성도들이 다시 그를 찾아 모악산으로 모여들었다. 미륵불교는 권력이나 재물에 오염되지 않은 증산 상제 신앙의 순수성을 보존하는 방파제 역할을 했다.

금산사 미륵전

 

금산사 미륵전의 내부 불상. 가운데가 미륵불이고 좌우 입상은 협시보살이다.

 

  1. 신앙과 역사의 만남: 금산사 비밀결사와 항일 독립운동

김형렬은 미륵불이 다스리는 용화세계의 도래가 곧 외세의 침략이 종식되고 주권을 회복하는 자주독립과 일치한다고 믿었다. 김형렬의 미륵신앙운동은 내세 지향적 도피에 머무르지 않고,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민족 독립운동이라는 사회적 실천으로 직결되었다. 종교적 체험의 참된 징표 중 하나로서 ‘실천적 행동력’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참된 신앙은 현실 도피가 아니라, 역사의 고통 속으로 걸어 들어가 그것을 변혁하는 힘으로 나타나야 한다. 김형렬의 미륵신앙은 1919년 기미년 3·1운동을 계기로 항일 독립운동이라는 위대한 역사적 실천으로 폭발했다.

3·1 운동 직후, 김형렬은 금산사 포교 활동을 방패 삼아 항일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독립운동 군자금 수금 운동본부’(이하 ‘독립운동본부’)가 그것이다. 위봉사와 금산사의 주지였던 곽법경, 재정을 담당한 장기동, 포교를 담당한 김자현 등과 공조하여 전국적인 군자금 모금 네트워크를 가동했다. 신도들은 나라를 찾겠다는 일념으로 전 재산을 아낌없이 기부했다. 독립운동본부는 당시 19세였던 백성욱(훗날 동국대 총장) 등을 상해 임시정부에 자금 전달 밀사로 파견하여 1차로 3만여 원의 거금을 전달하는 등 수차례에 걸쳐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송금하였다.

상해 임정으로의 독립군자금은 일회성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김형렬은 독립운동본부 조직망을 가동하여 재무책임자 장기동, 포교책임자 김자현 등과 함께 전 재산을 매각하여 독립 자금을 마련하였다. 1919년 9월, 금산사의 대규모 치성 행사를 표방하여 전국의 미륵 숭봉자 대표 88명을 소집하였다. 그러나 친일 세력의 밀고로 일제 경찰의 대대적인 급습이 이루어졌다. 김형렬을 비롯한 지도부와 신도 88명이 체포되어 전주 검사국으로 압송되었다. 일제는 이들에게 소위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를 씌워 가혹한 고문을 가했다. 거꾸로 매달기, 채찍질, 물고문 등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지옥 같은 6개월의 예심 기간 동안 동지 중 61명이 모진 고문과 전염병으로 감옥 안에서 옥사·병사하는 비극을 겪었다. 이는 김형렬 성도가 지향한 미륵신앙과 해원, 상생의 이념이 국가적 위기 극복을 위한 애국주의적 실천으로 승화되었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이다(현재 금산사 만인교 옆에 ‘태운 김형렬 선생 등 88애국지사 충혼비’가 건립되어 이를 기리고 있다).

김형렬은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모진 고문을 견뎌내며 “내가 모든 것을 주도했으니 다른 이들은 무죄하다”고 주장하며 동지들을 보호했다. 1920년 봄, 일제는 확실한 증거를 확보하지 못해 그를 불기소로 석방할 수밖에 없었다. 이 처절한 투쟁은 김형렬의 미륵 신앙이 현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역사적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행동하는 양심의 종교’였음을 역사에 증명했다. 오늘날 금산사 경내에 우뚝 솟은 충혼비는 그 엄숙했던 애국적 헌신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1. 기록자이자 실천가로서 남긴 태운 김형렬의 유산

김형렬은 1902년 상봉부터 1909년 어천에 이르기까지 증산 상제의 9년 천지공사 기간 중 본격적인 8년 천지공사 과정에서 최초이자 마지막까지 동행하고 수종 든 유일무이한 목격자였다. 그의 신뢰도 높은 정교한 기억력에 기반한 구술 증언은 훗날 이상호·이정립 형제가 증산 상제의 행적에 관한 초기 기록 『증산천사공사기』(1926)와 『대순전경』(1929)을 수집·성편하는 데 사료적 원천(primary source)을 제공하였다. 증산 상제 천지공사의 핵심 공간인 동곡약방과 제비창골 등의 구체적 지리적 맥락과 조화 권능의 일화가 단순한 구전 신화로 왜곡되거나 소멸하지 않고 일관된 텍스트 형태로 후세에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대부분 김형렬의 기억 전수 공헌 덕분이었다. 만약 그가 지닌 기억과 구술 기록의 총체가 부재했더라면 오늘날 증산사상의 학술적 문헌 토대와 가을개벽 도수의 구체적 실체성은 역사 속으로 영영 묻히거나 유실되었을 것이다.

