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 『내맡김(Gelassenheit)』

역자의 말

『내맡김(Gelassenheit)』은 1959년 네스케(Neske) 출판사에서 처음 출간된 소책자 분량의 텍스트이다. 1955년 하이데거와 동향(Meßkirch) 출신 작곡가 콘라드 크로이처(Conradin Kreutzer)의 탄생 기념 행사에서 하이데거가 행한 기념사 「내맡김(Gelassenheit)」과 1944-1945년에 하이데거가 작성한 긴 대화록에서 발췌한 「내맡김에 대한 토의: 사유에 관한 들길의 대화로부터」란 두 편의 글로 구성돼 있다. 후자의 글은 과학자, 학자, 스승이 들길을 산책하며 나누는 대화로 구성돼 있다.

『내맡김』, 특히 그 안에 실린 두 번째 글 「내맡김에 대한 토의(Erörterung): 사유에 관한 들길의 대화로부터」는 『언어로의 도상에서』에 실린 「언어에 관한 대화로부터: 어느 일본인과 어느 질문자 사이」, 『들길-대화(Feldweg-Gespräche)』와 더불어 하이데거와 동아시아 사유 사이 친연성과 관련하여 가장 주목받는 것들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 세 가지 텍스트들이 모두 대화편으로 구성돼 있다는 점이다. 이는 아마도 비서구적인, 그래서 신비적이란 혐의를 받는 그리고 그만큼 친동아시아적 사유를 내보이는 데는 서구의 전통적 학술 기준에서 벗어나는 방식의 글쓰기가 필요했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 글 「내맡김」 역시 비교적 비논증적이며 비체계적인 사유를 풀어낼 수 있는 연설 형식으로 돼있다.

「내맡김」에서 그의 후기 사유에서 주요 개념인 ‘내맡김’이 처음 대중적으로 소개된다. 그리고 두 번째의 「내맡김의 토의: 사유에 대한 들길의 대화로부터」에서 ‘내맡김’의 의미를 심층적으로 밝힌다. 하이데거에서 의미는 어떤 것이 그 자체로서 있는 영역을 말한다. 「내맡김에 대한 토의: 사유에 관한 들길의 대화로부터」는 내맡김을 사유의 본질로서 제시하면서, 내맡김이 그 자체로서 고유하게 일어나는 영역을 드러낸다. 토의(Erörterung)란 말 자체가 ‘장소’(Ort)에 대한 해명의 뜻을 갖는다.

그리고 내맡김 자체가 영역적인 것이다. 내맡김은 방념放念, 초연함, 초연한 내맡김으로 번역되고 방하착放下着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내맡김은 논증적이며 분별적인 사유 의지를 내려놓고 사방으로 환히 트이는 존재의 진리를 향해 마음을 모으는 자세[마음 씀, 마음챙김(mindfulness)]를 의미한다. 주객 분리 속에 사물을 주체 앞에 내세워진 대상으로 보는 분별적이며 표상적인 사유 방식에서 [뒤로] 물러나 존재 진리로 [앞으로] 향함으로써 내맡김은 개방된 장을 연다. 뒤로 물러남과 앞으로 향함이 서로 결속하며 열린 장을 일어나게 하는 것은 사유, 청종, 언어 등 하이데거가 존재에 대한 인간의 상응으로 말하는 것의 근본 특성이다.

「내맡김에 대한 토의: 사유에 관한 들길의 대화로부터」에서 내맡김이 향하는 존재 진리는 사역四域(Gegnet)으로 말해진다. 존재 진리는 사방으로 밝게 트이는 영역으로 사유되는 것이다. 다른 곳에서 이 영역은 하늘, 땅, 인간, 신적인 것이 하나로 어울리는 사방四方(das Gevierte: 사방 세계)으로 기술된다. 사역은 자신이 고유하게 드러나는 진리의 터전으로 내맡김을 사용한다. 이를 사역화(Vergegnis)라 한다. 사역화에서 인간은 비로소 자신의 본질로 머물 수 있게 된다. 인간 본질은 사역에 귀속하며, 사역의 진리를 위해 쓰이는 데 있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이처럼 자기의 본질 유래에 머묾을 고결함이라고 한다. 그럴진대 고결함은 또한 그렇게 본질로 있도록 해주는 것에 대한 감사함이다.

