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 내맡김에 대한 토의: 사유에 관한 들길의 대화로부터

<일러두기>

-『내맡김(Gelassenheit)』은 1959년 Neske 출판사에서 처음 출간된 소책자 분량의 텍스트이다.

-1955년 하이데거와 동향(Meßkirch) 출신 작곡가 콘라드 크로이처(Conradin Kreutzer)의 탄생 기념 행사에서 하이데거가 행한 기념사 「내맡김(Gelassenheit)」과 1944-1945년에 하이데거가 작성한 긴 대화록에서 발췌한 「내맡김에 대한 토의: 사유에 관한 들길의 대화로부터」란 두 편의 글로 구성돼 있다. 후자의 글은 과학자, 학자, 스승이 들길을 산책하며 나누는 대화로 구성돼 있다.

-『내맡김』, 특히 그 안에 실린 두 번째 글 「내맡김에 대한 토의(Erörterung): 사유에 관한 들길의 대화로부터」는 『언어로의 도상에서』에 실린 「언어에 관한 대화로부터: 어느 일본인과 어느 질문자 사이」, 『들길-대화(Feldweg-Gespräche)』와 더불어 하이데거와 동아시아 사유 사이 친연성과 관련하여 가장 주목받는 것들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 세 가지 텍스트들이 모두 대화편으로 구성돼 있다는 점이다. 이는 아마도 비서구적인, 그래서 신비적이란 혐의를 받는 그리고 그 만큼 친동아시아적 사유를 내보이는 데는 서구의 전통적 학술 기준에서 벗어나는 방식의 글쓰기가 필요했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 글 「내맡김」 역시 비교적 비논증적이며 비체계적인 사유를 풀어낼 수 있는 연설 형식으로 돼있다.

-「내맡김」에서 그의 후기 사유에서 주요 개념인 ‘내맡김’이 처음 대중적으로 소개된다. 그리고 두 번째의 「내맡김의 토의: 사유에 대한 들길의 대화로부터」에서 ‘내맡김’의 의미를 심층적으로 밝힌다. 하이데거에서 의미는 어떤 것이 그 자체로서 있는 영역을 말한다. 「내맡김에 대한 토의: 사유에 관한 들길의 대화로부터」는 내맡김을 사유의 본질로서 제시하면서, 내맡김이 그 자체로서 고유하게 일어나는 영역을 드러낸다. 토의(Erörterung)란 말 자체가 ‘장소’(Ort)에 대한 해명의 뜻을 갖는다.

-그리고 내맡김 자체가 영역적인 것이다. 내맡김은 방념放念, 초연함, 초연한 내맡김으로 번역되고 방하착放下着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내맡김은 논증적이며 분별적인 사유 의지를 내려놓고 사방으로 환히 트이는 존재의 진리를 향해 마음을 모으는 자세[마음 씀, 마음챙김(mindfulness)]를 의미한다. 주객 분리 속에 사물을 주체 앞에 내세워진 대상으로 보는 분별적이며 표상적인 사유 방식에서 [뒤로] 물러나 존재 진리로 [앞으로] 향함으로써 내맡김은 개방된 장을 연다. 뒤로 물러남과 앞으로 향함이 서로 결속하며 열린 장을 일어나게 하는 것은 사유, 청종, 언어 등 하이데거가 존재에 대한 인간의 상응으로 말하는 것의 근본 특성이다.

-「내맡김에 대한 토의: 사유에 관한 들길의 대화로부터」에서 내맡김이 향하는 존재 진리는 사역四域(Gegnet)으로 말해진다. 존재 진리는 사방으로 밝게 트이는 영역으로 사유되는 것이다. 다른 곳에서 이 영역은 하늘, 땅, 인간, 신적인 것이 하나로 어울리는 사방四方(das Gevierte: 사방 세계)으로 기술된다. 사역은 자신이 고유하게 드러나는 진리의 터전으로 내맡김을 사용한다. 이를 사역화(Vergegnis)라 한다. 사역화에서 인간은 비로소 자신의 본질로 머물 수 있게 된다. 인간 본질은 사역에 귀속하며, 사역의 진리를 위해 쓰이는 데 있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이처럼 자기의 본질 유래에 머묾을 고결함이라고 한다. 그럴진대 고결함은 또한 그렇게 본질로 있도록 해주는 것에 대한 감사함이다.

-사역의 영역을 중심으로 사역과 인간은 함께 속한다. 또 하이데거에서 동일성의 의미에 따르면 양자는 동일하다. 하이데거에 동일성은 상이한 것이 동일한 영역으로부터 그리로 함께 속함을 의미한다. I AM THAT. 사역은 동일한 것이고 동일한 것은 또한 나이다. 물론 마침내 서로 뒤섞일 수 없는 각자의 고유함에 이르면서. 사역과 인간만이 아니라 사물도 사역의 영역화(Gegnen) 안에서, 그를 통해, 비로소 사물로서 들어선다. 이를 사물화(Bedingnis)라 한다.

 

내맡김에 대한 토의: 사유에 관한 들길의 대화로부터

과학자: 마지막에 당신은 인간의 본질에 대한 물음은 결코 인간에 관한 물음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스승: 저는 단지 인간 본질에 대한 물음이 그와 같은 사정인 것은 아닌지에 대한 고찰이 불가피하다는 점만을 말했을 뿐입니다.

과학자: 어쨌든 저는 도대체 어떻게 인간에게서 시선을 돌림으로써 인간의 본질이 발견된다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스승: 제게도 그렇습니다. 그 때문에 저는 그것이 가능한지 또는 어쩌면 필연적인 것인지에 대해 명확함을 얻고자 합니다.

과학자: 인간을 바라보지 않고 인간의 본질을 인식한다니!

스승: 네 그렇습니다. 사유가 인간 본질의 탁월함이라면, 더더욱 이 본질의 본질적인 것, 즉 사유의 본질은 단지 우리가 사유로부터 눈을 돌림으로써만 보일 수 있을 것입니다.

학자: 그렇지만 전통적인 방식에서 사유는 일종의 의욕함인 표상함으로서 파악됩니다. 칸트 역시 그가 사유를 자발성으로 규정할 때 사유를 그렇게 이해합니다. 사유는 의욕함이고 의욕함은 사유입니다.

과학자: 그렇다면 사유의 본성이 사유와는 다른 어떤 것이란 주장은 사유가 의욕함과는 다른 어떤 것이라고 말하는 셈이네요.

스승: 그 때문에 저는 또한 사유의 본성에 관한 우리의 숙고에서 제가 본래 의욕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당신들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의욕하지 않음을 의지한다고요.

과학자: 그 사이 이 표현은 양의적인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학자: 의욕하지 않음은 우선은 여전히 하나의 의욕을 의미합니다. 물론 그 안에 부정[아님; 않음]이 지배하는 방식으로요. 더욱이 의욕함 자체를 향하면서 그것을 거부하는 아님의 의미에서 그럴 것입니다. 이에 따라 의욕하지 않음은 의도적으로 의욕함을 거부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또한 의욕하지 않음이란 표현은 모든 종류의 의욕함에서 단적으로 벗어나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과학자: 그래서 그것[후자의 의욕하지 않음]은 모종의 의욕함을 통해서는 결코 실현되거나 얻어질 수 없습니다.

스승: 그러나 어쩌면 우리는 전자 유형의 의욕하지 않음이란 의욕함을 통해 그에 가까이 접근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학자: 그렇다면 당신은 두 가지 의미의 의욕하지 않음이 서로 특정한 관계를 갖는 것으로 보는군요.

스승: 저는 그 관계를 볼 뿐만 아니라, 고백해도 된다면 우리의 대화를 이끌고 있는 것에 대해 숙고하려고 한 이래로 그것은, 비록 결코 저를 향해 부르고 있지는 않아도, 제게 말을 걸어오고 있습니다.

과학자: 제가 한 의욕하지 않음이 다른 의욕하지 않음에 대해 갖는 관계를 이렇게 규정한다면 올바로 추정하는 것일까요? 당신은 의지에 대한 거부라는 의미의 의욕하지 않음을 의욕하지요. 이를 통해서 우리가 얻고자 하는, 의욕함이 아닌 사유의 본질로 들어서도록 혹은 적어도 그것에 대해 준비하도록 말입니다.