증산 상제는 성도들에게 각자 그 인물에 상당하는 천지공사 도수를 붙였다. 그중 수석 성도인 김형렬에게 중요한 도수를 붙였음은 말할 것도 없다. 좌불(坐佛) 도수(2:111, 5:186), 수부(首婦) 선정 사명(셋째 딸 말순末順을 수부로 천거함)(3:92~94), 금산사를 지키는 도수(3:313, 5:186), 신선 도수(3:313, 5:186), 십무극(十無極)과 일태극(一太極)의 십일성도(十一成道) 공사(6:13), 대장수(大將帥) 신명을 불러 보신 대두목(大頭目) 수호신 공사(5:88), 육임(六任) 일꾼 지도자 출세 공사(5:337), 후천선경 도성덕립(道成德立) 공사(10:43) 등 김형렬은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공사에 수종하였다. 증산 상제는 그의 공덕에 대해 “너의 지극한 정성이 천지에 차고 남느니라.” 하고 “무량대복(無量大福)”이라 하시며 치하해 주었다. 또한 그의 소양과 식견에 대해 “하도낙서 지인지감(河圖洛書知人之鑑)”이라 호평하였다.

 

  1. 김형렬의 성경신과 그 의의

종교학적으로 평가할 때, 김형렬은 세 가지 차원에서 불멸의 위상을 지닌다. 첫째, 그는 절대자에 대한 인간적 헌신의 극치를 보여준 ‘성경신의 화신’이다. 둘째, 금산사 미륵전의 이치를 시루와 솥의 사상으로 승화시킨 ‘독창적인 사상가’이다. 셋째, 신앙을 국권 회복의 힘으로 치환한 ‘구국의 실천가’이다. 그는 1932년 임신년, 71세를 일기로 하운동 자택에서 고요히 작고했다. 그와 함께 그가 창립한 미륵불교도 그가 주창했던 ‘순수성’을 잃고 말았다. 비록 그의 육신은 사라졌고, 그가 기치를 들었던 미륵불교도 유명무실하게 되었으나 그가 남긴 미륵 세상의 비전과 해원상생의 가르침은 한국 종교 사상의 깊은 심연에 하나의 작은 등불로 남아 있다.

본 연구는 증산 상제의 수석 성도인 태운 김형렬의 사상과 신앙 운동을 우주론, 지리학, 인식론, 윤리학, 그리고 종교 역사학적 관점에서 종합적 규명을 시도하였다. 첫째, 체용론적 우주론의 실현이다. 김형렬은 ‘무체무용(無體無用)’의 원리에 따라 서방 금(金) 기운의 바탕(體)이 되어 천지공사의 물질적·인적 통로인 ‘식주인’의 역할을 완수하였다. 둘째, 제업창골의 신성성 확립이다. 김형렬의 삶의 터전은 단순한 농경지가 아닌, 후천 문명의 시종처이자 우주 질서 재편의 성지인 ‘제업창골’로 재정의되었다. 셋째, 신인합일의 인식론적 도약이다. 인위적 수도와 신안 개안, 천상 옥경대 참관을 통해 상제를 ‘인존천주(人尊天主)’로 인식하는 확고한 신성을 획득하였다. 넷째, 인존 참여와 상생의 윤리적 측면이다. 인간이 천지의 가을 결실에 주체적으로 참예하는 ‘천지용인지시’의 사명을 자각하고, 해원상생과 은혜 보답의 도덕률을 생활화하였다. 다섯째, 미륵신앙의 실천과 민족적 의의이다. 증산 상제 어천 후에는 김형렬은 증산 상제를 미륵불로 선포하는 미륵불교를 창립하였고, 임시정부 군자금 조달과 같은 실천적 독립운동을 전개하여 종교적 구세관을 민족 구도의 길로 연결시켰다.

마지막으로 증산 상제의 가르침을 홍포하는 성편 과정에서 초기 기록의 토대를 닦았던 공덕을 쌓았다. 그는 훗날 그의 아내 김호연과 더불어 천지공사 내용을 생생하게 전하는 큰 일꾼이 되었다. 증산 상제의 많은 성언(聖言)과 성적(聖蹟) 중에서 김형렬의 증언을 바탕으로 기록된 초기 기록과 김호연의 직접적인 증언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김형렬은 증산 상제를 추종한 이후 단 한 번도 변함이 없는 성경신의 화신으로 후세의 귀감이 된 인물이었다.

 

참고문헌

기본 경전

『증산도 도전』, 도전편찬위원회 편저, 대원출판, 2003.

학술 논문 및 연구서

고남식, 「강증산(姜甑山) 전승에 나타난 종도(從徒)의 양상과 주요 종도의 역할 비교」, 『국제어문』 제91집, 2021.

김성도, 「태운 김형렬(太雲 金亨烈)의 미륵신앙운동」, 『동양학연구』 제19집, 원광대학교 동양학대학원, 2023.

김현진, 「김형렬가문과 정집전」, 󰡔대순회보󰡕 302호, 2026.

윤이흠, 『일제의 한국 민족종교 말살책』, 모시는 사람들, 2007.

사료 및 기념물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금산사 만인교 옆 ‘태운 김형렬 선생 등 88애국지사 충혼비’ 비문.

조선총독부 경무국 고등경찰과 기록 및 사상통제 사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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