사역의 영역을 중심으로 사역과 인간은 함께 속한다. 또 하이데거에서 동일성의 의미에 따르면 양자는 동일하다. 하이데거에 동일성은 상이한 것이 동일한 영역으로부터 그리로 함께 속함을 의미한다. I AM THAT. 사역은 동일한 것이고 동일한 것은 또한 나이다. 물론 마침내 서로 뒤섞일 수 없는 각자의 고유함에 이르면서. 사역과 인간만이 아니라 사물도 사역의 영역화 안에서, 그를 통해, 비로소 사물로서 들어선다. 이를 사물화(Bedingnis)라 한다.

번역은 독일어본을 저본으로 삼고 영어본을 참조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번역이 잘못된 것이나 미흡한 곳은 앞으로 다시 손을 볼 것이다.

 

 

내맡김

고향에서 공식적인 저의 첫 마디는 감사의 말이 될 것입니다.

삶의 긴 여정 동안 제게 주었던 모든 것에 대해 고향에 감사합니다. 이 선물의 성격을 저는 몇 쪽 안 되는 분량의 글로써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이는 1949년 동향의 작곡가 콘라딘 크로이처 서거 백 주년에 붙여 출간된 기념논문집에 ‘들길’이란 제목으로 처음 출간되었습니다. 쉴러 시장의 따뜻한 환대에 감사하며, 오늘 이 자리에서 기념사를 할 수 있게 된 것에 대해 특별한 고마움을 전합니다.

존경하는 내빈 여러분, 그리고 이웃과 친구 여러분! 우리는 우리 지역 출신인 작곡가인 콘라딘 크로이처를 기념하기 위해 여기 모였습니다. 창조적인 일을 천직으로 삼은 분을 기리고자 한다면, 무엇보다도 그의 작품에 마땅한 경의를 표해야 합니다. 음악가의 경우라면 이는 그의 작품을 연주함으로써 이뤄질 것입니다.

콘라딘 크로이처의 작품들은 오늘날 가곡과 합창, 오페라와 실내악을 통해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이 선율들 속에 예술가 자신이 현재합니다. 작품 안에서 장인匠人의 현존이 유일하게 참된 것입니다. 장인이 위대할수록 그의 인간적 면모는 보다 완벽하게 작품 뒤로 사라집니다.