스승: 당신의 말은 맞을 뿐만 아니라, 신들이 우리를 떠나지 않았더라면 저는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건대 당신은 어떤 본질적인 것을 찾았다 하겠습니다.

학자: 우리 가운데 찬사를 보낼 사람이 도대체 있고, 이것이 우리의 대화 양식에 거스르지 않는다면, 저는 당신이 의욕하지 않음의 양의적인 설명에 대한 해석으로써 우리들을, 심지어 당신 자신마저 능가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하이데거 고향 마을에 나있는 들길의 예전 모습. 하이데거 기념관에 전시된 사진
현재는 들길의 목가적 풍경은 사라지고 포장된 도로와 주택들이 들어서 있다.

과학자: 제가 그것에 성공한 것은 저에게 있지 않고, 그 사이 억지를 씀이 없이 우리로 하여금 마음을 가지런히 모으게 하는 밤이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학자: 밤은 발걸음을 느리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숙고할 시간을 줍니다.

스승: 우리는 또한 그 때문에 인간의 거주지에서 아직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과학자: 저는 이번 대화 속에서 우리의 손을 잡고,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말로써 이끄는 저 보이지 않는 안내를 점점 더 깊이 신뢰하고 있습니다.

학자: 우리의 대화가 갈수록 어려워지기에 우리에게는 그 안내가 필요합니다.

스승: 당신의 ‘어렵다’는 말이 우리가 의지함을 떼어놓는 데 있는 낯섦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렇습니다.

학자: 당신은 의욕함만이 아니라 의지함을 말씀하시는군요.

과학자: 그리하여 무리한 요구를 초연하게 내맡기며 꺼내고 있습니다.

스승: 제가 올바른 내맡김을 이미 갖고 있었다면 언급된 떼어놓음의 요구에서 쉽게 벗어났을 것입니다.

학자: 적어도 우리가 의욕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한, ‘내맡김을 깨우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스승: 그보다는 ‘내맡김을 향해 깨어나 머무는 데’라고 말하는 편이 낫겠지요.

학자: 왜 ‘깨우는 데’는 안됩니까?

스승: 우리는 스스로 자신에게서 내맡김을 깨우는 것은 아니니까요.

과학자: 그렇다면 내맡김은 다른 어떤 곳으로부터 생기는 것이군요.

스승: 야기되는 것이 아니라 허락되는 것입니다.

학자: 물론 저는 ‘내맡김’이라는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릅니다만, 대략 우리의 본질이 의욕함이 아닌 것으로 들어서도록 허락될 때 내맡김이 깨어나는 것이라는 예감이 듭니다.

과학자: 당신은 놓아둠에 대해 얘기함으로써 일종의 수동성이 의미되고 있다는 인상을 줍니다. 그럼에도 저는 여기서 문제되는 것이 사물들이 미끄러지고 떠내려가도록 무력하게 놔두는 것은 결코 아니란 사실을 알고 있다고 믿습니다.

학자: 어쩌면 내맡김 속에는 세상의 모든 행위와 인류의 작위들에서 보다 더 높은 활동이 숨겨져 있습니다.

스승: 그럼에도 그 더 높은 활동이란 결코 능동적인 것이 아니지요.

과학자: 그렇다면 우리가 ‘놓여있음’에 대해 말해도 된다면, 내맡김은 능동과 수동의 구별 바깥에 놓여있군요.

학자: 왜냐하면 내맡김은 의지함의 영역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죠.

과학자: 의욕함에서 내맡김으로 넘어서는 것이 제게는 어렵게 느껴집니다.

스승: 내맡김의 본질이 여전히 숨겨져 있다면 더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학자: 어려움은 무엇보다도 내맡김 또한 여전히 의지의 영역 내에서 사유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유의 옛 거장, 예를 들어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에게서 그랬던 것처럼 말이죠.

스승: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에게서 많은 좋은 것을 배울 수 있지요.

학자: 물론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얘기하는 내맡김은 분명 죄된 이기심을 내던지고 신적 의지를 위해 자신의 의지를 포기하는 것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스승: 그렇습니다.

과학자: 내맡김이란 단어가 무엇을 의미해서는 안 되는 지가 여러 면에서 명확해졌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무엇에 관해 얘기하는지는 갈수록 알지 못하겠습니다. 우리는 사유의 본질을 규정하려 하고 있습니다. 내맡김은 사유와 어떤 관계이지요?

스승: 만약 우리가 전통적 개념에 따라 사유를 표상함으로 파악한다면 내맡김은 사유와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그러나 어쩌면 우리가 이윽고 구하고자 하는 사유의 본질은 내맡김 안에 깃들어 있을 것입니다.

과학자: 저는 아무리 그러려고 해도 이 사유의 본질을 표상할 수 없습니다.

스승: 바로 그 하려고 하는 의지 그리고 표상함이라는 당신의 사유 방식이 그것을 막아섭니다.

과학자: 그렇다면 도대체 제가 무엇을 해야 하나요?

학자: 저 역시 그 점이 궁금합니다.

스승: 우리는 아무 것도 해서는 안됩니다. 단지 기다려야 합니다.

학자: 탐탁치 않은 위안이네요.

스승: 탐탁한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우리는 어떤 위안도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위로도 닿지 않는 절망 속에서조차 우리는 여전히 위로를 기대하는데 그 조차 포기해야 할 의지적 행위입니다.

과학자: 그렇다면 무엇을 기다려야 합니까? 어디서 기다려야 합니까? 이제 저는 제가 누구이고 어디에 있는지 거의 알 수 없습니다.

스승: 우리가 뭔가를 가장하는 일을 그만두는 순간 우리 모두는 더 이상 그것을 알지 못하게 됩니다.

학자: 그래도 우리에게는 우리의 길이 남아있지 않나요?

스승: 물론입니다. 그러나 그 길을 너무나 빨리 잊어버림으로써 우리는 사유를 포기합니다.

과학자: 우리가 이제껏 경험하지 않은, 사유의 본질로 넘어오고 들어서야 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더 사유해야 하나요?

스승: 오직 이 넘어섬으로부터 일어날 수 있는 것에 대해서입니다.

학자: 그렇다면 당신은 전통적인, 사유의 본질 의미를 버리지 않겠다는 것인가요?

스승: 당신은 앞선 대화에서 제가 혁명적인 것에 대해 말했던 것을 잊었습니까?

과학자: 이러한 대화에서 망각은 참으로 특별한 위험인 것 같습니다.

학자: 제가 올바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지금 내맡김이라고 부르는, 그러나 거의 알지 못하고 무엇보다도 적절하게 자리 매김하지 못하는 것을 얘기되어온 사유 본질과의 연관 속에서 보아야 하네요.

스승: 제가 말하는 게 바로 그것입니다.

과학자: 직전에 우리는 사유를 ‘초월적-지평적 표상함의 형태로 묘사했습니다.

학자: 이 표상함은 예컨대 나무의 나무적인 것, 항아리의 항아리적인 것, 접시의 접시적인 것, 돌의 돌적인 것, 식물의 식물적인 것, 동물의 동물적인 것을 우리 앞에 세워 놓습니다. 이 내세워진 것들은 나무의 모습으로 있는 이 사물, 항아리 모습의 저 사물, 접시 모습의 이 사물, 돌의 모습으로 있는 많은 사물들, 식물들과 동물들 모습의 다양한 것들과 마주칠 때, 우리가 들여다보는 모습들입니다.

과학자: 당신이 다시 한 번 기술하는 지평은 모습을 에워싸는 시야 범위이군요.

스승: 그것은 대상들의 모습을 능가합니다.

학자: 마치 초월이 대상들의 지각을 넘어서듯이 말입니다.

스승: 이로써 우리는 지평과 초월이 가리키는 것을 능가와 넘어섬을 통해 규정합니다 …

학자: 그 지평과 초월이라는 것은 대상들과 대상들의 표상함으로 소급됩니다.