오늘 이 기념식에 참여하신 연주자들과 성악가들은 콘라딘 크로이처의 작품이 지금 이 시간에 우리에게 울릴 것이란 점을 보증합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추모식이 완성되는 것일까요? 기념식에는 회상하는 것이 속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한 작곡가에게 헌정된 기념식에서 무엇을 생각하고 말해야 하나요? 음의 울림을 통해 이미 ‘말하고 있고’ 그래서 일상적인 언어인 말의 언어가 필요하지 않다는 점이 음악을 특징짓지 않나요? 사람들은 그렇게 말합니다. 그럼에도 다음의 물음이 남습니다. 연주와 노래만으로 이미 행사는 기념식, 우리가 사유에 잠기는 추모식인가요? 아마도 결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행사의 주최자는 기념사를 식순에 넣은 것입니다. 추모사는 우리가 기리는 작곡가와 그의 작품을 회고하도록 도움을 줍니다. 이 기억들은 콘라딘 크로이처의 생애를 얘기하고 그의 작품들을 열거하며 묘사하는 순간 곧바로 생생하게 살아납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즐겁고 슬픈, 교훈적이고 모범이 되는 많은 사실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보면 그런 얘기를 듣는 데는 사유하는 것이, 즉 우리들 각자를 그 본질에서 직접적으로 그리고 끊임없이 관여하는 어떤 것을 숙고하는 것이 전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추모사 자체도 우리가 기념식에서 사유하리라는 것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우리 스스로를 속이지 맙시다. 이른바 전문적으로 사유하는 사람들을 포함하여 우리 모두는 너무나 자주 사유가 궁핍합니다. 우리 모두 너무나 쉽게 사유하지 않음[無思惟]에 빠집니다. 무사유無思惟는 오늘날의 세계를 들고나는 섬뜩한 손님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는 모든 것을 가장 빠르고 저렴한 방식으로 인식하고 또 같은 순간 그만큼 성급하게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또한 하나의 모임이 끝나면 또 다른 모임이 뒤를 쫓습니다. 기념식은 점점 더 사유가 빈곤해집니다. 기념식과 무사유가 나란히 공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비록 사유하지 않는 동안에조차도, 사유할 능력을 포기한 것은 압니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도 사용합니다. 물론 무사유에 사유 능력을 놀리고 있는 기이한 방식으로 말이죠. 그러나 마치 밭처럼 그 자체 성장의 조건인 것만이 묵혀둘 수 있습니다. 어떤 것도 자라지 않는 고속도로는 휴경지 또한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우리가 듣는 자이기에 귀가 먹을 수 있는 것처럼, 젊기에 나이도 먹을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그 본질의 근본에서 사유할 능력, ‘정신과 지성’을 가지고 있고 사유하도록 규정돼 있기에 사고가 빈곤하거나 아예 결핍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가지고 있는 것만을 잃어버리거나 흔히 말하듯, 그것에서 벗어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점점 증가하는 무사유는 오늘날 인간의 골수까지 해치는 한 사건에서 기인합니다. 오늘날의 인간은 사유로부터 도피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유로부터의 도피가 무사유의 원인입니다. 그러나 사유의 도피에는 인간이 그것을 보지도 인정하지도 않으려 한다는 점이 속합니다. 심지어 오늘날의 인간은 사유의 도피를 단호히 부인할 것입니다. 오히려 그 반대를 주장할 것입니다. 당연히 어떤 시대도 오늘날만큼 광범위하게 계획이 세워지고 그래서 다양하게 조사되고, 또 열정적으로 연구되지는 않았다고 말할 것입니다. 확실히 그렇습니다. 그리고 명민함과 탐구의 과다함은 그 나름의 커다란 유용성을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고는 필수불가결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그것은 한 특정한 유형의 사유란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이런 사고의 특성은 우리가 계획하고, 연구하고, 운용할 때 언제나 이미 주어진 조건들을 계산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 조건들을 특정한 의도로부터 특정한 목적을 겨냥하며 계산에 넣습니다. 우리는 미리 일정한 결과들을 기대합니다. 이같은 계산함이 모든 계획하고 탐구하는 사유들의 특징입니다. 이러한 사유들은 설사 수를 가지고 계산하지 않고 계산기와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여전히 계산적 사유입니다. 계산적 사유는 계산합니다. 계속해서 새롭고 점점 더 유망하면서도 비용이 저렴한 가능성들을 계산합니다. 하나의 전망에서 다음 전망으로 분주히 쫓아다닙니다. 계산적 사유는 결코 쉬지 않으며, 숙고적 사유[명상적 사유: besinnliches Dencken; meditative thinking]에 이르지 못합니다. 계산적 사유는 전혀 숙고적 사유가 아니며 존재하는 모든 것에 지배하는 의미를 숙고하는 사유가 아닙니다.

그리하여 사유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으며 각자 저마다의 방식으로 정당한데, 바로 계산적 사유와 숙고적 사유입니다.

오늘날의 현대인이 사유로부터 도피하고 있다고 말할 때, 우리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이 숙고입니다. 물론 단순한 숙고란 부지중에 현실을 붕 떠서 떠도는 것이라고 반박하기도 합니다. 지반을 잃어버린 사유란 것이죠. 당장의 현안을 처리하는 데 아무 쓸모가 없고 실제적인 일들을 수행하는 데 아무 보탬도 안 된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러분은 단순한 성찰, 끈기 있는 숙고란 일반 지성에는 너무 고상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핑계에서 유일한 진실은 숙고적 사유가 계산적 사유와 마찬가지로 저절로 이뤄지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숙고적 사유는 때때로 더 많은 노력을, 더 오랜 훈련을 요구합니다. 다른 모두 참된 수작업 보다 더 섬세한 면밀함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또한 마치 농부와 같이 씨앗이 싹을 틔우고 무르익도록 기다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누구든지 각자의 방식과 한계 안에서 숙고적 사유의 길을 따를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인간은 사유하는, 즉 숙고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숙고적 사유에서 결코 ‘높이 넘어설’ 필요가 없습니다. 가까이 있는 것에 머물며 가장 가까운 것, 여기 그리고 지금 우리들 개별자들을 관여하는 것을 숙고하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여기, 즉 이곳 고향 땅에서 지금, 즉 현재의 세계 시간에서 말입니다.

만약 우리가 숙고할 준비가 돼 있을 때, 이 기념식은 무엇을 당장 떠올리게 하나요? 우리는 한 예술 작품이 고향의 토양으로부터 피어났다는 사실에 유의합니다. 이 단순한 사실을 새길 때 우리는 틀림없이 즉시 지난 그리고 지지난 세기에 슈바벤 땅이 시인과 사상가를 배출했다는 것에 대해 사유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를 좀 더 깊이 생각하면 곧장 중앙 독일이 유사하게 그러한 땅이며 동프러시아, 슐레지엔과 보헤미아 지역 역시 마찬가지란 점이 분명해집니다.

우리는 깊은 생각에 잠기며, 순수한 작품의 모든 개화에는 고향 땅의 뿌리박음이 속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 묻게 됩니다. 시인 헤벨(Johann Peter Hebel)은 한번은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는, 인정하고 싶든 그렇지 않든, 땅에 뿌리를 내리고 솟아나 에테르에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식물이다.”

시인은 다음의 사실을 말하려고 합니다. 참으로 기쁘고 치유가 담긴 작품이 피어나려면 인간은 고향 땅 깊은 곳으로부터 에테르로 치솟아 오를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에테르는 높은 하늘의 자유로운 대기와 정신의 트인 영역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보다 깊이 생각하면서 이렇게 묻게 됩니다. 요한 페터 헤벨이 했던 저 말은 오늘날 어떻게 돼 있는가? 하늘과 땅 사이 인간의 평온한 거주는 아직도 있는가? 땅 위에는 여전히 숙고하는 정신이 지배하고 있는가? 인간이 끊임없이 땅 위에 서 있는, 즉 뿌리내리고 있는 토착적 고향이 지금도 존재하는가?

수많은 독일인들이 고향을 잃었습니다. 마을과 도시를 떠났고 태어나고 자란 터전에서 쫓겨났습니다. 고향을 지킬 수 있었던 다른 수많은 사람들 또한 대도시의 분주함 속에 빠져 배회하고 산업 지대의 황량함 안에 정착해야 했습니다. 이들은 오랜 고향으로부터 소외되었습니다. 고향에 남은 사람들은 어떨까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이들은 고향에서 내몰린 사람들보다 훨씬 더 고향을 상실했습니다. 이들은 매시간, 매일 라디오와 텔레비전에 매어 있습니다. 매주 영화는 생소하고 자주 저속할 뿐인 환상의 세계로 데려갑니다. 그 세계는 참된 것이 아닌 기만적인 세계입니다. 어디서나 화보 잡지를 접할 수 있습니다. 현대 기술의 정보 수단이 매시간 인간을 자극하고 몰아대는 모든 것들은 오늘날 인간들에게는 이미 농가 주위 자신의 경작지보다, 땅 위의 하늘보다, 밤과 낮의 순환보다, 마을의 관습과 풍속보다, 고향 세계의 전승보다 훨씬 더 가까운 것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더욱 깊이 사색에 잠겨 이렇게 묻게 됩니다. 고향에 남아있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쫓겨난 이들에게 지금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대답은 이렇습니다. 오늘날 인간의 토착성은 그 핵심에서 위협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더욱이 토착성의 상실은 단순히 외부의 주변 환경이나 운명 때문에 생긴 것도 아니며, 또한 단지 인간의 소홀과 피상적인 삶의 방식에 기인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태어나 살아가는 시대의 정신으로부터 야기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욱 숙고하며 묻게 될 것입니다. 사정이 그와 같다면 인간은 여전히 인간의 작품을 성숙한 고향 땅으로부터 무르익게 하여 에테르로, 즉 하늘과 정신의 영역으로 솟아나게 할 수 있을까? 아니면 모든 것이 계획과 계산, 조직화와 자동화의 집게 속으로 떨어지는 것일까?