스승: 그럼으로써 지평과 초월은 대상들과 우리의 표상함으로부터 경험되며 오직 대상들과 표상함과 관련해서 규정됩니다.

학자: 왜 이 점을 강조하시죠?

스승: 그러한 방식으로는 지평을 그것인 바 그것이게 하는, 그와 같은 것은 결코 경험되지 않는다는 점을 시사하기 위해서입니다.

과학자: 당신은 그렇게 주장하시면서 무엇을 생각하고 계신 것입니까?

스승: 우리는 지평 안으로 들여다본다고 말합니다. 즉 시야 범위는 개방적인 장場이며 그 개방성은 우리가 들여다봄으로써 시야 범위에 귀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학자: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또한 시야 범위의 시선이 제공하는 대상들의 모습을 그 열린 장에 들여세우는 것도 아닙니다.

과학자: 오히려 그 모습들은 열린 장으로부터 우리를 마주 향해 오는 것입니다.

스승: 그렇다면 지평적인 것이란 단지 우리를 둘러싸는 열린 장이 우리에게 향한 측면에 지나지 않습니다. 열린 장은 우리의 표상함에 대해 대상으로 나타나는 것의 모습을 향한 전망과 함께 채워지는 것이죠.

과학자: 그에 따라 그 지평은 지평으로서 여전히 다른 어떤 것입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말해진 바에 따르면 여기서 다름이란 그것 자신과의 다름이며 그 때문에 그것 자신인 동일한 것입니다. 당신은 지평이란 우리를 둘러싼, 열린 장이라고 말합니다. 이 또한 표상함의 지평으로서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을 도외시한다면 열린 장 자체란 무엇입니까?

스승: 저에게 그것은 하나의 영역(Gegend)과 같은 것입니다. 자신의 마법을 통해 그에 속하는 모든 것들이 고요히 안식하는 곳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그런 장입니다.

학자: 저는 당신이 지금 말씀하시는 것에 대해 뭔가 이해한 것인지 확신이 들지 않습니다.

스승: 만약 당신이 말하는 이해라는 말로써 앞에 제공된 것을 표상하고 이를, 말하자면 이미 알려진 것 아래 놓음으로써 확보하는 능력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저 또한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 역시 제가 영역으로서의 열린 장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배정할 수 있는, 이미 알려진 것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과학자: 그런 이유로 여기서 그것은 아마도 불가능할 것입니다. 추정컨대 그 이유는 당신이 영역이라고 부른 것이 모든 배치를 비로소 허락하는 것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스승: 제가 의미한 것이 그 점입니다. 그렇지만 그것만이 아닙니다.

학자: 당신은 모든 것이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는 ‘하나의’ 영역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 한 영역은 다른 영역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모든 영역들 중의 영역입니다.

스승: 당신 말이 맞습니다. 영역이 문제입니다.

과학자: 그리고 영역의 마법은 그 본질의 지배, 제가 그렇게 불러도 된다면, 영역화(Gegnen)입니다.

학자: 영역은 그 말의 의미에 따라 볼 때,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지평에 대해 앞서 말하기를 그것에 의해 둘러싸인 전망으로부터 대상들의 모습이 우리를 향해 다가온다고 했습니다. 이제 지평을 영역으로부터 파악하면 우리는 영역 자체를 우리를 마주하여 다가오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스승: 확실히 실로 그러한 방식에서 우리는, 앞서의 지평이 그랬듯이, 우리 자신과의 연관으로부터 영역을 특징짓는 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반면 우리는 우리를 둘러싸는 열린 장이 그 자체로 무엇인지 찾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은 영역이라고 말하고 그리고 방금 언급된 의도에서 그렇게 얘기한다면, 여기서 영역이란 말은 어떤 다른 것을 가리킵니다.

과학자: 이 외에도 [우리를] 마주해 다가옴은 결코 영역의 한 근본 특성이 아니며 영역의 근본 특성 자체도 아닙니다. ‘영역’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나요?

붉은 사암으로 지어진 르네상스 양식의 메스키르히 시청. 하이데거는 1959년 이곳 회의실에서 열린 명예시민 추대식 및 생일 축하 행사에서 답사로서 ‘고향에 대한 감사’(Dank an die Heimatstadt Meßkirch)를 강연한다.

학자: 그것의 옛 형태는 ‘사역四域’(Gegnet: 사방으로 트이는 존재의 열린 장)으로 탁 트인 터를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영역이라고 부르고자 하는 것의 본질에 대한 뭔가가 취해질 수 있나요?

스승: 영역은 모든 것을 모든 것으로 그리고 모든 것을 서로 그 자체로 고요히 머물도록 불러 모으는데, 이는 마치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일어납니다. 영역은 고요함의 폭(Weite; expanse)과 동안(Weile; abiding)으로 불러 모으며 되돌아 간수함입니다.

학자: 그렇다면 영역 그 자체는 폭이며 동안이군요. 영역은 고요함의 폭으로 머물고 자유롭게 그 자신으로 돌아감의 동안으로 트이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또한 ‘사역’이란 말을 그것의 강조된 용법을 고려하면서 통상적인 ‘영역’이란 이름 대신 사용할 수 있습니다.

스승: 사역은 머묾의 폭입니다. 사역은 모든 것을 불러 모으며 스스로 트임으로써 자기 안에 열린 장을 붙잡고 감싸서 그때그때의 모든 것이 고요함 안에서 밝게 솟아나도록 합니다.

과학자: 그 만큼 저는 사역이 우리를 향해 다가오기보다는 뒤로 물러나는 것으로 봅니다.

학자: 그래서 사역 안에 나타나는 사물들은 더 이상 대상의 성격을 갖지 않는 것이지요.

스승: 그것들은 더 이상 우리 맞은편에 서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대체 더 이상 세워져 있지 않습니다.

과학자: 그렇다면 그것들은 놓여있나요? 그게 아니면 어떻게 있나요?

스승: 놓여있다는 말로 고요히 머묾에 대한 얘기 속에 언급된 고요함을 의미한다면 그것들은 놓여있습니다.

과학자: 그러나 사물들은 어디에서 고요히 머무나요? 그리고 고요함은 어디에 있나요?

스승: 사물들은 스스로 속해 있음이 지닌 폭의 동안에 돌아감으로써 고요히 머뭅니다.

학자: 그런데 운동인 돌아감 안에 고요함이 있을 수 있나요?

스승: 실로 그럴 수 있습니다. 고요함이 모든 움직임의 아궁이, 모든 운동을 지배하는 것이라면요.

과학자: 저는 지금 당신이 영역, 폭과 동안에 대해, 돌아감과 고요히 깃듦에 말했던 모든 것을 제대로 표상할 수 없다는 점을 고백합니다.

학자: 그때그때의 모든 것이 표상함을 통해서는 하나의 지평 안에 우리를 향해 마주 서있는 대상으로 되는 한, 그것은 아마도 도대체 표상될 수 없을 것입니다.

과학자: 그렇다면 우리가 이름 붙인 것을 또한 본래적으로는 기술할 수 없다는 것입니까?

스승: 그렇습니다. 모든 기술이란 이름 불린 것을 대상적으로 내세울 게 틀림없으니까요.

학자: 그럼에도 그것은 이름 불리고 또 호명되면서 사유될 수 있습니다 …

스승: 사유가 더 이상 표상함이 아닐 때만 그렇죠.

과학자: 그러나 그렇다면 사유는 무엇이어야 하나요?

스승: 어쩌면 우리는 이제 사유의 본질로 들어서는 근처에 있습니다.

학자: 사유의 본질을 기다림으로써 말이죠.

스승: 기다림, 좋습니다. 하지만 결코 기대하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기대함이란 이미 표상함과 표상된 것에 묶여있기 때문입니다.

학자: 하지만 기다림은 그러한 것을 내려놓습니다. 또는 이렇게 말해야 되겠죠. 기다림은 대상을 앞에 세우는 표상함에 전혀 끼어들지 않습니다. 기다림은 본래 어떤 대상도 갖지 않습니다.

과학자: 그렇지만 우리가 기다릴 때 언제나 어떤 것을 기다립니다.