만약 오늘의 기념식이 우리에게 불러일으키는 것을 되새겨 본다면, 토착성의 상실이 우리의 시대를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을 유의하게 됩니다. 그리고 묻게 됩니다. 도대체 우리의 시대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이 시대를 특징짓는 것은 무엇인가?

이제 시작되고 있는 이 시대를 최근에 원자력 시대라고 부릅니다. 가장 볼썽사나운 그것의 표식은 원자폭탄입니다. 근래에 ‘원자력 시대’라고 불려 왔습니다. 그러나 이 표지는 단지 전면에 드러난 것일 뿐입니다. 사람들은 원자력이 평화적 목적을 위해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곧바로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원자 물리학과 그 기술자들은 도처에서 아주 광범한 계획 속에 원자력의 평화적 사용을 현실화하고 있습니다. 영국을 필두로 선도적 국가들의 거대 기업 그룹들은 원자력이 엄청난 사업이 될 수 있다고 이미 계산했습니다. 사람들은 원자력 사업에서 새로운 행복을 보고 있습니다. 원자과학 역시 비켜 서 있지 않습니다. 이러한 행복을 공개적으로 선언합니다. 올 7월 18명의 노벨상 수장자들은 마인아우 섬에서 발표한 한 호소문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과학, 여기서는 현대 자연과학은 인간의 보다 행복한 삶에로 나아가는 길이다.”

이 선언문은 어떤 내용인가요? 그것은 숙고에서 나온 것일까요? 원자력 시대의 의미를 되새기기라도 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저 언급된 과학의 주장을 통해 스스로 만족한다면 현 시대에 대한 숙고에서 가능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과학적 기술이 자연에서 새로운 에너지를 발견하고 풀어놓을 수 있다는 사실이 어디서 기인하는지 묻기를 잊어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사실은 지난 몇 세기 이래 모든 준거적 표상들의 전복이 진행 중이라는 데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인간은 다른 현실로 옮겨졌습니다. 이 세계관의 철저한 혁명은 근대 철학에서 수행되었습니다. 이로부터 세계 안에서 그리고 세계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입장이 자라나왔습니다. 이제 세계는 계산적 사유가 어떤 것도 더 이상 저항하지 못할 공격을 감행하는 대상과 같은 것으로 드러납니다. 자연은 독보적으로 엄청난, 하나의 주유소, 즉 현대 기술과 산업을 위한 에너지원이 됩니다. 이와 같이 원칙적으로 기술적인, 세계 전체에 대한 인간의 관계는 물론 17세기에 유럽에서, 단지 유럽에서 생겨났습니다. 그러한 태도는 그 밖의 다른 대륙에서는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이전의 시대와 민족의 운명에서는 완전히 낯선 것이었습니다.

현대 기술 속에 감춰진 힘은 존재하는 것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규정합니다. 이 힘은 전 지구를 지배합니다. 인간은 이미 지구를 벗어나 넘어 우주로 진출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과 20년도 지나지 않아 원자력 에너지와 함께 거대한 에너지원들이 알려졌고, 예측가능한 장래에 모든 종류의 에너지에 대한 세계 수요는 언제나 충족될 것입니다. 새로운 에너지의 직접적 조달은 이제 더 이상 석탄과 석유, 산림 목재의 산출과 같이 특정 국가와 대륙에 얽매이지 않을 것입니다. 머지않아 지구 모든 곳에서 원자력발전소가 건설될 것입니다.