학자: 물론입니다. 그러나 기다리는 것을 표상하고 앞에 세우자마자 우리는 이미 더 이상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스승: 기다림 속에서 우리는 기다리는 것을 열어둡니다.

학자: 왜 그렇죠?

스승: 기다림이 스스로 열린 장 자체 안으로 들어서기 때문입니다 …

학자: 멂의 폭 안으로 …

스승: 그 멂의 가까움 안에 기다림이 머무는 동안이 있습니다.

과학자: 하지만 머묾이란 돌아감입니다.

학자: 오직 열린 장 자체가 우리가 기다릴 수 있는 것이네요.

과학자: 그러나 열린 장 자체가 사역입니다 …

스승: 우리는 사유한다면 기다리면서 그리로 들어섭니다.

과학자: 그렇다면 사유는 멂을 향한 가까이로 들어섬이겠네요.

학자: 그것은 우리에게 우연히 닥친, 사유의 본질에 대한 과감한 규정이네요.

과학자: 저는 어떤 것을 표상함이 없이, 지금까지 언급된 것을 그저 요약했을 뿐입니다.

스승: 그렇지만 당신은 무언가를 사유했습니다.

과학자: 아니, 실제로는 어떤 것을 알려고 함이 없이 그것을 기다렸습니다.

학자: 그런데 당신은 어떻게 갑자기 기다릴 수 있었나요?

과학자: 이제 더 명백하게 깨닫게 된 바와 같이, 저는 우리의 대화 가운데 이미 오랫동안 사유의 본질에 당도하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이제 기다림 자체가 그리고 그와 동시에 우리 모두가 아마도 들길의 도상에서 더욱 더 기다리게 되었다는 사실이 저에게 더욱 명백해졌습니다.

스승: 당신은 그것이 얼마만큼 그러한지 우리에게 말해줄 수 있나요?

과학자: 기꺼이 말로 옮겨보겠습니다. 당신이 저를 곧장 개별적인 단어들로 묶어두는 위험에 처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스승: 통상 우리의 대화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지요.

학자: 우리는 오히려 단어들에서 자유롭도록 합니다.

스승: 왜냐하면 단어란 결코 어떤 것을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즉 단어는 어떤 것을 내보이면서, 그것이 말해질 수 있음의 폭 안에 머물도록 하는 것입니다.

과학자: 제가 무엇 때문에 기다림에 이르고, 또 어떤 방향을 따라 사유의 본질을 명료화하는 데 성공했는지 말해야겠습니다. 어떤 것을 표상함이 없이 기다림이 열린 장으로 들어서기에 일체의 표상함에서 저를 풀어놓고자 했습니다. 열린 장을 틔우는 것이 사역이기 때문에 저는 표상함에서 풀려나 오직 순수하게 사역에 내맡긴 채로 있고자 했습니다.

스승: 제가 올바르게 추정했다면, 그에 따라 당신은 내맡김에 들어서고자 했습니다.

과학자: 솔직히 고백하자면, 우리가 비록 조금 전 내맡김에 대해 얘기했지만 제가 그것을 뚜렷이 사유한 것은 아닙니다. 저는 우리가 논의한 대상들의 표상함이 아니라 대화의 진행을 통해 앞서 언급한 방식으로 기다림에 들어서게 되었던 것입니다.

학자: 우리는 결코 스스로 들어섬의 계기를 통하는 것보다 더 적절하게 내맡김으로 이를 수 없습니다.

스승: 무엇보다 그 계기가 우리를 움직이는 논의의 소리 없는 행로처럼 눈에 띄지 않을 때 더욱 그렇지요.

학자: 하지만 그것은 내맡김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길로 우리를 데려간다는 말이군요 …

스승: 그것은 고요함 같은 것입니다.

학자: 이로부터 저에게는 돌연 운동이 얼마만큼 고요함에서 나오며 고요함으로 깃드는지 보다 명확해집니다.

스승: 그렇다면 내맡김은 단지 길일 뿐만 아니라 운동이 되겠군요.

학자: 이 기이한 길은 어디로 향하며, 그 길에 맞갖은 운동은 어디에서 고요해지는 것입니까?

스승: 내맡김이 고유하게 있는 사역 안이 아니고서 다른 어떤 곳이겠습니까.

과학자: 마침내 저는 이제 제가 들어서고자 했던 것이 도대체 얼마만큼 내맡김인지를 되돌려 묻게 됩니다.

학자: 그 질문으로 당신은 우리를 몹시 당황하게 만드는군요.

스승: 그 당혹감은 우리의 길 위에서 끊임없이 처하게 되는 그런 것입니다.

과학자: 어째서 그렇지요?

스승: 우리가 그때그때 하나의 단어로 지칭한 것이 그럼에도 딱 들어맞는 단어를 하나의 명패와 같이 이름들로서 달고 있지 않는 한 그렇습니다.

과학자: 우리가 지칭하는 것은 그 전에는 이름이 없습니다. 즉 우리가 내맡김이라고 호명하는 것 또한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무엇에 따라 그 이름이 적절한지 여부와 정도를 평가합니까?

학자: 아니면 모든 지칭이란 이름 없는 것에 대한 하나의 임의적 행위입니까?

스승: 그러나 도대체 이름 없는 것이 있다는 사실이 그렇게 확정된 것인가요? 많은 것이 종종 말해질 수 없습니다만, 그 까닭은 단지 그것이 갖는 이름이 우리에게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학자: 어떤 호칭에 의해 그렇다는 것이죠?

스승: 어쩌면 이름들은 어떤 지칭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이름들은 이름 불릴 수 있는 것, 이름, 이름 불린 것이 함께 생기하는 명명命名함 덕분일 것입니다.

과학자: 당신이 마지막에 명명에 대해 말한 것이 저에겐 모호합니다.

학자: 아마도 그것은 단어의 본질과 연관되어 있어서 그럴 것입니다.

과학자: 그에 반해 지칭에 대해 언급하신 내용, 그리고 이름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오히려 제게 분명합니다.

학자: 왜냐하면 내맡김이란 이름의 경우, 우리가 그것을 검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승: 혹은 이미 검증을 마쳤기 때문이겠죠.

과학자: 어느 정도까지 그렇다는 것입니까?

스승: 당신이 내맡김이란 이름으로 지칭했던 것은 무엇인가요?

과학자: 당신이 허용한다면, 그 이름을 쓴 것은 제가 아니라 당신이었다는 점을 밝혀둡니다.

스승: 저 또한 당신처럼 거의 지칭을 수행하지 않았습니다.

학자: 그렇다면 누구였죠? 우리 중 아무도 아니란 겁니까?

스승: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머무는 이 영역 안에서는 오로지 누구도 아니었을 때 모든 것이 최선의 질서로 있기 때문입니다.

과학자: 책임질 게 아무 것도 없는, 수수께끼 같은 영역이군요.

스승: 왜냐하면 오직 스스로 그 자신을 책임지는 것이 단어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학자: 우리에게 남아있는 것은 단지 단어에 맞갖은 대답에 경청하는 일 뿐입니다.

스승: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우리의 말함이 단순히 들려온 대답을 따라 말함이라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

과학자: 어떤 사람이 처음으로 그러한 따라 말함에 이르게 되는지 여부와 누가 그렇게 하는지가 문제되지 않는다면 말이죠. 더욱이 그렇게 한 사람은 종종 그가 누구를 따라 말한 것인지 모르니까요.

학자: 그러니 누가 ‘내맡김’이라는 이름을 처음 화두로 제시한 것인지 다투지 맙시다. 오직 우리가 그렇게 이름 부르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만 숙고하도록 합시다.

과학자: 언급한 저의 경험에서 말하자면 그것은 기다림입니다.

스승: 그렇다면 이름 없는 어떤 것이 아니라, 이미 지칭된 것이네요. 이 기다림이란 무엇입니까?

과학자: 기다림이 열린 장과 관련 맺고 열린 장이 사역인 한, 기다림이란 사역에 대한 관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스승: 어쩌면 기다림은 심지어 사역에 대한 관계 자체일 것입니다. 기다림이 사역에 들어서고 그렇게 그 안에 깃들면서 사역으로 하여금 순수하게 사역으로서 번성하도록 하는 한 말입니다.

학자: 그럼으로써 어떤 것에 대한 관계는 관계 맺는 것에 의해 그 고유한 본질이 지켜질 때 참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스승: 사역에 대한 관계는 기다림입니다. 그리고 기다림은 사역의 열린 장으로 들어서는 것을 말합니다.

학자: 따라서 사역으로 들어서는 것.

과학자: 그 얘기는 마치 우리가 그 전에는 사역의 외부에 있었던 것인 양 들립니다.

스승: 우리는 그렇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유하는 존재로서, 즉 동시에 초월적으로 표상하는 존재로서 초월의 지평 안에 머무는 한, 우리는 결코 사역의 외부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평이란 사역이 우리의 표상함으로 향한 측면입니다. 사역은 지평으로서 우리를 둘러싸며 스스로를 내보입니다.

학자: 사역은 지평으로서는 오히려 자신을 감춘다고 생각합니다.

스승: 확실히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초월적으로 표상하는 가운데 지평 안으로 나가서면서 사역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사역으로서의 사역 자체로 아직 들어서지 않는 한 사역 안에 있지 않습니다.

과학자: 그렇지만 그것은 기다림 안에서 일어납니다.

스승: 당신이 이미 말했듯, 우리는 기다리면서 지평에 대한 초월적 관계에서 풀려나 있습니다.

과학자: 이러한 풀려나 있음이 내맡김의 첫 번째 계기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내맡김의 본질을 적중하는 것도 아니고 다 길어낸 것도 아닙니다.

학자: 얼마만큼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까?

스승: 저 지평적 초월로부터 풀려남이 필연적으로 선행함이 없이도 본래적 내맡김이 일어날 수 있는 한 그렇습니다.

학자: 본래적 내맡김이 사역에 대한 맞갖은 관계이고, 그러한 관계가 관계 맺는 것으로부터 순수하게 규정된다면 그것은 사역에 기반하며 사역으로부터 사역을 향한 운동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스승: 내맡김은 사역으로부터 나옵니다. 왜냐하면 내맡김은 사역에 기반하며 인간은 사역 자체를 통해 사역에 맡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사역에 근원적으로 속하는 한 그 본질에서 사역에 맡겨져 있습니다. 인간은 사역 자체를 통해 시원적으로 사역의 고유한 것인 한, 사역에 속합니다.

학자: 실제로 어떤 것을 기다림이 본질적인, 다시 말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기다림이라면, 기다림은 우리가 기다리는 그것에 속한다는 데 놓여 있습니다.

스승: 기다림, 물론 사역의 스스로 열림에 대한 기다림의 경험으로부터 그리고 그 기다림에 대한 관계로부터 기다림은 내맡김으로 불렸습니다.

학자: 따라서 사역을 향한 기다림이란 지칭이 사태에 상응하는 말입니다.

과학자: 그러나 내맡김이 사역으로 속해 있음을 근거로 초월적-지평적 표상함으로부터 풀려나고, 또 그 표상함이 이제까지 지배적인 사유의 본질이라면, 내맡김 안에서 사유는 표상함에서 사역을 향한 기다림으로 바뀝니다.

스승: 그렇지만 이 기다림의 본질이 사역으로의 내맡김입니다. 그러나 사역은 그때그때 내맡김을 자신 안에 깃들게 함으로써 속하게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사유의 본질은 사역이, 그렇게 말해도 된다면, 내맡김을 자신 안에 감싸 영역화[사역화]한다는 데 놓여 있습니다.

학자: 사유의 본질이 내맡김의 사역화에 있기 때문에 사유는 사역으로의 내맡김이라는 말이군요.

스승: 하지만 그로써 당신은 사유의 본질은 사유로부터, 즉 기다림 자체로부터가 아니라 사유가 아닌 다른 것, 즉 사역화함으로써 현성現成하는 사역으로부터 규정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과학자: 저는 내맡김, 사역, 사역화에 대해 지금 말하는 것을 어느 정도는 따라갈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여기서 어떤 것도 표상할 수 없습니다.

학자: 또한 만약 당신이 말해진 것을 그 본질에 맞갖게 사유한다면 그렇게 해서도 안 됩니다.

과학자: 당신은 우리가 사유의 변화된 본질에 맞게 그것을 기다린다고 말하는군요.

학자: 당연히 사역의 사역화를 기다리는 것이지요. 사역화가 우리의 본질을 사역으로, 즉 그것에 속함으로 들어서도록 말이지요.

스승: 하지만 만약 우리가 사역에 그것의 고유한 것으로 이미 속한다면?

과학자: 그러나 우리가 참되게 있지 않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학자: 우리는 참되게 있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

과학자: 그것은 다시금 ‘예’와 ‘아니오’ 사이를 쉼 없이 오가는 일입니다.

학자: 말하자면 우리는 그 둘 사이에 매달려있는 셈이죠.

스승: 그렇지만 이 사이에 머묾이 기다림입니다.

학자: 그것이 사역이 인간을 감싸 영역화하는 내맡김의 본질입니다. 우리는 사유의 본질을 내맡김으로서 예감하게 됩니다.

스승: 그리고서는 내맡김을 곧바로 다시 잊어버리지요.

과학자: 하지만 내맡김은 저 자신이 기다림으로서 경험했던 것입니다.

스승: 우리는 사유가 결코 그 자체로 존속하는 내맡김이 아니란 점을 유의합니다. 사역에 대한 내맡김은 내맡김의 사역화로서만 사유입니다. 사역화는 내맡김을 사역 안으로 들어서게 합니다.

학자: 그러나 사역은 또한 사물을 폭의 동안 안에 머물게 합니다. 사물과 관련하여 사역의 영역화를 어떻게 지칭해야 할까요?

과학자: 그것은 사역화일 수는 없습니다. 사역화는 내맡김에 대한 사역의 관련이기 때문이죠. 내맡김은 사유의 본질을 자신 안에 간직하고 있지만 사물들 자체는 사유하지 않습니다.

스승: 사역의 폭에 머무는 항아리에 관한 앞선 대화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분명히 사물들은 사역의 영역화를 통해 사물로 존재합니다. 그러나 사역의 영역화는 사역이 영역화를 야기시키는 게 아니듯, 사물들을 인과적으로 낳거나 발생시키는 게 아닙니다. 또한 사역은 사역화에서 내맡김을 위한 지평인 것이 아닙니다. 또 사역은 우리가 이 사물을 대상으로 경험하든 대상들에 덧붙여 표상된 ‘물 자체’로 여기든, 사물을 위한 지평이지도 않습니다.

학자: 지금 당신이 말한 것은 저에게는 너무나 결정적인 것으로 들려 말한 내용을 학술적 용어로 확정해보고 싶습니다. 물론 저는 이러한 용어가 사유된 것을 경직시킬 뿐만 아니라 또한 동시에 통상적 용어에 불가피하게 달라붙어 있는 다의성에 상응하여 그것을 다시 모호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스승: 그와 같이 학술적 유보를 붙였으니 이제 편안하게 학술적으로 말해도 좋습니다.

학자: 당신의 설명에 따르면 내맡김에 대한 사역의 관계는 인과적 작용관계도 아니고 지평적-초월적 연관도 아닙니다. 보다 간결하고 일반적으로 말하면 사역과 내맡김의 관계는 존재자적으로도 존재론적으로도 사유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어쨌든 하나의 관계라면 말이지요 …

스승: 단지 사역화로서만 사유될 수 있을 뿐입니다.

과학자: 그러나 그와 마찬가지로 사역과 사물의 관계 역시 인과적 작용관계도, 초월적-지평적 연관도 아니며, 따라서 존재자적인 것도 존재론적인 것도 역시 아닙니다.

학자: 그러나 또한 분명한 것은 사물에 대한 사역의 관계는 인간 본질에 관여하는 사역화도 아니란 점입니다.

스승: 그렇다면 사역이 사물을 사물로서의 그 자체 안에 머물도록 할진대 사물에 대한 사역의 관계를 어떻게 불러야 할까요?