오늘날 과학과 기술의 근본 물음은 더 이상 우리가 충분한 양의 연료를 어디서 구할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결정적 물음은 이런 것입니다. 우리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원자력 에너지를 어떤 방식으로 통제하고 조종해서 이 엄청난 에너지가 군사적 행동이 없이도 터져 나오고 ‘폭주해서’ 모든 것을 절명시키지 않도록 안전을 지킬 것인가?

만약 원자력 에너지를 길들이는 일이 성공한다면, 또 성공적이겠지만, 기술 개발의 완전히 새로운 시대가 시작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영화와 텔레비전 기술, 운송 및 특히 항공 운송 기술, 뉴스 보도 기술, 그리고 의학 및 식료품 기술로 알고 있는 것들은 아마도 단지 조야한 시작 단계를 의미할 것입니다. 다가올 근본적인 변혁은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그 사이 기술의 발전은 점점 더 빨리 진행될 것이고 결코 멈출 수 없을 것입니다. 인간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기술적 기구와 자동 장치들의 힘에 점점 더 밀착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형태의 기술적 설비와 시설로써 어디서나 매시간 인간을 요구하고, 구속하고 견인하고 압박하는 힘들. 이 힘들은 오래전에 인간의 결정 능력과 의지를 넘어섰습니다. 그것들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술의 업적들이 가장 빨리 알려지고 대중적으로 놀라움을 주는 것 또한 기술 시대의 새로움에 속합니다. 오늘날 누구나 이 강연이 기술 세계에 언급하는 것들은 능란하게 관리되는 화보 잡지에서 확인하거나 라디오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것을 듣고 읽는 것, 즉 단순히 아는 것과 듣고 읽은 것을 인지하는, 즉 숙고하는 것은 다릅니다.

올해 1955년 여름, 린다우(Lindau)에서 노벨상 수상자들의 국제 회의가 다시 열렸습니다. 그 자리에서 미국의 화학자 스탠리(Stanley)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생명이 살아있는 실체를 임의대로 분해하고 구성하고 변경할 수 있는 화학자의 손에 놓일 시간은 멀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주장을 알고 있으며, 심지어 과학적 연구의 대담함에 놀라워하면서 아무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이때 기술의 수단과 함께 인간 삶과 본질에 대한 공격이 준비되고 있다는 것을 숙고하지 않습니다. 이 감행될 공격에 비하면 수소폭탄의 폭발은 차라리 사소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설사 수소폭탄이 폭발하지 않고 지구상의 인간 삶이 유지될 경우에도 원자력 시대와 더불어 세계의 섬뜩한 변화는 다가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진정으로 섬뜩한 것은 세계가 철저하게 기술적 세계로 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훨씬 더 섬뜩한 것은 인간이 이러한 세계 변화에 준비가 돼 있지 않고, 또한 숙고적으로 사유하면서, 이 시대에 본래 도래하는 것과 사태적인 대결에 이를 수 없다는 점입니다.

어떤 개별 인간도, 어떤 집단도, 단 한 사람의 인간도, 그 어떤 인간 집단도, 심지어 영향력 있는 정치가와 과학자, 기술자들로 구성된 어떤 위원회도, 경제와 산업의 지도적 인사들의 어떤 회의도 원자력 시대의 역사적 경과를 멈추게 하거나 조종할 수 없습니다. 단순히 인간적인 어떤 조직도 시대를 장악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원자력 시대의 인간은 저지할 수 없는 기술의 압도적 힘에 속수무책으로 맡겨지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인간이 단순히 계산적인 사유에 맞서 숙고적 사유를 결정적인 것으로 끌어들이는 일을 포기한다면 정말로 그렇게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숙고적 사유가 깨어난다면, 숙고는 끊임없이 그리고 가장 사소한 경우에도 작동해야 합니다. 그것은 여기 지금, 바로 이 기념식에서도 작동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자리는 우리에게 원자력 시대에 현저한 정도로 위협받고 있는 어떤 것, 즉 인간 작품의 토착성에 대한 숙고거리를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는 묻습니다. 이미 오랜 토착성이 상실돼 간다면, 새로운 기초와 토대가 인간에게 다시 돌려질 수는 없는 것인가? 인간 본질과 그의 모든 작품이 새로운 방식으로, 나아가 원자력 시대에서도 번성할 수 있는 토대와 기초가 말입니다.