과학자: 사역은 사물을 사물로 제약합니다.

학자: 그래서 사역은 사물화(Bedingnis)로 불리는 게 가장 합당하겠네요.

과학자: 그러나 사물로 제약함은 어떤 제작도 작용도 아닙니다. 또한 초월적으로 가능하게 함이란 의미에서의 가능하게 함도 아닙니다 …

스승: 오직 사물화일 따름입니다.

과학자: 그래서 우리는 먼저 사물화가 무엇인지 사유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

스승: 사유의 본질을 경험하는 법을 배움으로써 말입니다 …

학자: 그에 따라 사물화와 사역화를 기다리면서.

과학자: 그럼에도 이러한 호명들은 지금도 이미 열거된 관계의 다양성들을 어느 정도 명료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특징짓는 게 가장 큰 문제인 연관은 여전히 무규정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제가 말하는 연관은 사물에 대한 인간의 그것입니다.

학자: 어째서 당신은 그 관계에 그토록 완고하게 매달려 있나요?

과학자: 우리는 앞에서 자연에 대한 물리적 사유의 실제적 관계로부터 나와 대상 사이 연관을 밝히는 것으로부터 시작했습니다. 제가 가장 보편적인 것으로 여기는 나와 대상의 관계, 자주 언급되는 주-객 연관은 분명 사물이 대상이 될 수 있는 한에서 사물에 대해 인간이 맺는 관계의 한 역사적 변용에 지나지 않습니다 …

스승: 심지어 사물들은 사물의 본질을 얻기도 전에 대상이 되었습니다.

학자: 그와 상응하여 인간 본질이 자아로 바뀌는 변용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

스승: 인간 본질이 그 자신에로 돌아갈 수도 있기 전에 마찬가지의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죠 …

과학자: 인간 본질을 이성적 동물로 각인하는 일을 최종적인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

학자: 오늘의 대화에 따르면 그런 일은 더 이상은 거의 불가능한 것입니다.

과학자: 저는 그 점에 대해 서둘러 결정을 내리는 것을 주저합니다. 반면 다른 사실 하나가 제게 명확해졌는데 자아와 대상 사이의 연관에는 인간 본질의 역사에 속하는 역사적인 어떤 것이 감춰져 있다는 것입니다.

스승: 다만 인간의 본질이 그의 각인을 인간 스스로부터가 아니라 우리가 사역과 사역화라고 호명하는 것으로부터 경험하는 한, 당신이 예감한 역사는 사역의 역사로서 생기합니다.

과학자: 저는 아직 그 정도까지 함께 사유할 수 없습니다. 자아와 대상 사이의 연관이 갖는 역사적 성격에 대한 통찰이 저에게 모호함을 제거해준다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제가 수학적 자연과학의 분석이란 방법론적 측면을 지지했을 때, 그러한 고찰 방식은 하나의 역사적인 것이라고 말씀해주셨기 때문입니다.

메스키르히의 성 마르틴 교회. 하이데거의 아버지는 이 성당의 종지기이자 관리인이었다. 큰 흰색 탑이 종탑으로 하이데거는 어린 시절 직접 이곳 종을 치기도 했다. 1949년 하이데거는 성당 부속회관에서 「들길」을 낭독한다.

학자: 당신은 그 명제를 강력하게 논박했지요.

과학자: 이제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합니다. 수학적 기획투사와 실험은 자아로서의 인간이 대상으로서의 사물에 대해 맺는 관계 안에 근거합니다.

스승: 심지어 그것들은 그 관계를 규정하면서 역사적 본질을 전개합니다.

과학자: 역사적인 것에 향해 있는 모든 고찰을 ‘역사적’(historisch)이라고 부른다면 실제로 물리학의 방법론적 분석은 역사적인 것입니다.

학자: 이때 ‘역사적’이라는 개념은 인식의 한 방식을 의미하며 폭넓은 의미로 파악된 것입니다.

스승: 아마도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행적들에서 존립하는 것이 아닌 역사적인(Geschichtlich) 것으로의 방향에서.

학자: 또한 인간이 일군 문화적 업적에서도 성립하는 것이 아닌.

과학자: 그런 게 아니라면 어디에 존립한다는 것인지?

스승: 역사적인 것(das Geschichtliche)은 사역에, 그리고 인간에게 자신을 보내면서 인간을 그의 본질로 영역화하는 사역으로서 생기하는 것에 기반합니다.

학자: 그렇지만 인간의 본질이 동물의 이성성理性性 (rationality) 안에서 여전히 충족되는 것이 아니라고 할 때, 그러한 본질은 아직은 거의 경험하지 못한 것입니다.

과학자: 이러한 사정에서 우리는 인간의 본질을 다만 기다릴 수 있을 뿐입니다.

스승: 우리를 여전히 고유한 본질을 숨기고 있는 사역에 속하게 하는 내맡김 안에서.

학자: 사역에 대한 내맡김을 우리가 구했던 사유의 본질이라고 예감합니다.

스승: 사역에 대한 내맡김으로 들어설 때, 우리는 의욕하지 않음을 의욕합니다.

과학자: 사실 내맡김은 초월적 표상함으로부터 풀려나고 그래서 지평의 의욕함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이러한 포기는 더 이상 의욕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사역으로의 속함에 들어서는 계기가 의욕함의 흔적을 필요로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말입니다. 그러나 그 흔적마저 내맡김에 들어서면서 사라지고 내맡김 안에서 완전히 지워집니다.

학자: 그렇다면 내맡김은 의욕함이 아닌 것과 얼마만큼 연관돼 있습니까?

스승: 머무는 폭의 체류, 돌아감에서 고요하게 됨, 사역의 영역화에 대해 말했던 모든 것에 따르면, 사역은 거의 의지라 불릴 수 없습니다.

학자: 사역의 사역화, 그리고 그와 마찬가지로 사물화가 모든 작용과 인과적 발생에서 본질적으로 벗어나 있다는 이 사실만으로도 일체의 의지적 본질이란 그 모든 것에 얼마나 결정적으로 낯선 것인지 드러납니다.

스승: 왜냐하면 모든 의지란 작용하고 현실을 자신의 요소로 만들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과학자: 만약 우리가 말하는 것을 들은 사람은 얼마나 쉽게 이런 생각이 들까요. 내맡김이란 비현실적인 것, 그래서 아무것도 아닌 것 속에 떠다니며 어떤 활동력도 없이 모든 것을 무의지적으로 허용하는 것이고 근본적으로 삶에 대한 의지의 부정이구나!라고 말이죠.

학자: 그러면 당신은 내맡김에도 또한 활동력과 결단성 같은 것이 지배한다는 사실과 얼마만큼 그러한지 보여주는 것을 통해 내맡김에 대한 그같은 가능한 오해에 대응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여기시는 것입니까?

과학자: 네, 저는 활동력, 결단성 같은 용어들이 곧장 의지적인 것으로 오해된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렇다고 보고 있습니다.

학자: 그 경우 사람들은, 예컨대 ‘결단성’이란 말을 『존재와 시간』에서 사유된 대로, 즉 현존재가 고유하게 떠맡은, 열린 장에 대한 자기 개방성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

스승: 우리는 사역을 바로 그것으로서 사유합니다.

학자: 만약 우리가 그리스의 말과 사유에 맞갖게 진리의 본질을 비은폐非隱蔽(Unverborgenheit)와 탈은폐脫隱蔽(Entbergung)로서 경험한다면 사역이 아마도 진리가 감춰진 채 현성하는 것이란 사실을 상기할 것입니다.

과학자: 그렇다면 사유의 본질, 즉 사역에 대한 내맡김은 현성하는 진리에 대한 결단성이 되겠군요.

스승: 내맡김 안에는 감내가 숨겨 있습니다. 이때 감내란 오롯이 내맡김이 그때그때 보다 순수하게 그의 본질 안에, 그것을 감내하면서, 서 있는데 있습니다.

학자: 그렇다면 내맡김은 어떤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고 언제나 내맡김의 억지함으로 남는 자제함 안으로 마음을 모으는 태도가 되겠네요.