되돌려질 수 있다면 미래의 토착성을 위한 기초와 토대는 무엇일까요? 어쩌면 이 물음과 함께 우리가 구하고 있는 것은 매우 가까이, 우리가 너무 쉽게 간과해버릴 정도로 가까이 놓여 있습니다. 가까움으로 가는 길은 우리 인간에게는 언제나 가장 멀고 그 때문에 가장 힘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길은 숙고의 길입니다. 숙고는 우리에게 하나의 표상에 단선적으로 매달리지 않기를, 편협하게 하나의 표상 방향으로 계속해서 달리지 않기를 요구합니다. 숙고적 사유는 우리에게 첫 인상에는 결코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것에 들어서도록 요구합니다.

한번 시험해 봅시다. 기술 세계의 설비들, 기구들, 기계들은 오늘날 우리 모두에게 필수불가결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에게 보다 큰 범위에서든 다른 어떤 사람들에게 보다 작은 범위에서든 말이죠. 기술적 세계에 맞서 맹목적으로 달려드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입니다. 기술적 세계를 악마의 작품으로 저주하는 것은 안목이 좁은 일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기술적 대상들에 의존하고 있으며, 심지어 그것들은 점점 더 고양되는 발전 기술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부지중에 기술적 대상들에 단단히 고정돼 있어 그것들에 대해 노예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그러나 다르게 시험해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기술적 대상들을 사용하면서도 그 모든 실제적 사용에서 자유롭게 되어 언제든 그것들을 풀어놓아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술적 대상들을 그것들이 취해져야 바대로 그렇게 사용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가장 내적으로 그리고 본래적으로 우리에게 개입하지 않는 어떤 것으로서 내버려둘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술적 대상의 불가피한 사용에 ‘예’라고 말하는 한편 그와 동시에 그것들이 우리를 배타적으로 요구해서 우리의 본질을 왜곡하고 혼란에 빠트리고 끝내 황폐화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한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식으로 기술적 대상들에 대해 동시에 ‘예’, ‘아니오’라고 말한다면 기술적 세계에 대한 우리의 관계는 이중적이고 불안정한 것이지 않는가? 완전히 그 반대입니다. 기술적 세계에 대한 우리의 관계는 놀라운 방식으로 단순하고 평온해질 것입니다. 우리는 기술적 대상들을 우리의 일상 세계 안에 들여놓고 동시에 밖에 놔둘 수 있습니다. 즉 그것들을 결코 절대적이지 않고 더 높은 것에 의존하는 사물들로 놔둘 수 있습니다. 기술적 세계에 대해 동시에 ‘예’, ‘아니오’라고 말하는 이러한 태도를 한 오래된 말로써 호칭하고 싶습니다. 사물들에 대한 내맡김이라고.

이러한 태도에서 우리는 더 이상 사물들을 단지 기술적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우리는 시야가 틔어 기계의 제작과 사용이 물론 사물들에 대한 다른 관계를 요구하지만, 그럼에도 그 관계란 것이 무의미하지는 않다는 것을 알아채게 됩니다. 예를 들어 농경과 농업은 이제 기계화된 식품 산업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모든 영역들에서처럼 여기서 자연과 세계에 대한 인간의 관계에는 깊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이 변화에서 무엇이 지배하고 있는지는 여전히 어둠 속에 남아 있습니다.

그와 같이 모든 기술적 사건들에는 인간의 작위와 부작위를 요구하는 하나의 의미, 우리가 처음으로 고안하고 만들지 않은 의미가 지배합니다. 우리는 섬뜩함 속에 고조되는 원자력 기술의 지배력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알지 못합니다. 기술적 세계의 의미는 스스로를 감춥니다. 그러나 이제 기술적 세계 안에 어떤 은닉된 의미가 도처에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뚜렷이 그리고 언제나 유의한다면, 우리는 곧바로 우리로부터 감추는, 물론 우리를 향해 다가옴으로써 숨는 것의 영역 안에 서 있게 됩니다. 그러한 방식으로 자신을 내보이면서 달아나는 것은 우리가 비밀이라고 부르는 것의 근본 특징입니다. 저는 기술적 세계에 감춰진 의미를 향해 열려 있는 자세를 비밀에 대한 개방성이라고 부릅니다.

사물들에 대한 내맡김(과 비밀을 향한 개방성은 함께 속합니다. 이 둘은 우리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 세계 안에 거주하는 가능성을 허용합니다. 그것들은 우리가 기술적 세계 안에서 그것에 의해 위협받지 않은 채 존립할 수 있는 새로운 기초와 토대를 약속합니다.

사물에 대한 내맡김과 비밀을 향한 개방성은 새로운 토착성에 대한 전망을 제공해 줍니다. 나아가 새로운 토착성은 어느 날 오래되고, 이제는 급속히 사라지고 있는 토착성을 변화된 형태로 소환하는 데 적합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당장은—얼마 동안 지속될지 모르지만—이 대지 위의 인간은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단지 인류의 절멸과 지구의 파괴를 낳을지 모를 제3차 세계 대전이 발발할 수도 있다는 이유로? 이제 막이 열린 원자력 시대는 설사 제3차 세계 대전의 위험이 제거된다 해도, 훨씬 더 큰 위험이 위협하고 있습니다. 기이한 주장입니다. 그러나 단지 우리가 숙고하지 않는 한 그렇습니다.

방금 얘기한 주장은 얼마만큼 타당한가? 원자력 시대에서 작동하기 시작한 기술의 혁명이 일정한 방식으로 인간을 속박하고, 사로잡고, 매혹하고, 현혹해서 어느 날 계산적 사유가 유일한 사유로서 받아들여지고 행해지는 만큼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얼마나 큰 위험이 끌려오고 있을까요? 계산적 계획과 고안의 가장 뛰어나고 효율적인 명민함, 다시 말해 숙고에 대한 무관심, 완전한 무사유와 함께 찾아올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 경우 인간은 숙고하는 존재라는 자신의 가장 고유한 본성을 부정하고 내던지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본질을 구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깨어나 숙고를 지키는 것이 결정적입니다.

그러나 사물에 대한 내맡김과 비밀에 대한 개방성은 결코 저절로 우리의 소유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들은 우연한 어떤 것이 아닙니다. 그 두 가지는 오직 끊임없고 결연한 사유로부터만 피어납니다.

어쩌면 오늘의 추모 행사가 그리로 이끄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계기를 수용한다면, 콘라딘 크로이처 작품의 유래, 즉 고향 호이베르크 지역이 지닌 뿌리의 힘을 사유함으로써 그를 기리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서 지금 우리 스스로를 원자력 시대 안에서 그것을 통해 길을 찾고 발견해야 하는 이들로서 깨닫는다면, 우리는 그와 같이 사유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물에 대한 내맡김과 비밀에 대한 개방성이 우리 안에서 깨어난다면, 우리는 새로운 기초와 토대로 나아가는 길에 당도하게 될 것입니다. 존속하는 작품의 창조는 이 토대에 새로운 뿌리를 내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요한 페터 헤벨(Johann Peter Hebel)이 한 다음과 같은 말은 다른 방식으로 그리고 변화된 시대에 새롭게 참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기꺼이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에테르에서 꽃 피우고 열매 맺을 수 있기 위해 뿌리를 가지고 대지로부터 솟아나야 할 식물들이다.”

 

 

EnglishFrenchGermanItalianJapaneseKoreanPortugueseRussianSpanishJavane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