스승: 그래서 삼가며 감내하는 내맡김은 사역의 사역화를 받아들이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과학자: 내맡김이 그의 본질에 깃드는, 억지하는 감내함은 최상의 의욕함에 상응할 수 있는, 그럼에도 그렇게 돼서는 안 되는 것일 터입니다. 내맡김을 바로 사역의 사역화에 속하게 하는, 내맡김의 자신 안에 깃듦에 대해서라면 …

스승: 그리고 일종의 방식으로는 또한 사물화에도 속하게 하는 …

과학자: 그 자체에 깃들며 사역에 귀속하는 속함의 감내에 대해서도 여전히 우리에게 이름이 결여돼 있습니다.

학자: 어쩌면 ‘안에 있음’[內住]( Inständigkeit)이란 용어가 뭔가를 호명해줄 수 있겠습니다. 언젠가 저는 한 친구를 통해 그가 어디선가 베껴 둔 몇 줄의 구절들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 구절들은 바로 이 단어[안에 있음]에 대한 설명을 담고 있습니다. 저는 그것들을 기억해 두었는데 이런 내용입니다.

 

안에 있음

결코 하나의 진리만이 아니니,

현성하는 진리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

열린 견인堅忍 가운데,

사유하는 마음을 다스려라

단순소박한 감내함으로

유일한 고결함으로

고상한 기억함의.

 

스승: 그에 따르면 사역에 내맡김에서 안에 있음은 사유가 지닌 자발성의 참된 본질일 것입니다.

학자: 그리고 그 시 구절들에 의하면 사유란 고결함과 친족관계인 회상이 될 것입니다.

스승: 사역에 대한 내맡김의 안에 있음은 고결함 자체일 것입니다.

과학자: 이 믿기지 않는 밤이 두 분을 도취로 유혹하는 것처럼 보이네요.

스승: 만약 당신이 우리가 더욱 기다리고 깨어나는 기다림 속 도취를 말하는 것이라면 확실히 그렇습니다.

학자: 겉보기에는 더 가난한, 그러나 존재로부터 허락된 것에서 더욱 풍요로운.

과학자: 그렇다면 두 분이 말씀하시는 생소한 맑은 정신에서 내맡김이 얼마만큼 고결함과 친연적이 될 수 있는지 말씀해주십시오.

학자: 유래를 갖는 것은 고결한 것입니다.

스승: 단지 유래를 가질 뿐만 아니라 자기 본질의 유래에 머무는 것이지요.

과학자: 이제 본래적인 내맡김이란 인간이 그 본질에서 사역에 속하는 즉 사역에 내맡겨져 있는 데 있군요.

학자: 단지 이따금 그런 것이 아니라, 어떻게 말해야 될까요, 애초부터 그렇게 있는.

과학자: 우리가 본래 사유할 수 없는 애초에 …

스승: 왜냐하면 사유의 본질이 바로 거기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과학자: 즉 인간의 본질은 앞서 사유할 수 없는 것에서 사역에 맡겨져 있는 것이죠.

학자: 그 때문에 우리는 다음의 말을 이어 붙입니다. ‘물론 사역 자체를 통해서’라고.

메스키르히 궁정 정원. 궁정 정원 문을 지나면서 들길은 시작된다.

스승: 사역은 고유한 영역화를 위해 인간 본질을 자기의 것으로 갖습니다[專有].

과학자: 이로써 우리는 내맡김을 설명했습니다. 방금 떠오른 것인데, 그럼에도 우리는 또 왜 인간 본질이 사역에 전유되는지 사유하는 것을 소홀히 했습니다.

학자: 분명한 것은 다음의 이유에서 인간 본질이 사역에 내맡겨 있다는 점입니다. 즉 사역이란 인간 본질 없이는 그것의 고유함대로 현성할 수 없을 만큼, 인간 본질이 사역에 속하기 때문이란 것이지요.

과학자: 거의 사유하기 힘든 말이네요.

스승: 우리가 그것을 표상하려고 하는 한, 다시 말해 억지로 ‘인간’이라고 불리는 대상과 ‘사역’이라고 불리는 대상 사이에 대상적으로 눈앞에 있는 관련으로서 내세우려고 하는 한 그것은 도대체 사유될 수 없습니다.

과학자: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점을 유의한다 해도, 사역에 대한 인간 본질의 본질적 연관에 대한 명제 안에는 극복할 수 없는 어려움이 남아있지 않나요? 우리는 방금 사역을 진리의 숨겨진 본질이라고 성격 규정했습니다. 사역 대신 한 번 간단히 줄여 진리라고 말해봅시다. 이 경우 사역과 인간 본질의 연관에 대한 명제는 다음의 사실을 말합니다. 인간 본질은 도대체 진리가 인간을 필요로 하기에 진리에 고유한 것으로 속해 있다. 그런데 진리가, 바로 인간과의 관련에서 인간으로부터 독립하여 그 자체일 수 있다는 사실이 진리의 탁월한 성격이 아니던가요?

학자: 당신은 그렇게 말함으로써, 우리가 진리의 본질을 고유하게 해명하고 인간의 본질을 보다 뚜렷이 규정했을 때야 비로소 토의할 수 있는 난제를 건드린 것입니다.

스승: 우리는 이제 그 두 가지를 향한 길 위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우리가 인간에 대한 진리의 연관을 고유하게 사유할 때 무엇을 숙고해야 하는지가 보다 분명해지도록 그 연관을 고쳐 말하고 싶습니다.

과학자: 그렇다면 당신이 그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선은 단지 하나의 주장으로 남겠지요.

스승: 확실히 그렇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바는 이것입니다. 오직 인간 스스로는 진리에 대해 어떤 것도 할 수 없으며 진리는 인간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 본질은 사역에 맡겨져 있고 사역에 의해 쓰인다는 것입니다. 단지 사역에 내맡김이라는 인간 본질이 사역화에 그리고 사물화를 지탱하는 데 쓰이는 그 이유 때문에 진리는 인간 본질로부터 독립적일 수 있습니다. 인간으로부터 진리의 독자성은 분명 인간 본질을 향한 연관이며, 이 연관은 인간 본질이 사역으로 영역화하는 데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학자: 사정이 그렇다면, 사역에 대한 내맡김 안에 들어서 있는 인간은 그의 본질 유래 안에 머물 것입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바꿔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은 진리의 본질에 쓰이는 존재자이다. 인간은 그와 같이 그의 유래 안에 머물며 본질의 고결함으로부터 요구받는다 하겠습니다. 그는 고결함을 예감할 것입니다.

과학자: 이 예감은 기다림 이외의 다른 것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내맡김의 안에 들어서 있음을 기다림으로서 사유하지요.

학자: 사역이 그와 같이 머무는 폭이라면 감내는 가장 멀리 뻗칠 수 있을 것입니다. 감내는 가장 오랫동안 기다릴 수 있기에, 심지어 동안의 폭 자체도 예감할 것입니다.

스승: 감내하는 고결함은 의욕함을 거절하면서, 하나의 의지가 아닌 것으로 들어섰던 저 의욕함이 순수하게 자신 안에 깃드는 것입니다.

학자: 고결함은 사유의 본질이며, 그럼으로써 감사함의 본질이 되겠네요.

스승: 어떤 것에 대해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감사하도록 허락된 것에 감사하는 것이지요.

학자: 이러한 사유의 본질과 함께 우리는 구하고 있는 것을 찾은 듯합니다.

과학자: 우리의 대화에서 말해진 모든 것이 평정에 이르는 것처럼 보이는 그러한 것을 우리가 찾았다면 말이죠.

스승: 그것은 단지 내세워진 것이기에, 아마 당신이 알아챘듯이, 우리 또한 한 동안 모든 것을 단지 정립하는 방식으로 말합니다.

과학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사역의 본질이 우리에게 더 가까이 이른 반면 사역 자체는 제게서 어느 때보다 더 멀리 있는 것 같다는 고백을 더 이상 억누를 수 없습니다.

학자: 당신은 사역의 본질 가까이 있으면서 사역 자체에는 멀리 떨어져 있다고 말하는 것인가요?

과학자: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도무지 사물에 대해 얘기할 수 있다면, 사역 자체와 그것의 본질은 다른 두 가지 사물일 수 없습니다.

학자: 아마도 사역의 자체는 그것의 본질이며 그 자신과 동일한 것일 터입니다.

스승: 그렇다면 대화 동안 우리가 경험한 것은 어쩌면 다음과 같이 표현될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사역의 가까움에 이르는 동시에 거기서 멀어져 있다고, 그러나 그렇게 멀어져 있음은 돌아감이라고 말이죠.

학자: 그렇지만 당신의 말을 통해서는 다만 기다림과 내맡김의 본질이 언급되었을 뿐입니다.

과학자: 그러나 사역이 트이고 감춰지는, 가까이 이르면서 멀어지는 가까움과 멂이란 어떤 사태인가요?

학자: 이 가까움과 멂은 사역 바깥의 어떤 것일 수 없습니다.

스승: 왜냐하면 사역은 모든 것을 영역화하면서 모든 것을 서로 불러 모으고 동일한 것 안에 고유하게 깃들며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과학자: 그렇다면 사역 자체가 가까이 이르는 것이며 멀어지는 것이군요.

학자: 사역 자체가 바로 멂의 가까움이고 가까움의 멂일 것입니다 …

과학자: 이때 우리는 이같은 특성을 변증법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스승: …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과학자: 오직 사역에 의해 규정되는 사유의 본질에 따라.

학자: 즉 내맡김 안에 들어서 기다리면서.

스승: 그러나 그 경우 사역이 멂의 가까움이라면 사유의 본질은 무엇이 되나요?

학자: 아마도 그것은 더 이상 한 마디 말로써 말해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방금 전까지도 사유의 본질 그리고 그럼으로써 인식의 본질을 적절하게 지칭하기에 알맞은 것으로 보이는 한 단어를 알고 있습니다.

과학자: 저는 그 단어를 기꺼이 듣고 싶습니다.

학자: 저에게는 이미 그것은 우리의 첫 번째 대화에서 떠올랐던 단어입니다. 제가 오늘 대화에서 우리의 처음 들길 대화 덕분에 소중한 시사를 얻었다고 언급했을 때도 그 착상을 염두에 두었던 것입니다. 또한 저는 대화가 진행되면서 이미 여러 번 이 단어를 제시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사유의 본질로서 우리 가까이 이르렀던 것에 대해 점점 더 그 단어가 안 어울리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과학자: 당신의 착상을 너무나 비밀스럽게 말씀하시는군요. 마치 자체 발견된 어떤 것을 너무 일찍 내주지 않으려고 하는 것처럼 말이죠.

학자: 제가 생각하는 단어는 제 스스로 발견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학술상의 착상일 따름입니다.

과학자: 그렇다면, 제가 그렇게 말씀드려도 된다면, 일종의 역사적 상기입니까?

학자: 당신이 그렇게 하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나아가 오늘 대화의 양식에도 잘 들어맞을 것입니다. 우리는 대화의 진행 가운데 그리스 사유로부터 유래하는 단어와 문장들을 섞어 넣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둔 단어는 우리가 한 마디 말로 부르고자 하는 것에 지금은 더 이상 부합하지 않을 것 같네요.

스승: 당신은 사유의 본질을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사역 안에 들어선 내맡김이자 우리가 멂에 대한 가까움으로서 예감한, 사역에 대한 인간의 본질적 관계인 사유의 본질 말입니다.

과학자: 비록 그 단어가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대화의 말미에 이르러 그것을 우리에게 털어놓아도 됩니다. 우리는 인간의 거주지에 다시 가까워지고 있고 어쨌든 대화를 중단해야만 하니까요.

스승: 또한 앞서 당신에게 소중한 시사로서 가치가 있었고, 이제는 더 이상 합당하지 않는 단어는 우리가 그 사이 어떤 말할 수 없는 것 앞에 이르게 된 사실을 명확하게 해줄 수 있습니다.

학자: 이 단어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입니다.

과학자: 어떤 단편(fragment)에서 그 단어를 취하셨나요?

학자: 그 단어는 그 자체로 홀로 있기에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것은 혼자서 단편 122를 이루는 말입니다.

과학자: 헤라클레이토스의 단편 중 가장 짧은 그 구절을 저는 알지 못합니다.

학자: 하나의 개별 단어로는 시작할 수 있는 게 거의 없기에 다른 경우에도 그 단어는 거의 주목받지 않았습니다.

과학자: 그 단편은 어떤 것입니까?

학자: ἀγχιβασίη(앙키바시에)입니다.

과학자: 무슨 뜻이죠?

학자: 이 희랍어 단어는 독일어로 ‘Herangehen’, ‘어디를 향해 나아감’으로 번역됩니다.

과학자: 저는 이 단어가 인식의 본질을 가리키는 데 탁월한 이름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 단어에는 대상 앞으로 나아가고 향해 가는 성격이 아주 잘 표현돼 있기 때문입니다.

학자: 저에게도 그렇게 보였습니다. 아마도 그것이 우리가 첫 번째 대화에서 근대 인식, 무엇보다도 연구에서의 활동과 수행, 작업에 대해 얘기할 때 그 단어가 제 눈에 뜨인 이유가 될 것입니다.

과학자: 자연과학적 연구가 자연에 대한 공격과 같은, 그럼에도 자연을 언어로 이르게 하는 것이란 사실을 명확히 하는 데 그 단어가 곧바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ἀγχιβασίη, ‘어디를 향해 나아감’: 저는 현대 과학의 본질을 다루는 논문의 키워드로 헤라클레이토스의 이 단어를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학자: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저 역시 그 단어를 발설하는 것을 망설였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가 대화의 길 가운데 추정한 사유의 본질을 전혀 적중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과학자: 사실 기다림이란 [대상을 향해] 나아감과는 거의 반대되는 움직임이기 때문이죠.

학자: 반대되는 고요함이라고 말할 수 있는.

스승: 아니면 단순하게 고요함. 그러나 ἀγχιβασίη이 어디를 향해 나아감을 의미한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요?

학자: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가까이 다가감(Nahegehen)을 뜻합니다.

스승: 어쩌면 우리는 또 ‘가까움 안으로 다가감’(In-die-Nähe-gehen)을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과학자: 당신은 그것을 완전히 문자적으로 ‘가까움 안으로 들어섬’의 의미로 생각하시는 것입니까?

스승: 대략적으로 그렇습니다.

학자: 그렇다면 그 단어는 우리가 발견한 것을 가리키는 이름, 아마도 가장 멋진 이름이 될 것입니다.

스승: 그럼에도 여전히 그 본질에서 구하는 것.

학자: ἀγχιβασίη: ‘가까움 안으로 다가감’. 이제 제게는 이 단어가 오히려 오늘 들길에서의 산책을 위한 이름인 것 같습니다.

스승: 우리를 밤으로 깊이 인도해준 길 …

과학자: 점점 더 찬란하게 빛나는 밤으로 …

학자: 그리고 별들을 경탄하게 하며 …

스승: [밤이] 하늘에 떠 있는 별들의 멂을 서로 가까워지게 하기에 …

과학자: 적어도 소박한 관찰자에게는. 정밀한 과학자에게는 그렇지 않을 것이고요.

스승: 인간 안에 있는 어린아이에게 밤은 별들의 이웃(Näherin; 재봉사)입니다.

학자: 밤은 이음새나 솔기, 매듭도 없이 모든 것을 하나로 엮어냅니다.

과학자: 밤은 재봉사(Näherin)입니다. 오직 가까움(Nähe)으로만 일하기 때문입니다.

학자: 밤이 쉰다기보다 일을 한다면 말이죠 …

스승: 저 높음의 깊이를 경탄함으로써.

학자: 그렇다면 경탄은 닫힌 것을 열 수 있을까요?

과학자: 기다림의 유형에 따라서는 …

스승: 만약 그것이 내맡겨진 기다림이라면 …

학자: 그리고 인간 본질이 그리로 고유하게 속한 채 머문다면 …

스승: 우리가 불러 세워진 그곳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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